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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공과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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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4:11 조회8,1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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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공과 박정희 대통령
 
女工 여러분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吳源哲 前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 現 한국형경제정책연구소 상임고문



보릿고개

우리나라에는 古來(고래)로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말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다」는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보릿고개」는 農土(농토)가 적어서 자기 가족이 먹을 양식도 생산하지 못하는 農家(농가)에서 일어난다. 따로 소득도 없다. 그러니 「보릿고개」의 절박함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가난한 農家는 봄이 되면 식량이 떨어진다. 당장 저녁거리가 없다. 어린 자식들은 밥 달라고 보채고, 産母(산모)는 젖이 안 나와 젖먹이는 울부짖는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라 양식을 꾸어올 데도, 꾸어줄 사람도 없다. 할 수 없이 채 여물지도 않은 보리이삭을 태워서 가루로 만든 다음 草根木皮(초근목피)를 넣고 죽을 쑤어 허기를 달랬다.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리추수 때라야 끼니라도 때울 수 있는데, 그때까지 못 견디면 굶어 죽는다. 보리추수가 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 다음해에도 또 다음해에도 이런 상태는 계속된다. 「보릿고개」의 심각성은 가족 전체의 문제라는 데서 오는 좌절감과 영구히 해결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릿고개」를 당하는 농가는 食口(식구) 중 한 입이라도 줄이려고, 열 살도 못 된 어린 자식을 양자로 보낸다. 이들은 주로 딸들인데, 말이 양자이지 대개 식모살이를 했다.


「보릿고개」를 참다못해 도시에 나와도 일감이 없었다. 먹을거리를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매일 매일이 「보릿고개」였다. 이런 「보릿고개」는 1977년에 가서야 해결된다.


196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다. 조그만 農家에 자식은 보통 5∼6명이나 되고 그 중의 반은 딸이었다. 그 당시 어느 농촌 소녀의 경우를 들어보자. 이 소녀는 초등학교 졸업 후 家事(가사)를 돕다가 15세가 됐다. 동생들은 늘어나고 식량사정은 더욱 어려워져, 마침내 공장으로 일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돈을 벌어 집을 돕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자기가 먹을 양식만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절박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소녀는 동네 또래 몇 명과 함께 공장으로 떠났다. 당시 공장에는 기숙사도 없었다. 이들은 조그마한 사글세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이니 달리 기술이 있을 리 없었다. 생전 처음 재봉틀이란 것을 보았다. 전기 모터로 돌아가는 재봉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늘이 움직이는데, 그 속도가 하도 빨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까딱 잘못하면 바늘이 손가락에 박힌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을 배웠다. 당시는 일주일에 꼬박 6일을 일해야 할 때이니 월 25일을 일했다. 야간작업도 서슴지 않았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물론이요, 점심 저녁을 회사給食(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1964년)의 방직공장 女工(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천4백40원이었다(필자 注:그 당시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쇠고기 6백g이 1백29원, 연탄 10장 76원, 쌀 20ℓ 6백37원). 이 소녀가 받는 월급은 취업 초기에는 이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도 해 추석 때는 선물을 사들고 그리운 고향으로 갔다.



열심히 일해, 차차 기술을 익혀 1970년이 되면서 일류 기능공이 됐다. 급료도 올라가서 日給(일급) 4백13원이 됐다. 한달 급료가 총 1만3백25원, 당시 쌀값이 20ℓ에 6백92원이었으니 쌀 3백ℓ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농촌 사정으로서는 아주 큰 수입이었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라는 칭찬도 받았다. 부모는 대견해 했고 『딸자식이 아들 녀석보다 낫다』고 자랑을 했다.



 





울음바다가 된 졸업식장


당시나 지금이나 학력은 신분을 표시한다. 그런데 당시 女工들의 대부분은 가정형편상 중학 진학을 못했다. 그러니 동창들이 중학교 교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들 중 한 女工의 이야기.


당시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자주 공장 시찰을 했다. 하루는 한 섬유공장을 들렀다. 수천 명의 女工들이 열심히 수출용 스웨터를 만들고 있었다. 시골에서 온 앳된 소녀들은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키도 작았다. 먹을 게 귀했던 시절이니, 시골에서는 오죽 했으랴. 朴대통령은 자신의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女工들이 기특해 보이면서도 애처로웠다. 그래서 어느 女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원을 물었다.


『공부 못한 것이 恨(한)입니다. 영어를 모르니, 감독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수출을 할 때라, 영어가 여기저기 씌어 있을 때였다. 대통령을 쳐다보는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대통령의 눈시울도 젖었다. 주위의 수행자들도 순간 숙연해졌다. 대통령의 시선이 옆에서 안내하던 사장의 눈과 마주쳤다. 朴대통령의 의중을 눈치챈 사장은 『당장 야간학교를 개설하겠습니다. 중학교 과정부터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朴대통령은 『돈 없어 공부 못한 것이 恨이라는데, 시설을 충분히 해주시오. 자부심을 느끼게』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女工들의 야간 교육이 시작되었다.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나이가 든 女工까지 모두가 참여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 건물이나 새로 마련된 시설은 어느 학교 못지 않았다. 교사 문제도 걱정이 없었다. 많은 사원들이 자원 봉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교복도 무료로 지급하는 등 소요 경비를 모두 부담했다.


이들 女工들은 휴가로 고향에 갈 때에는 꼭 교복을 입고 갔다. 그렇게도 입어보고 싶던 한 맺힌 교복. 그래서 고향 땅에서 교복을 입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문교부에서 수료증은 줄 수 있지만, 졸업장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듣고 朴대통령은 즉시 문교부 장관을 불렀다.


『장관,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라는데, 어린 소녀가 낮에 일하고 밤에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래, 그 한도 못 풀어주오. 그런 규정은 당장 뜯어고치시오』


졸업식날 학생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울다 보니 감정이 복받쳐 엉엉 소리를 냈다. 재학생도 따라 울고, 교사도 울었다. 사장도 울고, 참석한 내빈도 울었다. 졸업식장이 울음바다가 되어 행사도 잠시 중단되었다. 못 배운 한을 푸는 날. 얼마나 감격적인 광경인가.


女工들은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고등학교 과정으로 진급했으며, 고등학교 졸업생 중에는 대학에 입학한 학생도 생겼다. 이들 대학생에게는 회사에서 장학금을 주었다. 직장 야간학교 제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정부나 기업이 女工들에게 베푼 「情」이었다. 이 「정」이 순수했기 때문에 女工들은 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였고 고마워했다. 서로가 학우로서 친하게 되니, 협동심도 생기고 단결심도 생겼다. 일의 능률도 올랐다.


당시 각 공장에는 월별로 품목마다 수출목표가 정해져 있었다. 女工들은 이 목표량을 생산하는 데 스스로가 노력했다. 목표량이 달성될 때마다 기쁨의 환성을 올렸고 기업주는 이에 보답했다. 이런 일을 정치적이나 노동착취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한다면, 이는 당시의 실정을 왜곡하는 것이며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情을 모독하는 일일 것이다.







「女工들은 조국방위의 愛國者」


1960년대 초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파산상태였다. 정부는 경공업 제품을 생산, 이를 수출함으로써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렇게 중대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 1960년대의 여성근로자인데 역사상 특이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나 1970년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 특성을 살펴보면,

1) 당시의 女工들은 진취적이었다. 15∼16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세계에 뛰어드는 용기가 있었다. 미국의 서부개척자와 유사한 정신이다.

2) 인내심이 강했다.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을 하루 10여 시간 일했다.

3) 향학심이 강했다. 머리가 좋았다. 특히 암산에 능하고, 손재주도 좋았고, 눈이 좋아 장시간 미세한 작업을 해도 피로가 적었다.

4) 가족간에 우의가 돈독했고 가족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았다.

5) 국가나 회사에서 설정한 목표량(수출량)을 달성하는 데 스스로 노력을 했다. 대부분의 女工들은 자기 직장에 만족했고, 보수에도 불평이 없었다.


1960년대의 여성근로자는 참으로 자랑스럽다. 이들 어린 女工들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우리나라 경제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제1차 산업혁명의 戰士(전사)였던 것이다. 하마터면 파산할 뻔했던 국가위기에서 女工들이 나라를 구했다. 그리고 국민에게는 희망과 자신과 용기를 주었다.


1960년대 초 나라의 경제는 「보릿고개」로 표현되는 「기아선상」. 이로 인한 패잔병과 같은 패배감과 절망감. 이러한 정신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女工들의 헌신적인 노력에서 출발한 급속한 수출신장 덕분이었다.


1964년, 朴대통령은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를 수출 위주의 체제로 개편을 단행하고, 그해에 1억 달러 수출을 지시했다. 「수출제일주의」의 등장이다. 그 결과 그 해 1억2천만 달러를 수출, 1967년에는(학자나 업계에서 우리나라의 여건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던) 3억 달러를 수출했다.


여기서 자신을 얻은 朴대통령은 1969년도에는(상공부나 업계에서 수출신장을 주장하는 자리에서) 7억 달러의 목표를 제시하면서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다」며 강력히 지시했다.

1970년의 10억 달러 수출목표에 대해서(국민이나 언론에서는 이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朴대통령은 「하면 된다」라고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이 해, 우리 국민은 드디어 10억 달러를 수출해냈다.


朴대통령은 『우리 민족은 똘똘 뭉치면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고구려 시대에는 隋(수)의 백만 대군을 물리쳤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이 일어나 국난을 극복했다. 그리고 지금은 10억 달러 수출이라는 기적을 이루고 있지 않는가. 선진국과 같이 잘 살려면, 먼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 국민은 「선진국 국민이 어떠한 방법으로 선진국을 건설했는가」를 본받아 노력할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 개개인의 능력이 선진국(당시는 일본)보다 못한 것이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하면 된다. 우리 국민도 할 수 있다」. 그 방법은 경제면에서는 「수출제일주의」, 정신면에서는 「자조, 근면, 협동」과 「근검, 절약, 저축」의 새마을 정신이다』라며 「국가적 목적의식과 국민적 행동의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위정자와 우리 국민의 의식구조가 혼연일치가 되는 때였다. 그후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의식구조는 1970년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1977년에는 대망의 1백억 달러 수출을 이룩하게 된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서 「목적의식과 행동의식」을 제대로 심어주고 신념화하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대한 민족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였다. 그 증명 과정에는 오늘날 잊혀져 버린 이름없는 영웅들(女工)이 있었다.






실종되어버린 신념


그러나 그후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목적의식과 행동의식은 크게 변질됐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국민적 행동의식이 「나도 할 수 있다」는 이기주의적 행동의식으로 바뀌어지더니, 현재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구절은 아예 삭제돼 버렸다.


1960∼70년대는 정신면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특이한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후 수십년이 흘렀고, 그 당시의 사건들은 역사 속에 묻힌 일들로서 많은 부분들이 당시를 경험하지 못한(1960,70년대의 산업 戰士들과는 엄청나게 상이한) 새로운 세대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감격은 현재까지 살아남아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지금은 어느덧 50고개를 넘은 중년의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고 있을 이름없는 女工들의 모습이 내 눈을 촉촉하게 적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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