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소설] 전두환 (5) - 10.26 (Ⅱ)(수정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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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1-04 14:53 조회34,33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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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소설] 전두환 (5) - 10.26 (Ⅱ)
국방부
10월 26일 밤 9시 30분경, 국방부 청사 2층 장관실에는 총리, 국방, 내무, 외무, 법무, 문공, 서종철 대통령 특보, 유혁인 정무수석, 김재규 부장, 김계원 실장, 정승화 총장, 신현확 부총리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난상 토론이 벌어졌다.
김계원 실장이 최규하 총리를 향해 말꼬를 텄다.
김계원 실장: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면 국무회의를 열어야 하지 않습니까?”
최규하 총리: “물론이지요, 계엄 사유를 무엇으로 할까요? 유고로 할까요, 서거로 할까요?” 유고인지 뻔히 알면서 정치적 타협 결과를 가지고 대국민 발표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김계원 실장: “대통령 각하 유고로 인하여 27일 00:00부로 계엄을 선포한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최규하 총리 : “유고만 가지고 납득 하겠습니까? 무언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무위원들도 내용을 알아야 의견을 교환할 수 있지요.”
김재규 부장: “유고는 안 됩니다. 국내 치안이 좋지 않아서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최규하 총리 : “국내에 데모가 난 것도 아니고, 계엄이 선포된 부산도 조용한데, 그건 이유가 안 됩니다. 대통령 유고를 어떻게 국민에게 안 알리겠습니까? 계속 보안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일이며, 우선은 국무위원들도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김재규 부장: “ 왜 안 됩니까? 소련은 1주일 이상이나 브레즈네프의 행적을 발표하지 않고 있었는데 2~3일 동안 왜 보안 유지가 안 됩니까?”
최규하 총리 : “그러면 김 부장이 국무회의에서 사유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김재규 부장: “예, 하지요.”
노재현 국방장관 : “비상계엄과 국장문제 등을 검토해야 합니다.”
김재규 부장: “지금은 보안을 유지해야지, 국장 문제를 앞세울 수는 없습니다.”
문공장관 : “비상계엄의 사유를 명백히 해야 합니다.”
김재규 부장: “소련의 브레즈네프는 1주일간이나 행적을 보안 유지했는데 우리는 왜 며칠간 보안 유지를 못 합니까? 국가에 비상사태가 발생하여 계엄 선포한다고 하면 되지 사유를 자세히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은 무슨 생각으로 유고 사실을 3일간이나 비밀에 부치려 이토록 집요하게 주장했을까? 눈치 보기에 급급한 수뇌부를 3일에 걸쳐 자기 체제로 종속시킨 후 계엄사령부를 혁명사령부로 곧바로 전환 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 외에는 달리 해석이 되지 않는다. ‘국민 여러분 오늘 본인은 반민주적인 유신 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민주주의 세상을 열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 ’ 이런 식의 혁명선언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니 자기의 의사가 반영되기 어려움을 직감한 김재규 부장, 답답한 마음에 김계원 실장을 밖으로 불러냈다. 10월 26일 밤 10시 25분 경이었다. 김재규 부장이 말을 꺼내려 하자 김계원 실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사람아~ 어떻게 하려고 각하까지 그렇게 했어~”
같은 배를 타왔던 사람이 혼자서 탈출해 살길을 찾겠다는 신호였다. 이에 김재규 부장이 본심을 꺼냈다.
“인제 와서 그런 소리가 무슨 소용이요. 그런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마세요. 사태 수습이 급선무입니다. 보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최단 시간 내에 계엄 간판을 내리고 혁명 위원회로 간판을 바꿔 달아야 합니다.”
“알았소.”
이런 서먹한 분위기를 안고 두 사람은 국방장관실로 들어갔다.
장관실 회의용 탁자의 제일 상석에는 최규하 국무총리가 앉고, 좌측 소파에는 김재규 부장, 서종철 대통령 특별안보보좌관, 유혁인(정무1), 우측에는 김계원 비서실장, 신현확 부총리, 문공부 장관이 앉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국방부 소회의실에 들어가 있었다. 일곱 명이 앉아 있었지만, 김재규 부장이 있는 자리라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어서 김재규 부장만 장관실에 남겨 놓고 회의실로 들어가 비상 국무회의를 열었다. 밤 11시 30분이었다.
회의실은 김재규 부장이 없는 자리라 표현의 자유가 있었다.
“대통령이 서거하셨다는데 왜 비밀에 부쳐야 하느냐.”
“사망 여부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 아니냐.”
“계엄 선포 이전에 병원부터 가 봅시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김재규 부장의 주장이 먹혀들 수가 없었다. 이 분위기를 감지한 김계원 실장이 노재현 국방장관실의 보좌관실로 갔다. 국방장관실에는 김재규 부장이 홀로 앉아 있었고, 장관 보좌관실에는 국방장관 노재현과 정승화 총장이 앉아 있었다. 밤 11시 40분이었다. 김계원 실장이 김재규 부장을 배신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각하의 시해범이 바로 저 안에 있는 김재규요. 여기 김재규가 각하를 시해할 때 쓴 권총이 있소”
이 청천벽력 같은 말에 노재현 장관은 소스라치게 놀랐고, 정승화 총장은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이 권총은 김재규 부장이 2차로 대통령과 차지철에게 한방씩 더 쏘려다가 장전이 안되어 박선호 대령이 미리 대비했던 다른 총과 바꾸어갈 때, 김재규 부장이 김계원 실장에 얼떨결에 건네준 총이었다.
“여보 총장, 당장 김재규를 체포하시오.”
노재현 장관으로부터 이 명령을 받은 정승화 총장은 과연 명령을 받들었는가?
이어서 국무회의가 열렸다. 국무회의에서는 대통령 유고의 원인을 밝히지도 않았고, 유고를 ‘서거’로 바꾸어 버렸다. ‘유고’라 하면 사고의 원인을 밝혀야 하지만 ‘서거’라고 하면 갑작스러운 병환 정도로 사망했겠거니 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 이는 10월 27일 04시에 발표한 최규하의 특별담화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오늘 민족중흥의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졸지에 서거하신 데 대해 그 충격과 애통함을 가눌 길 없습니다. ··· 헌법 제48조 규정에 따라 본인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습니다. ··· ” 이어서 계엄 포고 제1호가 발령된 것이다.
한편 국무회의를 일찍 종결한 최규하 총리는 가장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와 장관실로 가서 혼자 앉아 있는 김재규 부장에게 국무회의 결과를 알려 주었다. 10월 27일 00시 25분이었다.
최규하 총리: “비상계엄은 새벽 04시를 기해 선포하기로 했습니다. 계엄사령관은 정승화, 계엄 합동수사본부(합수부)장은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으로 임명했습니다.”
김재규 부장: “잘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비상계엄을 간절히 원하던 김재규 부장은 만족스러웠다.
최규하 총리가 김재규 부장에게 회의결과를 알려 준 시각은 10월 27일 00시 25분, 그 5분 후에 김재규 부장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의해 연행됐다. 5분! 이 5분이 운명을 가른 것이다. 만일 정승화 총장의 궁정동 행적이나 김재규 부장 연행사실이 국무회의 도중 알려졌다면 정승화 총장은 절대 계엄사령관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재규 부장이 체포되자 이후 박흥주 대령 등 시해 일당들도 줄을 이어 체포됐다.
전두환의 등장
정승화 총장이 B-2 벙커에 온 시각은 10월 26일 오후 8시 05분, 정승화 총장은 헌병감까지만 부르고 정작 중요한 전두환 보안사령관만 쏙 돌려놓았다. 그렇다면 보안사는 어떻게 이 사건을 인지하게 되었는가? 10.26 밤, 김계원 실장이 대통령의 시신을 싣고 서울지구 병원에 갈때 보안사 정문을 통과해야 했다. 정문 근무병이 이 사실을 보안사 당직 사령인 이상연 대령에게 보고했고, 이는 그날 늦게까지 일하고 있던 보안처장 정도영 장군(육사 14기)에게 알려졌다. 정도영 준장이 병원장에 전화를 걸었더니 병원장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밀착 감시를 받고 있어서 대답이 엉성했다.
“코드 원이냐?”
“네”
“위독하시냐?”
“네”
이에 이상연 대령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했다. 이때 전두환 사령관은 서빙고 보안 분실(대공분실)로 가던 중이었다.
“사령관님, 각하의 용태가 위태롭습니다. 지구병원에서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전두환 사령관은 주요 간부들을 비상 소집했다. 8시 30분이었다. 서빙고 수사 분실에 도착한 전두환 사령관, 청와대 경호실에 전화했지만, 통화 연결에 실패했다. 경호 실장실에서도, 경호 차장실에서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로 이때 보고가 들어왔다.
“노재현 장관이 사령관님을 찾고 계십니다. 정승화 총장이 각 군 수뇌부를 B-2 벙커로 소집하고 있습니다.”
오후 9시, 전두환 사령관이 B-2 벙커에 도착했다. 이때 김계원 실장과 최규하 총리는 청와대에 있었고, 정승화 총장이 바쁘게 상황 지시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총장실에는 김재규가 있었고, 상황실에는 노재현 장관과 군 수뇌들이 묵직한 얼굴을 하고 모여 있었다. 전두환 사령관이 노재현 장관에게 다가갔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대통령께 무슨 일 있습니까?”
노재현 국방장관: “대통령이 서거했다. 자세한 건 모른다.”
용태가 위태로운 게 아니라 서거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밤 9시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전두환 사령관, 길 건너에 있는 육군 본부 보안대 사무실에 임시 지휘부를 차리고 상황 파악에 나섰다.
10월 26일 밤 10시 40분, 노재현 장관은 김계원 실장으로부터 김재규 부장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정승화 총장에게 김재규 부장을 체포하라 했지만, 그동안 정승화 총장의 석연치 않은 행동이 미덥지 않아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호출했던 것이다.
“김재규를 체포하라.” 노재현 장관이 전두환 사령관에게 직접 지시한 것이다.
11시 50분, 정승화 총장이 전두환 사령관과 김진기 헌병감을 불렀다.
“지금 국방장관실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있다. 헌병감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신병을 인도하여 전두환 사령관에 인계하라. 전두환 사령관은 신병을 인계받아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
김재규 체포 순간
김진기 헌병감을 부른 이유는 국방부 울타리를 헌병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헌병 복장을 해야 김재규 부장을 안심시킬 수 있고, 김재규 부장을 태우고 나갈 때도 정문 헌병에 미리 명령해 두어야 무사통과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가는 보안사가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부른 것이다. 전두환 사령관은 노재현 장관으로부터는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정승화 총장으로부터는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노재현 장관으로부터는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명을 들었지만, 정승화 총장으로부터는 김재규 부장을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는 말을 들었다. 각하가 사망했다는 말과 김재규 부장을 체포하라는 말을 합치면 김재규 부장이 각하를 시해한 범인이라는 의미가 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명령이 장관 다르고, 총장이 달랐다. 여기에 더해 정승화 총장의 분위기가 음산했다. 전두환 사령관은 길 건너에 있는 육군본부 임시 지휘소로 가서 보안처 군사정보과장 오일랑 중령(갑종 155기)을 불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오 중령, 너 김재규 얼굴 알아?”
오일랑 중령: “네 압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김재규는 네 얼굴 알아?”
오일랑 중령: “모를 겁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그럼 됐어. 국방장관실에 김재규가 있다. 너 곧바로 헌병복으로 갈아입고 김재규를 체포해. 무장을 해제시키고 정동 분실로 데려가라구. 정중히 대해야 해. 정동 분실에 허화평이 대기하고 있을 테니 허화평에게 인계해. 체포할 때는 ‘육본 B-2 벙커의 총장실에서 정승화 총장이 부장님을 모시고 오라 해서 왔다.’라고 해. 이렇게 유인해서 체포하라고. 만일에 대비해서 내가 참모장 차 레코드 등 세 대의 차량을 더 준비했으니, 같이 행동해. 헌병감이 헌병들을 체포 현장에 배치할 것이니 헌병 지원을 받으라고.”
헌병감 김진기와 상의한 결과였다. 오일랑 중령은 헌병 완장을 차고 차량 세 대를 인솔하여 국방부로 향했다. 국방부 정문에는 김재규 부장 경호원들이 많이 있을 것 같아서 뒷문으로 들어갔다. 국방부 청사 앞과 뒤에는 이미 헌병 장병이 10여명씩 깔려 있었다. 오일랑 중령은 중정 요원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국방부 청사 사방에 헌병 2명씩을 배치했다. 만일 연행 과정에 중정 요원들이 뒤를 따라올 경우에 대비해 연행 차량이 빠지자마자 출입문들을 일거에 봉쇄할 수 있도록 헌병을 배치했다. 오일랑 중령은 이런 조치를 해 놓고 2층으로 올라갔다. 회의실에는 국무위원들이 있었고 복도에는 장관 비서실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성거렸다. 이 사람들이 있으면 임무 수행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국방부에 파견된 보안대 김병두 대령을 만났다. 오일랑 중령은 김병두 대령에게 사령관의 임무 사항을 말해 주면서 복도에 있는 사람들을 방으로 몰아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내 복도가 조용해졌다.
오일랑 중령은 김진기 헌병감과 함께 국방부장관 보좌관인 조약래 준장(1성)의 안내를 받아 장관실에서 대기 차량이 있는 곳까지의 비밀 통로 코스를 사전 답사하여 체포 인원들과 함께 예행연습을 했다. 마지막으로 장관 비서실장인 조약래 장군에게 보안사령관의 지시사항을 말하고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려 있는 김재규 부장을 옆방으로 유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조약래 장군은 회의실 바로 옆 방인 장관 별실로 유인하겠다고 했다. 오일랑 중령과 김진기 소장(2성)은 미리 장관 별실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다. 2분 정도 흘렀다. 마침내 조약래 장군이 김재규를 안내해 왔다. 두 사람은 거수경례를 붙였다. 보아하니 한 사람은 헌병 투스타이고 한 사람은 헌병 중령이었으니, 김재규는 이들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김진기 헌병감: “부장님, 저 육군본부 총장 비서실장입니다. 정승화 총장이 B-2벙커에서 부장님을 모셔 오라 해서 왔습니다.”
김재규 부장: “아, 그런가. 가세.”
비밀 통로로 유인하여 1층으로 내려가려는데 김재규 부장이 갑자기 “박 대령, 박 대령”하고 박흥주 대령을 찾았다. 오일랑 중령은 “곧 따라옵니다.” 하면서 계단으로 내려가게 했다. 왜 이리 어두운 길로 가는가?“, ”이 길은 국무위원들이 다니는 통로입니다. 아까 최규하 총리께서도 이 길로 오셨습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레코드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의 조수석과 뒷좌석 좌측에는 미리 헌병이 승차해 있었다. 그때 오일랑 중령이 김재규 부장을 강하게 밀어 뒷좌석 중간에 앉히고 자기는 우측 좌석에 탔다. 순간 속았다고 생각한 김재규 부장, 하지만 이미 덫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무장 해제 하겠습니다.“
”뭐? 무장? “김재규가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오일랑 중령이 잽싸게 그의 손을 잡고 먼저 김재규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38구경 리볼버 권총을 꺼내 차 밖에 있는 헌병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온몸을 훑어 다른 무장이 없음을 확인한 후 출발하여 뒷문을 통해 삼각지 로터리로 향했다. 10월 27일 00:40분이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뒤를 쫓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남영동으로 들어섰다.
김재규 부장: ”자네, 누군가?“
오일랑 중령: ”네, 육본 헌병대장 오일랑 중령입니다.“
조금 더 있더니 다시 물었다.
김재규 부장: ”자네, 누구라고 그랬지? 어디로 가는거야?“
오일랑 중령: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으니 조용히 계십시오.“
김재규 부장: ”거기가 어디야?“
오일랑 중령: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김재규 부장: ”세상이 달라졌어.“
오일랑 중령: ”무슨 말씀이십니까?“
김재규 부장: ”대통령이 죽었단 말이야.“
미8군 수송대 앞에 이르자 ‘통행금지’ 바리게이트가 쳐져 있었고 경찰관들이 나와 있었다.
”나 육본 헌병대장인데 누구를 태우고 가는 중이다.“
당시만 해도 사회는 군을 우대하는 시기였다. 남영동 검문소가 또 나타났다. 같은 방법으로 통과하려 했는데 갑자기 시동이 꺼졌다. 뒤따라온 예비용 차량 2대 중 한 대에 나란히 이동시킨 후 경찰이 김재규 부장의 얼굴을 알아볼까 봐 김재규 부장의 고개를 꾸욱 누르고 통과했다. 전 국회의사당 건물과 덕수궁 사잇길로 들어가 보안사 정동 분실로 가려 했는데 오일랑 중령이 길을 몰라 헤매다 보니 인근에 있는 중앙정보부 분실로 가게 되었다. 분실 정문에서 예비군 복장을 한 장발의 경비병이 달려왔다. 김재규 부장이 이를 보더니 반가워했다.
”아, 우리 분실이구먼.“ ‘역시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다더니 나를 분실로 모시는구먼!’ 김재규는 순간 안심이 되었다. 반면 아차 싶은 오일랑 중령은 차를 빨리 돌리라 했다. 차를 돌려 나오니 곧바로 보안사 분실이 보이고 사람들이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김재규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고, 거기에는 허화평 대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두환 사령관은 오일랑 중령이 혹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정도영 보안처장으로 하여금 오일랑 중령 모르게 뒤를 따라가면서 엄호하도록 조치했다. 임무를 완수한 오일랑 중령은 육본 보안대 임시 지휘소로 가서 임무완수 보고를 했다. 전두환 사령관은 시해사건 연루자들이 국외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추가로 내렸다.
박흥주 대령의 운명
김재규의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이 그의 범행 동기를 진술했다.
”김재규 부장의 무서운 지시를 받고 가방에 들어있는 9연발 권총을 꺼내 7발이 장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허리에 찼다. 시간이 조금 있어서 부속실인 내 방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며 생각해 보니 기가 막혔다. 부장의 위치로 보아 모든 계획이 확고히 서 있는 듯했다. 명령을 내릴 때 얼굴이 워낙 무서워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육군 총장과 중정 2차장보를 식당에 대기시킨 것으로 보아 모두가 다 결탁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알았다. 각하를 시해하면 김재규 세상이 된다. 그가 성공했는데 내가 가담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몰려 살아남기 어렵게 될 것이고, 내가 공을 세우면 출셋길이 열릴 것이다. 반면 실패하면 나의 인생은 여기서 비참하게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의 명령을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박흥주 대령은 육사 18기, 당시 41세의 현역 포병 대령으로 부인과 1남 2녀를 두고 있었다. 중위 시절인 1964년 8월부터 1년 동안 제6사단장인 김재규의 전속부관을 했다. 그 덕으로 1969년 3월부터 3년 동안 보안사에서 근무했고, 1978년 12월부터 사고 당시까지 김재규의 수행비서로 있었다. 사고가 난 지 이틀 만인 1979년 10월 28일, 그는 합수부에서 이런 진술을 했다.
”그날 새벽 2시경 국방부 청사에 있을 때 일등병이 오더니 저기서 누가 좀 보자고 한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따라가니 헌병 대위가 무장 해제를 한다고 했다. 권총과 무전기를 내주었다. 이때 중정 경호조장 홍 대위와 경호원 한 명이 나처럼 불려 가는 것을 보았다. ‘이젠 다 틀렸구나!’ 부장 차를 타고 남산 순환도로를 거쳐 한남동 주택가에 정차시킨 다음 한 시간 30분 동안 있었다. 심정이 착잡했다. 04시 30분경, 행당동 내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처가 나왔다. “나 일이 있어서 급히 가야해.” “여보, 무슨일이에요?” 몹시 놀라는 처를 보면서도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강변도로를 타고 잠실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고 운전수 유석문과 함께 있다가 07시 뉴스를 들었다. 김재규가 차지철을 살해해 계엄사에 구속되어 수사 받고 있다고 했다. 10월 27일 오후 3시경 나는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됐다.“
박흥주 대령은 1980년 3월 6일, 경기도 소재의 한 야산에서 42세의 꽃다운 나이로 총살형에 의해 생을 마감했고, 김재규 부장과 박선호 대령은 1980년 5월 24일, 서울 구치소에서 교수형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재규의 실토
김재규 부장을 연행하기 전까지의 세상은 그야말로 주인 없는 무주공산이었다. 최규하 내각은 무기력했다. 인물들은 모두 이후의 권력이 누구 손에 쥐어질 것인가를 탐색하기에 눈들을 반짝였다. 김재규 부장이 이끄는 막강하다는 중앙정보부, 김계원 비서실장이 장악한 청와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이끄는 60만의 군벌이 결합하면 불과 이틀이면 정권장악이 가능했다. 만일 김재규 부장과 정승화 총장이 정권을 잡았다면 그들은 어떤 정치를 했을까? 시해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언론을 차단하면서 무서운 독재를 했을 것이다. 박선호와 박흥주 두 대령에게 보여주었던 무시무시한 얼굴을 온 국민에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이 모든 악몽이 김재규 부장을 체포하는 순간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정동 안가로 연행된 김재규 부장은 이제 막장의 카드를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묻지도 않은 말을 스스로 털어 놓은 것이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나에게 협조하라. 내가 대통령을 시해했다. 내일이면 세상이 바뀐다.“
이 말이 즉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됐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 총장을 압박했다. “대통령 시해범은 김재규가 확실합니다. 스스로 자백했습니다. 구속해야 합니다.“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정승화 총장은 더 이상 김재규 부장을 감쌀 수 있는 명분이 없어 결국 승인하고 말았다. 10월 27일 01시 30분, 바로 이 시각에 김재규 부장이 정식 구속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은 즉시 안가에서 서빙고로 넘어갔다.
1979년 10월 27일, 김재규 부장은 수사관 앞에 털어놓았다.
”나는 1976년 12월 4일부터 정보부장으로 근무해 왔다. 정국이 시끄럽고 야당이 날로 극성을 부렸다. 이에 대한 나의 수습책이 실패를 반복하여 무능함이 노출됐다. 내 형제들이 이권 관련한 비리들을 저질러 경고 친서를 받았다. 군의 새까만 후배이고 연하인 차지철로부터 수차에 걸쳐 수모를 당했지만, 대통령은 이런 차지철만 편애했다. 곧 있을 중요 인사에 내가 포함될 것이라는 데 대한 불안감이 컸다.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불신이 매우 컸다. 부마사태의 소요가 서울 대구 등 5대 도시로 확산되면 경제가 몰락하고 정권이 끝장을 맞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때 거사를 하면 국민적 지지를 받을 것으로 확신했다. 10월 26일 만찬 기회가 적기라고 생각했다.“
수사 단장 이학봉 대령은 김재규 부장과 잘 아는 사이였다. 김재규 부장이 보안사령관이었을 때, 보안사에 함께 근무했기 때문이다. 친화력이 좋은 이학봉 대령은 김재규 부장이 경계심을 갖지 않도록 필기를 하지 않고, 옛날의 상사와 부하와의 편안한 대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학봉 대령: ”왜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저지르셨습니까?“
김재규 부장: ”내 원대한 꿈이 앞섰다.“
이학봉 대령: ”부장님은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 인정도 받고 빛이 나는 것이지, 대통령이 돌아가시면 부장님의 입지도 동시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재규 부장: ”모두가 나에게 절절매고 따르기에 거사 후에도 계속 그렇게 하리라 생각했다.“
이학봉 대령: ”이번 거사에 어느 부대를 동원하려 하셨습니까?“
김재규 부장: ”정승화가 내 편이라 그런 건 염려하지 않았다.“
이학봉 대령: ”대통령을 시해하려면 누구를 시키든지 하시지 왜 부장님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셨습니까? 부장님이 직접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으시려고요?“
김재규 부장: ”나의 심복인 안전국장 김근수를 시키면 내가 직접 하지 않은 것으로 다 처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수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여러 차례 전화가 왔다.
이학봉 대령: ”네, 네 접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이번 거사에 동원되는 부대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부터 빨리 알아내.“
김재규 부장이 단기필마로 그렇게 큰일을 저지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전화 통화를 지켜 본 김재규 부장은 전두환 사령관을 빨리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이학봉 대령: ”이유만 정당하시면 금방이라도 만나 뵙게 해 드리지요. 말씀해 보십시오.“
김재규 부장: ”지금 곧바로 혁명을 해야 해. 시간을 지체할 겨를이 없어. 매우 안타깝다. 빨리 만나야만 해.“
시간을 급하게 재촉했다. 하지만 이학봉 대령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면서 추가 정보를 유도했다. 정승화 총장이 시해 현장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김재규 부장과 차를 함께 타고 육본 B-2 벙커로 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김재규 부장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다 된 밥에 김계원 실장이 배신을 했다. 그러나 정승화 총장은 나의 뜻을 받들었다. 육본 벙커에서 정승화는 부대 총출동 계엄상황을 처리했다. 국방장관이 와 있었는데도 정승화는 나에게 보고도 하고 의논을 하면서도 국방장관을 돌려놓았다. 이것이 바로 그가 나를 받들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이학봉 대령은 이 부분을 또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전두환은 보안사 요원들을 궁정동 시해 현장으로 출동시켰다. 동시에 수사 요원들을 국군서울병원에 보내 시신을 감시하던 정보부 요원들을 무장 해제시켜 체포했다. 서빙고 보안사 수사 요원들은 체격이 대단한 어깨들이었다. 이학봉 대령의 수사는 가속됐다. 김재규 부장과 함께 차를 타고 B-2 벙커에 와서, 국방장관의 승인 없이 병력을 동원한 정승화 총장의 행위는 분명한 ‘내란 방조’ 행위라며 정승화 총장을 체포할 것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건의했다. 이에 전두환 사령관은 ‘알았어. 바로 체포해’ 허락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불렀다. “정승화는 이내 계엄사령관이 돼 있다. 지금 구속하기엔 무리가 있으니 극비로 내사를 더 하자.
정승화 총장을 추종하는 군벌이 동시에 들고 일어날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1979년 10월 28일 발표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제1차 수사 결과 발표“에서는 정승화 총장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았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김재규 부장이 실토한 신문 내용은 실로 아찔했다.
11월 8일과 17일 김재규는 [3단계 혁명계획]을 털어놨다. 첫째, 정승화 총장을 시해 현장에 유인하여 ‘공범자’로 만듦으로써 ‘혁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고 둘째, 정승화 총장으로 하여금 계엄을 선포케 하고 군부대를 동원해 주요 기관과 시설을 장악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 ‘혁명 위원회’를 발족하여 김재규가 의장이 되는 것이었다.
”본인은 4월경부터 혼자 구상하여 왔습니다. 이조 이래 2인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김계원을 끌어들여 현장 목격자로 얽어 놓고, 정승화를 시해 현장에 끌어들여 공범자로 만들고, 정승화를 시켜 군을 동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습니다. 본인에게는 분신과 같은 심복이 있었습니다. 안전국장 김근수입니다. 계엄이 일단 선포되기만 하면 즉시 중정으로 들어가 그에게 내가 주도한 범죄 내용을 자세히 말해주고 그에게 임무를 주려고 했습니다. 비밀보장을 위해 궁정동 현장에 남아 있을 중정 요원들을 모두 연행하여 남산에 감금하고, 현장 증거를 모두 인멸시키려 했습니다. 간부들을 소집해 대통령 사망에 대해서는 안전국장이 조사 중에 있으니 일체 잡음을 내지 못하도록 보안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육군 총장을 설득 또는 협박하여 혁명 위원회를 발족하도록 하여 ‘10.26혁명’을 ‘국민 혁명’으로 전환할 계획이었습니다. 현 정부 조직을 최대한 그대로 활용함으로써 참여의식을 갖도록 하고 국민적 호응을 얻기 위한 홍보를 하려 했습니다. 혁명 위원장은 본인이 하고, 부위원장은 최규하 총리가 하고, 위원장은 정승화로 하여 상임위원과 비상임위원을 두고, 국회를 해산시키려 했습니다. 혁명 검찰부와 혁명 재판부를 설치하여 반혁명 분자를 처단하게 한 후 빠른 시간 내에 본인이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집권하기로 계획을 짰습니다. 본인이 정보부장으로 정보를 분석해 보니 우리나라에는 지도자가 될 인물이 없고, 본인의 권한을 최대한 활용하면 대통령 시해도 간단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며, 중정의 조직력과 권력으로 군부세력을 장악할 수 있어, 본인은 일약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상의 김재규 구상을 보면 체포만 되지 않고 하루만 더 있었으면 성공할 수 있었다.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 부장의 강력한 추천으로 참모총장이 된 사람이다. 특전사라는 최정예 부대를 지휘하는 정병주는 김재규의 안동농림학교 후배로,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을 할 때 대대장으로 인연을 맺어 계속 키워왔던 사람이고, 수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3군사령관 이건영은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을 할 때 주월 한국군 부사령관으로 내보냈고, 정보부장일 때 차장으로 데리고 있다가 3군사령관으로 내보낸 사람이다. 작전참모 하소곤, 수도기계화 사단장 손길남, 26사단장 배정도, 30사단장 박희모 모두가 정승화 군벌이었다. 이들 각자가 형성한 군 인맥이면 쿠데타를 한다 해도 성공할 수 있는 충분한 세력이었다. 이러하기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총장을, 그것도 방금 계엄사령관으로 날개를 단 정승화를 곧바로 체포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인물 김재규
궁정동에서 정승화 총장과 식사를 같이 하고 김재규 부장을 육본 벙커에까지 수행했던 차장보 김정섭은 79년 11월 18일, YH사건 처리에서 보여준 김재규 의 과격성에 대해 진술했다.
”1979년 8월 9일 10시경, YH회사 200여 명이 회사 내 문제를 가지고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습니다. 이튿날인 10일 10시경, 김계원과 김재규가 강제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사람들이 투신하면 그물망과 매트리스 등이 필요한데 당시는 숫자가 부족했습니다. 실무자들은 진압을 며칠 연기하자고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김재규 부장의 강경진압 지시로 안전대책이 부족한 상태에서 11일 02시에 경찰이 강제진압을 하다가 한명의 여공이 투신 사망했습니다.“
”1979년 8월 중순경, YH사건의 후유증과 도시산업 선교회 및 카톨릭 농민회 등의 반정부 활동에 대한 청와대 대책 회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김재규 부장은 “긴급조치 9호로는 칼날이 무디니까 아주 강한 10호를 만들어 주시라”고 건의했습니다. 이후 10월 하순경, CPX 훈련기간에 B-1 벙커에서 같은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때에도 김재규 부장은 ‘각하, 긴급조치 10호를 만들어 주십시오. 그래야 정국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또 다시 건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각하는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정국이 수습되겠느냐, 당분간 9호를 가지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해 보시오.”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김재규 부장은 부산 계엄 현장에 다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산에 가 보니 300만 시민 중 70% 이상은 유신에 호의적이더라. 시가지와 항만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30% 이하의 반대 세력은 행정기관이 잘만 선도하면 회복될 것 같더라.’ 김재규 부장은 소영웅주의,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으로 그를 따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 김정섭의 진술은 1979년 11월 9일자 김계원의 진술과 일치한다.
”1979년 8월 9일 10:00경, YH 노무자 200여 명이 신민당사에 집결하여 계속적인 취업을 요구했습니다. 배후에는 도시산업 선교회가 있었고, 이에 노동계와 종교계가 합세하여 강력한 대정부 투쟁으로 진전될 우려가 커져 있었습니다. 수습책을 연구하기 위해 8월 10일, 10:00에 청와대 제 사무실에서 김재규, 유인혁 정무1수석, 고건 정무2수석, 김정섭 2차장보 등이 모여 논의했습니다. 중론이 나왔습니다. 보사부 장관이나 노동청장이 신민당사에 가서 해명과 시책을 설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고위 관리가 신민당에 가서 사과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전례가 될 것이다. 금일 중으로 경찰을 투입해 강제 해산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날 야간에 경찰을 투입해 강제 해산을 시켰습니다.“
그의 혁명계획에는 ”반혁명 분자를 처단한다.“라는 구절이 들어있다. 이렇게 과격한 김재규를 ’민주화’를 내건 운동권들은 ”유신의 심장에 활을 쏜 민주화의 투사“라 극찬을 했다. 이 말을 처음 지어낸 사람이 바로 김대중이었다.
혐의 지우는 정승화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된 김재규의 다급한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동물의 왕국에서 천적들끼리 싸울 때 저마다 몸을 크게 만들어 위세를 과시하듯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이미 돌아가고 있으니 자기에 협력하라는 제스처를 크게 취하는 것이었다. 국방장관실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었던 김재규 부장은 이미 최규하 총리로부터 정승화 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됐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것이 당시 계엄사령관의 위세였다. 이런 정승화 총장이 시해 현장 바로 옆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차를 함께 타고 궁정동 안가로부터 B-2 벙커로 함께 왔다는 사실, 정승화 총장이 자기편에 서서 국방장관이 옆에 와 있는데도 무시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한 사전 조치를 취했고, 그 조치 사항을 자기에게만 보고하고 자기로부터 지시받았다는 사실을 수사관에게 또박또박 주입했다. 세상이 이미 김재규와 정승화 체제로 바뀌어 있다는 점을 이해시키려 한 것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자기에게 불러달라고 다급하게 요청한 것은, 이 중요한 사실의 의미를 전두환이라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내용이 그대로 전두환 사령관에게 전달됐고, 전두환은 김재규와 정승화 두 거물이 형성해 놓은 군벌들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정승화가 시해사건에 관련돼 있었다는 사실을 10월 28일 발표에서 일단 제외시켰던 것이다.
김재규 부장은 수사관에게 정승화는 자기가 키운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 반면,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는 본인은 김재규를 잘 모르고 가까이 지낸 사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정승화의 이중플레이가 시작된 것이다.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는 수사관을 불러 받아 적으라고 했다. 11월 1일이었다.
”나는 김재규를 잘 모른다. 가까이 지내는 사이도 아니다. 그는 나를 이용하려 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에게 이용당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나와 성격 차이가 크고, 관료적이며 고식적인 사람이다. 그와 같이했던 시간도 별로 없다. 내가 총장이 된 것은 그의 추천으로 된 것도 아니고 그의 영향력으로 된 것도 아니다.“
반면 김재규 부장은 12월 29일 ‘정승화 내란 방조 사건’ 조사 당시 정반대의 진술을 했다. ”정승화 총장을 이용할 계획은 79년 4월부터 줄곧 했다. 그가 내란에 가세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내가 총장으로 추천했다. 79년 1월 각하가 내게 총장을 추천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감찰실장에 지시하여 박희동 대장, 김종환 대장, 정승화 대장, 세 사람을 올리되, 정승화가 가장 적임자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작성하라 했다. 그 후 79년 2월 1일에 정승화가 총장이 됐다. 나는 이 발탁 사실을 당시 1군사령관을 하고 있던 정승화에 전화를 걸어 미리 알려 주었다. 그와는 동향인데다 평소 친밀하게 지냈다.“
12.12로 전격 구속되자 정승화 총장은 종전에 했던 말을 뒤집었다. 1979년 12월 15일이었다. ”오래전부터 많은 인연으로 자주 만났다. 김재규가 대통령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적극 접근했다. 그의 도움으로 총장이 되었다. 내가 총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각하의 결재 사실도 김재규가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 79년 10월, 추석 선물로 김재규가 300만 원을 주었을 정도로 친밀하게 지냈다.“
1979년 300만원은 얼마나 큰 돈이었나? 강남 아파트 30평형이 200만 원, 김대중이 5·18 폭동 자금으로 광주 정동년에게 준 돈이 500만 원이었다. 지금 현재 강남의 30평형 아파트 가격이 얼마인가? 20억원쯤은 될 것이다. 강남아파트 한 채 반값에 해당하는 이 엄청난 돈을 추석 선물로 받은 지가 불과 1개월 전이었으니 10월 26일 당시 정승화의 김재규에 대한 충성심이 어떠했겠는가? 이 추석 선물은 계획적인 매수공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진실한 사실이었고, 이 진실한 사실은 전두환과 이학봉이 지휘하는 합수부(합동수사본부)의 상식이었는데,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는 어떻게 이 진실한 사실을 지우려 했는가? 김재규가 서빙고 분실에서 위와 같은 진실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정승화는 끈질기게 주장했다. “나는 김재규가 범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김재규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파악한 수사관들이 여기저기 찔러볼 때마다 정승화는 버럭 화를 냈다. “너희들이 감히 총장의 말을 못 믿는 것이냐?“
내사가 진행 중이라는 낌새를 눈치 챈 정승화, 1979년 10월 28일 전두환에게 시해 당일의 정황을 설명해 줄 테니 수사관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10월 29일 이학봉 수사1국장, 검찰에서 파견된 정경식 검사, 2명의 수사관이 총장실로 갔다.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 4시간 동안 정승화가 말해준 요지는 간단했다.
”나는 김재규와 교분이 전혀 없다.“
”나는 안가가 어디 있는지 전혀 몰랐다. 10월 26일에 간 것이 처음이었다.“
”김재규가 대통령과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장소는 청와대 경내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자하문 밖에서 나는 몇 발의 M16 총소리를 들었다.“
”노재현의 지시로 김재규를 체포했다.“
진술 내용이 앞뒤가 맞지 않을 때마다 수사관들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질문하면, 그때마다 ”당신들이 감히 계엄사령관의 말을 의심하느냐“라며 윽박질렀다.
곰곰이 생각한 정승화 총장은 두 차례 더 수사관들을 불렀다. 10월 31일 오후 4시부터 5시까지, 11월 1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였다.
‘노재현의 지시로 김재규를 체포한 것“이 아니라 총장 단독으로 김재규를 체포했다.’고 수정하라 했다.
‘차 안에서 20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을 삭제하라고 했다.
‘10·26 이전에 김재규를 만나 김영삼이 민주당 총재로 당선된 배경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라는 내용도 삭제하라 했다.
10월 29일 오후 8시부터의 조사를 앞두고 정승화는 그날 낮에 조사에 영향을 주려는 심리전 공작을 했다. 1군, 2군, 3군사령관과 1군단, 5군단, 6군단 군단장들을 초청하여 오찬을 베풀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다음 자기를 중앙정보부로 유인하려 했지만 역으로 내가 그를 육군본부로 유인했다.”
“김재규에 대한 체포도 내가 결심해 지시했다.”
김재규 내란 음모를 저지한 일등 공신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4성 장군 3명과 3성 장군 3명을 오찬 모임에 초대한 것이다. 자신의 범죄 행적은 지우고 본인이 김재규의 내란음모를 저지한 1등 공신임을 주위에 부각시킴으로써 입지를 강화하게 되면 그것이 사회 여론이 될 수 있었다. 이를 위험하게 여긴 이학봉 수사1국장은 11월 2일 또다시 정승화 총장의 일탈 행위를 보고하면서 연행 조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보고를 받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노재현 장관의 의사를 넌지시 떠 보았다. 노재현 장관은 몸을 사렸다. 아니 정승화 총장을 보호했다.
“계엄사령관을 지금 조사하면 난리가 나고 시국이 불안해진다.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에는 10.26 시해사건에 정승화 총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개입돼 있을 것이라는 의혹의 분위기가 팽배해 가고 있었다. 이런 판인데 정승화 총장을 가만둔 채 어떻게 시국이 안정되겠는가? 바로 여기에 하나의 의문이 끼어들 수 있다. ‘노재현과 정승화가 한편일까?’ 국방장관 노재현과 정승화 총장은 이미 과도정부 수립에 주역이 돼 있었다.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의 103~104쪽에서 정승화는 이를 인정했다.
“1979년 11월 초, 노재현 장관은 국무위원들이 다음 대통령으로 최규하가 가장 무난한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 왔다. 나는 이에 동의하며, ‘군은 내가 설득할 테니 장관께서는 국무위원들을 단합시켜 최규하 총리를 잘 설득하시지요.’라고 말했다. 노재현 장관은 국무위원들이 자기의 눈치를 살피는 듯 하다고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최규하가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서 적임자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과도정부는 1년 전·후, 길어도 2년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데 합의했다. 다음날 장관은 국무위원들이 최규하 총리의 동의를 얻어냈다고 알려왔다.”
같은 책 105~106쪽에도 이 두 사람의 정치 개입 사실이 기재돼 있다. “대통령 후보 등록 마감일을 며칠 앞둔 11월 15일 조찬 회의가 있었다. 주요 논제는 김종필 문제였다. 김종필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와 노재현 장관은 내가 공화당에 압력을 넣는 것이 좋겠다는 데 합의했다. 나는 공화당 길전식 사무총장과 장경순 정책위 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최규하 총리를 대통령으로 밀기로 합의했는데 공화당이 후보를 내면 혼란만 가중되니 조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공화당 의원 총회는 김종필을 후보로 옹립하기로 가결했고, 김종필이 이를 수락하지 않는 형식으로 입후보를 포기했다.” 정승화 총장과 노재현 장관이 정국을 주도했고, 정승화 총장이 명실상부한 최고자였던 것이다.
10월 말부터 정승화 총장은 합수부에 ‘김대중 내란 사건’ 조사를 빨리 종결하라고 여러 차례 압박했다. 사건을 자신이 관할하는 계엄보통군법회의에 빨리 송치하라는 압박이었던 것이다. 전두환 사령관의 수사망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총장 연루설’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는 본연의 임무를 제쳐놓고 전방 지휘관들과 후방 지휘관들을 수시로 방문하여 자신은 시해 사실과 무관하며, 김재규를 체포하라 지시한 장본인이 바로 자기였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차기 대통령도 자기들끼리 정했다. 이런 전횡에 대해 내각과 정치계는 일체 함구했다. 이대로 가면 세상은 김재규, 정승화, 노재현 체제로 굳어지게 돼 있었다. 전두환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수 없었다. 20일이라는 수사 종결 시한은 가까워지고, 수사 절차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고, 전두환은 초조했다. 11월 6일, 전두환은 서둘러 12일 동안 조사한 결과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정승화의 압박이 먹혀들었던 것이다. 12월 6일의 수사 결과 핵심 발표문은 두 가지였다.
“군부 또는 여타 세력의 조직적 관련이나 외세의 조종이 개입된 사실이 없다.”
“사건 당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초청으로 궁정동 안가에 있었고, 그 후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육본으로 갔다.”
이 두 번째 항목은 합수부장인 전두환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와의 머리싸움 결과로 그나마 발표문에 넣게 된 것이다. 이 항목에 대해 국민은 처음으로 경악했다. 그동안 나돌던 ‘총장 연루설’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 행위에 묵시적으로 동조한 사실이 드러나 있는데, 이 엄연한 동조행위를 왜 합수부가 조사하지 않느냐, 합수부도 야합세력이 아니냐, 여론이 한 단계 더 거칠어졌다.
하지만 전두환은 울분을 참으면서 정승화를 뺀 나머지 8명만 피의자로 하여 육본 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사건을 송치했다. 1979년 11월 13일이었다. 이로써 김재규 내란 음모 사건은 전두환의 손을 떠나 정승화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합수부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됐고, 김재규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정승화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정승화의 김재규 살리기
육본 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한 8명의 피의자 중에는 경호실 차장 이재전 중장(3성)이 있었다. 전두환은 그를 직무유기죄로 구속한 상태에서 송치했다. 경호실 차장 이재전 장군은 직무를 유기한 것만이 아니라 범인 은닉행위도 범했다. 여기에서 ‘송치’라는 말은 경찰이 검사에게 ‘기소 의견’으로 보내는 절차를 의미한다. 시해 직후인 10월 26일 오후 8시 35분 경, 이재전 장군은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부당한 압력을 받았다. “각하가 시해당했다. 경호실장도 직무 수행이 불가능한 상태다. 경호 차장이 직무를 대행하라. 병력 충돌을 일절 하지 마라. 보안을 지켜라. 경거망동하지 마라.” 이 엄포를 들은 이재전 장군은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고 김계원 실장의 부당한 지시를 따랐다. 이것이 범행인 것이다. 그는 어떻게 했어야만 임무에 충실한 것이 되었는가? 대통령과 직속 상관인 차지철의 시신을 확인하고, 만찬 장소에 병력을 보내고 대통령 주치의를 병원으로 보내고, 비상 자동규칙에 따라 경호대에 ‘호랑이 1호’를 발령하여 부대를 전투태세로 전환해야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재전 장군은 경호실로 돌아와 간부들에게 대통령 유고 사실을 숨기고, 처장급 이상만 소집하여 병력 출동 금지령만 내렸다. 이에 따라 총소리를 듣고 안가로 달려가던 ‘태양 사찰 요원’들이 가다 말고 철수했다. 거꾸로 경호실 간부들이 각하 시해 사실을 다른 곳들로부터 전해 듣고 항의하자, 마지못해 처장회의를 열었다. “각하가 시해됐다. 상황은 이제 끝난 것 같다.” 처장들이 나서서 시신을 보호하고 현장 조사를 실시하자고 건의 했지만 이재전 장군은 단칼에 묵살했다.
이렇게 명백한 죄가 있어서 합수부가 이재전 장군을 구속 송치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승화 총장은 집요하게 군 검찰에 압력을 넣어 불기소처분하게 했고, 그 어떤 징계도 내리지 못하게 했다. 1979년 12월 5일이었다. 도대체 이재전 장군이 무엇이기에 정승화는 여기에 다 걸기를 했을까? 이재전 장군에게 똑같은 명령을 내린 사람은 김계원 실장뿐만이 아니라 정승화 총장도 있었다. 정승화 총장이 B-2 벙커에 오자마자 조치한 것은 경호실 차장 이재전 장군과 수경사령관 전성각에게 전화를 걸어 현장접근금지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정승화 총장으로부터 이런 부당한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재전 재판 과정에서 알려지면 이는 정승화 총장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이재전이 재판정에 서는 것을 죽자 살자 방해했던 것이다. 정승화 총장은 이재전 장군뿐만 아니라 김계원 실장에 대한 기소에 대해서도 적극 방해했다. 같은 이유에서였다.
김재규가 군법회의에 회부되자 시체에 까마귀 떼 덤비듯이 이른바 재야세력이 달려들었다. “영웅이다.”, 유신에 마침표를 찍은 민주화투사다.“, ”유신의 심장을 쏜 민주화투사다.“ 구명운동도 확산됐다. 김재규도 고무되었고, 정승화도 고무되었다. 이에 따라 김재규의 말도 바뀌었다. 합수부에서는 ”내가 집권하기 위해 대통령을 시해했다.”라고 했는데, 재판정에서는 ”유신 체제에 비수를 꽂기 위해 대통령을 쏘았다.”라고 했다. 재야세력이 ‘영웅이다’, ‘민주화 투사다’ 띄워주니까 그 스스로 더 떠올랐다. “나는 유신 체제의 폐해와 부작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힘을 가진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대통령 시해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런 뜻을 실행에 옮긴 후, 자살하거나 망명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주도권을 쥐고 혼란한 정국을 설거지하고, 내가 구상한 대로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여당에는 인물이 없다.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하자가 있다. 김영삼은 역량이 미미하다. 이철승은 사꾸라라서 지지기반이 없다. 그래서 이후의 정국을 이끌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내란 음모 사건 소송기록 1079~1090쪽에 있는 기재다.
처음으로 정승화 총장이 추임새를 넣었다. 아니 폭탄 발언을 했다. 이로부터 1주일 후인 11월 24일, 계엄 선포 이후 처음으로 민과 군이 참여한 ‘계엄 확대회의’가 열렸다. “10.26 사건은 애석하지만, 국민과 국가 전체의 불행은 아니다. 박대통령 체제는 잘못되었으므로 시정되어야 한다.” 본심을 드러내는 놀라운 발언이었다. 이 발언에 경악한 장군들이 심하게 반발했다. 2군 사령관인 진종채, 육사 교장 백석주, 3군 사령관 이건영 등의 반발 발언에 이어 장군들이 뒤숭숭하게 수군거렸다. “대통령이 서거한 지 며칠이 지났다고 이런 말을 하느냐, 그런 말을 하려면 살아 있을 때 해야지 왜 지금 하느냐, 박대통령 체제가 잘못되었다면 여기 있는 군 지휘관들도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것이 아니냐. ···” 모든 장군이 흥분하자 회의는 중단됐다.
반면 정승화는 10.26 이전에는 이런 말을 했었다. “박 대통령은 이 나라의 태양이요, 민족의 지도자요, 우리나라 중흥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다.”
이 확대회의에 있었던 1군사령관 황영시는 전두환을 따로 찾아와 항의했다.
“김재규 수사를 철저히 하라. 디디하게 하니까 이런 망언이 나오는 게 아니냐. 정승화의 말은 김재규가 영웅이라는 게 아니냐?” 이런 반발이 있었는데도 정승화는 이틀만인 11월 26일, 언론사 사장들과 편집국장들을 초청하여 이른바 ‘3김 비토론’을 발표했다.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불투명한 사람이다. 김영삼은 무능하다. 김종필은 부패했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면 군은 쿠데타를 일으켜서라도 막을 것이다.” 1주일 전인 11월 17일, 김재규가 재판정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받아 언론에 발표한 것이다.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이는 계엄사령관인 자기가 김재규를 반드시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힌 폭탄발언이었다. 1979년 10월 26일부터 12월 6일까지는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는 시기였다. 최규하가 권한대행을 하고 있는데도 정승화에게는 최규하가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김재규를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최규하가 권한대행이라는 데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발언은 정가와 군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야당도 반발했다. 그에게 최규하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로 증명이 됐다. 계엄 군법회의로 넘어간 공소장에는 ‘최규하가 김계원으로부터 김재규가 시해범이라는 말을 들었다.’라는 기재가 있다. 정승화는 전창렬 군검찰부장에게 이 부분을 수사하라고 압박했다. 이 조사는 최규하를 주눅 들게 할 수 있었다. 최규하의 약점을 정승화가 꽉 잡고 있다는 점을 최규하에게 인식시켜주기 위한 제스처였다. 최규하를 주눅 들게 했으니, 세상에는 계엄사령관이 최고였던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지시를 받은 전창렬 군검찰부장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의논 상대로 전두환을 찾아갔다.
전두환 : “각하, 정승화 총장이 군검찰에 각하를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군검찰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최규하 : ”좋다. 언제든지 와서 조사하라.“
이렇게 활활 타오르고 있는 정승화의 불꽃에 김재규가 갑자기 찬물을 끼얹었다. 12월 8일, 김재규는 법정에서 ‘정승화가 자기의 범행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에게 협조했다’라는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이어서 1979년 12월 10일에 열린 제3차 공판에서 김재규 변호인이 폭탄 발언을 했다. “계엄사령관은 내심 김재규의 선처를 바라고 있다.” 사실 이 말은 당시 돌아가고 있는 시국을 정확히 읽은 것이었다.
이 와중에 정승화는 79년 11월 16일, 그의 심복을 종용하는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전두환 합수부장의 입장에서 보면, 설상가상, 점입가경의 경지였다. 사태를 더 이상 방관하면 정승화-김재규의 세상이 될 것이라는 여론도 확산됐다. 이학봉 수사1국장이 또 전두환을 압박했다. 1979년 12월 6일이었다.
이학봉 : “더 이상은 안됩니다. 정승화를 체포해야 합니다.”
전두환 : “12월 12일로 한다.” 그리고 연행 지침을 내렸다.
1) 대통령보고 시점에서 정확히 30분 만에 연행조를 총장 공관에 보내라.
2) 연행조는 우경원 합수부 수사2국장, 허삼수 합수부 조정통제국장 및 7명의 합수부 수사관으로 하라.
3) 총장 공관에는 1개 분대 규모의 헌병이 특별 경계를 하고 있고, 외곽에는 50여 명의 해병대 병력이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수사관을 보호하고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합수부에 배속돼 있는 33 헌병대 병력 60여 명을 활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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