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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 편 네 편 갈라진 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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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1:59 조회12,4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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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내 편 네 편 갈라진 군벌


한남동에서 총소리가 울릴 때,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신촌의 모 음식점에서 술을 곁들인 저녁을 하고 있었다. 전두환 측 주장으로는 그날 대령에서 장군으로 진급한 수경사 헌병대장 조흥이 수경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 헌병감 김진기, 전두환을 함께 초청한 자리라 하지만 전두환 측이 미리 만든 장소일 가능성도 있다. 정승화 쪽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둔 후 재가가 끝나면 따로 가서 사정을 설명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촌에 정승화 계열의 장군들이 모여 있을 때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 실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날 아침 전두환은 미리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장군을 불러 “내가 그 시각에 대통령 보고가 잡혀져 있으니 보고를 끝내고 갈 때까지 대접을 하고 있으라”는 지시를 했다. 이 신촌모임을 놓고 검사들은 전두환이 반대파들을 묶어 두기 위해 사전에 계획한 음모라고 몰아갔다. 1996년 3월 18일 역사바로세우기 제2회 공판에서 이에 대해 김상희 검사와 전두환 피고인과의 문답이 있었다. 

김상희 검사: 그 세 사람을 한 곳에 모은 것은 그 들의 부대지휘를 효과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차단할 목적이 아니었습니까?

전두환: 그 사람들의 지휘를 차단하려 했다면 아주 쉽게 할 수가 있지요, 모아놓고 예를 들면 통신수단을 차단해 버린다든지 몇 시간 연금을 시키는 게 간단하지요. 그런 목적이 아니고 내가 대통령 재가 받고 난 다음에 30단에 들렀다가 그 분들한테도 가려고 했습니다. 그 분들이 정승화, 소위 말하는 김재규 심복들이기 때문에 정승화 총장에 대한 연행조사가 불가피하니까 그렇게 이해하라고, 이해도 시키고 협조도 받아야 하겠다는 순수한 생각으로 했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여러 가지 오해를 받게 됐습니다. 그런 저의는 전혀 없었습니다. 만약 그런 저의가 있었다면 다른 방법으로 그 사람들을 가둘 수가 있지요.


 장태완 등을 연금할 생각을 가졌다면 그들은 전화 한 마디에 식당에서 나와 각기의 부대들로 갈 수 없었다. 30경비단에 있는 장군들과 신촌만찬에 있던 장군들은 성분이 다른 두 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전자의 장군들은 김재규에 대한 재판을 제대로 하려면 김재규를 비호해온 정승화를 조사해야 한다는 장군들이었고, 후자의 장군들은 정승화에 무조건 충성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날 두 부류의 장군들에게 따로 따로 재가의 결과를 설명하려 한 것은 좋은 착상이었다고 생각된다. 국방장관만 제 자리를 지켰다면 아마도 전두환은 계획대로 대통령 재가를 신속하게 마치고 30경비단에 있던 장군들과 신촌에 있는 장군들을 모두 만났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렇게만 되었다면 12.12는 총장연행이라는 간단한 사건으로 종결되었을 것이다.    


장태완과 정병주 등은 이 ‘신촌모임’(일명 연희동 모임)에서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다가 밤  8시경에 육군본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총장이 괴한에게 피습되어 납치된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장태완은 총장공관에 전화를 걸었지만 부관 이주천 소령은 정승화가 합수부에 연행됐다는 사실은 숨긴 채 “총장님을 구해 달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장태완은 부대로 복귀하면서 정총장이 불순세력에 납치된 것으로 오해하고 수경사로 가서 구조대를 보내 정승화를 구하고 범인을 체포하라고 무전으로 지시했지만, 참모들은 총격전이 일고 있는 공관에 상황파악도 하지 않고 구조대를 보내는 것은 무리라며 반대했다. 이 때 윤성민으로부터 무전이 날아왔다. “정승화 총장이 합수부에 연행되었다” 이 내용을 전해 듣고 비로소 장태완은 사태의 성격을 알게 되었다. 8시 40분경이었다.


이에 대해 장태완의 첫 반응은 이러했다. “합수부장은 계엄사령관의 부하인데 부하가 어찌 상관을 연행할 수 있느냐, 이는 명백한 하극상이다. 합수부를 용서할 수 없다.” 윤성민의 반응과 100% 일치하는 반응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군사문화권에서는 정승화의 심복이라면 100사람이면 100사람 모두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장태완은 수경사 전 병력을 사령부로 집결시키라고 비상령을 내렸다. 심지어는 청와대 외곽경비를 맡고 있던 33경비단 소속의 3개 중대 병력까지도 근무지를 이탈해 수경사령부에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33경비단에 대한 지휘권은 청와대 경호실에 있었기에 이 명령은 분명한 월권이었다. 그리고 전 장병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전투준비태세에 임하라고 지시했다. 이 때, 김기택 수경사 참모장이 30경비단에 장군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고했다. 장태완 소장은 이들이 연행의 배후세력이라 단정했다. 육본으로 간 김진기 등 정승화 계열의 장군들이 헬기를 동원하여 유학성 들을 체포하자는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장태완도 한 것이다. 장태완은 30경비단장실에 전화를 걸었다. 그 전화는 유학성 중장이 받았다. 장태완 소장은 유학성에게 “그 곳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무슨 작당을 하느냐, 계엄사령관을 납치해서 어쩌자는 거냐, 빨리 총장을 원위치로 돌려보내라”고 호통을 쳤다.


유학성이 상황의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나도 연행 계획을 모르고 이 자리에 초청돼 왔다. 여기에 와서 비로소 연행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총격전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이다. 총장연행은 10.26과 관련하여 대통령께 보고한 사항이며, 여기 30경비단에 와있는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 말에 장태완 소장은 유학성 중장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너희 놈들 거기 있거라, 내가 전차를 몰고 가서 싹 깔아죽이겠다.” 이런 장태완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유학성은 평소 장소장과 친분이 두터운 황영시 중장에게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황 중장이 또 다시 자세하게 설명해주면서, 못 미더우면 여기에 와 보라고 했지만 장태완 소장은 “이놈들! 꼼짝 말고 거기 있어, 내가 포를 갖고 와서 네놈들의 머리통을 모두 날려버리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술에 취한 채 흥분해 있던 장태완에게는 아래도 위도 없었다.


30경비단을 반란군의 본거지라고 단정한 장태완은 9시 30분경, 김용휴 차관과 윤성민 참모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30경비단을 공격하여 총장을 구출하려 하니 26사단, 기계화사단, 9공수여단을 출동시켜 자기의 휘하로 넣어달라는 요구를 했다. 군 상식을 많이 벗어난 요구였던 것이다. 이어서 그는 3군사령관 이건영에게 전화를 걸어 30경비단이 반란군 본거지이고, 병력을 동원하여 쳐들어가야 하니 예하 병력을 동원해주고 후방지원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이건영 대장은 한수 더 떴다. “그 못된 놈 들이 장난을 치는 모양인데 장 장군이 잘해야 한다. 황영시 1군단장, 차규현 수도군단장 두 놈들의 지휘 하에 있는 부대는 절대 서울로 출동할 수 없도록 조치할 테니 걱정 말고 그 놈들을 즉시 소탕하라”고 부추긴 것이다.


장태완은 이어서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에 전화를 걸어 “30경비단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을 먼저 출동시켜 합수부와 30경비단을 동시에 제압하는 방법밖에 없으니, 정병주 당신은 그 동안 육사출신이 여단장으로 있는 1,3,5 공수여단은 출동하지 못하게 하고, 9공수여단을 출동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정병주 소장은 육본 작전처장(이병구)와 특전사 작전참모(신우식)의 만류를 뿌리치고 9공수여단에 출동을 지시하고 이를 장태완에게 알려주었다. 같은 시각에 윤성민 차장은 행정학교 교장인 소준열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행정학교에 주둔하고 있는 20사단의 사단장 박준병 소장(육사)을 즉각 체포하라 지시했고, 이어서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71사단장인 백운택 소장(육사)을 즉시 체포하라 하였지만 이들은 경비병들을 뚫지 못해 체포를 단념했다. 하지만 두 사단장들은 그때 30경비단에 있었다. 이어서 장태완은 자기의 지휘선상에 있지도 않은 26사단장(배정도)과 수도기계화사단장(손길남)에 전화하여 전 병력을 서울운동장과 장충공원에 출동하라는 월권적 명령을 내렸다.


한편 육본작전참모 하소곤 소장은 1공수여단이 이미 출동한 것으로 오해하고 장태완에게 한강 1,2교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태완은 한강교에 퇴근중인 시민 차량을 강제로 세워 이들 시민차량을 빼앗아 바리케이드를 치게 했다. 수도권 일대의 헌병초소에 "검문에 불응하는 자는 무조건 사살하라"는 기막힌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장태완은 1공수여단이 출동한다는 하소곤 소장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장태완은 하소곤으로부터 ‘1공수여단이 출동했다’는 말을 듣기 전에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이미 “1공수여단이 출동한다는 말이 있으나 확인한 바 여단장 박희도는 부재중이고 이기룡 부여단장은 출동계획이 없다고 했고, 만약을 위해 이순길 특전부사령관을 1공수여단에 보내 감시케 하고 있다”는 내용을 설명들은 바 있었다. 그런데도 장태완은 이를 시정해주지 않고, 옳다 싶어 위와 같이 무서운 조치를 취한 것이다.


수경사에 온 윤성민과 수경사 사령관 장태완은 한동안 서로를 격려하며 난동을 주도한 콤비가 되었다. 여기에서 필자가 난동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데에는 이유가 많이 있다. 합수부장은 10.26과 관련돼 있는 정승화를 합법적으로 연행했고, 연행한다는 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여기까지만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결과를 보고 순리적으로 문제를 풀어야지 병력을 풀어 우격다짐으로 합수부의 법집행을 방해할 일이 아니었다. 날이 새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잘 잘못을 가리면 되는 것이었다. 필자는 윤성민과 장태완이 당시 어째서 ‘세상이 그날 밤 안에 모두 끝나고 내일이 없다’는 식으로 무모한 일을 저질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는 사(私)를 공(公)보다 앞세운 처사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윤성민은 전두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사실도 부인하려 했다. 그렇다면 윤성민은 전두환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을 파악하거나 또는 설득시키거나 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대화를 스스로 포기하고 무조건 전두환을 반란군이라고 생각하고 병력을 동원하고, 두 사단장을 체포하라 지시하고, 육본 보안대장 변규수 대령 등을 체포 구금시킨 것이다. 1996년 6월 27일, 윤성민은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내가 8시경, 수도권 일대에 진돗개하나를 발령한 것은 총장이 공비들에 의해 납치된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합수부장으로부터 합수부가 정총장을 10.26과 관련하여 연행했다는 보고를 받은 바 없다. 그러나 나는 총장연행을 반란행위라고 생각했다. 8시30분경,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려고 전화를 했으니 최광수가 대통령을 대주지 않았다. 그 후 신현확 총리에게 전화를 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의견을 구했지만 신총리는 ‘지혜롭게 수습하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8시 40분에 소준열에게 전화를 걸어 박준병을 체포하라 지시했다. 아까는 전두환과 통화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변호인이 들려주는 녹음테이프를 들어보니 통화한 것 같다. 아니 확실히 통화했다. 통화내용은 ‘지금 10.26사건과 관련해서 간단한 조사가 있어 연행을 했는데 그것이 의외로 에스컬레이트 되어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그래서 그 조사 후에 갈 테니 잘 수습해 달라’는 보고였다.


이 때 변호인들은 윤성민에게 합수부가 법 집행치원에서 정승화를 연행하였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 어떻게 합수부를 반란군으로 단정하고 무모한 명령들을 내렸는가에 대해 집요하게 몰아갔다. 신정철 변호인이 윤성민에게 아래와 같은 요지의 신문을 집요하게 하고 있었다.


윤성민 당신은 8시 10분경에 합수부가 정총장을 연행했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합수부를 반란군이라고 단정하여 무모한 명령들을 내렸는데, 그 때 당시는 전두환이 대통령에 보고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결재를 하러 갔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고, 적어도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일에 대통령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체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줄은 누구나 알 수 있는데 어째서  그때 벌써 반란군이라고 단정을 할 수 있는가?


변호인들이 바꾸어 가면서 이런 취지로 몰아가는 데 반해 윤성민은 답답할 정도로 “결국 대통령 재가를 받지 못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나는 반란군으로 규정한 것이다”라는 취지의 답변만 반복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을 가지고 12월 12일 밤에 취했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하니 참으로 딱해 보였다.


신정철 변호인: 박준병과 백운택 장군을 체포하라 명령한 것은 그들이 반란에 가담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요?

윤성민:

신정철: 반란에 가담했다는 정보가 있었나요?

윤성민: 결과적으로는 박준병이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신정철: 아니 결과적으로가 아니라 체포명령을 내린 8시 40분경에 박준병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하는 것입니다. 

윤성민: 30단에 가서 합류해서 주 멤버로 행동하지 않았습니까?

신정철: 그러나 그날 8시40분경 체포명령을 내렸을 당시에는 박준병 등이 30단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 않았습니까?

윤성민: 여튼 그 후에 안 사실이지만 30단에 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너무 답답한 대답만 반복하고 있기에 전상석 변호인이 끼어들었다.     


전상석: 나중에 안 것 가지고 머리가 자꾸 굳어 있는데 그러면 안 돼요, 그 때 안 사실을 가지고 이야기 해야지요.


바로 이 순간 재판장이 끼어들어 변호인들과 말싸움을 했다.


재판장(김영일): 지금 신정철 변호인이 신문하시는데 왜 옆에서 갑자기 들어왔습니까?

전상석: 같이 하는 변호가 아닙니까?

재판장: 그래도 순서가 있고 법정에서 그렇게 막 하시면 되겠습니까?

전상석: 같은 변호인들로 중간에 들어설 수 있지요.

재판장: 순서가 있지 않습니까? 왜 변호인이 법정에서 정중하게 안 하고 왜 그러십니까?

전상석: 아니, 같은 팀에서 상변호인의 질문에 도움을 주는 것도 안 됩니까?

재판장: 다른 변호인이 먼저 신문하시고, 차례 오면 하시라고 아까 이양우 변호인에게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상석: 아니, 상변호인 신문에

재판장: 질서 없이 왜 그러십니까? 이 역사적인 재판을 하는데 법정을 질서 없게 만드는 것입니까?

전상석: 누가 질서 없게 해요?

재판장: 뭡니까?

전상석: 아니, 누가 질서 없게 합니까? 

재판장: 왜 불쑥 불쑥 하십니까?

전상석: 불쑥불쑥이 아니에요. 상변호인하고 나도 공동 변호인입니다. 질문을 옆에서 도와드리는 거예요.

재판장: 질서가 있어야지요.


막말로 치닫고 있었다. 이 때 변호인 신정철이 윤성민에게 질문을 함으로서 변호인과 재판장 사이에 있었던 감정싸움은 수습이 됐다.


신정철: 그 당시 박준병 장군이 30단에 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아까 말씀하셨고, 사실 또 모르셨지 않습니까? 박장군이 30단에 갔다고 하는 것은 사후에 아신 것이지요?

윤성민:


여기에 또 재판장이 끼어들어 직접 증인 윤성민을 이렇게 신문했다.


재판장: 12.12. 저녁에 합수부장과 전화를 한 것은 틀림없나요?

윤성민: 처음엔 없었는 줄로 알았는데 녹음테이프에 나와 있으니 사실일 겁니다.

재판장: 부하직원으로부터 받은 것을 합수부장으로부터 받은 것을 착각하시는 게 아닌가요?

윤성민: 아닙니다.

재판장: 합수부장과 통화를 했으면 내용이 있을 것 아닌가 이 말입니다. 

윤성민:  통화내용이 ‘지금 10.26사건과 관련해서 간단한 조사가 있어 연행을 했는데 그것이 의외로 에스컬레이트 되어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그래서 그 조사 후에 갈 테니 잘 수습해 달라’는 보고였습니다. 

재판장: 그러면 증인이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기로는 간단히 조사하려고 연행했다는 말속에 함축된 것이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의 재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안 나오니까 함부로 연행했구나 하는 판단에서 행동한 것입니까?

윤성민: 그렇습니다.

재판장: 그렇게 된 것입니까?

윤성민: 예, 재판장님, 이런 계엄 하에서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려면 마땅히 국방장관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재판장: 그 당시 재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는 것입니까?

윤성민: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재판장: 그러면 재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재가를 안 받고 연행 했구나 이런 생각까지 한 것입니까?

윤성민: 그렇습니다.


이상의 진술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윤성민은 그날 아무런 근거 없이 박준병과 백운택이라는 두 명의 사단장을 체포하라 한 것이다. 이 두 사단장들은 10월 27일 새벽 4시에 발효된 계엄령에 따라 서울로 올라와 주둔하고 있었던 두 육사출신 사단장들에 불과했다. 윤성민이 이 두 사람을 체포하라 한 것은 이들이 육사출신이었기 때문에 전두환에 합세했을 것으로 예단하고 취한 조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신문과정을 보면 참으로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두환과 윤성민 사이에 전화통화가 있었다면 그 통화는 일방로(one way communication)가 아니라 쌍방 통화였다. 3성장군인 윤성민은 이 통화에서 2성장군인 전두환의 이야기를 들은 후 “그러면 장관과 대통령에게 보고가 된 사항이냐”, 이렇게 당당하게 물었어야 했다. 이렇게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서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함부로 연행을 했다’고 단정 지은 후 그같이 엄청난 조치들을 취했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 본다. 윤성민은 바보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전두환이 괘씸하다는 생각에 무조건 그를 하극상으로 몰아가면서 정승화를 강제로 원상복구 시키려 했던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전두환에게는 법을 집행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었지만, 윤성민에게는 감히 2성장군이 4성장군을 체포 연행할 수 있느냐에 대한 위계질서에 대한 명분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위계질서는 법 위에 설 수 없는 명분인 것이다. 여기에서 재판장은 교묘한 방법으로 윤성민을 도와가며 유도심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신문과정에서 재판장은 불공정하게 뛰어들어 윤성민을 감쌌고, 이로 인해 변호인들의 집단 퇴장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피고인들은 사실상 변호인 없이 1심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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