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소설] 전두환 (4) - 전두환 업적 (수정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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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1-20 12:00 조회28,2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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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소설] 전두환 (4) - 전두환 업적
<전두환 업적>
한강의 기적, 마무리
지금의 대한민국 경제는 세계가 매우 부러워 할 정도로 잘 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국민들은 생활고를 호소하고 비전이 없다며 아우성치고, 정권은 민생해결에 명운을 걸고 있다. 그러면 1980년의 한국경제는 어떠했을까? 민생은 지옥이었고 국가는 외채를 갚지 못하는 부도상태에 있었다. 모든 외신들이 한국경제를 시체에 비유했다. 세계는 1974년의 제1차 오일쇼크, 이어서 1979년 제2차 오일쇼크에 허덕이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한국은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른바 ‘3고’현상에 매몰돼 있었다.
고물가, 평범한 인플레이션이 아니었다. 도매물가 상승률이 44.2%나 되었다. 이에 비해 봉급은 겨우 5%만 오르니 그 당시의 민생고가 어떠했겠는가? 지금의 민생고와는 차원이 다른 지옥 같은 고통이었다.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니 돈 있는 사람은 사재기에 올인했다. 품귀현상이 발생하자 물가는 더 가파르게 올랐다. 저축하는 사람이 없으니 저축률은 당연히 제로, 기업은 돈을 외국은행에서 빌려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장가동률이 10% 미만이기 때문에 자꾸만 자꾸만 외채를 빌려 외채의 이자를 갚을 수밖에 없었다. 돌려막기인 셈이었다. 이런데 어떻게 외환위기가 오지 않겠는가? 이때 세계 각국은 에너지 파동이라는 단 한 가지 악재에도 타격을 받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하물며 경쟁력 자체가 없었던 우리나라 기업들이야 어떠했겠는가?
바로 이 황량한 시점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 누구라도 이런 현상 앞에 서면 앞이 캄캄해질 것이다. 그런데 전두환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8년 후에 치러질 88국제올림픽을 유치해 오겠다고 야단을 쳤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철 모르는 대통령’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엉뚱한 전두환이 일본으로부터 40억 달러를 가져다 한강공사와 올림픽 공사를 벌였다. 미국의 뉴딜정책과 유사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경제 전문가였다. 집권기간 대부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3%나 되었다. 반면 같은 기간 선진국들은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이변중의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그에게 도깨비 방망이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집권 4년 후의 한국 프로필을 보자. 1980년에 654억 달러였던 GNP가 무려 1,623억 달러가 되었고, 1980년 제로였던 저축률이 GNP의 32%수준으로 급등했으며, 44.2%였던 도매물가상승률이 2.3%로 안정되었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사람들은 그를 비하하기 위해 그를 ‘석두’라고 불렀다. 대단히 고약한 선입견을 주입시킨 것이다. 이런 것을 세뇌공작이라 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언론인들은 기사에 이렇게 대서특필했다. “어이 김재익, 경제는 자네가 대통령이야” 경제 천재 김재익 박사에게 경제 전체를 내맡기고, 대통령은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며 통큰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웠다. 하지만 ‘통이 크다’는 이 말속에는 ‘석두’라는 의미가 있었고, 전두환은 경제에 문외한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김재익, 경제는 네가 대통령이야” 이 말은 의도적인 왜곡이었다. 김재익은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이었다. 전두환은 그를 전격 발탁하여 경제수석으로 앉혔다. 경제기획원 장관을 상대해야만 하는 자리인데, 그는 늘 차관과 장관 앞에서 수줍어하고 어려워했다. 이런 김재익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대통령이 한 말이 와전되었고 왜곡된 것이다. “어이 김재익, 자네가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장차관을 상대하라구, 알았어?” 그런 김재익도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묘역에서 산화하고 없었다. 당시의 경제문제는 물가 잡는 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가를 반드시 잡아야한다는 것은 김재익도 알고 전두환도 알고 국민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는 경제전문가만 알고 있는 전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물가 잡는 지혜와 추진력이었다. 사재기 심리를 잠재우지 않고 물가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두환은 심리전을 폈다. 당시의 물가는 쌀이 선도했다. 쌀을 대형트럭에 높이 올려 싣고, 거기에 ‘양곡 수송’이라고 크게 써 붙인 후 시내를 여러 차례 돌아다니게 했다. 시내에는 양곡이 많이 공급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경제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라 지혜였다.
공무원 봉급과 기업의 봉급을 동결했다. 물가는 44.2%나 오르고 있는데 겨우 5%밖에 안올려준 봉급마저 동결한다고 하니 누가 전두환을 좋아했겠는가! 전기료, 우편료 등 모든 공공요금을 동결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적자는 오로지 구조조정으로 메꿀 수 밖에 없도록 했다. 그나마의 봉급으로 연명하던 가정들의 생계가 갑자기 끊겼다. 전두환의 인기가 추락했다. 그래도 소신껏 했다. 이후 똑같은 구조조정이 영국 대처수상과 미국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서도 채택됐다. 미국에서 한창 시작한 ‘영기준 예산제도(Zero Base Budget)’를 도입하여 세출예산의 허리띠를 바짝 조였다. 그야말로 엘리트 경영이었다.
46~47세의 보안사령관 시절, 그는 늘 박정희 대통령에 ‘직보’를 했다. 다른 분야는 상식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 술술 보고할 수 있었는데 경제에 대해서는 용어조차 생소했다. 김재익 등 당대에 경제전문가들과 기업인들을 섭외하여 새벽특강을 받았다. 이조시대에 왕들이 배우는 ‘경연수업’인 셈이었다. 경제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안목이 생겼다.
국제경쟁력
당시 한국기업들은 ‘국산품 애용’이라는 보호막 안에서 쉽게 폭리를 취했다. 사실 외국에 팔기만 하고 외제를 사지 말자는 것은 후진국의 억지였다. ‘사지 않으려면 팔지도 말라’ 이것이 그가 생각한 신사도였다. 수입 장벽을 없앴다. 수입업자들이 마구 늘어나 싸고 좋은 제품들이 물밀 듯 들어왔다. 우리 영토가 국제시장이 되었다. 온실에서만 안주해 온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살벌한 국제경쟁에 내몰린 것이다. 창의력! 이것만이 살 길이었다. 그런데 창의력은 자유공간에서만 발상된다. 억압됐던 모든 자유를 풀었고, 공무원들이 설치해놓은 거미줄 같은 규제들을 모두 철폐했다. 인습도 탈피하고 경험이라는 고정관념도 폐기했다. 교복도 자유, 머리 길이도 자유, 스커트 길이도 자유, 당시 거리에서는 경찰이 장발을 단속했고, 자를 가지고 다니면서 무릎으로부터의 치맛자락 높이를 쟀다. 북괴가 있는 한 야간통행 금지는 절대로 풀 수 없다는 것에 사회적 합의가 있었지만, 그는 과감히 풀었다. 심지어는 빨치산 가족들에 가해진 연좌제까지도 풀었다. 이렇듯 전두환은 모든 종류의 구속을 해제했다. 달러가 유출된다는 이유로 꽉 막혀있던 해외유학의 길도 열었고, 해외여행, 해외송금, 심지어는 해외이주까지 장려했다. 생전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해외이주 알선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위화감을 조성한다며 생산대수를 극히 축소시켰던 컬러TV를 마음껏 생산하라며 빗장을 풀었다. 흑백으로 대변되는 답답한 세상이 총천연색이라는 단어로 바뀌어 컬러 세상이 활짝 열렸다.
정부가 주도해왔던 경제를 민간주도 경제로 바꿨다. 업주들에 주인의식과 개척정신이 생겼다. 규제는 정부부처 이기주의의 산물이다. 공무원들은 규제를 많이 만들어야 기업인들로부터 이른바 ‘도장값’을 받았다. 공무원들이 자식들에 비싼 과외를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규제로부터 들어오는 ‘도장값’ 때문이었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시절, 기업인들로부터 이런 교육을 받았기에 ‘규제혁파’에 대한 철학을 가질 수 있었다.
WTO
‘자유경쟁(Free Competition)!“ 이는 고전적인 아담스미스의 경제이론이다. 그동안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많은 사람들이 경제계의 장차관자리와 수석자리에 있었으면서 그들은 왜 자꾸만 규제를 만들어 자유경쟁 억제해왔는가? 공정거래의 룰을 지키지 않는 이탈기업들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자유경쟁이란 ’공정한 자유경쟁(Fair&Free Competition)이다. 이를 위해 전두환은 ‘공정거래법’을 만들었고, 이 둘을 지키게 하는 레프리 시스템도 설치해 놓았다. 하지만 가장 훌륭한 지휘는 감시 감독과 처벌이 아니라 기풍진작이었다. 새마을운동이라는 문화운동처럼 사회분위기, 사회문화를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봉급 동결과 구조조정으로 일시적으로 추락했던 전두환의 인기는 이후 경제가 번영의 가도를 달리는 순간부터 회복되었지만, 한국에는 언제나 간첩들과 북괴의 방해공작이 있었다. 각종 괴담을 지어내 국민을 선동했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숨겨지고 괴담만 나돌았던 것이다.
1981년 1월에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과의 스타워즈 경쟁을 촉발시켰다. 스타워즈의 개발에는 자금이 많이 들었다. 소련이 이에 맞서 국방비를 퍼붓다가 그만 두 손을 들었다. 1988년 12월 7일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UN에서 연설을 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일방적으로 해체하고 동구에 배치한 모든 소련군을 철수한다“는 253자의 매우 짧은 연설이었다. 바로 이 한 순간에 냉전이 종식된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세계 제1의 가치가 이데올로기(이념)였다. 하지만 이 순간 이후 세계 제1의 가치는 ‘삶의 질’로 바뀌었다. 무기를 만드는 돈으로 건강식품과 의약품을 만들고 나라마다 복지가 향상됐다. 모든 나라들은 무역장벽을 없애고 모든 세계인들은 싸고 좋은 제품을 살 수 있어야 했다. 이에 따라 세계의 모든 기업들은 냉혹한 국제경쟁을 치러야만 했다. 이것이 1990년에 출발한 WTO였다. 전 세계 기업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런데 전두환은 이보다 10년 전인 1980년부터 기업을 국제경쟁시대로 내 몰았다. 이렇게 미리 예방주사를 맞은 한국기업들이었기에 1990년부터 밀려온 WTO라는 쓰나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금융실명제
‘금융실명제법’ 누가 제정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영삼이 제정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법은 전두환이 제정했고, 그 법을 깜짝 시행한 사람이 김영삼이었다. 금융실명제법 이전에는 차명과 가명을 허용하는 ‘예금과 적금 등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이 있었다. 1961년 7월 29일 박정희가 제정한 법률이다. 지하에 숨어있는 음성자금을 양성화시킬 목적으로 차명이나 가명으로 거래를 하도록 허용한 법률이다. 그런데 1982년 4월, 장영자-이철희 부부가 ‘단군이래 최대 규모의 어음사기 사건’을 저질렀다. 사기액수가 정부 1년 예산의 10%규모였다. 이 부부는 건설사 등 자금사정이 좋지 않은 기업을 찾아다니며 현금을 빌려주고 채권의 2~9배에 달하는 어음을 챙겨 사채시장에서 할인하는 방법으로 사기를 쳤다. 이 돈으로 장영자 부부는 당시 화폐로 월 3억원 이상을 쓰며 사치행각을 벌였다. 이에 놀란 전두환이 곧바로 착수한 법률이 ‘금융실명제법’이었다. 법률을 제정해놓은 후 이른바 ‘7.3조치’라는 것을 단행했다. 1년 후인 1983년 7월 1일부터 ‘금융실명제법’을 시행할 것이라는 정책을 1982년 7월 3일에 발표한 것이다. 그런데 아뿔사! 발표하기가 무섭게 너도 나도 뭉칫돈을 빼갔다. 은행들이 울상이 되었다. 갑자기 과소비가 폭발했고, 사재기와 부동산투기 현상이 나타났다. 전두환은 곧바로 날개를 접었다. 법률 단서조항에 ”1986년 1월 1일 이후 당시 대통령이 정하는 시기에 시행한다“는 구절을 삽입한 후 시행을 보류했다.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었다. 민주화의 화신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하나회를 해체하고 부정축재자를 토벌하는 등 인기가 90% 가까이 상승했다.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더 잘하고 싶었다. 1993년 8월 12일 목요일 오후 7시 45분, 은행이 문을 닫고 내부결산이 마감된 시각에 기습적으로 ”시행한다“는 명령 하나로 시행을 강행했다. 그 누구도 대량으로 돈을 인출할 수 없었고, 가명통장은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차명으로 이름을 빌려준 사람은 배신도 했다.
전자시대 통신시대
일본의 전자산업은 SONY라는 천막회사가 앞장서서 열었지만 한국의 전자산업은 대통령 전두환이 앞장서서 열었다. 진공관 라디오는 미국 TI사가 개발했고, 트랜지스터는 미국의 벨 연구소가 개발했지만 트랜지스터로 라디오를 만든 세계 최초의 발명가는 SONY를 설립한 모리타 아키오였다. 1955년이었다. 이어서 SONY가 개발한 워크맨과 캠코더가 세계 전자시장을 석권했다. 이때 한국은 어떠했는가? 1980년에 이르러서도 한국의 전자산업은 LG의 전신인 금성이 대표했다. 흑백TV와 금성라디오가 고작이었다. 일본과는 비교 자체가 안됐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전두환을 거치면서 전자산업 프로필이 역전됐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의하면 2021년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소매판매량 기준 18.9%를 차지해 1위를 기록했고, 애플이 17.2%를 차지해 2위를 기록했다. 세계 TV시장의 48%를 삼성과 LG가 석권했다.
통신분야는 어떠했는가? 전두환을 거치면서 일본은 우리에 비해 100리 밖으로 뒤져있다. 1970년대의 가정용 전화기는 특권층과 부잣집에만 있었다. 전화기가 곧 신분이었다. 1978년, 강남의 30평형 아파트가 200만원이었을 때, 전화기 한 대 값이 260만원 하던 때도 있었다. 전화기를 신청해놓고 대기하는 가구가 60만이나 되었다. 전화선이 부족한 것은 교환기가 수동식이어서 전화 교환원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상대방 단자에 코드를 꽂아주어야 비로소 연결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답답한 실정을 경험한 전두환에는 ‘1가구 1전화’에 대한 꿈이 생겼다.
육사18기 전자공학 박사인 오명 비서관을 불렀다.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 엘리트만으로 내각과 비서진을 꾸린 대통령은 건국 이후 전두환뿐이다. 국가를 엘리트 집단으로 경영하느냐, 아니면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으로 경영하느냐, 포퓰리즘 대통령에게는 머슴만 필요하고, 엘리트는 방해가 된다. ”어이 오박사, 전자교환기가 뭐야?“ 당시 극히 소량의 전자교환기가 수입돼 있었지만 값이 너무 비쌌다. ”네, 다이얼만 돌리면 교환수 없이 송신자와 수신자가 곧장 연결이 되기 때문에 대량의 가입자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의 전화선은 음성통신에 그치지 않고 활자를 통신하는 정보 전달 용도로도 개척될 것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은 전두환은 마음이 급했다. ”어이 오명 박사, 자네가 체신부 차관해. 그리고 통신말야. 그거 현대화하는 사업 추진하라구“ 이후 사업규모가 커지자 속도가 느려졌다. 이를 눈치 챈 전두환은 오명 박사를 장관으로 앉혀 ‘전자교환기 사업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당시 전자교환기는 선진 6개국만 생산하고 있었다. 전자교환기를 국산화한다는 것은 상상 밖의 무모한 꿈이라는 것이 이 분야의 상식이었다. 인도와 브라질이 개발하다가 실패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그래서 전자교환기 사업은 주변의 비웃음을 받으면서 출발했다. 통신사업비를 대폭 늘렸다. 통신업체로 하여금 수입금 3%를 떼어내 연구개발비로 쓰게 했다.
비서실 요원, 공무원, 기업 기술자, 학자들로 TF를 구성하여 3대 전략사업을 추진했다. 반도체사업, 컴퓨터사업, 전자교환기 사업이었다. 주위는 계속 냉소적이었다. ”그렇게 돈이 많으면 차라리 한강다리를 더 놓지 그래~“ 전자교환기 사업에만도 800억 원이 투입되었다. 세출 예산의 1.4%였다. 역시 최고경영자가 앞장서면 불가능이 없었다. 4년만인 1986년에 불가능하다던 전자식 교환기가 세계 7번째로 자체 개발되었다. 여기에 참여한 금성반도체, 동양정밀, 삼성반도체 개발자들이 세계IT업계에 신화적 존재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 개발품은 베트남, 러시아, 몽골 등으로 수출되었다. 1987년 천만회선이 개통되어 전두환의 꿈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렸다. 이사를 하면 단 하루에 철거와 개통이 이루어졌다. 반면 당시의 유럽에서는 1개월, 일본에서는 1주일 정도가 걸렸다. IT선진국을 넘어 IT선두국이 된 것이다.
반도체 강국의 개막
반도체 경쟁력의 핵은 제조공법이다. 1980년대 초, 일본의 13개 반도체 업체가 공동으로 투자하여 반도체 제조공법을 개발했다. 이런 일본기업들의 집중공격을 받은 미국의 3대 반도체 제작사인 모토로라, 인텔, 몰스텍이 폐쇄됐다. 반도체 칩을 사용하는 전자제품, 가전제품, 기계제품이 도미노식으로 타격을 받았다. 이때 한국은 반도체 황무지였다. 1982년, 전두환은 이병철 회장을 불렀다. ”외국기술을 몰래 스파이해 오지 말고 파격적인 값을 정당하게 지불하고 반도체기술을 개발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병철 회장이 실리콘밸리에 접근했다. 1983년 2월, 이병철 회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이른바 [동경선언]을 발표했다. 착수하겠다는 것이었다. 64K에 이어 86년에는 1메가 D-RAM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삼성이 1메가에 성공하자 그 다음은 정부가 4메가 D-RAM개발에 직접 나섰다. 삼성, 현대, LG로부터 100억 원을 걷고, 정부가 300억 원을 출연해 1988년 2월, 그가 퇴임하기 직전에 4메가의 고지를 점령했다. 축하모임에서 전두환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불가능이 없는 여러분들에게 부탁합니다. 다음에는 64메가입니다. 성공하는 그날에는 제가 머리카락을 팔아 한턱 쏘겠습니다.“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이 전두환의 머리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전두환 업적, 김대중이 북에 훔쳐줘
전두환은 육사 동기생인 김성진 공학박사로 하여금 국가전산원을 설치하게 하고 금융전산망에 이어 국가전산망을 완성토록 했다. 이 모든 노력으로 인해 우리의 정보기술과 정보통신 인프라는 일본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1986년 전두환은 대덕단지에 전자통신연구소(ETRI)를 설치하여 발명가인 서정욱 박사를 임명했다. 서정욱 박사는 CDMA(다중분할방식)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한국형 핸드폰을 개발했다. PC와 핸드폰, 인터넷 선진국이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낮과 밤 따로 없이 개발전쟁을 했듯이 전두환의 개발 현장에도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77명의 귀중한 생명이 밤낮으로 일하다가 순직한 경부고속도로 작업현장에 김대중과 김영삼이 달려와 큰 대자로 누워서 작업자들로부터 눈총을 받은 사실에 이어서, 김대중은 전두환이 피땀흘려 개발한 컴퓨터와 IT기술을 훔쳐다 북한에 주었다. 2001년 5월, 소망교회 담임목사 곽선희가 450억원을 북으로 들고가 [평양과학기술대학교]를 세워주었다. 평양에 KAIST를 세워준 것이다. 역시 KAIST 교수출신인 박찬모가 포항공대 총장을 거쳐 김대중에 한동안 중용됐다. 이 박찬모 교수가 50여명의 인터넷 교수 급 전문가들을 북에 데려가 북한판 KAIST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켰다. 오늘날 우리에는 물론 미국에까지 해킹공격을 가하고 해킹으로 자금을 훔쳐가는 기술은 이 시기에 길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박찬모는 그때부터 최근까지 평양판 KAIST의 명예총재직을 보유해왔다.
전두환과 김일성은 전생의 숙적
만일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특공조가 청와대로 침투했을 때 육군대령 전두환이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한민국을 중흥시킨 유신의 역사가 없었을 것이고, 유신의 역사가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도 없었을 것이며, 보릿고개의 시대가 한동안 이어졌을 것이다. 전두환이 청와대를 경비하는 30단의 지휘관이었을 때 그는 ”만일 북괴 공작조가 칠흑같은 밤에 청화대로 침투하면 어떻게 방어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당시로서는 답이 없었다. 생각 끝에 그는 조명탄으로 청와대 하늘을 대낮같이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곧장 실행에 옮겼다. 그가 가지고 있는 10문의 박격포를 반반씩 갈라, 5문은 청와대 오른쪽 하늘을, 5문은 왼쪽 하늘을 향해 지향시켜놓고, 조명탄을 병사가 집어넣기만 하면 자동 발사되어 청와대 하늘을 대낮같이 밝게 비추도록 해 놓았다. 이렇게 하면서도 그는 설마 조명탄을 발사해야 할 그런 극적인 상황이 발생하려나 했다.
그런데 1968년 1월 21일, 정말로 김신조 일당이 실제로 침투해온 것이다. 즉시 조명탄이 청와대 하늘에 발사됐다. 포에서 팡~하는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간 조명탄은 딱 소리를 내면서 밝은 빛을 발하며 나일론 천의 낙하산을 타고 바람에 흔들리며 서서히 내려왔다. 대낮처럼 밝으니까 침투조에 대해 조준사격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조명탄을 발사하지 못했다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자.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뉴스 보도들은 김신조 일당이 31명이고, 그 팀장이 김신조인 것으로 보도했다. 30명은 사살됐고, 김신조 한 사람만 생존하여 투항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2014년 1월 22일 TV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는 비밀 해제된 미 국무부 자료를 발표했다. 김신조 일당은 33명이었는데 정부는 31명으로 발표했고, 2명은 서부전선 철책선을 뚫고 달아났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침투조에나 맨 뒤에는 감시조인 ‘방차대’가 있다. 침투조를 지휘하는 조장과 그를 호위하는 2명이 옥상에서 상황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불빛에 잡혔다. 이 세 명을 모두 생포했다. 칠흑같은 밤에 전두환이 준비해놓은 조명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작두에 잘린 김신조 특공조 조장의 목
2011년 중앙 선데이는 세 차례에 걸쳐 매우 쇼킹한 뉴스를 전했다. 방차대 세 명이 보안사에 잡혀갔다. 조사관이 작두를 대기시켜놓고 세 명에게 회유작전을 폈다. ”임자들 살려 보내줄 터이니 북에 가서 대한민국에 충성하겠다는 충성맹세서 쓰라우“ 팀장인 김종웅 대위가 나섰다. ”이 보라구요. 사람 그케 만만히 보지 말기요, 우리에겐 조국도 하나 태양도 하나요. 수작질 하지 말라우“ 허세를 부리면서 엎드리더니 작두에 목을 걸었다. ‘네가 감히 목을 자르겠느냐’는 판단에서 기세 한번 부려본 것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어깨에게 조사관이 눈짓을 보냈다. 시퍼런 날이 내려지자 순간적으로 피가 튀었다. 머리도 한동안 뛰고 몸도 한동안 움직였다. 이 모습을 지켜본 나머지 두 조원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그리고 순순히 충성맹세서를 쓰고 지장을 찍었다. 림태영과 우명훈이었다. 보안사는 이 두명을 서부전선 철책선을 뚫어주면서 보냈다. 팬티만 입혀 도망하라 한 후 가라총을 마구 쏘아댔다. 간첩 이수근이 넘어올 때 북괴가 썼던 쇼를 우리도 사용한 것이다. ”철책선을 뚫고, 남조선 괴뢰들의 집중사격을 받으며 팬티만 걸치고 오로지 조국을 향한 충성심 하나로 달려온 두 영웅“ 이들은 그 후 북한의 이름 있는 영웅들이 되었다.
국정원 해체는 김일성의 소원이었고, 이 소원을 받들기 위해 조직된 남한 최대의 간첩단이 ‘남민전’이었다. 1979년 일망타진된 이 자생간첩단 ‘남민전’의 멤버로는 임헌영(민족문제 연구소장)과 이재오, 그리고 민주당 이학영 현의원 등이 있었다. 이 남민전의 구호가 ‘국정원 해체’였다. 그런데 30년이 채 안되는 시점에서부터 국정원이 해체되기 시작해 지금은 완전 해체단계에 와 있다. 김대중이 집권하자마자 가장 먼저 해체한 것이 국정원이다. 1998년 2월, 그는 취임하자마자 대공 전문요원 581명을 한순간에 악-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일거에 잘라냈다. 바로 그 해인 1998년 10월 북한에는 대규모 숙청작업이 단행됐다. 남조선을 위해 충성하는 ‘남조선 간첩’ 250명을 일거에 처형한 것이다. 3성장군 림태영과 2성장군 우명훈이 여기에 끼어 있었다. 박정희가 북에 키워놓은 우리 측 간첩명단을 통째로 북에 넘겨준 자, 그자가 누구였겠는가? 이는 2011년 말 중앙선데이 심층취재의 일부분이다. 이를 제보한 사람은 북한 중견간부 출신인 탈북자였다. 이 제보자는 림태영, 우명훈의 가까운 지인이었다. 김일성은 특공조를 10세 미만의 아이들을 상납 받아 살인기계로 키웠다. 이렇게 귀하게 키운 31명을 모두 사살하고 2명을 남조선 간첩으로 전향시킨 전두환이 얼마나 미웠겠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전두환은 1사단장 시절, 제1땅굴을 찾아낸 장본인이다. 땅굴 역시 특수 침투조만큼 귀중한 자산이었다. 이후 땅굴은 반드시 많다는 여론이 퍼졌고 제2, 제3, 제4땅굴이 연이어 발견되었다. 수많은 민간탐사자들이 사비를 들여가며 땅굴을 탐색하고 있으니 김일성의 땅굴게임은 심리적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김일성 입장에서만 보면 땅굴을 처음 찾아낸 전두환이 얼마나 미울 것이며, 김일성을 종교적 신으로 모시는 주사파와 운동권들은 또 얼마나 전두환을 미워했겠는가?
농락당한 김일성의 수해구호품
아웅산 폭파로 전두환을 암살하려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지 1년, 1984년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경기도에는 80년만에 처음으로 집중 폭우가 내려 47명의 사망과 실종자를 냈고, 수많은 가족들이 절단났다. 세계적으로 큰 피해라 세계적십자연맹까지 나서서 원조를 제의해 올 정도였다. 주말인 9월 8일, 북한이 희떱게 나서서 구호물자를 보내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것도 세계에 뽐내보겠다고 방송을 통해 의사를 전달했다. 쌀 5만 섬, 포목 50만 미터, 시멘트 10만 톤, 의약품 등 북한 실정으로는 너무나 과도한 물량이었다. 이는 전두환이 자존심 때문이라도 사양할 것으로 믿고 통 크게 부풀려 제안한 것이었다. 이 제안을 분석한 노신영 안기부장은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는 보고를 했다. 받아들이면 국민 자존심이 상처를 입고, 국제사회에 한국이 북한보다 못산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웅산 테러를 저지른 죄로 국제사회에서서 코너에 몰려있는 북한의 입지를 개선시켜줄 수 있고 국민의 대북 경각심이 해이해질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생각을 달리했다. 아웅산 테러에 대한 복수도 하지 못했는데 그나마 복수를 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한 적십자회 총재 유창순은 9월 14일, 북괴에 ‘귀측의 수재물자 지원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정중히 전달했다. 육로로는 판문점으로, 해상으로는 인천부두로 구호품들이 수송됐다. 그 많은 양의 물자를 장비의 도움 없이 어깨로 등으로 날랐다.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북한 방송은 ”북조선 인민들이 헐벗는 남조선 인민들을 위해 모두 나서서 땀 흘리고 있다“고 선전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우리 국민들은 북한 주민들이 너무 못살고 있는 것에 대해 가슴아파했다. 수재물자를 다루는 대형 수송선이 북에는 단 2척, 그중 한 척인 13,500톤급 대동강호가 시멘트를 싣고 오다가 침몰했다. 쑥색 5톤 트럭에서는 방금 도색한 페인트냄새가 진동했다. 땀을 흘리며 등짐을 지는 인부들이 새 옷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들의 배에는 돼지머리가 매달려있었다. 잘 때도 넥타이를 풀지 않았다. 넥타이를 스스로 맬 줄 몰라 풀면 다시 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인부들은 남조선 주민들이 헐벗고 못사는 줄로만 알고 사과, 배, 사이다, 빵이 든 봉지를 나누어 주었지만 품질이 나빠 식용이 불가능했다. 그들이 입은 옷과 신발은 6.25 직후의 수준이었고, 군량미는 굴속에 오래 둔 것이라 썩은 냄새가 났다.
우리 측 인부들이 도시락을 주문해 나누어 주었더니 받으려 하지 않았다. 적십자 간부가 ”우리를 위해 여기까지 와서 수고하시는데 아무리 그래도 점심 한 끼는 대접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했더니 높은 사람이 받아먹었다. 너도 나도 달려들어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해치웠다. 높은 사람이 오더니 더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 측 적십자사가 북한 측에 1,600개의 선물 세트를 준비하고 그 위에 ‘대한적십자사’라는 마크를 찍어 전달했다. 밍크담요, 카세트, 라디오, 전자 손목시계, 양복지, 양장지, 한복 옷감, 내의, 셔츠, 양말, 조미료, 화장품, 스타킹, 브래지어, 운동화 등 17가지가 들어있었다. 우리는 이 1,600개의 대형 가방을 3개의 컨테이너 박스에 싣고 갔지만 북한은 34대의 트럭에 옮겨 싣고 갔다. 북으로 간 후 이 1,600개의 선물은 김일성에게 바쳐졌을 것이고, 이는 다시 노동당 간부들에게 재분배 됐을 것이다. 김일성이 전두환에게 굴욕을 당한 것이다.
역공당한 김일성의 수공전략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6일까지 아시안게임이 서울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김일성은 1981년까지 아시안게임의 서울 유치를 방해했다. 게임을 평양에 유치하고 싶다고 신청한 것이다. 아시안게임 위원회 간부들이 북한을 먼저 방문하고 그 다음에 한국을 방문해 개최지로서의 적합성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북괴의 아킬레스건은 자존심이다. 자존심을 건드리기만 하면 발끈하여 감정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 전두환은 이것을 이용했다. 방문단에게 편지를 보내 평양을 갔다가 중국을 거쳐 서울에 오면 불편하고 여러 날 걸리니 평양에서 곧장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오라고 한 것이다. 방문단이 이 제의를 받아들여 평양에 물었다. 평양에서 판문점에 이르는 도로는 낙후돼있다. 판문점에서 서울로 오는 길은 고속도로와도 같다. 올림픽 방문단이 이런 길을 택할 경우 평양과 서울, 북한과 남한의 수준이 금방 드러난다. 김일성의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방문단이 우리 측 제안을 평양에 제시하자마자 북괴는 발끈하면서 아시안게임 평양 유치를 포기한다고 성질을 냈다. 사실 게임을 치를 능력도 없으면서 서울 유치를 방해하려던 것이었다.
남북 간에는 체제경쟁이 치열해 왔다. 1972년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가동되면서부터 남한보다 2배 이상 잘 살던 북한을 우리가 추월하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이 범국민 운동으로 전개되고, 중화학공업, 기계공업이 기적을 이룩하면서 남북의 경제적 위상은 5배, 10배 등 배수 급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이 선택한 길은 합리적인 경쟁,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테러와 암살이었다. 좋은 지도자를 암살시켜 사회를 혼란하게 한 다음, 남한에 키우고 있는 빨갱이들을 이용해 체제를 뒤엎고 무력통일하려는 일종의 일확천금의 노림수에만 의존해 온 것이다.
암살행진, 1981년 7월, 전두환은 필리핀으로 가서 마르코스와 정상회담을 했다. 주안점은 88올림픽 유치였다. 이때 캐나다에 거주하는 태권도 장군 출신 최홍희가 아들을 데리고 함께 전두환을 암살하려다 아슬아슬하게 극적으로 거사 직전에 캐나다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1982년 8월, 전두환은 올림픽 행사에 아프리카 국가들을 유치하기 위해 4개국 순방길에 올랐다. 김일성과 대남사업 담당 김중린은 가봉을 암살장소로 택했다. 대남사업 총책인 김중린이 최정예 공작원 4명을 암살조로 파견했다. 그런데 이 공작조가 콩고를 거쳐 먼 길을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다 죽었다. 이들과 합세하려고 가봉에서 대기하던 간첩조가 성질이 나자 군악대가 보유하고 있던 애국가 악보를 북괴가 악보로 바꿔치기를 했다. 애국가를 연주한다는 군악대가 북괴가를 연주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가봉 대통령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백배 사죄하면서 북괴와의 외교를 단절하고 전두환이 요청하지 않은 내용까지 다 동원해 환심을 사려 했다.
암살 음모는 이듬해인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의 아웅산테러로 또 다시 이어졌다. 테러는 성공하여 전두환이 기용한 두뇌급 인물 모두를 폭살시키기는 했지만 전두환을 살해하지는 못했다. 17명 사망, 15명 중상, 전두환은 즉시 북한 소행이니 퇴로를 차단하라고 버마 당국에 요청했다. 랑군강 하류를 수영해가는 소령을 잡았고, 소형 보트를 타고 도주하는 상위 2명을 체포했다. 진 모 소령은 체포 당시 수류탄을 던지려다 안전핀을 빼는 순간 폭발하여 부상을 입고 1985년 사형집행을 당했다. 5.18 광주에 왔던 신기철 상위(대위)는 총을 꺼내 미얀마 경찰에 저항하다가 사살됐다. 이 틈을 타 달아났다가 포위된 강민철 상위가 또 수류탄의 안전핀을 제거하여 던지려고 팔을 높이 드는 순간 수류탄이 폭발하여 오른팔을 잃고 체포됐다. 강민철 역시 광주에 와 트럭의 적재함 맨 앞에 서서 광주시내를 질주하고 다녔던 공작원이었다. 미얀마 경찰은 이 강민철의 입을 열기위해 공을 들였다. 여성 간호원을 배치해 정성스럽게 간호를 하게 했다. 난생 처음 여성으로부터 따뜻한 보살핌을 받자 마음이 흔들렸다. 조국에 대한 배신감도 느꼈다. 임무를 마치고 랑군강에 오면 동건호라는 쾌속정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라고 해서 믿고 있었는데 막상 달려와 보니 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수류탄은 안전핀을 뽑고 손잡이만 꼭 잡고 있으면 폭발하지 않고, 던져야만 폭발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강민철 폭파조에 제공된 수류탄은 안전핀을 뽑은 바로 그 순간 폭발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진 모 소령도 강민철 상위도 이렇게 해서 팔을 잃은 것이다. 공작원은 다시 북으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임무가 끝나면 즉시 현장에서 제거하려는 작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깨닫는 순간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나도 조국을 배신한다.’ 강민철 상위는 결국 자신이 북에서 파견된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폭파조가 북괴 공작조라는 것이 강민철에 의해 밝혀짐으로써 북괴는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됐다. 강민철은 1980년 광주에 왔기 때문에 한국에 오기를 열망했다. 2000년, 버마 당국은 그의 간절한 뜻을 한국정부에 전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그를 냉차게 거부했다. 김대중의 뜻은 곧 김정일의 뜻이었을 것이다. 김정일이 광주에 투입했던 강민철을, 조국을 배반한 강민철을 남으로 보낼 리가 없었던 것이다. 2008년 5월, 오갈 데 없는 강민철은 랑군 감옥에서 이미 해골상태가 되어가지고 사망했다.
김일성은 88올림픽만은 반드시 막아야한다고 작정하고, 전두환 암살을 끈질기게 획책했지만 아웅산테러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손가락질 받고 감시받는 테러지원국이 되었다. 그래서 방향을 돌려 다른 수단으로 88올림픽을 막으려 했다. 첫째가 ‘금강산 댐’으로 올림픽이 열리는 서울 자체를 물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KAL858기를 공중 폭파시켜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서울행 비행기를 타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만들려 한 것이다.
금강산 댐과 평화의 댐
공작과 음모의 화신 김일성, 1986년 4월 8일,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200억 톤의 저수량을 갖는 금강산발전소 건설계획을 확정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에서 가장 큰 댐이 소양감 댐으로 저수량이 29억 톤인데 200억 톤이면 거의 7배에 가까운 것이었다. 올림픽이 열리면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 것이니 세계 각국은 서울에 오기를 일찌감치 단념하라는 메시지였다. 이에 대한 대응책이 없으면 우리는 늘 불안 속에 살면서 북의 노예가 돼야했다. 1986년 10월 30일, 이규호 건설부 장관이 중대발표가 있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북괴가 저수량 200억 톤 규모의 금강산댐을 건설한다. 수공수단임이 분명하다. 방류하면 서울이 16시간 이내에 물바다가 된다.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63빌딩의 2/3가 물에 잠긴다고 한다. 대응 댐이 필요하다.”
금강산댐은 북한강을 따라 휴전선 26km 북쪽에 위치해 있다. MBC를 위시한 방송들과 모든 언론들이 나서서 “금강산댐 건설 음모”라는 제목으로 특집 방송을 하여 사회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1986년 12월, 모든 매체들이 나서서 국민 성금을 독려했다. 달동네 어린이가 생활비의 20%를 털어서 성금을 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도 소개됐다. 1986년 10월 제1단계로 댐 높이 80m, 저수량 5억 9천만 톤을 수용할 수 있는 ’평화의 댐‘을 착공했다. 사실 200억 톤이라는 북괴의 발표는 엄포의 심리전이었다. 이 세상에 그렇게 큰 댐은 없었다. 전두환이 1단계 댐으로 겨우 5억 9천만 톤의 대응 댐을 건설한 이유는 성금의 규모 때문이기도 했지만, 김일성에게 ’금강산댐을 건설해보았자 우리의 대응 댐으로 서울 수공전략이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만으로도 의표를 찌르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총 공사비 639억 원, 1986년 10월에 착공한 1단계 평화의 댐은 1988년 5월에 준공되었다. 북한강 따라 휴전선 남쪽 10km 지점에 건설된 것이다. ’평화의 댐‘이 건설되자 밤낮을 모르던 ’금강산댐‘의 건설속도가 지지부진해졌다. 의표를 찔린 것이다. 이것으로도 김일성은 88올림픽을 방해하지 못한 것이다.
1660년을 전후하여 조선에 표류해 14년 동안 조선땅에 잡혀있던 네덜란드의 선원 하멜, ’전쟁이 나면 달아나고, 누군가를 마녀사냥 멍석말이 하면 모두 다 몰려들어 짓밟는 인종‘이 조선족이라 했다. 조선족의 이 모습이 김영삼 시대에 재현됐다. 1993년 대통령에 오른 김영삼, 하나회를 해체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함으로써 박수를 받았다. 이에 신이 난 김영삼은 5-6공을 짓밟는 것으로 또 다시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른바 ’3대 의혹사건‘, 12.12, 차세대 전투기 사업, 평화의 댐을 공격목표로 삼았다. 전두환과 노태우, 이른바 군인 정치인이 주도한 모든 사업, 모든 행위가 다 추잡한 사기였다는 것을 여론화 함으로써 자신이 구름 위에 높이 뜨려 한 것이다. 언론의 인민재판이 이어졌다. 멍석말이와 마녀사냥이 김영삼의 주특기였다. ’대쪽‘ 이미지를 팔아 거품 위에 올라탔던 이회창이 김영삼 드라이브에 편승했다. ’3대 의혹사건‘ 모두를 감사원장으로서 감사했다. 적장의 목을 줄줄이 잘라오겠다며 박수를 받고 출발한 이회창의 창 끝에는 장장 8개월, 9개월의 감사결과가 매달려 있지 않았고, 별 소득 없이 마무리 되었다. ’사기‘는 군사정권이 친 게 아니라 김영삼과 이회창이 친 것이다.
차세대 전투기 의혹, 노태우가 처음에는 미 해군기인 F/A-18을 선정했다가 국방장관이 이상훈에서 이종구로 바뀌면서 깡통비행기 F-16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의혹이었다. F-16에 ’깡통 비행기‘라는 꼬리표를 단 사람은 조갑제였다. 한국군은 육군의 군대이지만, 미군은 해군의 군대이다. 해군력에 의해 장거리에 군사력을 투사시킬 수가 있다. 이른바 Long Range Power Projection Forces. 그래서 미국 국방비의 60%를 해군이 차지하고 있다. 해군력의 상징은 항공모함이다. 항공모함에는 80~100대의 F/A-18기가 실려 있다. 함재기는 짧은 이착륙거리에서 뜨고 내려야한다. 짠 해수에도 견뎌야한다. 그래서 비싸다. F/A-18기는 해군의 주력기이지만, 활주로가 길고 해수도 없는 공군의 주력기는 F-16이다. 우리 공군이 써야 할 무기는 단연 F-16이었다. 2023년의 어느날 조선일보 ’만물상‘에는 F-16예찬론이 구체적으로 담겨있었다. 1960년대, 미 공군 전투기의 모토는 ’멀리 보고 먼저 쏜다‘는 개념이었다. 그렇게 제조된 전투기가 F-4, 팬톰기였다. 이에 공중전의 대가, 이른바 ’파이터 마피아‘ 3인이 전투기의 전투 이론을 폈다. 유명한 보이드 대령, 스피니, 리치아니, 미 공군은 이들 3인에게 차세대 전투기 스펙을 의뢰했다. 이에 탄생한 것이 F-16이다. 2000년의 코소보 전투에서 미그기는 F-16의 밥이었다.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구가 이런 이론을 한 전문가로부터 터득했다. 보안사 사병 윤석양이 보안사의 민간사찰 문제를 터뜨렸다. 그래서 갑자기 국방장관이 이상훈에서 이종구로 교체됐다. 게다가 F/A-18은 장관이 바뀌면서 값을 두 배로 올렸다. 이런 것이 진실인데, 이회창이 무슨 비리를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언론을 동원하여 공연히 생사람들만 잡고, 비리는 단 한 개도 잡지 못했다.
평화의 댐은 어떻게 때려잡았는가? 국회 청문회부터 열어 관련자들을 망신주었다. 죄도 없이! 1993년 9월 4일, 감사원장 이회창이 3개월 동안의 평화의 댐 감사결과를 내 놓았다. “수공과장, 정권안보 이용”, “정권 안보용”, “국면 전환용”, “독재정권 유지를 위한 전시용 댐”, “국민을 기만한 사기극”, “우스개 된 평화의 댐”… 전두환은 그야말로 기찻길 철로에 깔린 깡통이 됐다.
이렇게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전두환은 인간 축에도 들지 못하는 사기꾼인 것으로 굳어져 왔다. 그런데 이 어쩐 일인가? 김대중 말기인 2002년 5월 7일, 갑자기 전두환이 영웅이 되고 평화의 댐이 효자댐이 되었다. 조선일보가 “15년동안 천덕꾸러기로 여겨왔던 평화의 댐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신동아는 2002년 7월호에서 “금강산 댐은 제2의 노동미사일이고, 또 하나의 핵무기다. 고의든 부실공사 때문이든 터지면 전시체제로 돌입할 수 밖에 없다”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일부 다른 신문들도 “평화의 댐, 존재가치 다시 부각” 등으로 거들었다. 2015년에는 오마이뉴스까지 전두환의 업적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런 보도는 찻잔 속 한 순간의 태풍에 지나지 않았다.
2002년 인공위성 사진에 저수량 26억 2,400만 톤 규모의 금강산댐에 커다란 함몰 부분이 생긴 것이 찍혔다. 그해 7월부터 북한은 서둘러 증축하기 시작했다. 26억 톤이면 서울이 물바다가 될 수 있었다. 김대중이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러나 김정일의 종이 돼버린 김대중으로서는 북괴의 수작을 그대로 방송할 수는 없었다. 냉가슴을 안고 김정일에 사정을 했다. “금강산 댐 안전문제를 공동조사하자.” 북한은 그렇게 하자고 해놓고 20일 만에 약속을 깼다. 철저히 상납만 하고 인간대접 조차 받지 못한 김대중, 국민에게 쉬쉬하며 평화의 댐에 도둑공사를 했다. 쉬~쉬~를 연발하며 80m의 댐을 125m로 높이는 공사를 했다. 총 공사비 1,950억 원. 전두환이 투입한 공사비 639억의 3배나 되는 큰 돈이었고 큰 공사였다. 평화의 댐 증축공사는 2002년 9월에 착공하여 2005년 5월에 준공됐다. 준공식에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준공식도 쉬쉬하며 자기들끼리 했다. 동네 이장만 참석하고 장관 차관은 한명도 없었다. 금강산 댐 담수량은 26억 2,400만 톤, 평화의 댐은 26억 3,000만 톤, 소양강 댐과 충주댐에 이어 제3의 댐이 되었다. 그리고 이 평화의 댐에는 전두환의 ’전‘자도 없다. 오로지 김대중과 세계의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들의 얼굴이 댐의 후사면을 가득 차지했고, 김대중의 이름만 도배 돼 있다. 평화의 댐을 도둑질해서 직접 착복한 김대중, 전두환이 곡간에 쌓아둔 달러와 컴퓨터와 컴퓨터기술을 도둑질해서 김정일에게 갖다 바친 김대중, 참으로 존경스러운 민주화의 영웅이 아닐 수 없다. 전두환이 붙여준 이름 ’평화의 댐‘은 ’도둑 댐‘, ’쉬쉬 댐‘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저 멀리 북한산 계곡 휴전선 턱 밑에 아직도 숨어있다. 꼭꼭! 그리고 이 댐을 시작한 전두환의 이름은 5.18민주공원 출입로 땅 속에 박혀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의 구둣발에 짓밟히고 있다.
김현희를 놓고 벌인 김일성과의 한판 승부
’서울 올림픽에 오다가는 공중폭파 당한다.‘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고안된 금강산 댐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일성은 한국으로 오는 민항기 공중폭파 사건을 기획했다. KAL858기 공중폭파 사건이었다. 노태우가 출마하는 제13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었던 1987년 11월 29일, 안기부장 안무혁으로부터 전두환에 긴급보고가 있다는 전갈이 왔다. ’북괴가 또 일을 저질렀구나‘ 예감이 적중했다. “버마 상공에서 KAL기가 레이더망에서 갑자기 사라졌다합니다” “북괴 소행이니 초점을 그리로 잡아 범인을 추적하세요” 1987년 11월 29일이었다. 바다 한 가운데 일엽편주처럼 떠있는 중동의 한 작은 왕국 ’바레인‘, 당시 인구 170만, 면적 778평방키로로 서울면적 605평방키로 보다 조금 더 넓은 나라다. 김현희가 여기에 도착할 때 까지는 김현희 공작조의 천신만고 과정이 있었다. 그들이 겪은 과정도 스릴 넘치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하지만 바레인에 있는 김현희를 1987년 12월 15일 새벽 04시에 서울로 데려올 때까지 15일 동안 바레인을 상대로 펼친 김일성과 전두환의 두뇌싸움은 치열한 외교전의 드라마였다.
만일 김현희의 신변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전두환은 집권 말기를 ’무능‘으로 마감했을 것이고 북괴는 버마(미얀마) 아웅산 테러에 이어 제2차의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김일성과 벌인 마지막 목장결투에서 최후의 승리를 장식한 것이다.
김현희는 1962년 생으로 일본어를 배우며 간첩으로 훈련됐다. 1987년 10월 7일, 공작 파트너 김승일과 함께 평양 룡성43 초대소에 불려가 폭파업무를 부여받았다. 목표는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아부다비-서울로 날아가는 KAL858기를 공중폭파시키는 것이었다. 이라크-UAE-서울 노선이었다. 김현희-김승일 조는 바그다드에서 KAL858기를 타고 비행기 선반에 시한폭탄을 올려놓은 후 아부다비에서 내려 로마로 도주하도록 기획돼 있었다. 맨손으로 출발한 이 공작조는 바그다드에 가기 전에 실로 긴 여정을 밟았다. 평양-모스크바-헝가리의 부다페스트-오스트리아의 비엔나-유고의 베오그라드-이라크의 바그다드. 바그다드로 가기 위해 4개국 공항을 거쳐야 했다. 각 나라를 거칠 때마다 제공되는 준비물들이 다 달랐다. 김현희 조를 거치는 간첩들은 전체의 그림이 무엇인지 모르고 부분만 제공했다. 보안이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전체를 아는 사람은 부품들의 조립자인 김현희-김승일 뿐이었다.
유고의 베오그라드 여직원이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들어있는 4개의 배터리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배터리가 없으면 임무수행이 불가능했다. 김현희는 기지를 발휘했다. 김승일로 하여금 공항직원에 항의해 말씨름을 하게 해놓고 잽싸게 엎드려 쓰레기통에서 배터리 4개를 다 확보했다. 바그다드에서 탑승한 김현희 조는 9시간 이후 자동폭발 하도록 폭탄시계를 세팅한 후 UAE의 아부다비에서 내렸다. KAL858기는 시한폭탄을 실은 채 아부다비를 출발하여 버마상공을 지나다 11월 29일 오후 2시 05분에 폭파됐고, 김현희는 로마로 도망가려다가 공항직원의 강제에 의해 계획에도 없던 바레인에 내리게 됐다. 비행기 사정상 2일을 초조하게 지낸 후 로마행 출국수속을 마치고 대합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탑승만 하면 북에 가서 공화국영웅훈장을 받고 김일성의 총애를 받게 돼 있었다. 그런데! 바레인 주재 일본대사관 직원과 바레인 경찰이 다가왔다. “당신의 여권은 위조이니 경찰서로 연행할 것”이라 했다. ’다 끝났다!‘ 김현희는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김승일에게도 건넸다. 담배 속에는 독약 앰플이 들어있었다. 그것을 깨물자 경찰이 김현희의 입 안에 들어간 독약을 황급히 꺼냈다. 일부는 삼키고 일부는 입에서 바닥으로 흘러나왔다. 이렇게 실갱이를 하는 동안 김승일은 여유 있게 앰플을 다 삼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일본의 정보가 참으로 빨랐다.
“무슨 수를 쓰든지 김현희를 꼭 데려오라” 전두환의 지상 명령이었다. 당시 중동 일대의 외교력은 북한이 장악하고 있었다. 국정원 대공수사부에는 앰플전문가 한 모 과장이 있었다. 그가 김현희가 사용했을 앰플을 가지고 바레인으로 급파되었다. 가지고 가는 앰플이 김현희 가방 속에 있을 담배속 앰플과 같은 물건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김현희를 인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김일성의 압력을 받은 바레인은 한국 사람은 누구든 만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한 과장은 미국 대사관을 통해 바레인 측 수사책임자 ’핸더슨‘을 만나게 해 달라 간청했지만 핸더슨은 바레인이 고용한 영국인이라 만남이 쉽지 않았다. 이에 정해윤 주 바레인 대사가 핸더슨 수사책임자를 만나 한 과장을 만날 수 있도록 설득했다. 결국 국정원 한 과장은 핸더슨을 만날 수 있었고 설득에 성공했다. 한 과장이 가져간 앰플과 김현희의 앰플이 일치한 것이다. 하지만 핸더슨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바레인 당국은 김일성의 눈치를 보며 김현희의 인계를 차일피일 미루었다. 서울에서 외무부 차관보 박수길이 급파됐다. 그리고 바레인에 협박했다. “김현희는 여객기를 공중에서 폭파시킨 반인륜적 범인이다. 국제적 폭발력이 엄청난 존재다. 이 엄청난 국제적 폭발력을 과연 바레인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 김현희를 바레인 법원이 재판하려면 기간이 오래 걸린다. 그 사이에 북한은 수단 방법 안가리고 김현희를 납치하거나 죽이려 할 것이다. 며칠 내로 김현희 숙소를 폭파할 것이라는 첩보도 있다. 북한은 중동지역에 나가있는 당신네 대사를 납치해 김현희와 맞바꾸자고 협상할 수도 있다. 한 순간이라도 빨리 손을 털어라.” 그로부터 12시간 후, UAE 외무장관 ’칼리프‘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현희를 서울로 데려가시오”
사건이 발생한 지 464일 만인 1989년 3월 7일, 제1심 재판이 열렸고, 그 47일 후인 4월 25일, 1심은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이 사형을 확정했다. 그리고 그 보름만인 4월 12일, 노태우는 서둘러 그녀를 특별사면 시켰다.
사건 발생 6일 만인 1987년 12월 5일, 조선중앙통신사는 KAL기 폭파와 북한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발뺌을 했다. 조총련과 남한의 종북자들이 소설도 쓰고 TV특집을 만들어 김일성의 의도를 받들었다. 미국과 일본이 각기 수사관들을 한국에 파견했다. 미국정부는 1988년 1월 21일, 북괴를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고 입국비자 발급제한, 경제적 압박조치를 가했다. 1988년 1월 26일, 일본 역시 대북제제를 강화시켰다. 하지만 노무현시대에 들어와 김현희는 MBC를 비롯한 언론의 집중공격을 받고, 국정원장을 필두로 한 반국가 인물들에 의해 거처가 폭로되었으며 외국으로 나가라는 압박을 받았다. 남편은 스트레스로 사망하고 김현희는 바퀴벌레 나오는 축축한 골방과 골방 사이를 이리저리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전두환도 대통령을 했고 노무현도 대통령을 했다. 중동에서 달러를 벌겠다며 뜨거운 사막에서 건설노동을 하고 금의환향하는 우리 국민 120명을 가루로 폭파시킨 김일성 집단에 대해 왜 전두환과 노무현이 정 반대 입장에 서야하는가? “저한테 꾸중만 하지 마십시오. 저는 위원장님을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NLL은 영토선이 아닙니다. 제가 북에 양보하겠습니다. 미군도 내 몰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두환은 김일성과 싸워 이긴 대한민국 대통령이었고, 노무현은 김일성 아들의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 다닌 민주화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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