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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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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4:20 조회10,7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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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는가?


전체공개 해방전후사 메모|2006/02/18 05:40 http://blog.paran.com/essaytown/8298783    )

  작년에 노무현이 공산주의자 여운형에게 서품하였을 때 이것은 그의 사상을 의심케 하거나 적어도 한국사에 대한 그의 지식을 의심케 한다. 조선 청년은 황군에 입대하라고 여운형이 연설한 것이 독립운동이었는가? 그리고 해방 직후 건준의 이름으로 상해임정의 귀국을 막은 것이 독립운동이었는가? 상해임정에 정통성을 두는 대한민국 정부의 시각에서 상해임정을 대적하였던 여운형은 독립운동 방해자였다고 보는 시각이 옳을 것이다.

그러면 해방 직후 왜 여운형은 김구 선생을 거세하려 하였을까? 여운형이 김구 선생을 대권 경쟁자로 여겼다는 것이 일반 상식이다. 그러나, 건준은 상해임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여운형의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제시대에 상해임정의 광복군은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노무현이 작년에 독립운동가로 서품한 여운형은 상해임정을 독립운동 단체로서 인정치 아니하고, 귀국 및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발표를 하였으며 그러한 주장이 대세로서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해방정국의 대세는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 건국 논리였는데, 바로 이 논리가 상해임정의 독립운동을 인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일본의 항복이 중국에서는 내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내전은 독립군끼리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중국공산당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은 중공군 무기를 들고 있었으며, 상해임정의 광복군은 국민당 정부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광복군의 동맹군은 쟝개석 총통의 국민당 군대였으며, 여운형의 공산당 당론에서는 중공군이 동맹군이었다.

오늘날 한국 정부가 대만을 배신할 때마다 대만은 우리 민족 독립을 위한 국민당 노력을 떠올리며 섭섭해 한다. 그리고, 쟝개석 총통의 도움 없이 우리 민족이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였음이 사실이었다. 이승만 박사의 끈질긴 대미 외교의 성과로 우리 민족 독립이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거론되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승만 박사가 제출한 안건을 정상회담 탁자에 제출하여 영국의 처칠 수상과 중국의 쟝개석 총통이 함께 심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다른 민족의 경우 독립운동의 증거가 분명한데 우리 민족에는 그런 증거가 없었다. 오늘날 북한과 남한 좌익은 중국인의 부하였던 김일성이 소속한 마적단이 시골 경찰 습격하여 4명 살해한 것을 가지고 과대 광고하였으나, 마적단이 조선인 동포에게 끼친 해악은 그보다 엄청나게 더 큰 것이었기에 엄밀한 의미의 독립운동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4명의 숫자는 1980년 5월 15일 유시민이 선동한 과격시위대가 오후 1시 30분에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남대문 앞에서 희생시킨 순경들의 숫자보다도 적으며, 역시 김대중계 인물이었던 윤상원이 광주에서 선동한 폭력 시위대가 동년 5월 19일 버스로 깔아 희생시킨 경찰의 숫자를 밑돈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 당시 한국 민족은 영국 처칠 수상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민족이었다.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 역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쟝개석 총통이 우리 민족 독립은 적극 지지하였다. 그러면 우리 민족과 쟝개석 총통은 어떤 관계였는가? 당시 3명의 정상 중에서는 쟝개석 총통이 아시아 역사에 가장 정통하였으며, 광복군과 국민당 군대와의 동맹군 관계는 쟝개석 총통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에 대한 보증을 설 근거가 되었다. 광복군은 약한 군대였기에 우리 민족 해방과 독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병력도 1943년에 100명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그나마 본토에서 오는 군자금이 없어서 국민당 군대와의 동맹군 관계를 유지하여야만 지탱될 수 있었던 것이 쟝개석 총통에게는 상해임정의 역할을 카이로 정상회담에서 확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2차대전 종전은 중국에서는 내전의 시작을 의미하였으며, 공산진영과 자유진영간의 내전이었던 동족 상잔은 중국의 동포간에 먼저 시작될 뻔하였다. 팔로군 조선의용군은 모택동의 명령을 따랐으며, 팔로군의 적군 국민당 군대의 동맹군 광복군은 팔로군에게 적군으로 간주되었다. 본토에서 여운형의 건준이 세우려던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였는데, 건준이 중국 공산당의 적군인 광복군을 승인하는 것은 그가 중국 공산당 동지들을 배신하는 것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세계는 좌우가 첨예하게 갈라져 있는 세계였다.

박정희 대통령 정권 초창기에 모 인사가 광복군 박정희의 활약상을 저술한 책을 대통령께 선사하였는데, 박대통령은 몹시 역정을 내며 책을 집어 던졌다고 한다. 독립운동 경력이 출세의 프레미엄이었던 시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는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평소의 과학도의 정직으로 무장되어 있던 박대통령이 그 책의 과장된 내용에 화를 내셨는지도 모른다. 여하간, 이 일로 박정희의 광복군 활동상은 감히 아무도 언급할 수 없었으며 역사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역사의 또 다른 비밀 때문에 우리는 광복군 박정희를 다시 추적해야 한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이 항복 선언을 하자마자 상해임정의 김구 선생이 땅을 치며 한탄하였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미스테리이다. 평생을 온갖 고초를 겪으며 독립운동을 하였던 어른이 조국 해방 소식에 기뻐 춤을 추신 것이 아니라, 땅을 치며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것이 그의 눈물의 이유이다. 이것은 미스테리이다. 해방의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에 상해임정은 초상집처럼 슬픈 분위기에 쌓였다. 그리고 바로 이 미스테리의 한 가운데 박정희라는 인물이 있다.

여태껏 사람들은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1950년 6월 29일에 처음으로 구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또 하나의 상륙작전 준비가 1945년 8월에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 천황 항복 선언 소식에 많은 일본군 지휘관들이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며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이것은 일본 군부에는 뜻밖의 천황의 리더십이었다. 1946년 동경전범재판 때 천황측의 논리는 2차대전 당시 일본 왕실은 괴뢰정부 왕실이었으며, 실권은 군부에 있었고, 천황은 군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황이 괴뢰정부 왕실이었다는 주장은 사실이었으며, 연합국도 깜짝 놀랐을 정도로 일본이 쉽게 항복을 선언하였다. 군부가 항복할 가능성은 없었으나, 일단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자 그것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1945년 4월 하순 독일의 항복 직후 연합국 지휘관들은 태평양 전쟁은 아직 그 끝이 먼 전쟁으로 인식하였다. 해전에서 미군이 승리하였으나, 일본 지상군의 위력을 일본과 연합국 모두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전과 달리 지상전에서는 미국이 몹시 불리하였다. 지상전을 위해 지상군을 미국 본토에서 아시아 대륙으로 수송할 방법이 없었으며, 또 그런 느린 병력 수송으로 막강한 일본군 사단들과 전투를 치룬다는 것은 몹시 불리한 여건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해병대 상륙 작전을 비밀리에 진행하였으며 중국 본토 상륙을 위한 파트너로 광복군은 선택하였었다. 그리고 8월 중에 광복군과 미해병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예정이었었다.

그리고 아직 한번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룬 적이 없었던 광복군이 패망을 앞둔 일본군과의 전투 경력을 갖는다는 것은 상해임정의 귀국을 보장받는 것을 의미하였다. 역시 아직 한번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룬 적이 없었던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 지휘관도 일본 패망 이후 자신이 건국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본군과의 전투 경력 기회를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이처럼 서로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이 경쟁하고 있었는데, 미해병과 광복군의 연합작전 수행을 불과 한 주 앞두고 일본이 항복을 해버렸으니, 김구 선생은 모든 수고가 헛탕이 된 것을 원통해 하였으며, 그 날의 상해임정의 초상집 분위기처럼 그날부터 상해임정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아직 한번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룬 적이 없었던 광복군이 패망을 앞둔 일본군과의 전투 경력을 갖는다는 것은 상해임정의 귀국을 보장받는 것을 의미하였다. 역시 아직 한번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룬 적이 없었던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 지휘관도 일본 패망 이후 자신이 건국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본군과의 전투 경력 기회를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이처럼 서로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이 경쟁하고 있었는데, 미해병과 광복군의 연합작전 수행을 불과 한 주 앞두고 일본이 항복을 해버렸으니, 김구 선생은 모든 수고가 헛탕이 된 것을 원통해 하였으며, 그 날의 상해임정의 초상집 분위기처럼 그날부터 상해임정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했는가? 여기서 우리는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할 즈음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광복군 중대장에 임명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이것은 매우 신중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1919년부터 1944년까지 상해임정은 외교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45년에는 광복군의 활동에 김구 선생이 정치 생명을 걸었었다. 그래서 그 해에는 광복군이 상해임정의 전부였다. 해방 조국에서 상해임정이 건국의 꿈을 실현할 것이냐 아니면 국내파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몰락하느냐가 광복군에 달려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6일 전에 러시아군이 만주국을 침략하여 만주 사회가 급격히 붕괴되자 상해임정은 만주 인근 지역으로 모병단을 보내었다. 중국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도 병력 규모를 늘리기 위한 모병을 하였으므로 만주의 조선인들, 특히 조선인 장교들이나 군인들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여야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박정희의 리더십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전까지 박정희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만주국 군관 박정희의 광복군 입대는 그곳 조선인들의 광복군 지지와 더불어 조선의용군이 광복군을 공격하는 것을 예방하는 의의가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박정희가 해방 전에도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는 항간의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 설에 대하여 반대하는 이들은 만주의 동포들은 1945년 8월 중순부터서야 광복군 명칭을 처음으로 들었으므로 그 이전에 광복군과 박정희 사이에 연락이 있었을 개연성은 희박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광복군 비밀요원 설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김구 선생이 청년 박정희가 유망함을 보고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권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시점은 실제로 박정희가 고향을 떠나 중국 대륙을 여행한 시점, 그리고 김구 선생이 광복군을 창군을 창군과 시점과 일치하기에 충분히 그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박정희가 작전장교였다는 사실이 그 개연성을 높인다. 박정희는 만주국 보병8단 작전참모였던 박정희는 유능한 작전장교였다. 국군 하급장교 시절에 북한군 남침 예정을 그 시기와 침투 경로까지 정확하게 예측하였던 이가 바로 박정희였다. 경제 전쟁에서의 박정희의 전략 때문에 미국 학계는 박정희를 우러러본다. 한국의 포항이 미국의 디트로이트를 일거에 점령하였다. 국제시장에서 철강 수요가 줄어들 것을 모두가 예측하고 있었던 때에 박정희는 철강, 전자, 조선산업의 붐을 정확히 예측하였으며, 한국인도 국산품을 안 쓰던 시대에 한국산은 만드는 대로 세계시장에서 날개돋힌 듯 팔리게 하였다.

박정희의 이런 전략에 자기 인생을 던진 이가 바로 박태준이었다. 만약 박정희 비판 세력으로 초등학교 출신이었던 정승화가 한국군 최고 지휘관이 될 수 있었으며, 일본 학도병 출신이었던 김재규가 권력 2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면 명문대 출신 박태준의 군부 내 출세는 보장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박태준더러 군복을 벗고 포항 모래사장에 가라고 하였다. 돈 한 푼 안주고 필요한 것은 미국에 가서 빌려다가 제철소를 지으라고 하였다. 미국 가니 정계와 재계가 한결같이 철강산업은 전망이 없으니 하지 말라고 막았다. 미국 정계와 재계 전문가들이 모두 이렇게 말하는 데도 박태준은 박정희 대통령의 전략에 자기 몸을 던졌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수학 천재 박태준의 수학 스승은 박정희였다. 해방 조국 육사에서 박태준의 수학 교관은 박정희였으며, 박정희는 생도 중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까다로운 미분, 적분 문제들을 척척 푸는 박태준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박태준은 박정희를 영원한 스승으로 모셨다. 그래서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포항 모래사장으로 가서 포항제철을 지으라고, 그것도 돈 한 푼 안 주고 지으라고 했을 때 박태준은 자신의 영원한 스승 박정희의 명령에 자기 목숨을 내던졌다. 이것은 자기편 출세시키기 위해 쓸데없는 위원회들을 만들어 국가 예산을 허랑방탕 탕진시키고, 유전비리, 행담도 비리를 일으키는 노무현 식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패러다임이었다.

자,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은 대륙의 일본군 동향 정보를 광복군에 의존하여야 하였다. 더욱이 8월 하순에 예정되어 있었던 미해병대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아주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였다. 그러면, 김구 선생은 일본군 정보를 어디서 입수하였을까? 첩보 없는 광복군의 존재는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첩보는 일본군 주둔 위치 지도였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있는 이는 박정희 뿐이었다. 박정희는 만주국군 작전참모였기에, 그리고 지리학과 지도와 측량 분야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능한 장교였기에 그의 만주국 보병8단 사무실에는 팔로군, 만주군, 일본군, 러시아군 등 각국 군대의 진 배치도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들의 편지와 증언이 박정희의 독립운동설을 뒷받침한다. 일년 전에 오마이뉴스는 박정희의 친일 행적을 보도하기 위해 특집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기자들을 대거 그의 고향에 보냈다. 그러나 증언은 뜻밖에도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는 것뿐이었다. 박정희는 일본인들 몰래 학생들에게 한글과 애국가를 가르쳤으며,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민족의 긍지를 일깨워주었으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떠났다.

그러면, 일본인 지인들은 박정희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하는가? 우리나라에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학하였으니 일본군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사를 전혀 모르는 무식한 소리이다. 만약 조선인에게 일본 육사 진학의 길이 열려 있다면 진학안할 이가 누가 있었는가? 조선인이 검사가 되면 조선인이 축하해 주던 시대였기에 김재규 아버지는 김재규를 일본 육사에 입학시키기 위해 일본에 가서 백방의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만약 조선인에게 일본 육사 진학의 길이 열려있었다면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완전 평등 대우였다. 그러나, 식민지화 초기에 왕족과 귀족에게 일본 육사 진학 특전을 베푼 적은 있었을 뿐 아무에게나 일본 육사 문이 열려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가 왕족이었는가? 아니다. 더구나 황국신민교육을 완강히 거부하였던 박정희는 사상적으로 찍혀있던 자였는데. 일본 육사에 입학시키겠는가? 그렇지 않았다. 단지, 만주국 군관요원으로서 만주국 황제의 추천으로 위탁교육을 2년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면 대구사범학교 교련 교관이 본 박정희는 누구였는가? 금강산에는 박정희가 대구사범 시절 수학여행 때 돌에 새긴 시조가 있는데, 독립운동을 위한 기개가 담긴 명문이다. 박정희는 작사 작곡을 하는 음악가였으며, 어느 화가 못지 않은 미술 실력을 지녔으며, 그의 서예 작품은 서예가들의 세계에서 일품이다. 그리고 수학에도 천재였던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는 꼴찌를 유지하였다. 남들은 비웃었겠지만 그 이유를 대구사범 교련 교관이었던 일본이 아리카와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교과과정이 황국시민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박정희는 백지 답안으로 항거하였다.

만주국 군관학교가 본토의 조선인이면 아무나 지원할 수 있었던 학교가 아니라, 박정희의 문경 교사 시절 먼저 관동군 대좌로 부임하였던 아리카와 대좌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런데, 아리카와 대좌가 박정희에게 독립운동을 하라는 유언을 편지로 남겼다. 박정희가 만殮별徨閨?예과를 마칠 무렵 아리카와 대좌는 남태평양에 출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때 그는 박정희에게 이런 유언을 편지로 보냈다: <이 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일본은 망할 것이요,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나는 죽으로 가나 자네는 자네 조국을 위해 살게.>

이 짧은 유언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직업적 군인은 이런 편지를 쓸 줄 모른다. 이것은 군인 정신에 관한 것이다. 박정희에게 군인이 되는 길을 열어준 이는 아리카와 대좌였다. 그리고, 만주국이 아닌 조선을 위한 군인이 되라는 유언을 남겼다. 여기에 해방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는 암시가 있었다. 박정희가 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려 하였는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뛰어든 것을 알고 아리카와 대좌는 자기 제자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독립운동을 위해 준비할 때임을 유서로 남겼다.

그러면 박정희는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는가? 1960년대는 이것은 묻어두어야 할 비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많은 비밀을 묻어 두었다. 본래 한일회담이 기술 이전을 위한 한미일간의 합의였으므로 일본 기술을 최대한 빼와야 할 시기에 묻어두어야 할 비밀이 있었다. 미련한 노무현처럼 반일정서를 권력 장악에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경제 전략이 아니었던 시대였다. 만약 그 시대 대통령이 노무현처럼 나불거렸으면 일본은 전자기술은커녕 제철소 건립 기술조차 한국 대통령에게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광복군은 어떻게 일본군 동향에 대한 고급 정보를 입수하여 미국에 전달하였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조선인이 장교가 되는 기회가 극히 적었던 시대에 누가 일본군 핵심 정보를 광복군에 전달하였을까? 관동군 동맹군이었던 만주국 작전참모로서 박정희는 고급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신뢰할 국가관을 가진 청년으로 일본군 핵심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는 박정희 외에 또 다른 이가 있었을까?

그러면 박정희는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는가? 1960년대는 이것은 묻어두어야 할 비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많은 비밀을 묻어 두었다. 본래 한일회담이 기술 이전을 위한 한미일간의 합의였으므로 일본 기술을 최대한 빼와야 할 시기에 묻어두어야 할 비밀이 있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광복군은 어떻게 일본군 동향에 대한 고급 정보를 입수하여 미국에 전달하였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조선인이 장교가 되는 기회가 극히 적었던 시대에 누가 일본군 핵심 정보를 광복군에 전달하였을까? 관동군 동맹군이었던 만주국 작전참모로서 박정희는 고급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신뢰할 국가관을 가진 청년으로 일본군 핵심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는 박정희 외에 또 다른 이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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