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은 북 게릴라전, 입증증거 42개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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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11-07 21:58 조회2,9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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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북괴가 주도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42개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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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답변서] 책에는 5.18을 북괴가 주도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42개 증거를 50-224쪽에 걸쳐 사진들과 함께 정리했다. 그런데도 많은 독자가 42개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하신다. 그래서 그 42개 증거를 따로 뽑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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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북괴당국, 최근에 간첩 손성모를 5.18주도자로 선전하고 있다.
2001년 탈북 1호박사 안찬일은 ‘안찬일tv’에서 북괴당국이 최근 직접 나서서 광주에 파견됐던 간첩 손성모가 북괴의 5.18 작전에 지대한 공로를 쌓았다는 내용을 북한 주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그 공로로 당은 그에게 북괴의 최고 훈장인 공화국영웅 훈장과 1급 국기훈장을 수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안찬일이 밝힌 방송의 요지는 이래와 같다.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손성모에 대해서입니다. . 이 사람은 1929년생으로 1967년도에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북한의 엘리트였습니다. 그 사람을 통일전선부가 스카우트해서 공작원으로 키워오다가 1980년 4월경 그를 광주로 직파했습니다. . “광주사건이 진정된 이후에 북한에 당간부들 비교적 권력기관 사람들한테는 특별강연이 있었습니다. ‘손성모 동지 유훈을 따라 배우자, 마치 손성모라는 대남공작원이 광주 시민군 총 사령관으로 북한에서 내려간 특수부대, 공작원, 또 광주의 학생들, 시민들을 묶어서 지휘한 총사령관이었다는 인상을 갖도록 강연을 했다 합니다. . ”
“김일성이 60년대 초반에 남파간첩들에게 … 교시를 준 게 있는데 ‘공작원들은 십자가와 스님 뒤에 숨어라’ 그래서 종교계에 침투하는 걸 그 사람들은 가장 안전하게 생각을 해왔고 이 손성모라는 이 공작원도 바로 80년 4월에 대한민국에 침투하면서 광주 근교에 있는 증심사라는 절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으로 위장한 거죠. 머리를 이렇게 깎고 복장도 스님 복장을 하고, 그 주변에 흑룡사니 뭐니 이렇게 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거사를 꾸몄고, 또 류낙진의 딸 류소영과 공모를 했다는 내용들이 손성모의 강연에서 밝혀졌습니다. . . ”
“광주사태가 종결된 후도 손성모는 월북하지 않고 암약하다가 1981년에 체포가 된 겁니다. 우리 군 정부 당국에 체포가 돼서 감옥으로 갔고, 거기에서 아주 오랫동안, 거의 뭐 19년 동안 복역을 하다가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에 김대중이 비전향 장기수들을 대거 북한으로 송환될 때 이 공작원도 북으로 송환을 시켜버렸습니다. . 당시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들은 대체로 30년 이상 복역했지만, 손성모는 19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만 감옥에 있었습니다. . .북으로 간 이 사람은 북한 최고 명예라 하는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접견하고 국기훈장 1급을 비롯한 많은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 ”
실제로 손성모는 광주현장 사진들 여러 장면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안찬일이 밝힌 손성모의 이력은 모두 사실이다. 손성모는 1981년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체포되어 1999년 까지 수감되어 있다가 김대중 정부의 특사로 석방되었고 2000년 6.15남북공동성명 이후 비 전향 장기수로 다른 장기수들과 함께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1980년대 초 남파되어 잠복 중이던 간첩 손성모는 5.18광주사태 당시 남파되었던 북한 특수 군의 길 안내자로 활약하였다. 1981년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체포되어 1999년 까지 수감되어 있다가 김대중 정부의 특사로 석방되었고 2000년 6.15남북공동성명 이후 비 전향 장기수로 다른 장기수들과 함께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손성모는 1981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사건번호는 서울고등법원, 1988.7.20. 선고 88노1367 판결, 대법원 1988.10.25. 선고 88도1568 판결이다.
실제로 손성모는 광주현장 사진들 여러 장면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원조빨치산 박현채와 비전향 장기수 류낙진의 딸 류소영이 모두 증심사에서 공작을 했다. 4월19일 류낙진의 딸 류소영 주도로 조선대 운동권 전체 비상회의가 증심사에서 열렸다. 그날 예정된 강사가 바로 원조 빨치산 박현채였다. 그런데도 재판기록에 나타난 혐의는 오로지 손성모가 1980년 5월 7일부터 광주 증심사에서 승려로 신분을 위장하고 사찰의 위치 및 정황, 주지들 및 승려들의 신원, 경찰의 검문 사항, 광주사태와 관련한 민심동향 등을 지득하여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하였다는 혐의에 국한돼 있다. 당시의 검찰과 법원은 5.18을 대공용의선 상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오로지 사찰 정보와 지리와 민심에 대한 정보를 조직적으로 탐지하였다는 혐의까지만 밝혀냈다. 당시의 검찰이나 판사들은 5.18과 북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1980년 당시는 대북 경각심이 역사상 최고조에 달해 있었던 반공의 시절이었다. 모두가 “때려잡자 공산당”, “무찌르자 공산당”,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 하고 외쳤다. 이수근과 신중철을 전국으로 순회시키면서 반공교육을 했다. 간첩 드라마도 열심히 만들어 방송했다. 1980년 초에는 북괴가 대규모 게릴라부대를 침투시켜 전국 봉기를 유발시킨 후 신의주에서 대기하는 10만 인민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첩보도 받았다. 1980년 5월 23일에는 돈, 독침, 권총, 난수표 등을 소지하고 광주로 침투하는 간첩 이창용도 검거했다.
그런데도 증심사를 본거지로 하여 빨치산 박현채 및 그 수족들과 함께 북괴의 5.18 작전 중 광주의 역할을 기획했던 핵심 간첩을 잡아놓고도 당시의 보안사, 중정 그리고 공안검사들이 이를 5.18과 연계시키지 못한 것이다. 공안검사? 그 대표적 인물이 황교안이다. 황교안은 당 대표 시절, 빨치산의 원조이지 증심사에서 활동한 박현채의 꼬붕 김현장을 수석특보로 껴안으면서 5.18에 충성맹세를 했다. 심지어는 5공의 핵심 인물들도 5.18의 대공 용의점에 대해 착안하지 못했다. “광주에서 고정간첩들이 활동했다는 것까지는 인정하는데 북한이 특수군을 600명씩이나 남파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발언은 좌익들은 물론 우익에서 저자를 폄훼하려 드는 사람들에게 저자를 공격하게 하는 화살로 작용해 왔다.
2022.1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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