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소설] 전두환 (5) - 10.26 (Ⅰ)(수정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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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1-04 14:53 조회32,64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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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소설] 전두환 (5) - 10.26 (Ⅰ)
<10.26>
미국의 원조시대
1956년부터 ‘박정희가 집권하기 시작한 1962년’까지 7년 동안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연평균 5억 달러어치의 원조를 받았다. 경제원조가 2.8억 달러, 군사원조가 2.2억 달러였다. 경제원조는 현금이 아니라 잉여 농산물, 유연탄, 석유였다. 정부는 이를 시장에 내다 팔아 이른바 ‘대충자금’을 만들었고, 이 대충자금이 연간 세출 예산이 되었다. 이에 더해 무역 적자 규모는 연평균 5천만 달러였다. 실업률은 30%인데, 인구 증가율이 2.88%, 매년 72만 명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다. 해가 지날수록 식량이 부족했고 굶는 사람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엔에 등록된 국가 수는 120개국, 인도 다음으로 배를 곯는 국가가 한국이었다. 만일 일본이 남기고 간 철도, 도로, 광산 등 사회 인프라가 없었다면, 그리고 일본이 남기고 간 오늘날의 대기업 전신들마저 없었다면 인도를 대신해 우리나라가 꼴찌였을지 모른다. 당시 태국의 1인당 GNP는 220달러, 필리핀은 170달러, 한국은 68달러였다. 북한은 우리의 2배, 필리핀은 우리의 3배 더 잘 살았다. 오죽하면 장충 체육관을 필리핀이 지어 주었겠는가.
해마다 군사원조를 더 늘려 달라고 애걸하는 장군들, 해마다 민간원조를 더 늘려달라는 고관들은 협상 논리를 개발하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머리들을 짜냈다. 희망은 없고, 배는 고프고, 병은 많이 돌고, 유일한 생명선인 미국의 원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비참한 시절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YH사건(79.8.11)
6.25 전쟁에 실패한 김일성은 4.19 시위를 통해 무정부 사태를 만들어 냈지만, 이를 남침의 기회로 이용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 김일성은 통일의 조건을 세 개로 정의했다. 북조선 역량 강화, 남조선 혁명역량 강화, 해외역량 강화다. 남조선 혁명역량이라는 것이 바로 반국가 세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농민, 무산계급, 도시산업 선교회, 가톨릭 농민회, 학생 클럽, 교수 클럽, 법조 클럽들을 양성하고 배양하는 것이다. 남조선 혁명 역량 강화 사업에는 지금도 쉬는 날이 없다.
1979년 8월 11일, 신민당사에서 YH라는 지퍼 제작사 노동자 200여 명이 폐업을 철회하라며 농성을 했고, 당수인 김영삼이 이를 수용했다. 사건을 직접 주도한 인물은 노조 지장 최순영, 부지부장 이순주, 사무장 백태연이었다. 그런데 이를 배후 조종한 인물들이 놀랍다. 인명진 목사, 문동환 목사, 이문영 교수, 고은 시인 등 8명이었다. 인명진은 누구인가? 국힘당을 손아귀에 넣고 흔들었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문동환은 누구인가? 문익환의 동생으로 민주당에서 5.18을 전두환의 학살 사건으로 몰아갔던 음모론자가 아니었던가. 고은은 누구인가? 별거 아닌 시 가지고 노벨 문학상 후보자입네 하면서 뭇 여성들을 희롱했던 파렴치한 색한이 아니었던가. 신민당사를 농성자들에게 40시간씩이나 내어 준 김영삼, 그 누가 그를 YH 사건의 배후 인물로 낙인찍으려 하지 않았겠는가?
김영삼의 난동
이런 김영삼은 어떻게 해서 신민당 총재가 되었는가? 불법으로 되었다. 이것이 김영삼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1979년 5월 30일은 YH 사건이 발생하기 79여 일 전이었다. 이날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김영삼과 이철승이 겨뤘다. 당시 김영삼은 52세였고, 이철승은 57세. 김영삼은 조리도 없고 내공이 별로 없는 뚝 건달이었지만, 이철승은 조리도 있고 필력도 상당한 지식인 클래스였다. 평소의 지지율은 이철승이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지만, 투표에서는 김영삼이 압도적으로 앞섰다. 이에 조일환 등 신민당 간부 3명이 당선 무효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은 이를 인용해 주었다. 인용한 날이 9월 7일이었다. 김영삼은 자기를 몰아낸 배후자가 박정희 정권이라고 생각했고, 박정희는 YH 사건의 배후자가 김영삼이라고 생각했다. YH 사건이 고약하게 민심을 자극한 것은 공장 여성이 4층에서 떨어져 죽은 것이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증명된 것이 없지만, 이 역시 의문사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총재직에서 물러난 김영삼, 자존심이 극도로 상하고 오기가 하늘에 치달았다. 총재직에서 물러난 지 9일째 되던 9월 16일, 그는 NYT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미국 정부는 한국에 일체의 원조를 중단하고 한국 정부에 민주화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 당시 언론들은 김영삼의 이 발언을 사대주의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김영삼은 언론을 반박했다. “미국은 우리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나라다.” 연이은 이 소아적 발언에 박정희가 노했다. 여당인 공화당도 노했다.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일탈하여 반국가적인 언동을 함으로써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의를 손상시켰다.” 이 여파로 김영삼은 10월 4일부터 의원직까지 박탈당했다.
부마사태
10월 15일, 의원직까지 상실한 김영삼은 그의 정치 본거지인 부산에 내려가 ‘민주 선언문’이라는 전단지를 뿌렸다. 다음날인 16일에 5,000여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17일에는 시민들이 합세해 박정희 타도 반정부시위로 확대했다. “정치 탄압을 중단하라.”, “유신 정권을 몰아내자.”, 파출소, 경찰서, 도청, 세무서, 방송국을 마구 파괴했다. 18일에는 마산과 창원 지역으로 확산됐다. 이에 정부는 18일 0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하여 그중 66명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다. 20일 정오에는 마산, 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3공수 여단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그중 59명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다. 10.26 발생 6일 전의 일이었다.
차지철과 김재규
김재규는 1926년, 안동 출신이다. 박정희 대통령보다 9년 연하였지만 육사 2기 동기로 박정희 그늘에서 출세했다. 마치 노태우가 전두환 그늘에서 큰 것과 같은 케이스였다. 차지철은 5.16 혁명 때 공수부대 대위였고 김재규보다 7년 연하였다. 그런데도 차지철은 대통령의 총애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인 김계원은 1923년생으로, 차지철의 10년 연상이며 육군 참모총장까지 거친 인물이었는데, 차지철은 이러한 김계원까지도 무시했다. 거친 말투에 무시하고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 습관화돼 있었다.
대통령께 보고할 때마다 이 둘은 차지철로부터 감정이 많이 상했다. 차지철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이 날로 불타올랐다. 차지철에 대한 미움과 분노는 그를 맹목적으로 편애하는 대통령에게로 전이됐다. 대통령이 점점 더 미워졌다. 1974년 8월 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저격범 문세광에 의해 사망한 이후부터는 대통령이 그동안 영부인과 함께 지냈던 시간의 상당 부분이 차지철에 의해 경영됐다. 이럴수록 차지철의 행패는 더욱더 목불인견이었다.
운명의 씨앗, 차지철과 박근혜
여기에 더해 김재규 부장은 판단력이 우둔한 편이었다. 눈치 없이 박근혜와 최태민과의 밀회 문제를 자주 보고했다.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은, 국정원 잠복팀이 의협심 반 호기심 반으로 그녀를 밀착 감시하며 보고서를 올리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용들은 국정원 내부에 삽시간에 퍼졌고, 가족들을 통해, 친구를 통해 사회에 전파됐다. 육 여사가 저격당했을 때, 박근혜는 23세였다. 이때부터 파렴치한 전과가 수십 개라는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접근해 신뢰를 독점했다. ‘구국 봉사단’이니, ‘새마음 봉사단’이니 하는 것을 만들어 최태민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따라서 항간에는 아름답지 못한 추문들이 공공연하게 많이 돌았다. 2004년의 주한 미 대사 ‘버시바우’는 위키리크스에 최태민을 러시아 요승 ‘라스푸틴’이라고까지 평가했다. 10·26 이후에도 박근혜는 전두환을 찾아가 최태민과 함께 두 개의 봉사단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의 명예를 위해 최태민을 동해안 부대에 보내 박근혜와의 접촉을 차단시켰다. 이로써 전두환은 박근혜의 영원한 적이 되었다.
흉한 말이 돌 때마다 김재규 부장은 쓴 말을 해야 한다면서 자주 그 보고를 했고, 그럴 때마다 대통령은 짜증을 냈다. “애미 없이 그거라도 마음 붙이고 지내는 가엾은 애를 왜 자꾸 건드리느냐.” 대통령은 점점 외로워졌다. 사적인 대화를 나눌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차지철 실장하나뿐이었다.
게다가 김재규 부장은 그의 형제들이 이권 관련한 비리들을 저질러 대통령으로부터 ‘경고 친서’를 받기까지 했다. ‘경고 친서’는 옳지 못한 일을 한 국가 간부들에 대통령이 친필로 써 보내는 경고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다음 인사이동에서 김재규 부장이 탈락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한마디로 차지철 실장의 행패와 박근혜의 추문을 다스리지 않는 대통령에 대한 김재규 부장과 김계원의 실장의 충성심이 사라지고, 대통령에 대한 불만의 계절이 이어져 온 것이다. 측근 대부분이 박정희 대통령의 적이었던 셈이다.
살육의 현장
1979년 10월 26일 오후 4시, 대통령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마치고 헬기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기체 내에서 차지철 실장이 김재규 부장에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이오? 나 차지철이오. 이따 6시에 각하께서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을 하실 것이니 준비하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 나, 비서실장, 그리고 부장님이요.”
청와대와 담 하나로 분리된 궁정동의 작은 안가, 지금의 국정원 안가는 일급 호텔의 스위트룸만큼 호화롭지만, 궁정동의 대통령 식사 자리는 여염집 안방보다 더 간소하고 초라했다. 식사방과 화장실이 문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제사상과 똑같은 상이 짧은 발발이 다리 위에 얹혀 있었다. 도톰한 방석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식사하는 방이었다. 문갑이 있고, 그 옆에는 자그마한 흑백 TV가 놓여 있었다.
반말 정도로 들리는 차지철 실장의 전화를 받은 김재규 부장은 기분이 상했다. 식당 관리를 하는 해병 대령 박선호에게 식사 준비를 시킨 후 곧장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에 전화를 걸었다. “바로 오늘”이라는 결심이 선 것이다.
“정 총장, 나요.”
“네 네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저녁 좀 만났으면 하오. 궁정동 안가 알지요?”
“네, 부장님.”
“8시 30분까지 궁정동 본관으로 와 주시오.”
“네 알겠습니다, 부장님.” 1979년 10월 26일 오후 4시 15분이었다.
한편 박선호 대령은 부리나케 심수봉과 신재순을 섭외했다. 심수봉은 당시 ‘그때 그 사람’을 불러 인기가 많이 올라가 있는 24세의 가수로 명지대 경영학과에 적을 두고 있었고, 신재순은 광고 모델로 한양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김재규 부장은 정승화 총장에 이어 김계원 비서실장에 전화를 걸어 빨리 만나자고 했지만, 김계원은 5시 40분에야 안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안가의 뜰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얼마나 안가가 초라했으면 이렇게 지체 높은 거물들이 쪼그려 앉아 막대기로 땅바닥에 글씨를 쓰고 있었겠는가.
김계원 비서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쪼르르 각하한테 보고해서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야.”
비서실장 김계원이 경호실장 차지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이 말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내심을 털어놓았다.
“형님. 이놈, 오늘 제가 해치우겠습니다. 뒷일을 형님이 책임져 주시오.”
김계원 비서실장, 마치 간절히 바라던 말을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 역시 대통령의 면전에서도 차지철로부터 자주 면박을 받았기 때문에 그 수모감이 극도에 올라 있었다. 상층 세계의 본질을 뚫고 있는 김계원 실장이 김재규가 차지철 실장을 해치우겠다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각하를 함께 시해하고, 김재규의 주도하에 새 시대를 열어 가겠구나. 김재규가 그 준비를 다 마쳤구나.’ 이런 뜻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뒷일이 무슨 일인지에 대해서도 짐작 했을 것이다. 이정도의 직감이 없는 사람이 육군 총장을 하고, 대통령 비서실장을 할 수는 없었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6시 05분, 대통령과 차지철이 안가에 도착했다. 대통령은 출입문을 마주 보고 방석 위에 앉았고, 그 오른쪽에는 신재순이, 그 왼쪽에는 심수봉이 앉았고, 심수봉 쪽 문갑에는 기타가 기대져 있었다. 출입문 쪽에는 대통령과 마주한 자리에 김재규가, 심수봉과 마주한 자리에는 김계원이, 좌측 모서리에는 차지철이 앉았고, 차지철의 등 뒤에는 화장실 문이 있었다. 문갑 쪽 벽 밖에는 복도가 있고, 복도 맞은편에는 부엌이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 경호원 7명은 부엌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 : “오늘 가보니 삽교천에는 공기도 좋고, 공해도 없이 깨끗하던데 신민당은 왜 그 모양이오? 오늘 삽교천 준공식 광경을 왜 KBS TV에 보도하지 않지? 정보부장, 신민당 사정은 좀 어떻소?”
김재규 : “공화당 발표 때문에 다 틀렸습니다. 사표를 내겠다고 한 친구들이 다 강경으로 돌아섰습니다. 아무래도 당분간 정 대행 체제의 출범은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주류가 강해져서 다소 시끄럽게 됐습니다.”
차지철 : “그까짓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전차로 싹 깔아뭉개겠습니다.”
여기에서 정 대행 체제라는 것은, 9월 7일 법원에서 김영삼의 총재 당선을 무효화시킨 후 정운갑을 총재로 대행하게 하는 체제를 의미했고, 사표를 내겠다고 한 친구들이라는 말은 10월 13일, 9일 전에 의원직을 상실한 김영삼 추종자 66명의 사퇴를 모두 다 받아들일 수는 없고, 선별적으로 수리하겠다고 발표한 이른바 공화당의 ‘사퇴서 선별 수리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13일의 공화당 발표에 발끈한 김영삼과 그 추종자들이 부산으로 달려가 1979년 10월 15일부터 부마사태를 촉발시킨 것이다.
술잔이 돌면서, 심각한 정무 이야기는 사라지고 편안한 잡담들로 식사를 끝냈다. 7시 뉴스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김재규가 자리를 떠 작은 미니 정원 건너 50m에 떨어져 있는 김재규 집무실 본관 1층 식당 문을 열었다. 그 식당에는 정승화 총장이 6시 35분에 도착해 중앙정보부 2차장보 김정섭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정 총장, 미안하오. 저쪽 행사를 마치고 올 테니 두 분이 식사하고 계시오.” 이날 계획 중 가장 중요한 육군참모총장이 와 있는 것을 확인한 김재규는 작전을 개시했다. 2층 집무실로 올라가 책상 뒤에 숨겨둔 38구경 권총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는 박선호 대령과 박흥주 대령이 뒤를 따랐다. 박선호 대령은 해병이고, 박흥주 대령은 육사 18기였다. 김재규가 본관 식당의 어두운 곳으로 갔다. 두 대령이 바짝 따랐다. 갑자기 무서운 표정을 짓더니 손가락으로 바짝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김재규 : “본관에 육군참모총장과 2차장보가 와 있다. 오늘 해치운다.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해라.”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보여주면서 확고한 결의를 확인시켜 주었다.
김재규 부장: “각오가 돼 있겠지?”
박선호 대령 : “예, 돼 있습니다.”
박흥주 대령 : “예”
박선호 대령: “각하도 하실겁니까?”
김재규 부장: “응”
박선호 대령: “오늘은 좋지 않습니다. 경호관이 7명이나 됩니다.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김재규 부장: “안돼. 오늘 해치우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돼. 나는 지금 모든 준비를 하고 있다. 똑똑한 놈 세 놈만 골라 다 해치워.”
박선호 대령: “30분만 여유를 주십시오.”
김재규 부장: “알았네.”
김재규 부장이 권총을 우측 바지주머니에 넣고 만찬장으로 돌아왔다.
이 자리에 앉은 여섯 사람 중 대통령이 곧 시해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김재규 부장과 김계원 비서실장 뿐이었다. 김계원 실장은 김재규 부장이 자리를 잠시 비운 이유를 안다. 이때, 상 앞에 마주 보고 있는 대통령의 얼굴이 어떻게 보였을까? 조금만 더 있으면 피를 쏟는 시체로 변할 것이라는 상상을 하고, 그 뒤처리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김계원 실장은 키가 매우 작은 왜소형이다. 얼굴판은 오목형도, 볼록형도 아니고 평평하다. 코는 낮고, 입술은 거의 없는 일자 선이다. 안경의 위쪽은 뿔이고, 아래쪽은 금테다. 이미지는 쌀쌀형, 인간미가 머물만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음성에는 여운이라는 에코가 없다. 이런 사람이 바로 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대통령의 임종 순간을 카운트다운식으로 세고 있었다.
7시가 가까워지자 대통령이 자주 시계를 보았다. 뉴스가 궁금하신 모양이었다. 조급해하는 대통령에게 차지철이 말했다.
“각하, 시간이 되면 바로 TV를 켜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TV를 켰다. KBS 뉴스가 나왔다. 삽교천 제방 준공식 장면이 나왔다. 아마도 대통령은 그 모습을 빨리 보고 싶었을 것이다. 미 대사가 김영삼을 만난다는 뉴스가 나왔다. 대통령의 심기가 상했다.
“총재도 아닌 사람과 대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거야.”
미8군 뉴스가 뜨면서 카터 대통령에 대한 불편한 감정도 피력했고, 헬기로 오는 도중 한강을 보니까 다리가 꽤 많이 놓여 있더라는 데 대한 만족감도 표했다. 이때, 김재규가 들어와 TV를 끄자고 하자 차지철이 TV를 껐다. TV가 꺼지자 대통령은 김재규 부장에게 부산사태 사진을 좀 구해달라고 했고, 김재규 부장은 “예, 각하.” 이렇게 대답했다.
대통령 : “김부장이 술을 좋아하니 김부장에 술을 많이 권하시오.”
보통 때 같으면 황송해하면서 감사를 표해야 했지만, 김재규 부장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통령 : “노래나 한 곡 들어볼까?”
말이 떨어지자 심수봉이 옆 문갑에 기대놓았던 기타를 들었다.
“비가 오면 생각 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며, 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 사람···”
시심이 풍부하고, 육 여사를 위해 시를 많이 썼고, 스스로 작곡을 하는 감성의 소유자인 대통령이 좋아할 곡이었을 것이다. 앵콜을 받은 심수봉이 ‘두만강’을 부른 후 차지철 실장을 지명했다. 차지철은 ‘도라지’를 부른 후 신재순을 지명했다. 7시 35분이었다. 식사 자리에서 심부름하던 남효주가 들어와, “부장님, 전화입니다.” 하고 암호를 전했다. 김재규가 곧바로 남효주를 따라 부속실로 갔다. 박선호가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규 : “준비 됐는가?”
박선호 : “예, 완료됐습니다.”
7시 38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기타 반주로 ‘사랑해’를 부르고, 대통령은 간간히 흥얼거리며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김재규 부장이 도끼눈을 뜨고 들어왔다.
자리에 앉으면서 오른쪽에 앉아 있는 김계원 실장을 향해 “각하를 똑바로 모시시오.” 하고 어깨를 툭 친 후, 곧바로 차지철 실장을 노려보았다. 차지철의 얼굴을 쏘아보면서 “각하, 이따위 버러지 같은 새끼를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하면서 차지철의 팔뚝을 쏘았다. 이에 놀란 대통령은 “무엇들 하는 짓이야!” 하고 나무랐다. 그러자 김재규는 각하의 가슴을 쏘아버렸다. 7시 40분, 식사 자리에 앉은 지 1시간 35분 만에 부하의 총을 맞은 것이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울먹이는 심수봉이 물었을 때 대통령은 식탁에 얼굴을 묻은 채, “응, 괜찮아.” 이렇게 대답했다. “각하를 똑바로 모시시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김계원에게 각하를 제대로 모시라는 뜻이 아니라 밖에 나가 주위를 관리하라는 신호였다. 이 말에 김계원은 즉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밖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통령은 앞으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고, 차지철 실장은 대통령을 팽개친 채 화장실로 도망을 갔다. 태권도가 고단수라는 말도 헛말이었다. 김재규 부장은 두 사람에게 두 번째 총알을 날리려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알이 장전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문을 열고 뛰어나가자, 박선호가 다른 권총을 준비하고 서 있었다. 그 총을 잡아채 들고 다시 들어오니 차지철이 문갑을 밀고 문 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한 발 더 쏘고, 머리를 식탁에 묻고 두 여인의 부축을 받고 있던 대통령 등 뒤로 가서 머리에 총을 대고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아마도 이 두 여인은 이 순간이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다. “나는 괜찮다.” 이 말을 끝으로 대통령은 63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국민은 가난에서 구해내 부자로 살게 만들어 주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중산층 서민보다 더 초라한 생활을 하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만찬장 밖에 대기하던 박선호 대령은 김재규의 총소리를 신호로 만찬장 바로 옆 대기실에 있던 경호처장 정인형과 부처장 안재송에 권총 1발씩을 쏘았다. 현관 옆에 있던 박흥주 대령은 이기주, 유성옥과 함께 조를 짜서 주방에 있던 대통령 차 운전기사 김용태, 경호원 김용섭, 박상범, 식당 종업원 이정오, 식당 운전기사 김용남을 향해 권총 15발을 쏘았다. 중앙정보부 요원 김태원은 M-16을 가지고 이미 쓰러져 있는 정인형에 2발, 안재송에 1발, 김용섭에 1발, 차지철에 2발을 더 발사하여 확인 사살을 종결지었다. 전체 9명에게 명중한 총알 27발을 포함해 그날의 총알은 40발이 발사됐다. 이 40발의 총소리는 인접해 있던 정승화 총장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김재규와 정승화의 콜라보
총쏘기를 끝낸 김재규 부장, 마루에서 대기하던 김계원 실장에 한마디를 던졌다.
김재규 부장: “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보안을 유지하십시오.”
김계원 실장: “뭐라고 하지?”
김재규 부장: “각하께서 과로로 졸도했다고 하든지, 적당히 하십시오.”
김계원 실장: “하여튼 알았소.”
영리한 김계원 실장, “각하께서 과로로 졸도했다고 하든지···” 이 말에 김재규 부장이 주도면밀한 계획 없이 이 사건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피로 목욕을 한 시체를 놓고, “과로로 졸도했다.”라고 말해도 된다는 김재규의 말에 허점이 담겨 있었다. 김재규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증명이 됐는데, 일을 벌인 후의 사후 계획에 대해서는 머리가 비어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벌써 증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와이셔츠에는 허리춤에서부터 목 부위까지 피가 마구 튀어 있었다. 허리춤에 꽂힌 권총에서는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물, 물!” 김재규는 맨발로 본관 1층 식당으로 달려가 이렇게 외쳤다. 비서가 주전자와 컵을 내어 주자 주전자만 낚아채 꼭지에 입을 대고 꿀떡꿀떡 마셨다. 주전자에서 입을 떼기가 무섭게, “차량, 차량!”, “손님 빨리 나오라고 해!” 다급하게 외쳤다. 신중하지도, 의연하지도, 장군답지도 않았다. 그냥 촐랑댔다.
김재규 부장의 차가 대령됐다.
정승화 총장: “무슨 일입니까?”
김재규 부장: “얼른 타시오. 가면서 이야기 합시다.”
조수석에는 박흥주 대령이 타고, 뒷좌석 좌측에는 김정섭 중앙정보부 차장보, 가운데 정승화 총장, 우측에 김재규 부장이 탔다. 그리고 7시 50분, 궁정동 정문을 나섰다.
차는 적선동을 지나 중앙청 세종로를 통과했다.
“부장님, 무슨 일입니까?” 정승화가 묻자, 김재규는 말없이 왼쪽 엄지를 위로 올리고, 오른쪽인지로 X자를 그리며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표시를 했다.
정승화 총장: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김재규 부장: “보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적이 알면 큰일납니다.”
정승화 총장: “외부 침입입니까?, 내부의 일입니까?”
김재규 부장: “나도 모릅니다.”
정승화 총장: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겠지요.”
김재규 부장: “김일성이 알면 큰일 납니다. 보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빨리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 계엄을 선포하면 어떤 부대를 뺄 수 있습니까?”
정승화 총장: “계엄을 빨리 선포해야 합니다. 동원될 수 있는 부대는 20사단, 30사단, 9공수여단입니다.”
김재규 부장: “앞으로 총장께서 계엄사령관으로 이 나라의 운명을 거머쥔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총장의 양 어깨에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잘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이 말이 오가는 동안 차는 3.1고가도로로 올라섰다. 김재규 부장이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어디로 갈까? 부? 육본?” ‘부’는 중앙정보부를 의미했다. 이에 감을 잡은 정승화 총장은 육본 B-2 벙커(국방부 창사 밑 벙커)로 가자고 했고, 박흥주 대령이 동의를 표했다. “육본 B-2 벙커로 갑시다.” 김재규 부장이 명했다.
“김일성이 알면 큰일이다.” 이 말이 곧 내부 소행이라는 뜻이다. 간첩이나 북괴 침투조가 저질렀다면 김일성이 먼저 알기 때문이다. 정승화 총장이 육본 B-2 벙커로 가자고 한 것은 자기가 김재규 부장의 요청사항을 이행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김재규 부장에게 사후 처리를 정보부에서 진행할 것인가, 육본에서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시나리오조차 없었다는 것은, 거사가 순전히 감정 폭발 차원에서 정교한 계획 없이 저질러졌다는 것을 암시했다.
미8군 영내길을 통과하면서 김재규 부장은 비로소 자기의 와이셔츠에 피가 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박흥주 대령에게 상의를 벗어달라 했다. 박흥주는 늘 예비로 갖고 다니던 김재규 부장의 와이셔츠와 상의를 건네주었고, 자기가 신고 있는 구두를 벗어 김재규 부장에게 건넸다. 김재규 부장은 그때까지도 자기가 맨발이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승화 총장의 인물 크기는 차내에서의 질문에 담겨 있었다. 국가 원수가 총에 맞아 사망했으면 놀라면서, “어느 놈입니까?” 이렇게 반응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정승화는 간지럽게 물었다. “외부의 침입입니까, 내부의 일입니까?”, 이 질문에 정승화의 사람됨이 담겨 있었고 인간의 크기가 담겨 있었다.
김계원과 최규하
7시 50분, 김재규 부장과 정승화 총장이 궁정동을 떠나자 김계원 실장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지휘하여 대통령 시신을 보안사 영내에 별채로 운영되는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옮겨 놓고 당직 군의관에게 대통령의 용태가 어떠냐고 물었다. 시신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숨겼다. “사망상태입니다.” 이 사망진단에 김계원은 안도하고 청와대로 들어가 비상소집을 했다. 한편 시신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무거운 얼굴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감시했다.
김계원 실장의 비상 소집령에 따라 고관들이 속속 청와대 비서실로 모였다. 오후 8시 25분부터 8시 40분 사이에 최광수, 고건, 유학인 등 수석들이 나왔고 최규하 총리가 나왔다. 총리가 나오자 김계원 실장은 사람들을 모두 부속실로 내보내고 총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만찬장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우다가 김재규가 잘못 쏜 총에 각하가 맞아 서거하셨습니다.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
최규하 총리 역시 촉이 빠른 사람이었다.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함께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현장에 김계원 비서실장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미 계엄 선포라는 방침까지 정해져 있다는 것을 동시에 인지한 것이다. 이후의 정국은 김재규 부장과 김계원 실장이 주도하겠다는 직감이 들고도 남았을 것이다. 최규하 총리 역시 다른 장관들이나 수석들과 마찬가지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애착이 없었을 것이다. 차지철 실장을 과도하게 감싸고, 박근혜로 인한 추문들이 점점 더 민심을 흉흉하게 자극했는데도 이를 바로잡지 않은 것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옛날의 팔팔한 대통령이 아니라 망령이 들어가는 대통령이라는 정서들이 권부에 확산해 있었다. 주위에 인물들이 못 참아 하는 것은 특히 차지철 경호실장의 안하무인적 횡포였다. 차지철에 대한 감정은 자연히 그를 무조건 감싸고 총애하는 대통령에 대한 감정으로 전이됐다.
대통령에 대한 애착이 없었기에 최규하 총리는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새 질서에 올라탔다. 이어서 경호실 차장 이재전 중장(3성)이 올라왔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이재전 경호실 차장을 따로 불러내 차디찬 음성으로 윽박질렀다. “각하가 유고다. 지구 병원에 모셔놓고 왔다. 차지철 실장은 부대를 지휘할 처지가 아니다. 차장이 경호실장 직무를 대행하라. 이 사실을 일체 외부에 알리지 마라. 경거망동하지 말라. 경호실 병력은 출동을 일절 금한다.”
대통령과 경호실장이 동시에 사고를 당했다면 경호실 차장은 이유 없이 경호 비상 제1호인 ‘호랑이 1호’를 발령하고 병력을 사고 현장으로 출동시켜 대통령과 경호실장의 신원을 확보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조치를 취하지 말고 조용히 동결 상태를 유지하라고 지시한 것은 김계원 실장이 사태의 중심에 서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재전 차장은 총소리를 듣고 ‘태양 요원’들을 이미 안가로 출동시켰지만, 김계원 실장의 지시에 따라 회군시켰다. 사실 이재전 차장의 상관은 차지철이다. 차지철 말고 그를 명령할 수 있는 상급자는 없었다. 그 역시 권력의 중심축이 김계원 비서실장이라는 점을 직감했던 것이다.
청와대에 몰려온 수석들과 장관들 역시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사고의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김계원 비서실장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계원 실장이 진실을 감추고 있다. 여기에서 각자는 무슨 상상을 했을까?
B-2 벙커의 상황실에 온 정승화 총리가 전화기를 들고 처음으로 연결한 사람이 또한 이재전 경호 차장이었다. 그 역시 이재전 차장에 경호병력 동결 지시를 했다. 김계원 실장과 정승화 총장은 공모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으로부터 똑같은 명령을 받은 것이다. 정승화는 1926년생으로 당시의 참모총장이고, 김계원은 3년 연상이지만 정확히 10년 전인 1969년에 참모총장을 지냈던 사람이다. 범행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을 두 사람 모두가 같은 시각에 했다는 것이다.
오후 9시 05분, 내무장관 구자춘과 법무장관 김치열이 비서실 직원으로부터 “각하가 변을 당했다.”라는 말을 듣고 달려와 김계원 비서실장을 다그쳤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김계원 비서실장: “간신배를 제거한다는 것이 각하가 다치셨다.”
김치열 법무장관: “차지철, 그 새끼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야!”
김계원 비서실장: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린애를 앞에 놓고 사탕 굴리기 놀이하듯 했다. ‘누군가가 차지철과 대통령을 살해했는데 이 사실을 김계원 실장 혼자 알고 있다?’ 이것이 장관들에게 던져진 수수께끼였다. 대통령과 차지철 실장, 두 거물을 동시에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김재규 부장이라고 상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차지철 실장과 김재규 부장은 세상이 다 아는 앙숙 관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캐묻는 사람이 없었다. 더 이상 나아가다가는 김계원 실장의 눈 밖에 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새 시대의 주역 중 한 사람이 김계원 실장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계원 실장이 애매한 말을 한다는 것은 그가 사고와 관련돼 있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만일 그가 정정당당한 위치에 있었다면 사고 내용을 신나게 까발렸을 것이다.
B-2 벙커
B-1 벙커는 육·해·공군 모두를 지휘하는 전쟁 지도본부이지만 B-2 벙커는 육군 전용 벙커로 국방부 청사 지하에 구축돼 있다. 김재규 부장과 김정섭 차장보를 대동하고 차에서 내린 정승화 총장은 당직 장교로 하여금 두 사람을 벙커 내의 총장실로 안내하라 지시하고는 곧바로 상황실로 들어갔다. 전화기를 들자마자 청와대 경호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경호병력 동결을 지시하고 계엄선포를 위한 조치를 했다. 상황 장교들로 하여금 합참의장, 한·미연합 부사령관, 각 군 총장을 호출케 했고, 이어서 육군참모차장, 작전참모, 본부사령, 헌병감, 수경사령관을 호출했다. 이러한 호출 조치를 하려면 먼저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이 어마어마한 호출 지시가 내려가도록 해야만 했다. 하지만 정승화 총장은 계통이고 장관이고 다 무시했다.
10월 26일 오후 8시 10분, 정승화 총장은 수도권을 지키는 4개의 핵심 부대의 동정부터 체크하여 이상 징후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어서 수경사령관 전성각 소장(2성)에 전화를 걸었다.
“전 장군, 나요, 참모총장이오. 부대 이상 없소? 병력은 확실히 장악되고 있는 거요?”
“네 네, 이상 없습니다.”
“앞으로는 총장 지시만 따르시오. 지금 출동 준비를 하시오. 그리고 사령관은 즉시 B-2 벙커로 오시오.”
수경사령부 역시 차지철 경호실장만 지휘할 수 있는 부대였다. 차지철 실장이 죽었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월권이었다. ‘수경사에 부대 이동 사항이 없었다.’라는 것은 차지철 실장이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만일 차지철 실장이 대통령을 살해했다면 후속조치를 위해서 수경사 병력을 움직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0월 26일 오후 8시 30분, 노재현 국방장관이 B-2 벙커에 도착했다. 그런데도 정승화 총장은 노재현 장관을 따돌리면서 상황처리에 몰두했다.
10월 26일 오후 8시 40분, 합참의장, 연합사 부사령관, 공군 총장, 해군 총장 등이 도착하자 김재규 부장이 직접 나섰다.
”대통령이 유고입니다. 이 사실을 3일간 비밀에 부치고 즉각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
김재규 부장이 직접 나서는 동안 정승화 총장은 묵묵히 상황처리만 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정승화 총장이 밤중에 불러서 허겁지겁 왔더니 김재규 부장이 비상사태를 지휘하고 있는 이 순간, 군 지휘관들은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이들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승화 총장은 그들을 왜 불렀을까? 앞으로의 시국은 김재규 부장이 이끌어 갈 것이라는 큰 틀을 미리 알려야 이후의 질서가 일사불란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10월 26일 밤 9시, 김재규 부장은 박흥주 대령을 시켜 청와대에 있는 김계원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계원 실장: ”큰 영애가 아버지 어디 계시냐 묻기에, 다른 데 계신다고 얼버무렸는데 또 물으면 뭐라고 하지?“
김재규 부장: ”잘 했소“
평소와는 다른 고압적인 자세였다. 이 음성은 청와대에 모인 사람들에게나 벙커에 모인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풍겨 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전화를 단번에 끊었던 김재규 부장, 이번에는 정승화 총장을 통해 김계원 실장에 또 전화를 연결했다.
김재규 부장: ”여기 국방장관과 각 군 총장이 다 모여 있으니 이리로 오시오.“
김계원 실장: ”총리께서도 여기 계시니 이리로 오시오.“
김계원 실장이 수화기를 막고 총리에게 의견을 묻더니 이내 ”좋소, 내가 그리로 가겠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총리와 장관들이 있는 자리에서 김계원 실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김재규 부장이 청와대 경호실이 무서워 못 오는 것 같습니다. 빨리 계엄부터 선포하여 치안을 유지해야 하니 그리로 가시지요.“
김재규 부장이 범인이라는 뜻이 장관들에게도 알려진 것이다. 정승화 총장은 장관의 권한사항을 자기가 마음대로 조치했다. 1군과 3군 사령부에 ‘진돗개 2’를 발령했다. 20사단에 전화를 걸어 육사 교정으로 출동하라고 명령하고, 9공수여단은 육군 본부로 출동하라 명했다. 여기까지 조치하고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 부장에게 건너가 그가 취한 조치들에 대해 보고했다. “더 하명하실 사항이 있습니까?“ 이에 옆에 있던 김정섭 차장보가 끼어들었다. “방송국, 변전소, 상수도, 은행“이라고 말했다. 정승화 총장은 이를 받아 메모했다. 직속상관인 국방장관을 제치고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하고, 김재규 부장의 지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10월 26일 밤 9시 10분, 정승화 총장의 호출을 받은 수경사령관 전성각이 도착했다. 정승화 총장이 호출한 지 한 시간 만이었다.
전성각 수경사령관: ”지시 말씀 계십니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병력으로 청와대 외곽을 포위하라. 경호실 병력의 이동을 차단하라.“
혹시 이재전 경호실 차장이 자기의 명령을 어기고 경호 병력을 궁정동, 아홉구의 시체들이 피투성이로 널브러져 있는 사고 현장으로 보낼 수도 있다는 노파심에 2중 시건장치를 한 것이다. 정승화 총장의 이 전화는 이재전 차장과 전성각 수경사 사령관에게 ‘정승화가 실세’라는 메시지로 각인됐을 것이다.
20사단과 공수9여단에 출동명령을 내렸던 정승화 총장은 다시 전화를 걸어 출동을 보류시켰다. 출동하면 신문에 기사가 날 것이고, 기사가 나면 그들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김재규 부장이 말하는 ”보안 유지“가 깨지는 것이었다. 계엄 선포는 국무회의 주관사항이다. 그런데 국무회의도 열리기 전에 정승화 총장은 오로지 김재규 부장의 요구에 따라 비상계엄 조치에 속하는 상황 처리 내용을 혼자서 실행했다. 엄청난 월권이었다. 이처럼 세상은 이미 김재규, 김계원, 정승화의 것이 돼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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