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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장례식에 보낸 박 대통령의 弔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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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3:35 조회6,3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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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통령 장례식에 보낸 박 대통령의 弔辭


이 대통령 장례식에 보낸 박 대통령의 弔辭  
출처 : ★세이예스★
blog.chosun.com/laskin79  
2005-04-06 09:16:53  

  
<편집자 주> 1965년 7월19일 0시 35분, 건국 대통령 李承晩 박사가 하와이 마우날라니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1960년 4·19 학생시위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휴가차 5월29일 하와이를 방문한 이후 조국의 격동으로 끝내 고국땅을 밟아 보지 못한 채 他國의 작은 섬에서 5년 2개월 만에 90년의 생애를 마감했던 것이다. 李承晩 前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朴正熙 대통령은 李錫濟 총무처 장관에게 『하여튼 정부로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길 바라오』라고 간단하게 언급했다.

해방 후인 1946년에 귀국한 朴正熙는 건국준비위원회의 呂運亨보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李承晩 박사를 더 존경했다. 한때 朴正熙는 그의 中兄 朴相熙와 이 문제로 심각하게 언쟁을 한 일도 있었다. 朴正熙는 군인으로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을 때까지 李承晩 박사를 개인적으로 힐난하거나 비판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오직 자유당 정권의 부패상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현실 타파를 실천에 옮겼을 뿐이었다.

朴正熙가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되었지만 李承晩 박사는 귀국할 수 없었다. 당시 李承晩 정권 末期의 失政과 4·19의 여파가 혁명 정부에게 큰 짐이 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국내 언론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65년 7월23일 朴正熙 대통령은 李박사의 유해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공항에 나가 영접했으며 가족들의 반대로 가족장이 되었으나 國民葬 수준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지원했다. 이 弔辭는 1965년 7월27일 국립묘지에 安葬式을 거행할 당시 丁一權 국무총리가 代讀한 것으로 朴대통령이 李承晩 박사를 마음속 깊이 흠모하고 있음을 구구절절이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의 주검을 앞에 놓고 그의 뒤를 이어 조국 근대화를 이뤄내려는 젊은 대통령의 이 弔辭는 솔직하고 정직한 한 인간의 重厚(중후)한 告別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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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독립운동의 元勳(원훈)이요, 초대 건국대통령이신 故 雩南 李承晩 박사 靈前에 정성껏 분향하고 嚴肅(엄숙)한 마음으로 삼가 弔辭를 드립니다.

돌아보건대 한마디로 끊어 파란만장의 기구한 일생이었습니다.

과연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자기 몸소 역사를 짓고 또 역사 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근대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박사께서는 이제 모든 榮辱(영욕)의 塵世因緣(진세인연)을 끊어버리고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생전의 一動一靜(일동일정)이 凡人庸夫(범인용부)와 같지 아니하여, 실로 조국의 明暗(명암)과 민족의 安危(안위)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던 세기적 인물이었으므로 박사의 최후조차 우리들에게 주는 충격이 이같이 심대한 것임을 외면할 길이 없습니다.

일찍이 大韓帝國(대한제국)의 國運(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용감히 뛰쳐나서 조국의 開化(개화)와 反제국주의 투쟁을 감행하던 날, 몸을 철쇄로 묶고 발길을 荊棘(형극)으로 가로막던 것은 오히려 선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榮光(영광)의 特典(특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쫓겨 海外의 망명생활 30여 星霜(성상)에 문자 그대로 혹은 바람을 씹고 이슬 위에 잠자면서 東奔西走(동분서주)로 쉴 날이 없었고, 또 혹은 섶 위에 누워 쓸개를 씹으면서 조국광복을 盟誓(맹서)하고 원하던 것도 그 또한 革命兒(혁명아)만이 맛볼 수 있는 명예로운 饗宴(향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70老軀(노구)로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그나마 분단된 국토 위에서 안으로는 思想의 혼란과 밖으로는 國際의 軋轢(알력) 속에서도 萬難(만난)을 헤치고 새 나라를 세워 민족과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여 民主韓國獨立史(민주한국독립사)의 제1장을 장식한 것이야말로 오직 建國人(건국인)만이 기록할 수 있는 불후의 金文字였던 것입니다.

이같이 박사께서는 先驅者로, 革命兒로, 建國人으로 다만 조국의 개화, 조국의 독립, 또 조국의 발전만을 위하여 온갖 勞役(노역)을 즐거움으로 여겼고, 또 헌신의 성과를 스스로 거두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견지하신 민족정기에 입각하여 抗日反共(항일반공)의 뚜렷한 정치노선을 信條로 부동자세를 취해 왔거니와, 그것은 어디까지나 박사의 국가적 경륜이었고 또 그 중에서도 평화선의 설정, 반공포로의 석방 등은 세계를 놀라게 한 정치적 果斷力(과단력)의 역사적 발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집권 12년의 종말에 이르러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이른바 정치적 과오로 인하여 살아서 역사의 심판을 받았던 그 쓰라린 기록이야말로 박사의 賢明(현명)을 어지럽게 한 奸臣輩(간신배)들의 가증한 소치였을망정 究竟(구경)에는 박사의 일생에 씻지 못할 汚點(오점)이 되었던 것을 痛歎(통탄)해 마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헤아려보면, 그것이 결코 박사의 민족을 위한 생애중의 어느 일부분일망정 전체가 아닌 것이요, 또 외부적인 失政(실정)책임으로써 박사의 內面的(내면적)인 愛國精神(애국정신)을 말살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또 일찍이 말씀하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歸國第一聲(귀국제일성)은 오늘도 오히려 이나라 국민들에게 들려주시는 最後(최후)의 遺言(유언)과 같이 받아들여 民族死活(민족사활)의 箴言(잠언)을 삼으려는 것입니다.

어쨌든 박사께서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世紀的 悲劇의 주인공이었던 것을 헤아리면 哀心으로 뜨거운 눈물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그보다는 조국의 헌정사상에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어린 羊(양)」의 존재가 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위인」이란 거룩한 명예를 되살리시고, 민족적으로는 다시 이땅에 4·19나 5·16 같은 역사적 고민이 나타나지 않도록 보살피시어 자주독립의 정신과 반공투쟁을 위한 선구자로서 길이 길잡이가 되어주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박사로 하여금 그토록 오매불망하시던 고국땅에서 臨終(임종)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異域(이역)의 쓸쓸한 海濱(해빈)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박사에 대한 영원한 敬意(경의)로 그 幽宅(유택)을 국립묘지에서도 가장 吉地(길지)를 택하여 遺骸(유해)를 安葬(안장)해 드리고자 합니다.

생전에 손수 創軍(창군)하시고 또 그들로써 공산침략을 격파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렸던 바로 그 국군장병들의 영령들과 함께 길이 이 나라의 護國神(호국신)이 되셔서 민족의 多難(다난)한 앞길을 열어주시는 힘이 되실 것을 믿고 삼가 두 손을 모아 冥福(명복)을 비는 동시에 유가족 위에도 神의 加護(가호)가 같이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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