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클럽
 
 
작성일 : 16-06-18 21:14
5월21일 오후, 경찰 4,000명 전원 광주시 탈출- 전경 증언록 1편
 글쓴이 : 솔향기
조회 : 1,284  
있는 그대로 올립니다.

법적 자료 가치가 있을 것 같아서 글자 한자 빼지 않고 인용 복사하여 올립니다. 다만, 너무 길어서, 대부분 생략 하고, 경찰이 5월 21일 이후는 없었다는 그 증거만 알리고자 합니다.

- 의무전경의 증언록-

- 인용 -

의무전경으로 시위진압에 나서


증 언 자 : 박시훈(가명, )

생년월일 : 1956.(당시 나이 24)

직 업 : 의무전경(현재 대학원생)

조사일시 : 1989. 11


개 요

당시 의무전경(기동대)으로서 광주항쟁에 진압을 나온 박시훈(가명) 씨가 5 18일부터 21일까지의 진압과정에서 목격한 사실들을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민중항쟁의 또 다른 피해자로서 그 심적 갈등을 토로한 내용이다.


기동대에 배치받고 시위진압을 나가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를 광주에서 마쳤다. 대학 3학년때 순수문학에 심취하여 실존의 문제들을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문학도의 길을 걷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다.

그러던 1979 1 13, 입대를 하게 되고, 대학 재학생이 70퍼센트가 넘는 전경들 중의 한 사람으로 기동대에 배치받았다. 얼마 되지 않아 10.26으로 박정희가 죽자 기동대에서는 충격과 함께 일부는 긍정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 무렵부터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면서 정국이 혼란스러워졌고, 곧 기동대도 출동할 것이라는 말들이 은연중 나돌았다.

1980
3월 기동대는 공설운동장에서 전남지역 장정들(스타들)을 모시고 시위진압훈련 시범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굳이 이런 훈련을 하는 이유가 무얼까 하고 회의적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4
월과 5월에 기동대는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의 시위로 인하여 매일 출동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그 때문에 외출, 외박도 못 하는 대원들은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5 10일 이후부터 학생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전개하고 도청 앞 집회 역시 경찰들과의 타협 속에서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5, 16
일 시위시에는 경찰이 시위대를 보호하듯 함께 돌아다녔고 시위행렬에 있는 친구나 후배들을 볼 수도 있었다.


외박과 외출의 꿈은 깨지고 다시 출동

5
18 0시를 기해 계엄이 확대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일단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인간은 누구나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마음에도 없는 생활을 버티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로서는 이제 계엄이 확대되어 당분간은 편해질거라는 생각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18
일 아침, 모두가 들뜬 기분으로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시위진압으로 인해 허용되지 않았던 외출이나 외박을 보내준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시위진압을 하느라 스트레스가 무척 많이 쌓여 있었는데 뜻밖의 외출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고 대원들은 외박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9
50분쯤 비상벨이 울렸다. 외박과 외출의 꿈은 무너지고 다시 지긋지긋한 출동이 시작된 것이다. 모두들 불만에 가득 차 투덜거리면서 진압 차림을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진압복, 가스탄, 플라스틱 방패, 방석모 50센티미터 정도의 곤봉으로 무장하고 180여 명의 1중대가 진압을 나갔다.

나는 기동대내에서 내무반장을 맡고 있었다. 내무반장의 역할은 부대 안에서 소대원을 통제하고, 진압과정에서는 소대장의 지시를 받고 작전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것이었다.

전남대를 향해서 가는 도중 "시위대가 공원으로 가고 있다, 공원에서 금남로로 가고 있다"는 무전연락을 받고 방향을 바꾸어 가톨릭센터 앞으로 출동을 했다. 그곳에 도착한 시각은 10 30분이었다.
이미 가톨릭센터 앞에서는 2백여 명의 학생들이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났다. 기동대는 그 광경을 지그시 지켜보며 서서히 진압준비를 했다. 처음 진압은 소대장과 분대장의 지휘체계를 갖고 신중하면서도 강력하게 진압해야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5-6
분의 시간이 흐르고 소대장으로부터 사과탄 투척 명령을 받고 소대의 절반은 체포조, 나머지 절반은 투척조로 나누어 일단은 시위대 해산에 주력했다. 대원들은 일시에 방독면을 쓰고 방망이를 빼들었다.

'
사과탄 투척', '체포조 앞으로'

하는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시위대를 향해 무섭게 쫓아갔다. 대원들은 데모하는 너희들 때문에 외박도 못 나가고 애인도 만나지 못했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방망이를 휘두르며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출시켰다. 시위대는 동아극장 골목 등으로 피해 갔고, 나는 그들을 쫓아가는 대원들에게 때리지 말라고 말렸다. 삽시간에 시위대는 달아나고 우리 눈앞에는 잠시 시위대열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위대가 다시 시야에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시위대와 기동대는 대치장소만 가톨릭센터 앞에서 광주은행 본점 앞 사거리로 바뀌었을 뿐 학생들은 오히려 시민들과 합세하여 '계엄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쳐댔다.

시위대가 밀려오면 기동대는 가스탄을 뿌리면서 해산시키려고 애를 썼고, 그러면 그럴수록 시위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시위의 양상도 투석전에서 그치지 않고 화염병이 나오는 등 격렬해져 갔다.


공수부대의 갑작스런 출현을 보고

오후 2시경 시위대가 밀려났고 기동대는 가스차를 앞세우고 진압을 하던 중 시위대열에서 갑자기 화염병이 날아와 가스차 앞부분이 불길에 휩싸였고, 이에 놀란 기동대원은 가스차 안에서 뛰쳐나왔다.

3
, 시위대는 화염병 공격을 그치고 불붙은 택시를 밀어붙이는 등 필사적으로 싸웠다. 해산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점점 불어나는 시위대를 본 기동대원들은 진압할 가스탄도 부족할 지경이 되어 겁먹고 상기된 표정으로 있었다.

(중략)



19일 월요일 아침 8시 기동대는 광주관광호텔 앞으로 출동했다. 금남로는 이미 차량이 통제되고 상가는 모두 철시한 상태였다. 공수대원들은 여전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을 통제, 수색하여 체포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오전 9-10시경 금남로 거리에 상당수 젊은이들이 눕혀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 공수대원들은 개별적으로 반항하는 젊은 사람들을 팬티만 입혀서 금남로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군대식 기압을 주었다. 그들은 논산훈련소에서 마치 신병들 다루 듯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쪼그려 뛰기' 등을 시키는 것이었다.

관광호텔 앞으로 잡혀온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기합을 받고 있을 무렵 경찰 작전 과장이라는 사람이 10여 명의 젊은이를 풀어주었다.

"
당신이 뭔데 우리가 잡아온 이들을 풀어주느냐."

하고 공수대원이 항의하여 작전과장을 무색하게 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0
시를 전후하여 공수대원들은 금남로 건물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여 젊은이들을 잡아갔다. 기동대원들이 YMCA 앞에 있을 때였다. 공수대원은 젊은 남자 한 명을 양손을 머리 뒤로 올리게 하고 방망이로 후려치면서 끌고 나왔다.

(중략)

페퍼포그차에도 두려워하지 않던 시위대는 공수부대의 곤봉 세례를 받으며 밀려났다. 잠시 금남로는 텅 빈 도로가 되다가 공수부대가 원위치로 돌아오면 시민들은 다시 애국가를 부르며 모여들었다. 기동대는 다시 가스탄을 터뜨렸다. 그러나 시위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왔으며 공수대원들은 '의악' 하는 괴성과 군가를 부르면서 시위대를 쫓아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 되었다.

기동대의 무전기에서는 계속해서 상황보고가 들어왔다. "민간인 2천 명이 체포되었다. 31사단 수용능력이 부족하여 상무대가 넘치고 있다" 등의 내용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자 전혀 미동하지 않던 시위대가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고, 어둑어둑해질 무렵에는 시위대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1
기동대는 노동청 삼거리에서 비를 맞으며 시민들을 통제, 주시했고, 8시가 되자 19일의 시위는 끝이 난 듯했다. 공수대원들과 경찰 병력만 보였고 기동대는 곧 복귀했다.


(중략)

그때였다. 노동청 삼거리에서 버스 한 대가 속력을 내어 달려왔다. 이를 본 기동대원들은 재빨리 버스를 피했는데 앉아서 쉬고 있던 함평경찰서 경찰 몇 명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버스에 깔렸다. 시체를 모포로 덮은 후 상무관으로 옮겼다. 바로 눈앞에서 우리의 동료인 경찰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순간순간마 다 두려움은 더해 갔다. 저녁을 먹기 위해 다른 경찰부대와 임무교대를 하고 노동청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시간 도청 앞은 공수부대와 경찰병력이 노동청 앞까지 여러 겹으로 싸고 있었다. 우리는 경찰들의 시신을 옆에 두고 상무관내에서 저녁을 먹었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우리는 공포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시민들은 그때까지도 좀체 공수부대의 힘에 밀려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또한 압사한 경찰들을 직접 목격하는 등 일들이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20
일 밤 싸움이 계속되고 해결의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자 머리 속도 복잡해지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막연했으며 광주에 계시는 부모님 얼굴도 떠오르고 집에 가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집으로 전화를 했다. 나는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식구들은 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다시 기동대는 노동청과 금남로를 옮겨다니며 진압활동을 벌였다. 얼마 후 시내의 주변에서 불길이 솟았다. MBC 방송국 건물이 불길에 휩싸이고 연이어 노동청 주유소 앞에서도 불길이 치솟았다. 곧바로 도청 차고가 불탄다는 소식이 속속 들어왔다.

밤이 되어도 시민들은 무수히 많은 차량으로 도청을 향해 돌격해 왔고 불타버린 차량들의 잔해가 도처에 남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군병력은 시위대를 흩어지게 하기 위해서 도청 앞에 탐조등을 설치하여 운집해 있는 시위대를 향해 계속해서 비추는 작전을 펼쳤다. 밤중에 불빛을 들이대면 시민들은 두려움에 흩어질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흩어지기는커녕 시민들의 함성이 귓청을 때렸고, 도청 뒷담을 뛰어넘으려고 애를 쓰는 시민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새벽이 되었지만 시위대는 끝내 흩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부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새벽 4시까지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며 시위대와 공방전을 벌였다.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자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시민들이 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새벽 4시가 되자 시민들은 귀가하기 시작했고, 도로를 메웠던 많은 사람들은 흩어져 보이지 않았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잠을 잘 수 있게 되고, 5시경 뿌옇게 날이 밝았다.

날이 새어 눈을 떠보니 노동청 앞에는 시민들이 악몽같은 얼굴을 하고 벌써부터 모여들고 있었다. 어떤 시민은 돌을 몇 개 던지기도 하고 이상한 짐승 쳐다보듯 충혈된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자두자는 생각으로 꼼짝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어느새 시민들은 순식간에 모여들어 우리들에게 돌을 던져댔다. 그때야 모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21
일 아침 조선대에 다니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후배는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내게 확인하려는 듯 물었다.

"
도청 지하실과 분수대에는 시민들의 시체가 얼마나 있죠? 공수부대가 죽였잖아요. 형은 보았으니까 말을 해봐요."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웃었다. 도청 안 지하실은 모르겠지만 분수대는 물도 마른 빈 상태였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또한 그날까지 나는 시민들의 시신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칼, 곡괭이, 낫 등을 든 시위대가 위력시위를 벌이며 우리들 앞에 다가왔고, 10시가 되어갈 무렵에는 군용트럭 등을 타고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하는 것이 보였다. 차량을 탄 시위대는 각목으로 차체를 두들기며 도청 가까이 다가왔다가 다시 물러가는 등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18일 당당하게 나타나 자랑스러운 듯 진압을 해대던 공수부대도 시민들의 힘에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시민들이 어느새 공수부대의 트럭이나 철모를 소지하고 다니는 것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정시채 부지사가 나와 여자 한 명과 협상을 한다고 했다. 협상과정에서 11시까지는 시민들과 공수부대간에 소강상태가 지속되었고, 경찰들과는 장난도 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우리 경찰만 믿고 귀가하십시오."

"
너희들이 진정한 광주 시민이라면 경찰복을 벗어던지고 방망이를 공수부대에게 겨누어라."

시위대와 경찰들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대며 다소 완화된 표정으로 대화를 했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다시 쌍방은 대치상태가 되었다. 우리는 협상내용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 계속 - 2편에서
추천 : 20

솔향기 16-06-18 21:53
 
공수부대 부분은 영화나 언론 보도로 많이 왜곡 보도되고 하여 생략 했습니다. 경찰 부분만 묘사합니다.위의 의무경찰의 증언록 중 공수부대 부분이 약간식 조금 묘사 <공수부대는 무섭게 한다, 방망이를 휘두른다. 시민을 팼다. 겁난다. 방호복도 안 입고 했다. 지나가는 남녀를 때렸다 등 > 되지만은 큰 의미가 없기에 생략했습니다. 증언자 본인이 의무경찰이고, 공수부대원이 아니었기에 생략했습니다. 글 쓰고자 하는 목적은 5월 21일 이후는 경찰이 전원 철수하여, 광주는 무법 상태라는 것을--알리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HOME]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