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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07 13:58
♠제9_4-2_1화 젊은 巨人의 초상{'이용문'장군評傳}. '김 창룡' 관련}
 글쓴이 : inf247661
조회 : 83   추천 : 2  

 https://www.youtube.com/watch?v=lfcIY_54Zhw   : 무명초 항구無名草 港口{'김 영일'작사, '이 재호'작곡; '백 난아'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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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_4-2_1화 : 젊은 巨人의 초상{'이 용문' 장군 평전}. '김 창룡' 관련부분.

                       '박 정희'는 대통령 시절에 측근에게;
                "형{'박 상희'}이 피살 뒤, 사정을 알아 보려고,
       장교 복장으로 고향에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肅軍(숙군) 때, '김창룡'으로부터 그 점을 추궁받았다."
                                             고 말하더라고 한다.
             ,,, ,,, ,,, ,,.

'박 정희'가 전남 광주의 토벌사령부에서 작전참모로 일하고 있을 때,
만군의 선배장교이자, 군부내 남로당 조직의 거물인 '崔 楠根(최 남근)'
중령이 사령부로 붙들려 와서,
              '박'소령이 보는 앞에서 訊問(신문)을 받았다.
 ㅡㅡ

함경도 태생인 '최남근'은 만군 보천군관학교 출신으로 해방 때는
무장 한인 독립단의 소탕을 임무로 했던 만군 산하 간도 특설대의
                                          신병교육대 부대장이었다.

몸집과 배포가 모두 큰 그는 '呂 運亨(여 운형)'의 건국동맹 군사분맹이 조직한 만군내 비밀 독립운동 결사에 들어 있었다.
이 조직엔 '박 정희'도 관여했으므로 두 사람은 아는 처지였다.
ㅡㅡ

1945년 8월 8일, 쏘련군이 만주로 쳐들어 와,
지휘 계통이 혼란한 틈을 타서, '최 남근'은 백두산 기슭으로 들어가;

"지금부터는 조선 독립군이다."

라고 선언, 해방된 것도 모르고 며칠을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1961.5.16 당시 육사생도대장,
혁명검찰부장 '朴 蒼岩(박 창암)'대령 증언}

                       ,,, ,,, ,,, ,,.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출신인 '최 남근'은,
     麗水.順川 반란사건시 馬山 주둔 제15연대 연대장이었는데;

,,, ,,, ,,, ,,, , '김 창룡'에게 체포되어, ,,, ,,, ,,, ,

1949년 5월 3월 26일 오후 2시, 경기도 수색에서 총살되었다.

                            ,,, ,,, ,,, ,,, ,,.
ㅡㅡ


                     《한국 전쟁사》엔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麗.順지구의 숙군은 육본정보국 소속의 '賓 哲顯(빈 철현)'대위가
지휘하는 조사반 '이 세호.金 昌龍(김 창룡).박 평래'.양 린석.
이 희영' 등이 광주에 도착, 약 3천명을 조사,
                              남로당 계열 1백50여명을 색출하였다.

17명의 2#기생, 60여명의 3#기생, 그밖에 4천7백49명이 1949년
                    7월까지, 총살.유기형.파면 등으로 제거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金 昌龍'과 동기생인 육사 3#기생이 특히 많이 숙군된 데 대해,
                                    '김 춘근'은 이렇게 분석했다.

"일제는 제2차대전 말기에 18 ~ 19세 소년들을 소년 항공병,
                                     전차병, 등으로 징집했읍니다.
이들이 조선경비대에 사병으로 많이 들어왔다가, 추천을 받아
육사#3기생으로 대거 입학했어요. 남로당은 감수성이 많고 예민해서
사상적 세뇌가 쉬운 이들에게 접근, 집중 공작을 편 것이지요."

                             ,,, ,,, ,,,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박 정희'는 광주에서 육사로 복귀한 지 며칠 뒤인,
                  1948년 11월 11일에 軍部 수사 당국에 체포되었다.
                              육사 7#기생 졸업식날이기도 했다.
                ,,, ,,, ,,, ,,.

         '金 昌龍'이가 자꾸 구속대상자 명단을 올리니깐,
  육군총장 '채 병덕'소장은, "야, 야, 이렇게 잡아 가두다간 너하고
나밖엔 안 남겠다." 고 농담을 하더라고
                       '金 昌龍'은 부하들에게 털어 놓더라고 한다.
ㅡㅡ


숙군이 시작되었을 제, '金 昌龍'이 실무책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계급이 아니었다.

                     육사 3#기생 출신인 그는 그 때 제1연대 정보주임으로 있었다.

'金 昌龍'은 美 軍政 時節에 제1연대에 근무할 때부터, 군부내의
공산당 조직에 대한 첩보를 수집, 그들을 일소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제 때, 관동군 헌병으로써; 중국 공산당의 지하조직을 수사한 경험,
      해방 뒤 '악질 전직자'로 분류되어져 蘇聯軍 軍政 時 체포되어
               고통을 당한 체험, 등이 '金 昌龍'으로 하여금 공산주의자란
                                  말만 들어도 피가 역류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麗.順 반란사건이 났을 때, '김 창룡'은 '백 선엽' 정보국장,
  '김 안일' 정보국 특무과장 등과 함께, 미군 방첩 교육을 받고 있었다.

교육기간을 채우지도 못하고, '金 昌龍'은 숙군의 실무에 뛰어들게 됐다.
군부내의 남로당 조직에 대한 정보와 수사경험이 가장 많은 '金 昌龍'은
계급과 소속과를 초월, 아주 자연스럽게 숙군의 중심 역할을 하게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가 소속된 제1연대는 육본 직할부대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어,
                                 '백 선엽' 정보국장은 '김 창룡'을 불러 직접 부렸다.

'김 점곤'{육사 2#기생, 사단장, 육군보병학교장, 少將 예편,
                                                            전남 광주 출신, 경희대 교수}은;

"'金 昌龍'은 모든 사람은 공산주의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 놓고,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부터 가려내는
              일종의 Negative System{네거티브 시스템}的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고 했다.

그는 또;

"'金 昌龍'은, '상대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라고 믿을 때,
  비로서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며, 그런 상관이 아니면, 복종도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인연으로 나와 '백 선엽' 국장은 그가
      절대 복종하는 상관이었고, 그 때문에 '박 정희'에게 손대지
         말라는 지시도 잘 들어 주었다."

고도 했다.

'김 점곤' 소령은 '박 정희'가 체포된 2일 뒤에 그 사실을 알고
                '金 昌龍' 대위에게;

"때리지 말고 조사하고, 자술서를 받아 보도록 하라."

고 지시했다.

  '박 정희'와 거의 같은 무렵에 구속된 '金 道榮(김 도영. 육군대령
              예편.육사1#기) 소령은 서울 남산 근방에 있었던 헌병사령부
                               영창에서 1주일간 있다가, 서대문 형무소로 넘어갔다.

그 때 서대문 형무소에는 1천여명의 숙군 피의자들이 2동의
                                        건물에 수용되어 있었다.

2일 뒤, 형무소내 조사실로 불려 갔다. '金 昌龍.이 한진'등
                                 3 ~ 4명의 수사 요원들이 있었다.

              벤치같은 의자에 앉았다.
   한 구석에는 누군가가 전기고문을 받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박 정희'였다.

               "너도 불지 않으면 저렇게 당한다."

고 겁을 주기 위한 것 같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訊問(신문)하던 한 조사관이;
"너 이러다간 죽으니, 우선 아무나 대어 놓고 재판정에서 부인하라."
                                                고 귀띰했다.

     '김 도영(金 道榮)'은 우선 살고 보자는 마음에서 같은 연대의
                                 부관 장교 2명을 세포라고 찍었다.

이 2 사람은 그 뒤 구속돼 조사를 받고 풀려 났다. '金 道榮'은 결국
              무죄 선고를 받고 석방돼 즉시 공비토벌에 투입되었다.

京仁 地區(경인 지구) 부대의 숙군 책임자였던
                       '車 虎聲(차 호성)'{당시 특별부대 정보처장}
소령은 서대문형무소에서 '金 昌龍'.'이한진' 팀이 쓰던 조사실의
                                옆방을 역시 조사실로 쓰고 있었다.

  '車'소령이 어느날 '金 昌龍' 방에 들어갔더니, '朴 正熙'가 혼자
                  앉아 있었고, 조사관들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車'씨{서울 녹번동 거주}는 이렇게 기억한다.

"그 때 제가 이렇게 말했읍니다.
            ' '박'형! 이왕 자백하려면 깨끗이 털어 놓으세요.
       솔직이 불어야 속도 후련해질 것 아니오, 너무 걱정마시오.'
라고 그랬더니, '박 정희'는 이미 다 털어 놓았다고 대답하더군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박 정희'를 신문하여 조서를 받은 '이 한진'은 일제시대 학병
         출신으로서 우직했고, 힘은 장사였다. 육사 5#기생으로서
'박 정희'와는 사제지간인 셈이다.

그는 숙군 뒤엔 특무부대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제Ⅰ군단 정보처장으로 전출한 직후 대령으로 제대했다.

말년엔 거의 실명하다시피 되어, 고생하다가 몇년 전에 사망했다.
                                 ,,, ,,,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김 창룡'과 함께 숙군의 실무책임자였던 당시 육본정보국의
   특무과장 '김 안일'소령은 육군 준자으로 예편 뒤,
           교회 牧師(목사)로 변신,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다.

'박 정희'를 직접 신문했던 '김 창룡'과 '이 한진'이 모두 죽은
지금, 그는 육사 동기생 '박 정희'의 비밀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 ,,, ,,, ,,.

"'박 정희'는 이념적인 공산주의자는 절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비교적 솔직하게 이야기해 갔다.

"'박 정희'는 붙들리자마자 이럴 때가 올 줄 알았다면서 자술서를
쫙 썼읍니다. 이 자술서를 잘 썼기때문에 그가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 ,,, ,,.

  수사에 협조한 사람은 거세된 환관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박 정희'를 살리자고 밑에서 건의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거지요. '박 정희'를 석방할 때, 나, 金 昌龍, 백 선엽,
  3명이 연대로 신원보증을 했읍니다. 이 3명이 그의 구명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이들이라고 보면 되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백 선엽'{육군대장.교통부장관}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떤 인물을
통해 형무소에 있던 '박 정희'가 꼭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만나 주었고,
             그 자리에서 '박 정희'는 도움을 요청했었다고 말했다.

첫번 대면에서 '백 선엽'은 좋은 인상을 받았고, 그래서;
"그 분은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백 선엽'은 '박 정희'의 구명에 관계했다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그 때는 내가 살린다면 사는 겁니다."고 했다.

"眼下 無人이란 비판을 들었던 '金 昌龍'도 내 명려엔 절대 복종했다."

면서, '박 정희'에 대한 심한 조사를 금지시키고, 출소 뒤, 그를 육본
    정보국으로 데려 온 것도 오직 자신의 결단이었음을 강조했다.
                      ,,, ,,, ,,.

'백 선엽'대령은 최근 친지에게 제1단계 숙군 수사를 마무리하면서
있었던 일을 털어 놓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백 선엽'대령은 제1단계 숙군 수사를 마무리하면서 10여명의 사형 집행
        예정자 명단이 적힌 서류를 가지고 '이 승만'대통령을 찾아 가,
                            결재를 맡았다고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런 뒤, '백'대령은 '이'박사에게;

                  "여기 아까운 사람이 하나 있읍니다."

면서, '박 정희'소령을 살려 주었으면 한다는 얘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이'박사는 즉석에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박 정희'는 그야말로 일단 죽었다가 살아 난 셈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김 점곤' 당시 전투정보과장의 기억에 따르면 '元 容德(원 용덕)'과
'金 一煥(김 일환){만군 대위.군사영어학교 출신.국방차관 역임}'도
              '박 정희'의 구면운도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軍部내에서 '元 容德'의 발언권이 셀 때는 아니었지만, 칼자루를 쥔
     '백 선엽' 정보국장에 대해선 말발이 먹힐 수 있는 관계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백'국장은 일제시대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교사로서의 의무적
   복무기간을 채우지도 아니하고 만주 봉천군관학교에 들어갔다.

조선총독부에서 이를 문제 삼아 입학이 취소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당시 만주군 軍醫官(군의관)이었던 '元 容德(원 용덕)'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어 '백 선엽'은 만군 장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됐던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박 정희'와 육사2#기 동기생인 '송 석하{육군 소장 예편'에 따르면
'박 정희'는 그 뒤 '백 선엽'보다는 '元 容德(원 용덕)'에게 더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박 정희'의 큰 딸 '박 재옥'이 '韓 丙起(한 병기)'와
                 결혼할 때 주례를 선 것도 '元 容德'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박 정희'는 5.16 거사가 성공하자, 그 때,
   軍部의 악질부정사건으로 헌병대에 입건, 수사 도중에 죽은
'金 聖柱(김 성주)'사건의 책임을 지고, 민주당 정권으로부터,
         군법회의에 피소 중이던 '元 容德' 헌병총사령관을
풀어 주도록 했고, 대통려이 된 뒤에도 세배를 다녔으며,
           '元 容德' 장군의 아들{육군 장성, 생도 # 2기생}의 뒤도 봐주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 ,,.
                       ,,, ,,, ,,.

★ 인용 근거
       책자명 : 젊은 巨人의 초상('이 용문'장군 평전)
       저자명 : '조 갑제' 지음
       발행처 : 사단 법인 '샘터'
       출판일 : 1988년 6월 25일
       가격 :   \ 3,000 원


♥제9_4-2_2 화로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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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安南 아가씨
가수 : '李 海燕'님 노래
앨범 : (1996)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 18 - 강홍식,전옥,이해연
가사 : 'lijuwon' 님 채록 제공
남 려성 작사 / 한 상기 작곡/콜럼비아



1.남십자 별빛 아래 고향은 멀고 주인선(朱印船) 돛대 아래 세월이 갔다
바닷가에 노래하는 安南 아가씨 새파란 달이 뜨면 달이 뜨면 춤을 춘다네

2.사나이 가슴에는 希望의 별빛 남쪽을 떠나가면 南十字 별빛
아유타, 다락 우에, 휘파람 날리는  그 옛날 가신 님의 가신 님의 추억은 길다

3.메나무 푸른 물에 꽃배를 띄워 龍首레 뱃머리에 등불을 걸고
사무로 아가씨가 노래를 부르는 벚꽃이 피는 나라, 피는 나라 마음의 고향

*주인선(朱印船):도쿠가와막부 시기, 남만 무역 면허를 가진 선박
*남십자성: 남십자 자리에 있는 십자꼴을 이루는 네 별
*안남(安南): '베트남'의 옛 명칭.
*아유타: '태국'에 있던 중세 왕국의 이름{'샴' 왕국}
*샤무로 아가씨: 태국의 옛이름, '샴'의  아가씨라는 뜻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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