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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혁명가 朴正熙의 생애 (일기) (9권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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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4:06 조회6,8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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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혁명가 朴正熙의 생애 (일기) (9권10장)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의 생애 (9권10장)  
〈전쟁 미치광이 金日成 도당들의

  이 야만적인 행위에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저 미련하고도 무지막지한 폭력배들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걸 잊지 말지어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1976년 8월18일 朴正熙 일기)


  


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트럭을 몰고온 북한군인들이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과 노무자들을 습격하고 있다(UN군 측 감시카메라가 찍음)


〈전쟁 미치광이 金日成 도당들의 이 야만적인 행위에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저 미련하고도 무지막지한 폭력배들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걸 잊지 말지어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1976년 8월18일 朴正熙 일기)


[日記 속의 인간과 권력]


아내와 나 사이엔 24년만 주어져

朴대통령은 유신시대에 일기를 쓰고 있었다. 자신만의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朴正熙 일기는 그의 인간됨을 소박하게 드러낸다.
1975~1976년 무렵의 日記와 발언록을 중심으로 그의 숨결과 육성을 느껴 보자.

1975년 10월3일(금) 맑음

단기 4308년 개천절이다.
단군 聖祖가 이 땅에 나라를 세우신 지 4308년. 弘益인간이란 민족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지난 4천년 동안 우리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생을 영위하면서 가꾸고 건설하고 키워 왔다.

영고성쇠, 민족이 걸어온 역정에는
허다한 굴곡과 기복이 있었으나 민족의 전진은 계속되어 왔다.
앞으로도 영원히 계승될 것이다.

올바른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배달민족이 걸어온 전통과 정통을 우리들이 계승하고 창조적인 발전을 위하여 온 겨레가 가일층 분발하고 정진해야 하겠다.

1975년 11월6일(월) 맑음

서울신문 오늘자 5면을 읽고 조국을 사랑하는 정념이란 것을 새삼 생각해 보았다. 「값진 선물 자신감을 뿌듯이 안고」라는 표제 아래 김모라는 在美(재미) 교포(예비역 대령)가 쓴 글이다. 김씨는 광복 30주년 행사의 하나로 在美 기독교 지도자 친선 모국 방문단의 일원으로 돌아온, 羅聖(로스앤젤레스) 거주 장로직 기독교인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4년 만에 고국의 발전상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고국 동포들의 진지하고도 활기찬 모습과 입이 딱 벌어지는 고국의 발전상이 눈물겹도록 대견하고 고맙다』고 했다.

이번 고국 방문을 통해서 값진 선물을 가지고 간다면서 그것은 자신감이라고 했다.
『그동안 조국이 초라하다는 데 얼마간 기가 죽어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나는 가슴을 활짝 펴고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떳떳이 조국의 모습을 전하고 자랑하겠노라』고 하였다.

얼마 전 조총련계 교포들이 34년 만에 고국땅을 밟고
『이만한 조국이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고 자랑할 수 있다』고
한 기사가 기억 난다.

조국이 부강하고 잘살고 훌륭하면 어디를 가나 어깨가 으쓱하고 자랑스럽고,
그러지 못하고 가난하고 빈약하고 못살면 그와는 반대로 공연히 어깨가 수그러지고 기가 죽어서 움츠리고 다니게 되는 것은 도리가 없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겪고 느낀 일이다.
일제 시대 때가 그러했고 해방 후도 그러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우리 국민들은 이 점,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 확실하다.
자신감과 긍지가 생기기 시작했고 앞으로 몇 년 후에는 우리도 당당히 선진 국가로서
어깨를 재고 살 수 있다는 자신이 만만하다. 이것이 국민의 사기다.
이것이 필요하다.

失意(실의), 비굴, 열등의식, 패배의식 이런 것들은 이제부터 과감하게 씻어 버리고 패기, 자신, 긍지를 가지고 대한민국이 나의 조국이란 것을 어디서나 자랑할 수 있는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

이것이 민족의 염원인 조국 통일의 대업을 성취하는
정신적인 원천이요, 원동력이라고 확신한다.

金모라는 在美 동포의 그 정신은
오늘 우리 모든 국민의 가슴속에서 싹트고 있는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1975년 12월12일(금) 맑음

오늘이 아내와 결혼한 지 만 25년이 되는 날이다.
아내가 있었다면 은혼식을 올리고 축배를 올렸을 터인데…. 1950년 12월12일 대구시 모 교회에서 일가친척·친지들의 축배를 받으며 식을 거행하고, 아내와 백년해로를 맹세하였다.

24년 만에 아내는 먼저 가고 말았다.

남은 은혼식·금혼식을 올리며, 일생의 반려로 자손들의 축복을 받으며
老後를 즐기는데 아내와 나의 사이는 어찌 24년밖에 시간을 주지 않았을까.

25년 전 오늘의, 그 착하고 수줍어하던 아내의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이번 25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아내와는 幽(유)와 明(명)을 달리하게 되었으니 인생이란 果是(과시) 무상하도다.


봉급을 배만 더 인상해 줄 수 있다면

1976년 1월 20일(목) 맑음

연두 중앙관서 순시 개시. 오전 10시 경제기획원. 오후 1시30분 재무부 방문.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종사원에게 봉급을 물어보았더니 작년 12월에는 4만4000원이었는데 1월부터 7만7000원 정도이고 상여금을 합치면 월평균 8만여원이 된다고 하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사람에게 현재 물가 표준으로 倍만 더 보수를 인상하여 줄 수 있다면 극히 만족하겠지,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1976년 2월24일(화) 맑음

금년도 각 대학 입학 시험에 학과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신체부자유라는 이유로 불합격된 학생들의 억울하다는 호소 소리가 작금 보도를 통하여 알려짐으로써 듣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다.

문교부 장관을 통하여 관계 각 대학 총학장에게 권유하여 이들을 구제해 주도록 지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체 부자유 학생과 학부모들의 기뻐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고 참으로 흐뭇하기 그지없다.

중국 고사에 漢武帝 때 사마천은 신체 불구가 되어서 더욱 분발하여 「史記 (사기)」 130권을 저술하여 고대중국사를 남겼다고 한다.

손자병법을 후세에 남긴 孫武도 두 다리가 없는 불구였다고 한다.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의 명저를 남긴 공자의 제자 左丘明은 눈이 멀었던 失明者라고도 한다.

신체 일부가 불구라고 하여 사회에서 버림을 받거나 폐인 취급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들 중에 굳은 의지로써 훌륭한 일을 성취하여 후세까지 빛을 남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학이 이들 불구한 사람들을 차등 대우하였다는 것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金日成은 남침 시기 놓쳤다』

1976년 4월13일. 朴대통령은 청와대 출입 기자단 및 공보비서관들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朴대통령은 1월15일 연두기자회견 때 발표했던
포항석유 시추에 대해서 얘기를 꺼냈다.

『3월25일 미국에서 기계를 들여와 하루에 20m씩 파고 있습니다. 시추를 할 때 기계에 물을 붓는데 그 물과 합쳐서 기름이 나오고 있어요.

아직까지 경제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시중에 떠도는 얘기는 전부 거짓말이야.
한 번 포항에 같이 가봅시다.
그때 기름이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어』

화제는 미국 하원의원 프레이저가 시작한 朴東宣(박동선)의 對美로비 스캔들, 즉 코리아게이트 사건 조사로 옮아갔다.

『프레이저의 본색이 드러났는데,
즉 한국의 민권을 위해 투쟁했다는 기록을 남겨서 지지표를 더 얻으려는 속셈입니다』

朴대통령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미국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다.

『미국의 군사 원조는 내년에 완전히 종결됩니다.
유상원조도 8년 상환이고, 이자 8%는 상업차관과 다를 바 없어요.
내 생각 같아서는 차라리 구라파에서 얻어 오는 것이 좋겠어.

그 전에 닉슨이 국군 현대화를 위해서 무상으로 15억 달러를 준다고 했었는데,
이것이 점차 변질되어 유상으로 바뀌었고, 내년에 받게 될 2억3000만 달러로 15억 달러 약속은 다 이루어진 셈이지요. 미국의 군사 원조 실태를 국민에게 전부 다 알려 주시오』

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확고한 방침을 갖고 있었다.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우리 국군만으로 북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도 미군을 쉽게 뽑아 가지는 않을 것이오.
지난번 美 의회에서 딜럼스 수정안이 압도적 다수로 부결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에 지상군을 요청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해군과 공군, 병참 원조만을 適期에 대주면 좋겠어.

걱정되는 것은 이북의 기습이오.
이북에서 일단 기습을 가해 오면 처음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넘어온 敵은 모두 분쇄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즉각 전방에서 막을 수 있어요』

그는 물가에 관해서도 자신감을 보였다.

『현재 추세로 보아 연말까지 도매 물가 인상률을 10%, 소비자 물가는 12% 선에서 억제하겠소. 절대 자신이 있어요. 석유가 안 나와도 우리 경제는 자신 있습니다』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북은 모순이 저렇게 쌓여 가면 반드시 망합니다.
중국도 외세의 압력이 없었던 淸나라는 약 300년 갔지만,
대부분의 통일 중국은 200년 정도밖에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毛澤東(모택동) 死後에는 굉장한 혼란이 있을 겁니다.
金日成도 마찬가지요. 金日成도 초조하겠지만, 이제 남침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봅니다』

朴대통령은 집무실에 포항에서 나왔다는 석유를 병에 담아 놓고 방문객들에게 자랑하곤 했었다. 그때 이 석유가 땅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지상에서 정유된 기름이 스며든 것이었음을 알고 있던 사람은 吳源哲 경제2수석비서관과 이 석유를 분석했던 석유공사 劉載興 사장 정도였다.

1976년 4월17일(토) 맑음

1년 전 오늘 크메르 공화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항복하고 프놈펜이 함락된 날이다.
작년 이맘때 국내 정세를 회고하니 감개무량할 뿐이다.

조국을 死守하겠다는 의지가 박약하고 국난을 당하고도 국민이 단결할 줄 모르고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이익보다 자기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고 위기에 처해서 국론을 통일하고 국민을 결속시킬 수 있는 지도자를 갖지 못한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他山之石으로 삼고 우리가 갈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金大中의 군축 이야기 듣고 오싹』

1976년 4월24일. 朴대통령은 기자들을 초청해서 오찬을 하면서 보도금지를 전제로 한 뒤, 크메르(캄보디아) 공산군의 양민 학살에 언급했다.

『우리가 6·25 동란을 겪어 봐서 알겠지만 크메르 사람들 고생하고 있을 겁니다.
공산당은 자기와 같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사람 대접을 하지 않아요. 차라리 소나 말을 더 귀하게 여긴다고 하더군요.

이럴 때 평화니 인권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합심해서 학살의 마수로부터 크메르 국민들을 건져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세계인권옹호위원회는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법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들만 몇 명 잡아서 법의 절차를 밟아 처리하는 데도 야단법석을 떨면서, 크메르에 관심을 안 보인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기자 양반들 社(사)에 가면 이야기해요.
크메르 국민들을 도와야 한다고. 이런 것이야말로 대서특필해야 하는 것 아니오.

인도차이나 3國은 사서 고생하는 것 같아.

월남에 들렀을 때 들은 얘기인데, 우리 공병대가 다낭인가 어디에다 팔각정을 멋지게 세워 주었으나 월남 국민들이 하도 돌보지 않아서 우리 공병들이 매일 아침 청소해 주었다고 합디다.

그곳 사람들은 멀거니 우리 공병들이 청소하는 모습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하니, 이게 될 말입니까.

전투는 미군과 한국군에게 맡겨 놓고, 자기들은 反정부 구호나 부르면서 재미는 볼 대로 보겠다는 겁니다.

심지어 軍 장교가 軍需(군수)를 맡아 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미군에게서 원조받은 무기의 일부를 야간에 베트콩에게 슬슬 팔아먹은 예도 있었다고 해요.

그 후 나는 派越(파월) 지휘관들에게 일렀습니다.

큰 전과를 세우려 하지 말고, 희생자는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내도록 하고,
한국군에 지정된 지역 안의 보호에만 힘쓰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의 지원이 없어도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국방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몇 년 전 선거에서 金大中씨가 군축을 선거 구호로 내세웠을 때는 내 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모두가 다 위선이었구나

1976년 4월24일(토) 흐림

작금 紙上과 방송을 통하여 공산화된 크메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잡은 지 1년간에, 크메르 인구의 약 1할에 가까운 50만~60만 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이다.

6·25를 통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잔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우리들이기에 크메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천인공노할 이 참상을 누구보다도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義憤(의분)을 금할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에서 이와 같은 잔인무도하고 야만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을 보고도 全인류가 특히 툭하면 남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평화니 人道니를 찾던 각국의 인사들, 언론·종교단체, 무슨 무슨 옹호 단체들이 어찌하여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다는 그 자체가 더욱 해괴하고 이해할 수 없다.

유엔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소위 세계평화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인권이 어떻고 하는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은 갑자기 벙어리가 된 모양인지? 모든 것이 다 위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만 한다.

크메르의 참상을 들으면서 나의 머리에서 문득 떠오르고 잊혀지지 않는 일은, 작년 이 무렵 크메르가 적화되자 서울에 와 있던 크메르 대사관 직원들 소식이 궁금하기만 하다.

대사와 기타 몇몇 고급 직원들은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밖의 하급 직원들은 본국이 공산화되었더라도
자기들 부모 형제와 친척들이 있는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귀국할 여비가 없어서 우리 정부에서 여비를 도와주고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다.

그 후 그들이 방콕을 경유, 본국으로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사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만행이 있을 줄이야 그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공산주의란 왜 이처럼 잔인하고 포악할까?
인류 사회에 어찌 이런 극악무도하고 잔인무도한 主義니 국가니 하는 것이, 존재가 용인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국토 북반부에도 크메르 루즈와 똑같은 살인 집단이 존재하고 이들이 무슨 혁명이니 해방이니 평화니 조국의 통일이니 연방제가 어떠니 하고 광적으로 설치고 주제넘게도 우리를 보고 독재니 파쇼니 비방을 하고 돌아가니, 가소롭다고나 할까, 한심스럽다고나 할까.

1976년 4월26일(월) 흐림

초봄을 장식한 개나리·진달래·벚꽃·목련들은 어느새 다 지고 시들고 2陣으로 철쭉·라일락·서부해당화 등이 활짝 피었다.

모든 나뭇가지에 새싹이 푸릇푸릇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게 푸르러 간다.
싱그러운 신록이 무럭무럭 눈에 보이듯 자라만 간다.

1976년 4월30일(금) 맑음

1년 전 자유월남공화국이 패망한 날이다.
작금 우리 사회에서는 印支반도 적화의 이야기가 紙上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연일 보도되고 있다.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우리 이웃의 자유 우방이 어이없게도 패망하고 세계 지도의 색깔이 달라져 가는 것은 참으로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다. 왜 印支가 적화됐느냐. 그들이 패망한 원인이 무엇이냐.

우리는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3500만 동포들이 제각기 가슴에 손을 얹고 엄숙한 마음으로 깊이 반성하고 크게 각성해야 할 것이다.

자기의 조국을 자기들이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지가 없고 국민들의 단결이 없을 때
그 나라는 망하는 법이다.

이는 비단 印支의 예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의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1976년 5월6일(목) 맑음

부처님 오신 날 2520주년 석탄일이다.
금년부터 「초파일」을 공휴일로 제정하여 그 첫해가 된다.

전국 각지와 5000여 사찰에서 석존의 탄신을 경축하고 국태민안과 평화적인 국토 통일을 기원하는 법회와 각종 불교행사가 거행되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지 1600여년이 된다고 한다(고구려 소수림왕 시대).
신라시대에는 國敎로서 정하여 넓게 보급이 되고 護國불교로서 그 시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우리 민족의 사상과 정신면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는 승려들이 법복을 벗어 던지고
무기를 들고 일어서서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을 섰다.

그 정신과 전통은 고려를 거쳐서 이조시대까지도 계승되었다.

李氏왕조에 들어와서 소위 崇儒抑佛(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가 다소 쇠약해진 느낌이 없지도 않으나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에 미친 영향력은 감퇴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이 되고 해방 후 사회적 혼란과 더불어 사상적 혼란기를 지나오는 과정에서 불교 내부에서 분열이 생기고 타락 현상이 일어남으로써 불교의 과거 찬연한 역사와 전통을 날이 갈수록 퇴색케 하는 경향을 노정하게 된 것을 몹시 아쉬워한 바 있었다.

작금 불교계 내에서 새로운 정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고 화합 단결하는 운동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모쪼록 대동단결 불교 중흥을 위하여 불교계 지도자 여러분들의 분발이 있기를 기대한다.

1976년 5월16일(일) 흐림

5·16혁명 15주년 기념일이다.

15년 전 오늘 새벽에 이 나라의 젊은 군인들이 기울어져 가는 國運을 바로잡기 위하여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고 궐기했다.

오늘 새벽 동녘이 틀 무렵 전차 부대를 선두로 하는 1陣의 혁명군 부대가 결사의 각오를 굳게 간직한 채 새벽바람 찬이슬을 마시며 숙연히 한강대교를 渡江했다.

고요히 잠든 수도 서울은 역사의 새로운 장이 바뀌는 이 순간까지 적막 속에 초여름의 피곤한 잠을 이루고 있다가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부패와 부정과 무능과 안일, 정체와 무기력으로 氣息(기식)암암하던 이 사회에 새로운 활력소와 소생의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몽롱한 깊은 잠길에서 잠을 깨고 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전 5시 국영 방송을 통해서 혁명 공약이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새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1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혁명은 아직 완결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줄기차게 진행 중에 있다.

가지가지의 고난과 저항과 毁譽褒貶(훼예포폄)을 들어가면서. 5·16의 완성은 우리나라를 선진 공업국가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자주국방·자립경제를 달성하여 평화적 남북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여야만 한다. 1980년대 초에는 이 목표가 달성될 것으로 확신한다.

1976년 6월25일(금) 흐림

大逆 金日成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 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소위 남조선 해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처럼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반만년 역사상 동족끼리 이처럼 처참한 살육전은 없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도 또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 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治罪해야 하나.

길은 단 하나뿐이다.

全力을 경주하여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역적 도당들에게 천벌을 가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길러서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애국선열, 전몰군경, 반공애국투사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 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뿐이다.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이 대업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 이것을 보면서 박정희 대통령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나라 발전을 위해 노력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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