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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26의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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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2:22 조회12,2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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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10.26의 밤


                                                           1. 10.26의 시대적 배경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1927)과 이철승(1922) 총재자리를 놓고 겨뤘다. 평소의 지지율에서는 이철승이 훨씬 우세했지만 기이하게도 투표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52세라는 새파란 나이에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삼은 정국을 걷잡을 수 없이 흔들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에는 노동운동, 도시산업선교회(도산), 가톨릭농민회, 학생운동 그리고 수많은 불순 재야세력이 우후죽순으로 번성하여 박정희(1917) 정권 타도를 목표로 하는 투쟁을 전개했고,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들과 손을 잡고 이들을 이용하면서, 국가의 운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박정희 정권을 공격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박정희 대통령을 몹시 싫어하던 미국의 카터대통령까지 끌어들여 박정희 정권에 타격을 가하려 했다. 이런 동기에서 연타로 쏟아내는 김영삼의 독기어린 막말들은 박정희 정권을 극도로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1979 년8월 11일, YH사건이 발생했다. 회사 측의 폐업조치에 대항하여 200여명의 조합원들이 불순분자들의 배후조종을 받아 신민당 당사를 40시간 동안 점거하여 정치투쟁을 벌였고, 김영삼은 이들을 고무했다. 이에 경찰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강경진압 지침에 따라 무리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신민당 사람들, 취재기자, 노동자들이 부상을 입었고 노조위원 김경숙이 사망하게 되었다. YH사건은 순수한 노사분규를 정치문제화 시키려는 재야세력 및 야당의 충동질에 의해 빚어진 사건이었다. 사건을 직접 주도한 노조지부장 최순영, 부지부장 이순주, 사무장 박태연, 배후조종자 인명진(목사), 문동환(목사), 서경석(목사), 이문영(교수), 고은(시인) 등 모두 8명이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이들 8명은 국보법 위반 등 대한민국 파괴에 인생의 큰 부분을 바쳤던 사람들이다. 


박정희와 여권은 YH사건 배후에 김영삼 총재가 있다고 확신했다. 신민당 당사를 40시간 동안이나 노조 농성자들에게 내준 것 자체가 그렇다. 이런 와중에 신민당에 내분이 일었다. 조일환씨 등 신민당 간부 3명이 김영삼의 총재직 당선은 무효라며 서울지방법원에 직무정지가처분 신청을 냈다. 당시 신민당 내부에서의 평소 지지율이 김영삼보다는 월등하게 높았는데도 김영삼이 당선된 데에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당시의 의혹들이었다. 9월 7일, 드디어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고, 이로써 김영삼은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물러난 김영삼은 이를 박정희 정권의 공작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감정이 격화된 김영삼은 9월 16일, NYT 회견을 통해 미국에게 “한국에 원조를 중단하고 한국정부에 민주화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촉구했다. 당시 여론은 김영삼의 이 발언을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김영삼은“미국은 우리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라”라고 반박했다. 이 발언에 박정희가 격노했다. 한국 국민으로서 어찌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대통령과 여당은 김영삼의 이 발언에 대해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일탈하여 반국가적인 언동을 함으로써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고 규정했다.


사실 당시 우리 국민은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면서 생활을 했고, 미국의 군사원조가 아니면 군을 지탱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원조가 2.8억 달러, 군사원조가 2.2억 달러였다. 환언하면 한국경제가 현상을 유지하려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 달러와 무역적자 5천만 달러를 합쳐 3.3억 달러를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연평균 2.88%의 인구 즉 72만 명의 인구가 매년 증가하고 있었다.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률,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실업률 30%! 지금의 실업률은 얼마인가? 3.5%. 매년 30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지만 겨우 4,000명 정도만이 취직을 하는 지금의 실업률이 겨우 3.5%라 하니, 당시의 30% 실업률이 얼마나 살인적인 것이었겠는가! 당시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필리핀 국민소득 170달러, 태국 220달러, 한국은 68 달러였다. 북한은 우리보다 2배, 필리핀은 3배나 더 잘 살았다.


박정희는 이렇게 한심했던 폐가를 재건하여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내고 있었다. 이렇게 했어도 1979년 당시까지 한국군은 미국의 FMS 군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민간경제 역시 미국의 정책적 배려에서만 성장할 수 있었다. 필자는 당시 대위였는데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미국정부가 지원해 주었다. 미국의 이런 원조가 없었다면 당시 수많은 군인들이 미국의 선진 문물을 습득할 수 없었을 것이며, 이들 교육받은 군인들이 없었다면 당시 군의 현대화는 물론 사회행정도 현대화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군은 선진문물을 배워 일반 사회에 공급하는 향도요 전도사였다.        


해마다 미국 측과 협상하는 군의 장군들은 물론 정부 인사들은 원조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얻어내려고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이런 사정에 비추어볼 때 김영삼의 위 발언은 결국 국가안보를 희생시켜서라도 정적을 물리치려는 무책임한 소아적 발상에서 나온 표현이었으며, 그래서 국민의 지탄을 받았던 것이다. 이 발언으로 인해 김영삼은 10월 4일부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당시의 일반적인 사회정서로는 이런 김영삼이 용서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꾼들은 예나 지금이나 상식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총재 잃은 신민당은 당연히 그들의 정공인 극한투쟁을 선택했다.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사퇴를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고, 골라서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사퇴서 선별수리론”인 것이다. 이것이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했다.


10월 15일,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됐다. 10월 16일에는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고, 여기에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전개됐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 경찰서, 도청, 세무서, 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른바 '부마사태‘였다. 이에 정부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3공수여단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함으로써 시위는 진정되었다. 이렇게 어지럽던 계절 속에 10.26이 있었다. 10.26은 김영삼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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