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68)] 지만원 족적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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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4-26 15:16 조회4,65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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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메시지(68)] 지만원 족적 1~6
① 나의 족적은 인간 상상력 밖에 있다 ② 신체검사에 두 번이나 불합격했는데도 육사생 ③ 자습시간 70%를 독서에 ④ 병사들에 물어가면서 병사 지휘 ⑤ 복종이냐 정의나, 하극상 ⑥ 포탄에 눈을 달다 ⑦ 정인숙과 정일권 ⑧ 담배의 애교 ⑨ 불리한 위치에서 베트콩 제압 ⑩ 29세 포대장 시절이 내 인생의 꽃 ⑪ 유학의 전설 ⑫ 중앙정보부 1년 ⑬ 국법연구원 6년 ⑭ F/A-18을 F-16으로 바꿔 ⑮ 장관자리, 전국구자리, F-16사업권 사양
⑯ 결론 ① 나의 족적은 인간의 상상력 밖에 있다 “하늘의 연자매는 느리게 돌지만 가루는 아주 곱다”. 워즈워스 롱펠로의 표현이다. 시간이 걸려도 신의 섭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나는 신만이 아는 그림을 내 인생 캔버스에 그려왔다. 내가 그린 그림은 거의가 다 사람들의 상상 밖에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 족적을 그들의 상상력 안에서만 해석하려든다. 때문에 나에 대해서는 하늘만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 일부를 간추려본다. ② 신체검사에 두 번이나 불합격했는데도 육사생 1962년 사관학교에 가고싶어서 신체검사를 했다. 키가 모자란다며 하사관이 불합격도장을 찍었다. 앞이 캄캄했지만 검사장을 나와 밖에 벗어놓았던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대로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옷을 입은 채 검사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키를 다시 재달라고 졸랐다. “키가 2-3미리 모자란다고 장교되지 말란 법 있느냐, 강감찬 장군도 키가 작지 않느냐” 하사관은 들은 척도 않고, 서류를 싸고 있었다. 이때 심판관이라는 완장을 찬 미남 소령이 걸어오더니 하사관에게 명령했다. “이 아이 키 다시 재라.” 구두를 벗고 신장계에 올라가려 하자 소령은 “구두를 신고 재” 하고 명령했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필기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필기시험을 치르는 날 아침 나는 용두동에서 경복고등학교 시험장에 가려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 안에서 갑자기 위경련이 발생해 데굴데굴 구를 지경이 됐다. 결혼한 형이 용두동에 세를 들어 살았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좌측방에는 안집이 살고, 우측방에는 형이 살았다. 밑이 숭숭 뚫린 나무마루, 얇은 천으로 둥그렇게 둘러진 옹색한 공간에서 잤으니 몸이 얼어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홍시가 한 개 눈에 띄기에 그걸 먹었다. 언 몸에 언 홍시를 먹은 것이 탈을 일으킨 것이다. 배를 움켜쥐고 광화문 사거리에서 내려 병원을 찾으니 이른 새벽에 문을 연 병원이 없었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경복고로 갔는데 배가 꼿꼿하고 머리가 아파 시험을 본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하필이면 첫날 시험이 내가 잘하는 수학과 물리였다.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시험을 보기는 했다. 이튿날 또 나머지 과목들을 보기는 했지만 나는 하늘이 나를 육사에 보내실 마음이 없는가보다며 낙담하고 비관했다. 그리고 그 추운 마루바닥에서 며칠 지내다가 독감이 들어 일주일동안 해골이 됐다. 그런데 이 웬일인가? 대문에 우체부가 오더니 합격통지서를 전해주는 것이 아닌가. 다음 다음날인가? 육사에 체력검정을 받으러 갔다. 눈이 퀭해가지고. 또 다시 키를 재려했다. 그런데 체력검정에 동원된 하사관들이 “빨리빨리 해, 시간없어” 하면서 서둘렀다. 바로 내 앞에 있던 청년은 키에 불합격되어 울상이 돼 있었다. 내가 또 키를 재려 신발을 벗으려는데 이 웬일인가. 하사관이 나를 체중계 쪽으로 밀었다. 아마도 구두를 신고 잰 키 기록이 넉넉해서 다시 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지옥의 문을 순간적으로 모면한 듯 얼떨떨했다. 몸무게를 쟀다. 턱없이 부족했다. 하사관은 기계처럼 불합격 도장을 찍어버렸다. 그리고 나를 밀면서 집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울먹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키가 작고 똥똥하신 대령이 나타났다. 울먹이는 나를 보시더니 “야, 이 애 왜 울먹이냐?” 하사관에게 물었다. “예. 체중미달입니다” “그래? 이놈 카드 따로 빼놔라. 내가 물 좀 먹여갖고 다시 올게” 그는 옆방 치과의사 사무실에 놓여있는 주전자를 들고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 주전자에 물을 담아 나에게 다 마시라 했다. 마시고 또 마셨다. “이제 더 안들어가는데요~” “그래? 이리와” 나를 체중계 위로 밀었다. 아직도 한참 모자랐다. 다시 화장실로 데려갔다. “네 놈은 이 물을 다 마셔야해” 마시고 또 마셨다. “더는 못마시겠는데요~” 그는 이러기를 4차례나 반복했다. 그래도 모자랐다. 그러자 그 하사관은 하늘같이 높은 대령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는지 “대령님 이제 됐습니다. 그만 하십시오” 그리고 불합격 도장을 정정하여 합격 도장을 찍어주었다. 육사 지구병원에서 육사 화랑연병장까지 10분정도 걸어갔다.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배에서 출렁소리가 났다. 이 배를 가지고 2km를 빨리 뛰려면 분명 창자가 꼿꼿해져 주저앉을 것 같았다. 초등학교 다닐 때 손기정이 되겠다며 뛰다가 냇물에 엎드려 물을 마시고나면 곧 배가 꼿꼿해져서 뛸수 없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배를 안으로 바짝 당기고 살을 계속 꼬집어가면서 뛰었다. 배가 참아주는 것은 곧 기적이었다. 여기까지의 나의 족적을 내 나이에 밟은 사람은 나 말고는 없을 것이다. 고통과 찬스를 동시에 주시는 하늘의 손길이 있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기적이었다. 하늘이 소령님을 움직였고, 대령님을 움직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상상속에 있을 수 없는 스토리가 내게만 있었던 것이다. ③ 자습시간 70%를 독서에 “여러분은 지금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나이에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슴에는 하얀 백지가 들어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백지에 무슨 그림을 그리는가에 따라 여러분들의 인격과 포부가 달라집니다. 점수 따려고 귀중한 젊음을 낭비하지 마세요. 성능이 증명된 고전과 철학서를 읽으세요. 그리고 살아있는 백과사전이 되십시오.” 나보다 사관학교 9년 선배가 세계사 시간에 해준 말씀이었다. 그 말씀이 내 가슴을 움직였다. 토요일이면 동기생들은 외출-외박 채비를 신나게 했다. 하지만 나는 도서관으로 신나게 달렸다. 책을 고르는 데 2~3시간을 썼다. 주말에는 적막감마저 감도는 육사 캠퍼스에 나 혼자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매일 주어진 자습시간은 2시간, 동기생들이 학과 과목을 공부할 때 나는 고전소설, 위인전, 철학서적들을 읽었다. 자습시간의 70%정도를 독서에 할애했다. 수학계통의 학과들은 예제만 풀어도 좋은 점수가 나왔다. 나는 중고등학교를, 그것도 야간을 다니다 말다 하면서 주로 독학에 의존했다. 그 독학실력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나의 응용능력은 중고등학교 6년동안, 그리고 재수1년 동안에 길러진 것이다. 독서의 방법도 특이했다. 매 10페이지를 읽으면 책을 덮고, 이 10페이지에서 저자가 내게 무엇을 전달하려 했는가에 대해 상상을 했다. 그리고 대각선으로 그 10쪽을 다시 훑어본 후 내용과 느낀점을 메모했다. 나의 글쓰기 능력은 그리고 요약능력은 바로 이 과정에서 길러졌을 것이다. 독서에 대한 나의 열정, 독서하는 방법, 독서를 통해 나의 글쓰기 능력을 훈련하는 방법 역시 당대의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 범위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내 가슴에는 점수나 출세가 자리한 것이 아니라 호연지기와 시심이 길러졌을 것이다. ④ 병사들에게 물어가면서 병사들 지휘 양평과 여주 사이, 32사 298포병대대가 내 첫 부임부대였다. 제2포대 포대장이 스케이트를 타다가 골절이 발생해 내가 포대장 임무를 대신했다. 매일 퇴근시간이 임박하면 대대장이 꼭 회의를 소집했다. 나는 신참 소위 입장에서 대대장실로 올라갔다. 대위들 틈에 앉아 대대장님이 지시하는 내용을 열심히 적었다. 적으면서 다른 대위들은 상을 많이 찡그렸다. 퇴근도 못하고 일거리에 잡혀있어야 한다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대위들이 상을 찡그리는 동안 나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답답한 쪽은 대대장님이었다. “지소위” “네” “지시사항 다 할수 있어?” “네, 문제없습니다” 뭔지도 모르면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답했다. 아마 대대장님은 내가 사리분간을 잘 못해서 저리도 순진하게 생글댄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나는 포대로 돌아와 병장들과 하사관들을 난로가에 불러 앉힌 후, “나는 육사를 나왔지만 책만 가지고 수학문제만 풀다 왔지, 군 실무를 통 몰라요. 대대장님 지시사항을 통 이해할 수가 없으니 좀 알려주세요” 하나하나 지시사항을 나열할 때마다 그들은 “문제없습니다. 그건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됩니다” 그들은 나를 가르쳐주면서 행복해했다. 나는 대위들이 이끄는 포대들보다 더 말끔히 대대장님 지시를 이행했다. 나를 예쁘게 보신 대대장님은 일주일에 한 두 차례 나를 태우고 퇴근하셨다. 이웃가게에서 2홉들이 소주를 한 병 사서 반주로 똑같이 나누어 마셨다. 그리고 1호차로 나를 숙소에까지 태워주도록 배려하셨다. 장교 신분에 나처럼 톡 까놓고 분대장들에게 내가 모르고 있는 분야를 털어놓고 그들의 도움을 받는 장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병사를 낮은 사람, 나를 높은 사람이라고 의식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병사들에 의지했고, 병사들은 나를 극진히 위해주었다. ⑤ 복종이냐, 정의냐, 하극상 한창 근무가 재미있어질 때 나이 많은 상사와 중사 몇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언덕 위에 따로 지어진 초라한 토담집, px로 모시고 싶다고 했다. 여러 달 부대생활을 했어도 그 px 건물을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술이 거나할 무렵 그들은 대대 작전과장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작전과장은 키가 작고 땅땅한 고참 대위였는데 부대 내에서 평판이 아주 나쁘게 나 있었다. 한겨울 강가의 자갈밭에 포를 끌고 가서 훈련을 하고 있었던 어느 날, 훈련을 관장하는 작전과장이 추위에 고생하는 하사관들을 위로하고 격려해도 부족할 판에, 마치 람보처럼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고 다녔다. 나이든 중사 상사들이 옷을 걷어 올리기도 하고 바짓가랑이를 올려가면서 멍이 든 부분들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때린 이유는 술, 과자, 고기를 상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판이 매우 나쁜 사람으로 알려져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의협심이 발동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작전과장 집으로 향했다. 하사관들이 뒤를 따랐다. 그의 오두막집은 산 모퉁이를 돌아가는 외길 소로 옆에 지어져 있었다. 봉당에는 목이 꺾어진 군화와 빨간 하이힐이 놓여져 있었다. 안에서는 교태 있는 여성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과장님 계십니까?” 성질 급하기로 소문난 그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 개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찾아와” 하면서 문을 염과 동시에 내 뺨을 후려갈겼다. 그와 나는 순간적으로 뒤엉켰다. 가파른 언덕을 부등켜 안고 굴렀다. 그도 나도 며칠동안 출근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멍이 많이 들어 설치고 다닐 수가 없었다. 소문이 퍼져 면목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단 헌병대에 나를 고소했다. 하극상이었다. 하극상은 제대와 동시에 감옥행이었다. 사단 헌병대장은 헌병참모를 겸하고 있었다. 그 헌병참모는 당시 고참 소령이었다. 그는 나에게 출근 전인 새벽에 헌병참모 관사로 오라고 했다. 찾아갔더니 그는 나를 인자한 얼굴로 대했다. 귀신에 홀린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들어서자마자 혼이 날 줄 알고 왔는데, 이 웬일인가 싶었다. 그는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자네 하극상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아는가? 기껏 사관학교 졸업해가지고 이런 일에 장래를 망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나? 그 작전과장에 대한 부대 내 평판이 매우 나쁘더구나. 젊은 혈기에 한번쯤 있을 수는 있겠더라. 자네 대대장님이 자네를 무척 사랑하고 아끼시더구나. 장래가 촉망되는 똑똑하고 성실하고 마음씨 착한 장교이니 제발 이번 한번만 봐달라고 신신당부하시더구나. 앞으로는 조심하게. 없던 일로 해 주겠네. 이만 가보게.” 내가 지휘하던 2중대(포병중대)에는 같은 해에 임관한 ROTC 4기생이 두 명 있었다. 한 사람은 백소위, 그는 출근하면 잠시 난로가에 앉았다가 어디로 가는지 하루종일 보이지 않았고 토요일에 서울로 외박을 나가면 2-3주는 출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함흥소위’라 불렀다. 또 한 사람 유소위, 그는 전주가 고향인데 하루종일 난로만 끼고 있다가 보고할 게 있다고 반장들이 들어오면 귀찮다며 무조건 나가라고 소리쳤다. “꼭 보고해야 할 게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온갖 쌍욕을 하면서 난로가에 있던 장작나무를 집어던졌다. 포대 내에 그에 대한 불만이 최고조에 달하자 한 착실한 하사가 술을 먹고 그를 쏘아죽이겠다고 난동을 부렸다. 또 다른 김소위는 작전과장 집에 토끼를 길러주고 선물을 해 주면서 그의 세도 밑에서 안주했다. 결국 작전과장은 다른 부대로 갔고, 나는 공수낙하훈련 받으러 가다가 기차 안에서 만난 부대원으로부터 월남 파병명령이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육군본부에 가서 명령을 확인한 후 베트남으로 떠났다. 베트남, 투이호아에는 백마사단 제28연대가 광범위한 작전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죽지 않으면 불구가 된다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1년 동안 산악 정글작전에 투입됐다. 체구도 작은 소위가 연대에서 아니 주월사령부에서 전과가 가장 높은 3중대 관측장교를 하다가 수색중대가 작전을 나가면 수색대와 함께 작전을 나가다보니 체중이 47kg로 줄었다. 몇 개월 전에 부임한 대대장님이 “저 아이 죽이겠다”며 3개월짜리 월남어 교육대에 보내주었다. 헬기로 40분 거리에 있는 사단사령부 영내에서 교육받는 도중 중위로 진급됐다. 대대장님은 L-19정찰기를 조종하는 대위에게 중위 계급장을 들려 나에게 날아와 계급장을 달아주게 하였다. 교육이 끝나자 나는 대대화력통제 장교로 보직되어 밤낮으로 벙커근무를 했다. 나의 직속상관은 고참 소령 작전과장이었다. 어느날 미군 중령이 상황실을 찾아와 부탁을 했다. 헬리콥터로 포를 날라 정글 속에서 포를 쏠 수 있는 방안을 장군에게 시범을 보여주고 싶으니 포1문을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대대장님의 지시로 내가 포차를 인솔하여 미군 비행장 모래밭으로 나갔다. 트럭 위 병사 9명을 태우고 포를 끌고 갔다. 살이 찌고 배가 출렁거리는 미군 소령이 나왔다. 그는 나에게 병사들을 차에서 내리게 하여 자기 앞에 일렬로 세우라고 했다. 빈정이 상한 나는 정중한 언어로 물었다. “어려운 질문이지만 왜 그래야하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나의 깍듯한 정중함에 대해 그는 둔탁한 언어로 ‘검열(Inspection)’을 하겠다고 했다. 기분이 매우 상했다. “나는 당신 대대장의 요청으로 도움을 주러왔지 당신에게 검열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이 말에 기분이 상한 그는 나에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며 무조건 명령에 복종하라고 했다. 나는 “너하고는 더 이상의 비즈니스가 없으니 돌아가겠다”고 맞섰다. 그가 폭발했다. “나는 한국에 오랫동안 고문관으로 있었다. 장군들도 다 내 말에 복종했다. 너 정신이 없구나, 너 처벌받을래?” 나는 매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에게 말했다. “야, 이 정신없는 인간이 우리와 한국군 전체를 얕보고 모욕하고 있다. 도와주려고 왔는데 내려서 검열을 받으라고 협박을 한다. 순식간에 사격준비를 해서 명령 없이 이자의 발 밑에 조준사격을 해. 어서” 바닥이 콩크리트가 아니라 모래사장이기 때문에 총알은 모래에 꽂혔다. 그 자는 체면이고 뭐고 줄행랑을 쳤다. 지프차도 버리고 도망을 가는 그에 대고 병사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부대에 돌아오니 소령과장은 왜 빨리왔느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말해드렸다. 그러자 그 소령은 “자네 제대하게 생겼네. 어찌하려고 그 엄청난 사고를 쳤느냐, 자네 미군의 위력을 전혀 모르는구먼” 겁을 주면서 힐난했다. “제가 다 당할테니까 그만 고정하십시오” 다음날 미군 중령 대대장이 조그만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그는 어제 소령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사과를 하러 왔다고 했다. 그 소령은 일을 망쳤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전근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상황실에 미군 병장을 파견할테니 이후에 한국포병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겠냐고 했다. 그 병장은 늘 상황실에서 내 옆을 지켰다. 나는 외톨박이 고학생으로 전전하다 어쩌다 운이 좋아 육사를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졸업이 내게 달린 유일한 스펙이었다. 그런데 무슨 배경이 있다고 함부로 하극상을 두 번이나 범했겠는가? 불의나 부당함을 보면 의기가 솟구치고, 의기가 솟구치면 내 자신의 안녕은 망각의 장으로 증발해버렸다. 그것이 나의 DNA였다. 그런데도 옆에는 늘 나를 지켜주는 신이 있었다. ⑥ 포탄에 눈을 달다 상황실에는 매일 미군 및 한국군으로부터 많은 정보자료가 접수됐다. 교전 정보, 관측한 정보, 암모니아 가스 분포정보 등이었고 정보 신뢰성에 따라 A급, B급, C급 정보로 분류돼 접수됐다.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정보는 암모니아 가스의 분포정보였다. 비행기가 날면서 암모니아 가스를 측정한 것인데 대부분의 상황장교들은 산짐승의 분포도일 것이라며 편한대로 생각해 버렸다. 그런데 나는 이를 중시했다. 소위때였다. 밀림으로 덮힌 산자락을 따라 커다란 냇물이 굽어 흘렀다. 강으로부터 대나무 밭이 넓게 펼쳐진 곳에서 암모니아 가스가 집중 분출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보병대대 병력이 출동해 여러 날 동안 텐트를 치고 깔고 앉아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베트콩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대나무 사이사이로 소로가 나 있었고, 그 소로를 따라 우리 병사들이 이리저리 이동을 했다. 지휘관들은 허탕을 쳤다며 실망하고는 곧 철수할 것이라고 했다. 장대비가 쏟아졌다. 개인 텐트를 치고 밖을 내다보던 병사들의 눈에 10m앞 대나무 숲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이 포착됐다. “야, 저 땅속에 베트콩 있다” 땅굴 구멍에 수류탄을 집어넣자 순식간에 베트콩들이 분출돼 나왔다. 강물이 핏물이 되었다. 이것을 기억하는 나는 암모니아 분포 정보를 매우 귀하게 여겼다. 다른 상황장교들은 A급이건 C급이건, 그냥 훑어보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매일같이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정보자료를 병사가 받아 적지만, 장교는 쓰윽 훑어보고는 귀찮다는 자세로 덮어버렸다. 나는 이 자료를 적극 활용할 생각을 했다. 똑같은 지도로 상황판을 세 개 만들었다. 낮 상황판, 저녁 상황판, 새벽 상황판이었다. 병사가 정보를 전화로 받아 적으면, 즉시 해당 시간에 해당하는 지도에 점을 찍으라했다. A급은 붉은색, B급은 노란색, C급은 검은색, 이렇게 표식을 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각 상황판에는 트렌드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표적들에 가까이 있는 포대별로 시간별 사격표를 만들어 발사토록 했다. 여러 달 후 베트콩에서 노획된 자료에는 “한국 포에는 눈이 달렸다”는 문구가 나왔다. 수많은 장교들이 파병되어 나와 같은 사격지휘 장교직에 있었겠지만 나와 같은 발상을 한 장교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 다음편에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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