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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만난 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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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4:04 조회8,4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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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만난 육영수
                       
                                                     6.25때 복직한 박소령


1950년6월 중순 경, 박정희는 민간신분을 면하기 위해 복직원을 내놓고 6.21일 어머니의 소상을 치르기 위해 선산으로 내려갔다. 북괴의 동향이 심상치 않은 데 대해 마음이 놓이지 않아 사태가 발생하면 즉시 구미경찰서로 연락하라고 당부했고, 박정희의 염려대로 6.25일에 전쟁이 발발하자 장도영 정보국장은 박정희에게 급히 귀대하라는 연락을 취했다.

당시 정보과장 차호성은 이렇게 회고한다.

“6.27일, 정보국장은 내게 의정부 방향의 적정을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명했다. 전선에 나갔다가 밤 늦게 본부에 돌아오니 사무실에 서류만 널려 있었다. 데리고 갔던 부하들을 이끌고 한강다리 쪽으로 갔지만, 한강다리는 이미 끊기고 물 속에는 추락한 자동차와 시체가 즐비하였다. 강나루까지 걸어가 헤엄을 쳐서 천호동으로 건너가 밤을 지샜다. 먼동이 트자 저 쪽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앉아 있기에 다가가 보니 박정희였다. 허술한 군복에 모자를 쓰고 있었다.  

“차형, 납니다” 하면서 부시시 일어나는데 시장한 기가 역력했다. 그 역시 고향에서 급거 상경하여 육군본부에 가보니 텅텅 비어 있어 나릇배로 건너온 것이라 했다. 두 사람은 시흥을 향해 걸어갔다. 관악산 근방에는 격추된 적기가 연기를 내면서 타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길죽하고 누런 오이를 따가지고 오기에 주머니에 있던 30원을 몽땅 내주고 오이를 샀다. 참으로 꿀맛이었다."

"박정희는 시흥으로 갔고, 나는 낙오병 수습을 위해 뒤에 쳐졌다. 며 칠 후 수원으로 옮긴 임시 육군본부로 갔더니 이미 박정희는 소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책상 위를 뛰어넘어 나를 부등켜 안았다. '차형, 정말 고맙소'. 내가 복직 추천서를 써주었기 떼문이었다,"      



                                                     부산에서 만난 육영수


같은 정보과에 근무하는 송재천이라는 소위가 박정희를 매우 좋아했다. 송 소위는 자기의 이모 딸, 육영수를 박정희에게 연결시켜 주기로 했다. 육영수는 부모님과 함께 부산으로 파난와 있었으며, 박정희 역시 후퇴한 육군보부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와 있었다. 더위가 좀 꺾인 8월 하순, 박소령은 송소위를 앞세우고 육영수 부모가 세들어 살고 있는 일본식 2층집으로 갔다.

허리를 구부려 군화 끈을 풀고 있는 박정희의 모습,  바로 이 모습을 육영수가 훔쳐보았다. 뒷 모습이었다. 육영수는 그 뒷모습이 든든해 보이고 정직해 보여서 결혼을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얼굴로는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으로는 속일 수 없다는 것이 육영수의 말이다.  

인천 상륙작전이 수행되던 9월15일, 바로 그날 34세의 박정희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1950년10월25일 대전에서 창설된 제9사단 참모장이 되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9사단이 대전에 있는 동안 박정희는 틈을 내서 부산으로 약혼녀를 만나러 다녔다. 두 사람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쓰고 1950년12월12일, 대구 계동에 있는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지의 반대는 순전히 박정희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군인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례는 신랑과 신부를 혼돈하여 ‘육영수 군과 박정희 양’으로 불러 폭소를 자아냈다 한다.

결혼 3일 전, 제9사단은 강원도 평창으로 이동해 갔고, 대구시 삼덕동에 신혼 살림을 차린 박정희는 신혼 5일 만에 평창으로 올라갔다.

9사단은 강원도 내륙 넓은 지역을 담당하고 있어서 교통, 통신, 보급이 엉망이었다, 해가 바뀌자마자 중공군이 개입함과 동시에 매일 같이 쏟아붓는 포화에 희생자들이 속출했다. 연기를 낼 수 없어 먼 후방지역에서 밥을 지어 오면 그것이 곧 소금물에 적신 주먹밥, 꽁꽁 얼은 밥도 굶주린 병사들엔 꿀맛이었다. 2월말에 이르기가지 9사단은 영월, 춘양, 정선, 강릉 등지로 이동하며 전투를 했다. 이 때 박정희는 9사단 부사단장으로 부임한 이용문 대령을 다시 만났다.        

육영수는 남편이 보고 싶어 대구에서 여러 차례 올라왔다. 포화가 쏟아지는 전투지역에는 헌병들이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민간인들은 접근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헌병들은 육영수의 미모와 미소 앞에 차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참모장님, 부인 오셨습니다”

송재천 중위의 말이었다.

“그 사람, 예까지 뭐하러 왔대”

이 때가 그들에게는 일생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였다 한다.

1951년4월15일, 박정희는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영수는 그가 대령 계급을 달고 있는 모습을 강릉에 가서 처음 보았다.

아래는 박정희가 35-36세 때 지은 시들이다.


                         춘삼월 소묘

벚꽃은 지고 갈매기 너울너울
거울같은 호수에 나룻배 하나
경포대 난간에 기대인 나와 英

노송은 청청 정자는 우뚝
복숭아꽃 수를 놓아 그림이고야
여기가 경포대냐 고인도 찾더라니

거기가 동해냐 여기가 경포대냐
백사장 푸른 솔밭 갈매기 날으도다
춘삼월 긴긴 날에 때 가는 줄 모르나니

바람은 솔송 호수는 잔잔
저 건너 봄사장에 갈매기 떼 희롱하네
우리도 노을 저며 누벼 볼거나

<1951년4월25일 강릉 경포대에서>


                 무 제

하늘도 자고 땅도 자고
사람도 잠자는 고요한 밤
벌레소리 처량히 들려오는
어두운 가을 밤

길게 내 뿜는 담배 연기만
어둠 속에 흡수되어 버리고
캄캄한 어둠 속 한 없이 헤매고 찾아도
담배연기처럼 겉잡을 수 없는
길고 고용한 가을 밤

길고 아득한 유구한 역사 속에
찰나 찰나의 생명을 연결하는 인간이

그러나 찰나에 사라질 담배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인간이란 것을 알면서도
찰나가 기쁘고 찰나가 섧다는 것을

인생이라고 일컬으면서 몹시도 허둥지둥하는 것이
어리석고 가엽구려
담배 연기와도 같은 인생이여!
호호 창창한 내일의 역사의 막
그 속에 무한한 기대와 희망조차 없이
그러나 막연히 기다려지는 인생의 삶

지구는 돌고 역사는 가고
세월은 흐르고 인생은 늙고
밤이 가면 내일에 새날이 온다는 것은
가을 밤 어둠 속에 사라지는 연기처럼 삭막한
인생의 부질없는 노릇이여!

<1951년 10월 말인 밤에>



                   잠자는 아내 모습

밤은 깊어갈수록 고요해지고
대리석과도 같이 하이얀 피부
복옥(꽃다운 향기)한 백합과도 같이 향훈을 뿜는 듯한 그 얼굴

숨소리 가늘게, 멀리 행복의 꿈나라를 거니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 잠든 얼굴 더욱 예쁘고
평화의 상징 사랑의 권화!(부처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난 일)

아 그대의 눈 그 귀 그 코 그 입
그대는 仁과 慈와 善의 세 가닥 실로 엮은
한 폭의 위대한 예술일진저
옥과도 같이 금과도 같이
아무리 혼탁한 세속에 젖을지언정
기리 빛나고 기리 아름다워라

나의 모든 부족하고 미흡한 것은
착하고 어질고 위대한 그대의 여성다운 인격에
흡수되고 동화되고 정착되어
한 개 사나이의 개성으로 세련되고 완성하리

행복에 도취한 이 한밤 이 찰나가
무한한 그대의 인력으로써 인생코스가 되어 주오

그대 편히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이 밤이 다 가도록 새 날이 오도록
나는 그대 옆에서 그대를 보고 앉아 행복한 이 시간을
영원히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1952년7월2일, 영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며>
2005.10.1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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