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박사학위가 보통 박사와 다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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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5-11-09 20:56 조회74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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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박사학위가 보통박사와 다른 점
나는 어려서부터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했다. “건달은 낮에 비단 옷을 입지만 선비는 밤에 비단옷을 입는단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초등생 때 들은 이후 줄곧 나를 자랑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5.18의 진실을 살리기 위해 꼭 중요한 것들만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나를 위한 위로곡] 의 극히 일부다. 내 자존심에는 같은 박사학위를 받았다 해도 그들과 나 사이에는 기량과 내공에 천지 차이가 있다고 각인돼 있다.
응용수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따는 것도 낙타의 바늘구멍에 비유된다. 이를 훨씬 더 뛰어넘어 수학공식과 수학정리를 8개씩이나 발명하고 미 해군 항공모함이 작전을 나갈 때 창고에 적재해야 할 수리부품 적정량을 계산하는 매머드급 알고리즘을 발명하는 정도의 학자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내 교수 역시 그런 말을 해주었다. 내가 왜 이런 것을 빍히느냐 하면 좌익도 우익도 판사들도 다 나도 “그렇고 그런 박사급이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에 내 글과 책을 읽으려 하지 않고 과소평가로 선입견부터 갖기 때문이다.
1. 나의 학위
2. 논문의 생김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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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details/mathematicalmode00jeem
https://archive.org/details/mathematicalmode00jeempdf
3. 세계적인 귀족학교의 전설이 된 한국장교
나는 1966년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대위시절에 베트남 전쟁터에 가서 4년 동안 게릴라전투를 하였다. 대위 때인 33살에 미국에 유학하여, 미 해군대학원 창설 이래 최고의 천재로 인정받고, 그 학교에서 3년 동안 교수로 봉직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전설화되어 있을 만큼 국위를 선양했던 사람이다. 내가 발명한 수학공식과 수학정리 그리고 수학모델에는 JEE MODEL, JEE FORMULA, JEE ALGORITHM이라는 대명사로 인용되고 있다. 시스템공학은 100% 응용수학으로 미국 사회에서는 물리학과 함께 그 난이도가 낙타의 바늘구멍으로 비유되는 고난도 학문인 것으로 인식돼 있으며, 고단위 몰두 과정을 필요로 하는 학문이다. 내가 나온 학교는 한국에서 미 해군사관학교 정도로 알려져 있다만, 학비가 하버드의 2.5배나 되는 귀족학교다. 옛날 영국 등에서 왕세자 정도나 받을 수 있는 고급대접을 받았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교수를 따로 만나 공부활 수 있었고, 20명 단위로 운영되는 교실에서 제공되지 않는 높은 급수의 과목을 1:1의 학습체제로 공부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귀족학교였다, 오로지 그 학교에서는 희귀한 박사급 학생이었디. 삭사가 박사로 진입하려면 4점 만점에 3.8을 해야 했고, 석사논문에 엑셀런트 마크를 받아야 하고, 5명의 교수로부터 추천을 받아야만 했다. 동양인으로서는 내가 지금까지도 유일했고, 더구나 문과인 경영학 석사가 박사학위로 전환한 예는 지금까지도 내가 유일하다. 그래서 그 학교에서는 내가 전설이다.
참고로 미국은 해군의 나라다. 미국이 세계를 통제하는 힘은 해군력에서 나온다,. 국방예산의 60%를 해군이 차지한다. 각군 중에서 과학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고 예산이 많기 때문에 해군대학원을 세워 미국의 육해공군 해병대 장교들과 소수의 연합국 장교를 선발하여 스파르타식으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게 한다.
4. 전투 마니어에서 학위과정으로 유학
베트남 전쟁터에서 4년 동안 게릴라 전투를 했기 때문에, 나는 5.18작전 상황일지를 보자마자 5.18이 게릴라전이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전쟁터에서 몸을 굴리던 초급장교가 어떻게 곧바로 전군에서 1명만 선발하는 유학시험에 합격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도 전설이었다. 나는 정글을 기어 다니면서도 늘 철모 밑에 영문 단편소설들을 넣고 다니면서 영어와 친숙해졌다. 귀국해서는 영자신문을 통해 영어를 가까이 하였다. 그래서 유학시험에서 100점 만점에 97점을 딸 수 있었고, 이 사실 역시 군 유학시험 역사에서 전설이 되어있다. 이런 집요함과 성실함으로 인해 유학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미 해군대학원 창설 이래 최고의 천재로 전설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5. 한국군에서의 공로
중령으로 국방연구원에서 근무했던 1982년, 미국에서는 국가기관의 예산-회계 개혁을 대통령실에서 기획하고 지휘했지만, 한국군에서는 육군중령에 불과했던 내가 연구해서 윤성민 국방장관을 움직이고 대통령을 움직여 5년 동안 한국군 역사에서 전무후무하게 자원관리 시스템을 설치하는 개혁을 진행하였다. 모든 사단에는 편제에 없던 자원관리참모부가 신설되었고, 사단마다 대형전산기가 들어갔고, 회계사와 전산요원들이 대거 충원되었다. 자유재로 인식되었던 군수물자에 대한 회계가 이루어지고, 장군에서 병사에 이르기까지 비용의식이 고취되었다. 시스템혁명이고 의식혁명이었다. 육해공군 모두에서 지만원은 전설이었다.
6. 민간신분으로 국가에 기여할 것들
대령으로 예편하고 미 해군대학원에서 3년 동안 교수로 봉직한 후 돌아와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라는 처녀작을 냈다. 베스트 1위를 연속 7주 동안 하였다. 이로 인해 장막 뒤에서 행해졌던 군사 비리가 모든 국민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신바람운동과 의식개혁운동에 올인 하던 김영삼 시절, 나는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라는 책을 내서 사회개혁의 시각을 ‘신바람-의식개혁’에서 ‘시스템개선’ 쪽으로 전환시켰다. 시스템이라는 낱말을 몰라 했던 1993년, 나는 KBS에 출연하여 ‘은행객장의 순번대기 번호표 장치’가 곧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질서가 유지되도록 설치하는 장치를 말한다‘ 이렇게 알려주었다. 이후 나는 시스템 전도사로 이름을 날렸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도 나로부터 촉발되었다. 사관학교 신체검사 때, 키가 모자라 불합격되었을 때 낯선 소령이 심판관 완장을 차고 나타나 구두를 신고 키를 재게 해주었고, 몸무게가 모자라 불합격 받았을 때 그 자리에는 나타날 수 없었던 대령님이 나타나 물을 먹여 합격시켜주셨다. 이런 저런 기적들이 [뚝섬무지개]라는 나의 일대기에 기록돼 있었고, 이 책을 읽은 김상근 KBS부장이 소령님, 대령님, 육사교수님, 베트남 대대장님을 몰래 수배하여 서프라이즈 프로를 만든 것이 오늘의 ’TV는 사랑을 싣고‘의 발원이었다. 나는 1990년대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샛별, 장안의 지가를 높인 필력이라는 말로 형용되었고, 대기업과 장부기관을 상대로 시스템 강연을 다녔다. 국가경영, 정부정책, 군사평론 분야에서는 나의 의견이 곧 답이었다. 당시 여당과 야당에서 공히 전국구 자리, 장관자리를 제안했지만 나는 모두 사양했다.
7. F/A18을 F-16으로 바꾸는데 핵심 역할
군의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힌 채무자는 대령으로 예편을 하였지만 곧바로 미 국방부의 초대로 미 해군대학원 교수로 봉직할 수 있었다. 노태우 정부시절, 공군은 해군기종인 F/A-18을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했다. 이에 민간인 신분인 나는 “군은 전투기 대수(number)를 사는 것이 아니라 체공시간(time in the air)을 사는 것”이라는 논리로 기종을 F-16으로 바꾸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F-16제작사에서 사업권을 준다 했지만 사양했다. 군사평론에 대해 업체로부터 보상을 받는 것이 불명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제작사 간부가 땅에 엎드려 나에게 큰 절을 했다. F-16 제작사 경영진은 나를 제조공장으로 초청해 공장을 견학시켜 주는 것으로 감사의 예를 표했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쓰는 [인물과 사상] 제11권(2000년)이 위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아래 사진은 내가 F-16 자작사인 GD(General Dynamics)사로부터 국빈급으로 초대받아 공장을 견학했을 때 촬영한 사진의 일부를 [구글 이미지]에서 오린 것이다.
내가 구태여 ‘자랑으로 비칠 수 있는 경력’의 일부를 공연히 밝히는 것은 이 정도의 재목(Caliber)이니까 그 방대한 수사기록, 위험한 수사기록을 정복할 결심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어필하고 싶어서다. 5.18연구는 쥐나 소나 연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어필하고. 아울러 광주가 몰아붙이듯, 어느 한 소영웅심을 가진 존재가 순간적 충동에 의해 희떱게 한번 써 본 책이 아니라는 점을 어필하고 싶어서다. 이러한 커리어를 가진 공적 존재가 단지 5.18을 연구했다는 이유 하나로 이 나라의 대표적인 극우 또라이로 조롱당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전두환 대통령 시대의 정보기관이 가장 방대했다. 그때에도 눈치 채지 못한 북한군 개입을 40여 년이 지난 지금, 단 한 사람의 자연인이 무슨 수로 새로운 정보를 찾아낼 수 있겠느냐?” 이 말 속에는 나의 능력과 경력을 은근히 무시하는 정서가 들어 있다. 아마도 사법부의 법관들께서도 같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문적 진실은 수억만의 상식인들이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과학자가 찾아낸다. 수억만 명의 인구가 지구를 거쳐 갔지만 오로지 1600년대의 뉴턴만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중력의 초당 가속도가 980cm라는 사실도 찾아냈다. 그는 또 하얗게 만 보이는 햇빛이 ‘보남파초노주빨’이라는 7색으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처럼 늘 새로운 것은 다수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한 사람이 발견한다. 천동설이 상식이었던 시대에 지동설을 발견해 낸 존재도 수억만의 다수가 아니라 갈릴레이라는 한 사람의 과학자였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철기시대의 아프리카 종족처럼 자기들과 닮지 않은 사람을 교수목(hanging tree)에 매달기 부터 한다. 중세의 종교 권력이 지동설을 발견한 갈릴레이를 탄압했던 것처럼 새로운 발견을 탄압하고 있다.
2025.11.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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