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의미(7) 배울 것 많은 일본의 교훈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3-19 21:08 조회16,875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7. 배울 것 많은 일본의 교훈들
군함도, 배울 것을 놓고 모략부터 하고 보는 한국 좌파
하시마섬, 일본 남쪽 끝녘 나가사키시에, 제주도를 마주보고 있는 초소형 섬이다. 섬의 크기와 모양이 꼭 군함 같다 해서 군함도라 불린다. 남북 480m, 동서 160m, 전체 둘레 1.2km, 뒷짐지고, 산보하면 18분 정도 걸린다. 이 섬의 원래 크기는 지금의 3분의 1 정도였는데 1897년부터 1931년까지 무려 34년에 걸쳐 매립공사를 했다고 한다. 매립공사는 누가 무엇 때문에 했는가? 미쓰비시가 지금의 3분의 1 크기에 불과한 섬을 1800년에 사들였다. 해저 1km에 석탄이 매장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기 1,800년이면 우리 조선에서는 정조가 왕이었고,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이 이태리를 점령했고, 미국에서는 자유가 법을 향도해야 한다며 미국 민주주의를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토머스 제퍼슨이 백악관에 입주했던 시기다. 그 시기에 미쓰비시라는 한 기업이 해저 1km 아래 석탄이 대량으로 매장돼 있다는 것을 탐지해서 그 석탄을 캐낼 생각을 했다는 것이 매우 놀랍다. 한편으로는 석탄을 캐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층의 미니 도시를 건설했다. 그 시대에 10층짜리 아파트촌을 건설하고 학교, 병원, 상가, 위락시설을 컴팩트하게 건설한 토목기술과 건축기술이 참으로 놀랍다. 인구 5,000명, 헥타르당 835명, 당시 도쿄 인구 밀도의 9배로 세계 최고의 인구 밀도 지역으로 기록돼있었다고 한다. 1750년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석탄이 산업의 동력이었던 시절, 일본의 한 기업이 잽싸게 해저에 있는 탄광까지 개발한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정조가 즉위하던 그때의 조선과 그때의 일본을 대비시켜 보자. 5천 년 역사는 뭐 하는 역사이고, 5만 년 역사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석탄 시대가 석유시대로 전환되자 군함도는 제1차 석유파동이 있었던 1974년에 폐쇄됐고 무인도가 됐다. 170년 동안이나 일본 산업의 동력을 제공했던, 일본의 전설적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전쟁에서도 신사도가 있고 멋이 있는 법이다. 일본 해군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연합군 장군들은 독일의 롬멜 원수를 존경한다. 적국이라 해서 모든 것을 조선 좌익들처럼 적대시하고 모략하고 비하한다면 이 세상은 벌써 지옥이 됐을 것이다. 초미니 섬을 3배로 확대해서 그 위에 10층짜리 고층 아파트를 1800년대에 건설했다는 사실은 분명 경이로운 역사다. 서울의 아파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와우아파트로 출발하지 않았던가? 이는 배움의 대상이지 모략의 대상이 아니다. 당시의 미쓰비시의 파이어니어 정신은 우리가 이제라도 연구하여 지혜와 교훈을 이끌어내야 할 학습의 대상이다. 이후에 소개되겠지만 우리는 특히 일본 문명과 문화의 원동력인 일본 유수기업들의 족적을 학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어떻게 일본의 신화를 창조해 냈는지 겸허한 자세로 배워야 할 것이다.
옷깃을 여며야 할 이 학습의 대상 앞에서 북조선 신봉자들은 무슨 짓을 했는가?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들어 군함도를 살인섬이라고 모략했다. 조선 청년 수백 명을 강제로 끌어다 혹사시키고,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굶기고 학대해서 122명이나 살해(killed)했다고 모략했다. 영화 [군함도]는 그 증거를 두 가지로 부각했다. 하나는 1965년 조총련이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탄광 벽에 끄적인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 낙서 영상을 1940년 전후에 조선 청년들이 쓴 글이라 거짓 모략을 했고, 시기를 알 수 없는 일본인 광부들 사진을, 조선인 광부였다고 사기를 쳤다. 금방 탄로가 나서 일본인들의 비웃음을 살 이런 짓들을 저들은 왜 업무 삼아 하는 것인가?
거울로 삼고 학습을 해야 할 기념탑에 가서 겨우 '지옥섬'으로 매도하고 모략할 생각만 할 줄 아는 인종이 바로 김일성 추종자들인 것이다. 초호화 유람선, 온갖 화려한 장식과 화려한 쌍쌍 무도회가 열리는 공간에 가서 겨우 한다는 것이 어디에다 배설해 놓을 것인가만 생각하는 북조선 추종자들,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오로지 서산대사의 말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이 한마디 말뿐이다, 식민지? 좌익들은 주장한다. 해방 전에는 일본의 식민지, 해방 후 지금까지 79년 동안은 미국의 식민지라고! 이들이 아는 건 식민지 하나뿐이다.
일본은 미국을 배웠다.
같은 패전을 했어도 일본은 온 세계인이 벌벌 떠는 원자탄 폭격을 받아 비참하게 패했다. 그 후유증이 자손대에까지 대물림되는 고약한 방법으로 패했다. 통상의 민족이라면 미국을 두고두고 원망할 것이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을 쿨했다. 패배를 인정하고 미국이 일본보다 잘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Made in U.S.A! 미국이 만든 제품이 아니면 쓰레기였고, 미국의 GNP가 세계 GNP의 54%를 차지했던 시기, 자만에 차 있었던 미국 땅에 깃발을 든 일본인들이 줄줄이 건너가 미국을 견학했다. 미국 공장에마다 견학을 시켜달라는 일본인들이 줄을 섰다. "저 코 납작한 잽(Japanese)은 왜 저 소란이야?" 공장장이 물었다. “아, 네. 공장을 견학시켜 달라 합니다." "그래? 다 보여줘서 얼른 보내. 일본은 백년이 가도 미국 못 따라와, 그러니 다 보여주라구." 일본인들은 특유의 감사를 표시하면서 열심히 견학했다.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일본인들의 구호였다. 한국인들처럼 실속도 없으면서 아는 체부터, 잘난 체부터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은 머리가 비었는데도 잘난 척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른다." 1893년 윤지호 일기장의 글이다. "조선인들은 허영심이 강하다." 마리니 콜라앙투앙 프랑스 선교사의 말이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떡잎부터가 달랐다.
SONY, 소니의 신화를 만든 사람은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리오'였다..
이 두 사람은 태평양 전쟁 때 동굴에서 해군이 추진하던 열 추적 유도탄, 오늘의 ‘사이드 와인더’를 연구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두 사람은 헤어지기가 싫어 미지를 개척하자는 뜻으로 천막을 쳤다. 이들은 두 사람의 모임을 '미지의 개척자' (Seeker of the unknown)라고 이름 지었다. 녹음기를 만들기로 했다. 가느다란 철사에 녹음을 시키는 것까지는 성공을 했지만 편집했을 때 자르고 때우는 과정이 문제였다. 이때 맥아더 사령부에서 활성기가 울려퍼졌다. 저것이 녹음기일 것이라는 생각에 달려갔다. 모리타 아키오는 미군 장교를 설득해 녹음기를 몇 시간 빌렸다. 녹음은 철사에 돼 있는 것이 아니라 질긴 테이프(질긴 종이)에 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을 다 뒤져도 질긴 종이는 없었다. 마분지에 자석 가루를 칠해 만들기는 했지만 상품 가치가 없었다.
이들의 두 번째 목표는 트랜지스터로 라디오를 만들어, 손에 들고 다니면서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라디오는 진공관 라디오, 덩치가 크고 가구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됐었다. 이 진공관 라디오는 미국 TI(Texas Instrument)사가 발명했다. 트랜지스터는 1948년 미국의 벨 연구소 (Bell laboratory)에서 발명했다. 모리타 아키오는 벨 연구소에 가서 트랜지스터 사용 권리를 사겠다고 했다. "무엇에 쓰려구요?" "네, 라디오를 만들려구요", "그렇다면 공짜로 사용하세요" 그것이 상품 가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1955년, 모리타 아리오는 세계 처음으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지고 미국시장을 노크했다. 손바닥만 한 라디오에 관심을 갖는 바이어가 없었다. 3일 동안 생각을 한 모리타는 신문광고를 생각해 냈다. 고객에 직접 알리면 바이어가 대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이 신문광고의 효시였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계 제작 회사 부로바사 중역이 찾아왔다. 20만 개를 주문하겠으니 OEM으로 해달라고 했다. 라디오에 SONY 마크가 아니라 부로바 마크를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일본 본부에 의사를 타진했더니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계약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모리타는 이를 거절했다. 부로바 중역이 놀래서 찾아왔다. "부로바사는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소니 제품에 부로바 마크를 넣는 것이 얼마나 횡재인지 모르십니까?" "네, 잘 압니다. 부로바사도 50년 전에는 우리 SONY사와 같은 처지에서 출발하셨겠지요. 우리도 부로바처럼 열심히 하면 50년 후에는 부로바사처럼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니사 제품은 소니 마크로만 판매하고 싶습니다" 그 후 40년 만에 두 회사의 프로필은 완전히 역전돼 있었다. 그다음 목표가 워크맨이었다. 모리타의 발상이었다. 소니의 초대 회장은 이부카 마사루, 그는 모리타의 연장자였다. 미국을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영문 포켓북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바로 요만한 사이즈의 캠코더를 만듭시다." 경박단소! 작고 가볍게 만드는 기술, 이것이 없으면 최첨단 전투기도 인공위성도 없었다. 그는 SONY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오랫동안 길러온 젊은 음악가 출신 오가에게 물려주었다.
토요다의 카이치로, 자동차에 관심을 가졌다. 미국에서는 한 개의 차종을 제작하기 위해 컨베어 벨트를 설치하면 수만 대씩 만들어 내고, 다른 차종을 위해 세팅을 했다. 그러나 일본에는 생활 수준으로 인해 한번 세팅을 하면 수천 개 정도만 생산했다. 생산효율상 미국 차와 경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이치로는 세팅 시간을 10분의 1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소품종 대량생산 체계에 대항해 일본은 다품종 소량생산 체계를 발전시켰다. 사람들은 남과는 다른 옷, 남과는 다른 독특한 차량을 갖기를 원한다. 따라서 일본의 다품종 소량 생산시스템이 국제시장에서 미국을 따돌리게 된 것이다. '적시 생산'(JIT Just IN Time)시스템도 토요다의 창조물이었다. 간단히 모델화하여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12대의 기계가 있었다. 기계 한 대에 한 사람씩 서서 일했다. 각자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일할수록 기업의 손익계산서에는 이윤이 줄어들었다. 더 열심히 일할수록 이윤은 더 많이 감소했다. 김영삼 시대인 1993년 서울공대 산업공학과 실력 교수인 이면우가 [W이론을 만들자]는 책을 써서 베스트 셀러가 됐었다. 이론의 요지는 열심히 일하도록 신바람 문화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신바람 나게 열심히 일해서 1인당 생산량이 증가했는데 왜 토요다에서는 이윤이 더 빠르게 감소했는가? ‘참으로 이상하다. 왜 1인당 생산성이 향상되면 될수록 손익계산서 상의 이윤이 저하되는 것인가?’ 토요다의 '오노' 부장, 식사를 하면서도 화장실에서도 그 생각만 했다. 그러다 한순간 무릎을 쳤다. 12사람의 작업대 앞에는 각자가 작업한 부품이 많이 쌓여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쌓여 있는 재고는 1개월 동안 소화가 안됐다. 1개월 후에 가공해도 되는 것을 미리 가공해 놓은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이자가 더 많이 날아가는 것이었다. "아하~. 전 공정은 후공정에서 소화한 것만큼만 생산하고 시간이 남아도 일하지 않는 것이 이익이 된다." 기막힌 논리를 찾아낸 것이다. 차라리 쉬는 것이 더 이익이었다. 각자에게 남는 시간이 또 아까웠다. 그래서 1인이 2개의 기계를 다루도록 했다. 결국 12사람이 다루던 12대의 기계를 한 사람이 다루게 된 것이다. 12대의 기계를 한 사람이 다루게 하려면 기계를 U자형의 연속으로 배열해야 했다. "전 공정은 후공정이 소화한 것만큼만 생산하라" 재고가 쌓이지 않았다. 커플링! (Coupling)! 에누리 없이 찰카닥 궁합처럼 공장이 가동되어 공정과 공정 사이에 재고가 없도록 한 것이다. 이를 이름 짓기를 JIT시스템(적시생산)이라 했고, 이는 토요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일본 사원들의 학습능력, 몰두능력,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그것이 일본의 강점이다. 일본을 욕하고 멸시하는 한국인들에 묻는다. 왜 일본에는 노벨상이 많이 떨어지는데 한국에는 노벨상이 김대중이 탄 이상한 평화상 말고는 단 한 개도 안 떨어지는 것인가?
일본이 이렇게 노력하는 동안 미국은 자만했다. 1957년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가 구름처럼 운집한 일본 군중에게 연설을 했다. "존경하는 일본 국민 여러분,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파자마를 만듭니다. 그리고 손수건도 만듭니다. 왜 이런 걸 더 많이 만들려 하지 않습니까?" 그는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흔들어 보이면서 일본인들을 비꼬았다. 이런 거나 만들면 됐지 왜 Made in U.S.A를 흉내 내겠다고 공업제품과 전자제품을 만들려고 애를 쓰느냐, 비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25년 후인 1982년, 미국인의 자동차 선호도 조사에서 일본이 1, 2, 3등을 차지했다. 미국차는 겨우 7위를 차지했다. 미국의 거리거리에 일본차가 미국차보다 많아보일 정도였다.
미국과 일본과의 경제전쟁
미국과 일본, 일본은 철광석의 99.6%를 오세아니아, 인도양, 라틴 아메리카에 의존한다. 원유의 99.8%, 천연가스의 79.2%, 석탄의 92.7%, 망간의 94.0%, 크롬의 93.5%는 페르시아만, 오세아니아, 인도양, 서남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중국, 동남아 등 먼 곳들에 의존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자원의 보고이며 과학 기술의 요람지이자 현대 경영학이 싹튼 곳이다. 모든 분야에서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앞서 있는 미국 경제가 이후 20여 년 동안 일본에 수모를 당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일본의 경영능력이 미국을 능가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기업들은 미국 기업들보다 더 많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 기업의 경영제도는 종신고용, 근무환경 개선, 직장교육, 연구개발 투자, 가치문화, 품질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세계의 교과서가 되어 있다. 이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조성한 '블루리본 위원회의 평가다. 일본 기업들이 장기적인 투자를 해 가면서 2~3%의 투자 대 수익율 (ROI: Return on Investment)를 올리는 동안 미국 기업들은 15% 이상의 투자 수익율을 단기에 올리기 위해 성장 동력인 장기투자를 생략했다. 이 차이가 일본을 품질 일등국으로 만든 것이다. 이 역시 미국의 불루리본 위원회의 평가였다.
미국은 변호사 천국이다. 1980년 당시 미국에는 50만 명이 넘는 변호사가 있었고 매년 4만 명 정도의 변호사가 배출되고 있었다. 이들은 그들의 역할을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러 사건을 만들어 일을 지연시켰다. 사건이 해결되면 판결 금액의 65%를 챙겼다. 이에 미국의 지식인들은 미국이 변호사들 때문에 망해가고 있다고 탄식들을 했다. 반면 일본은 과학기술의 천국이었다. 인구는 미국의 절반 수준이지만 겨우 2만 명의 변호사가 있었을 뿐이다. 매년 300명 정도의 고시 합격자들이 나오지만 이들은 판사, 검사, 변호사로 쪼개지기 때문에 변호사가 귀했다. 따라서 분쟁이 생기면 당사자 간 타협으로 해결했다. 일본인들의 독서문화, 대화 문화, 예절문화가 이를 충분히 가능하게 했다. 이처럼 미국이 변호사들을 양산하는 데 교육비를 쓰고 있을 때 일본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양산하는 데 교육비를 썼다. 당시 일본은 미국보다 2배 이상 많은 엔지니어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인문계 교육을 줄이고 자연과학 육성에 자원을 배분했다. 머리 좋은 학생들이 법대로 몰리는 대한민국의 교육 현상은 이래서 비관적인 것이다.
일본 기업들이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때마다 미국 기업들은 언 발에 오줌만 누었다. 변호사들을 이용해 특허 소송을 냈다. 1975년 소니가 Betamax를 개발했다. TV 방송 프로를 녹화했다가 퇴근 후에 볼 수 있는 VCR (Video Cassette Recorder)이었다. Time Shift, 특정 시간에 방송되는 귀중한 프로를 시청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신의 선물이었다. 일본이 이 VCR을 발명하자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월터 디즈니' 제작사가 소니에 즉각 소송을 제기했다. VCR이 공중 전파를 녹화(Taping from the air)하여 저작권(Copy Right)을 침해하는 기계라는 것이었다. 이 소송은 8년 동안이나 지속됐지만 결국 미국 법원은 소니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우리나라 김능환과 김명수 같은 대법관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판결이었다.
미국 기업들은 소송으로 앞서가는 일본 기업들을 제지시키려 했지만 이는 미국인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만 추락시켰다. 이러는 동안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 폭은 해마다 늘어났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 무역 분쟁이 일었다. 미국은 일본을 무역 침략자로 규정했다. 갖가지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미국을 홍수처럼 침략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1,000억 달러어치의 일본 상품을 수입해주면 일본도 그만큼의 미국상품을 수입해야 한다는 상호주의(Reciprocity) 원칙을 내세우며 일본을 공격했다. 이에 일본은 미국의 주장을 보호무역주의적 발상이라고 받아쳤다. “인구만 하더라도 일본은 미국의 절반인데, 어떻게 밥량을 2배씩이나 올려 먹을 수 있느냐? 동등주의 (Equal Treatment)로 하자. 일본도 미국에 가서 미국법을 지키면서 미국인과 동등한 조건에서 뛰었으니, 미국도 일본에 와서 동등한 조건으로 뛰어라.”
1980년에 미국은 일본에 통신 시장을 개방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통신장비는 일반고객이 아니라 기술 전문분야 사람들만 사용하는 기계다. 미국인 통신전문가들도 미국제품과 일본제품을 놓고 비교해서 일본제품이 우수하니까 쓰는 것이다. 기술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무역역조 현상을 정부가 개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 시기가 Made in U.S.A가 Made in Japan에 밀리는 전환의 순간이었다.
일본 기업 문화 Vs. 미국 기업 문화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인들에는 NIH(Not Invented Here)증후군이 팽배해 있었다. 미국에서 생산되지 않은 제품들은 다 쓰레기라는 심리적 자만심이 팽배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일본은 미국 땅을 샅샅이 뒤지며 배울 점 등을 배워다가 일본인 특유의 집합적 창의력으로 개선(KAIZEN)하여 완전한 일본제로 승화시켰다. 미국을 카피(복사)한 후 미국을 능가하는 제품을 창조한 것이다. 미국이 종이에 담아놓은 기술(Paper technology)을 생산기술(Production technology)로 잽싸게 전환하여 돈을 벌었다. 일본이 무서운 것이 무엇이고, 일본을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학습력과 창의력이다. 이를 부정한 경영계의 전문가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무역역조는 양국 경영문화의 산물이었다. 잠시 미국과 일본의 경영문화를 살필 필요가 있다.
미국인 경영자들의 봉급은 단기 이윤의 크기에 비례한다. 이럴 때 경영인들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단기 이윤 부풀리기에 올인하게 돼 있다.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을 뒤로 미루었다. 종업원을 교육시키고 학습시키는 시간을 아꼈다. 근로환경을 개선하는데 지출하기를 꺼렸다. 근로자들은 또 어떠했는가? 직장의 삶의 공간이 아니라 봉급을 벌기 위한 지옥이었다. 직장에서는 보수를 받고 여가는 밖에서 즐긴다는 의식이 팽배했다. 타임 카드를 가지고 회사들과 게임을 했다. 같은 분량의 일을 해도 시간을 늘려서 했다. 그래야 시급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반면 일본 기업의 최고 경영자는 맥아더 사령부 때부터 신입사원 연봉의 8배 이상 높일 수 없게 했다. 그 대신 최고 경영자는 출장 때 1등 칸을 타고, 초일류 호텔에 묵는다. 기업이 아무리 많은 수익을 내도 간부들에 보너스를 주지 않는다. 주식의 배당금에도 많은 세금을 물렸다. 일본의 직장은 행복을 누리고, 자아실현을 위한 공간이었다. 높은 봉급보다 더 행복한 것이 자기 능력의 계발이었다. 근로자들이 직장에서 행복하면 할수록 그 행복은 기업에 도움이 되었다. 방법을 개선하고, 새로운 것을 발명해 내는 것, 이것이 일본 직장인들의 행복이었다. 직장에서 타임 카드로 게임을 하고, 그 급료를 가지고 행복을 밖에서 찾는 미국 직장인들과는 게임 자체가 될 수 없었다. 미국 경영자들은 보스(Boss)였지만, 일본 경영자들은 코치요. 토의 상대였다. 미국에 진출한 혼다(Honda)자동차 공장에 취직한 미국인들은 포드나 크라이슬러에 고용된 미국인들에 비해 굉장한 우월감을 느낀다. 일본의 자발성과, 미국의 타임 카드, 전자는 인격이고 후자는 노예다.
미국은 간부의 단기 이윤이 저조할 때 책임을 묻지만,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회장인 마쓰시타 고노스케, 한 중역이 의사결정을 잘못해 기업에 엄청난 손해를 끼쳤다. 그런데도 고노스케는 그 중역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더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했다. 반면 결재서류를 이면지에 써서 올리라는 명령을 위반하고, 결재서류를 새 종이에 써서 올린 간부에 대해서는 강등을 시켰다. 사원들이 의아해하면서 질문을 했다.
"회장님, 지난번 모 중역은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는데도 용서하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번의 모 간부님은 하찮은 이면지 사용 명령을 위반했습니다. 회장님께 이면지를 내민다는 것이 황송해서 그랬는데 그런 것을 이렇게 엄하게 처벌하시는 것이 도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이에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이렇게 답했다. "아무개 중역은 모든 회사원이 다 인정하는 열성을 가진 간부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간부가 어쩌다 한번 저지른 실수를 탓해서 해고하면 이후 그 누가 열심히 일을 하겠는가? 하지만 이면지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태만이다. 태만은 개인에게나 조직에게나 다 같이 암적 존재다. 태만은 반드시 처벌돼야 한다." 그 대신 고노스케는 그 중역이 무엇 때문에 손실을 입혔는지 그 원인을 규명하는데 두뇌를 투입했다. 실수로부터 개선책과 교훈을 찾아내려는 노력이었다.
미국인들이 경험 요소를 중시하여 전통과 관습에 젖어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신인들을 선발해 목표와 비전을 제시해 주고 책임과 권한을 부여했다. 미국은 종업원 1인에게 한 가지 일만 맡기고, 그 일이 소멸되면 종업원을 해고했다. 하지만 일본은 한 종업원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향상시켜 주었다.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던 사람이 공장에서 일하게 했다. 가장 유능한 세일즈맨은 기술 현장을 아는 사람이다. 소품종 대량 생산 환경에서는 숙달이 중요시되지만, 다품종 소량생산 환경에서는 만능 인간, 만능 기계가 필요했다. 결원이 생겨도 다른 부서 사람이 보충할 수 있었다. 올 코트 프레싱도 가능했다. 노예 마인드를 가진 종업원과 주인의식을 가진 종업원, 일본의 기업 문화로부터 세계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무엇이 잘못됐느냐 Vs. 누구를 처벌해야 하나
기업에서나 공공의 공간에서는 늘 문제가 발생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본,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은 문제의 발생 원인을 규명하고 교훈을 이끌어내서, 다시는 같은 종류의 문제가 재발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창조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기업에서나 공공 공간에서나 이러한 노력이 전혀 없다. ‘누구를 처벌하고 잊을 것이냐?!’ 이것부터 따진다. 잘못의 원인을 가장 잘 찾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사고에 관련돼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을 감옥에 넣겠다며 분석 능력 없는 경찰이나 검사들부터 달려드니 그들이 사고의 원인을 밝혀 주겠는가? 모두가 은닉하고 변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같은 사고가 연년세세 이어지고 반복되는 것이다. 역사를 위조하고, 사실을 위조하는 이런 국민은 역사로부터 절대로 배우지 못하는 '후진 국민'이 될 수밖에 없다.
1942년의 IBM 왓슨(watson)회장, 중역 중 한 사람이 회사에 당시 화폐로 1천만 달러의 손해를 끼쳤다. 그는 얼굴을 들 수 없어 사표을 우송하고 칩거했다. 왓슨 회장이 그를 불렀다. “자네, 내가 바보인 줄 아는가? 나는 자네에게 1천만 달러나 투자했네, 자네가 나가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그 역시 자네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 있을 걸세, 잘못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면 그것이 바로 돈일세, 분석가들과 함께 잘못의 원인을 규명하고 교훈과 대책을 이끌어내게. 그리고 당신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한번 실수했다고 자르면, 그 누가 책임의식을 가지고 도전적으로 일을 하겠는가? 모두 다 안전 빵으로 몸을 사릴 것이 아닌가? 그러면 회사는 끝장나는 거라네.”
1993~98년 대통령이었던 김영삼 시절, 성수대교 붕괴, 위도 페리호 침몰 사고, 수학여행 간 학생들이 불에 타서 집단 사망한 사고, 대구지하철 사고 등 끔찍한 사고가 계속 발생했다. 그때마다 경찰과 검찰은 억울하고 힘없는 말단들만 잡아넣고, 손을 털었다. 김영삼은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청와대 고급의자에 앉아서 '뼈'만 깎는다고 발표했다. IMF 사고를 스스로 일으켜놓고도 그때는 뼈를 다 깎아내고 없어서인지 뼈를 깎겠다는 말도 못 하고 내려왔다.
'위도'라는 섬을 향해 휴가인들을 과밀하게 태우고 가던 페리호가 침몰한 사건을 기억하는가? 그 얼마 전, 영국에서도 같은 사고가 발생했다. 영국에는 지브러히라는 섬이 있다. 그 섬을 왕복하는 페리호 선박이 관광객은 잔뜩 싣고 가면서 커브를 틀자 사람들이 우루루 쏠려 집단으로 물에 떨어져 사망했다. 똑같은 종류의 사고가 났는데, 영국과 대한민국이 취한 조치가 하나는 선진국, 하나는 미개국이었다. 대한민국은 검찰이 몇 명만 잡아 감옥에 보냈고, 그것이 끝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달랐다.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찾아낸 것이다. 문을 단속하는 선원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선박이 출발하기 전에 문을 잠그지 않았는가?" 선원이 답했다. "이날은 휴일이고 원체 승객이 많아 선장이 이를 고려해 출발 시간을 약간 늦출 줄로만 알았습니다. 승객이 너무 많아 승객을 안으로 밀어 넣고 있을 때 선장이 갑자기 출발하면서 커브를 틀었습니다." 그럴듯한 이유였다. 이번에는 선장에 물었다. "당신을 왜 승객 사정도 고려하지 않고, 정시에 출발했는가?" "저는 원래 시간을 준수합니다. 선원들이 그 시각에 맞춰 출발 준비를 완료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까지 정시를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이에 영국 조사관들은 무슨 결론을 내렸을까? 대한민국처럼 희생양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사고의 원인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부재’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 관리 선원들과 선장 사이에 소통하는 수단이 전혀 없었다. 이 시스템 하나만 있었어도 사고는 예방될 수 있었다.
시스템! 영국은 비단 선박뿐만 아니라 인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공공시설, 공공 공간에 대하여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요인을 찾아내고, 그것을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치할 것을 강제화했다. 사고 예방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을 표준화시킨 것이다. 영국 표준 BS-5750, British Standard 5750이었다. 국제사회가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영국 표준 5750을 국제표준 2000(ISO2000: International standard organization)으로 채택하여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모든 세계기업은 최소한 ISO로부터 ISO-2000 표준에 합격했다는 인증서를 받아야만 국제시장에 제품을 출품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냉장고를 출품하는 기업은 최소한의 품질을 제조해 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었다는 것을 인증서로 증명해야만 출품할 수 있었다. 바이어(Buyer)들이 제품 하나하나를 일일이 평가할 수는 없다. 생산 시스템이 훌륭해야 제품도 훌륭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기업의 기본 시스템을 ISO-2000 표준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이 엄청난 발전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영국 지브러히 페리호 사고의 산물이었다. 사고 현장만 쓸어 묻어버리고 손을 털어버리는 대한민국의 오늘과 30여 년 전의 영국 사이에 얼마나 깊은 강이 가로놓여 있는가? 이런 후진국적 문화에서 어떻게 삼성, 현대, LG 등이 탄생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지 그것이 불가사의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오늘의 국민들, 현재 살아남고 있는 것은 생명이 국가 시스템에 의해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토정비결이 좋아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공공안전 시스템이 황무지에 가까운 나라, 그것이 잘난 체하는 한국인들의 나라인 것이다.
2010년에 해군 미니 구축함 천안함이 침몰됐다. 몇 줄의 뉴스만 봐도 북괴 소행이었다. 그런데 그 원인에 대한 진단들은 현장에서 사고를 당한 군사 전문가들 입에서 나오지 않고 물 밖 멀리에 떨어져 사는 붉은 주사파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붉은 좌익들은 "미군 잠수함이 침몰시킨 것"이라 했고,
당시 대통령 이명박은 "내가 배를 지어봐서 아는데 배가 낡아서 피로파괴한 것으로 보인다"고 예단했다. 바다 건너 먼 곳에 있던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이명박의 한심한 소리를 듣고 이명박에 전화를 걸었다. "미국, 영국, 스웨덴, 호주 등에서 잠수함 전문가를 모집해 보낼 테니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어떠세요?" 15명의 국제 전문가가 한국에 왔고, 여기에 한국 과학계 전문가를 합쳐 조사한 결과 북한 소행임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래도 주사파들은 물러서지 않고 지금까지도 미국 잠수함 소행이라는 괴담을 뿌리고 있다.
그런데! 그다음 대에 대통령이 된 박근혜 시대의 2014년, 세월호가 침몰돼 수백 명의 어린 생명들이 학살됐다. 학살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사고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공작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었던 사고였고, 침몰 후에도 선장과 선원들이 대량 인명피해가 날 수밖에 없도록 이상한 조치들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 사고 역시 그 4년 전에 발생했던 천안함의 경우처럼 행정부가 나서서 전문 기술자와 과학자들을 모집하여 조사팀(TF)을 꾸려 과학적 조사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박근혜는 4년 전의 천안함 사고로부터 아무런 지혜도 얻지 못해 행정부 소관 업무를 방기했다. 그래서 사고의 원인은 주사파들로 구성된 민주당 의원들과 반국가 분자들에 의해 괴담으로 발전했고, 그 괴담이 박근혜 탄핵에 물꼬를 텄다. 학습도 없고, 사색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민주주의 국가라는 허울이 있기에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이 되고, 그 자유 속에서 피어난 창의력이 '열대의 대지에 드문드문 솟아난 선인장'처럼 꽃이 되어 경제적 부를 누리고있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는 권력자는 없다. 학습 능력, 학습 습관이 없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주위를 자기중심적으로 통제하려는 독재를 한다. 팔로우들의 창의력을 이끌어내려는 마인드 자체가 없다. 학교는 누구나 다 다녔다. 학교란 무엇인가? 물고기를 잡아 주는 곳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기초만 알려주는 것이다. 물고기는 각자의 창의력으로 잡아야 한다. 독서가 없고, 상대방을 존중하려는 매너가 없고, 사색력을 습관화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재주 하나 길러가지고 출세들을 하는 세상이 대한민국 세상이다.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가장 많은 나라이지만 학습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적은 나라가 대한민국인 것이다.
일본의 토의 문화 QCC
창의력,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다 같이 가지고 있다. 창의력은 발전의 원동력이다. 이 귀중한 창의력을 한국인들은 활용을 하지 않고,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잘 활용한다. 4만 명의 도요타 자동차 회사에서는 매년 평균 260만 건의 창안 안건이 제안되고, 그 96%가 반영된다. 마쓰시다와 후지전기는 근로자 1인당 평균 매월 10건씩의 창안 안건이 제출된다. 이 중 50%가 반영이 됐다. 1950년, 자동차 한 대를 만드는데 토요다는 포드에 비해 10배나 많은 인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25년 후인 1975년, 토요다 생산성이 미국을 훨씬 앞질렀다. 토의 시스템 때문이었다.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일본의 레저업체 ‘하와이언 스파’, 토의로 인해 태어난 기업이다. 1750년 영국에서 발아된 산업혁명, 석탄이 에너지원으로 등장해 200여 년 동안 인류에 공헌하다가 1950년을 전후해 석유에 자리를 내주었다. 일본의 탄광 회사들이 직종을 바꾸거나 폐업이 되었다. 모든 근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한 탄광 근로자들이 모여서 토의를 했다. “우리는 가족처럼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사람이 많으면 토의가 제대로 안되니 마음에 맞고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는 친구들끼리 조를 짜서 대안을 찾아보자” 건강 레저기업을 만들자는데 의견일치를 보였다. 손이 거칠고, 행동이 유연치 못한 광부들은 뒤에서 일하고, 가족들이 앞장서서 웨이터와 웨이트리스가 되었다. 이렇게 탄광 노동자들이 창업한 새 기업이 오늘날 세계에서도 유명한 건강레저기업 ‘하와이언 스파’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탄광이라는 막장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도 직장을 가정과 같은 생활 공간으로 여기고 동료들을 가족으로 여기는 집단의식이 엿보인다. 도전정신이 보이고, 일본 사회의 토의문화가 탄광 속에까지 침투돼있다는 사실이 보인다. 이런 일본 사람들이 조선 청년들을 직장에서 차별하여 이지메시키고 따돌려 혹사시키고 학대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매우 어렵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이상목은 15세에 가출하여 일본으로 휩쓸려 갔지만 일본군 군 병원에서 봉급을 받고 일하다가 군의관이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주려 했다가 폭격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군 병원에서 일하다가 위안부가 되었다 한다. 심미자의 경우에는 교실에서 한국 지도에 무궁화꽃을 수놓고, 일본 지도에 나팔꽃을 수놓았다 하여 경찰에 끌려갔는데 일본군 헌병대장 스즈끼의 연인이 되었고, 한용운과 박마리아의 부탁을 많이 들어주었다고 한다. 헌병대장은 매우 착해서 조선인들을 도와주는 것을 용인해 주었다고 한다. 이상옥을 군 병원에 취직시킨 일본인이 있었고, 그녀를 조선으로 돌려보내 주려던 착한 일본군 군의관도 있었고, 신미자를 제 2의 부인으로 사랑한 헌병대장도 있었다. 이는 일본을 헐뜯고 모략해온 이야기들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참인가?
일본의 토의 문화는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 배려와 상대방으로부터 배우려는 일본인 특유의 자세에서 자연적으로 성숙돼 왔다. 그런데 이 장점을 미국과의 산업경쟁을 위해 본격적인 시스템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계기는 일본 품질문화에 연결돼 있다. 토의가 일본 품질문화의 절대적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일본 품질문화의 독특함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따로 다루겠지만 토의가 얼마나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는가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필자가 한 최고경영자 과정에 나가 시스템 경영에 대한 강의를 할 때 한 경영자가 필자의 얼굴을 유심히 뚫어져라 응시했다. 왜 필자를 유심히 바라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너무나 공감이 가서였다고 했다. 그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저는 건설업자인데 처음에는 개인들로부터 부탁을 받아 각기 원하는 개성 있는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어느 한 부자가 값은 2배로 줄테니 매우 짧은 기간에 집을 완성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건축계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납기였습니다. 그런데 가격이 2배라서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욕심에 결단을 내려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건축에 동원된 모든 하청업자들을 한 군데 불러 모아 사정을 말하고 방법을 찾아보자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A의 아이디어가 좀 부족하면 B라는 사람이 보충해 주었습니다. 매우 놀랍게도 손발이 척척 맞아 자본주가 원하는 기일 내에 건물을 납품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신기한 경험이 경영학 이론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2000년 초, 미국 굴지의 기업 GE의 잭 웰치 회장의 경영이론이 널리 읽혔다. 그의 성공 스토리의 핵은 워크아웃(workout)이었다. 부실기업의 워크아웃(walkout)과는 발음은 같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그는 가는 데마다 문제를 발견했다. 문제가 발견될 때마다 관련자들을 현장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현장 토의를 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문제는 곧바로 현장 토의를 통해 해결하고, 연구 과제라며 뒤로 미루지 말라고 했다. 이것이 GE사의 워크아웃이다. 사람이 많으면 아이디어도 많다. 이익을 많이 내자는 것은 기업의 목표가 될 수 없다. 모든 인류가 동감할 수 있는 숭고한 가치(Value)를 목표로 설정하라. 세계인이 공감할 수 없는 목표와 가치는 GE의 사원들도 공감할 수 없다. 목표에 공감이 가야 사원들의 창의력과 정열이 발동한다. 통제하지 말라. 통제를 안 하는 것이 훌륭한 경영술이다. (Less Control is more Control)부서와 부서 간의 벽을 부숴라. 벽이 없어야 아이디어가 창출된다. 상하의 계급도 없애라. 관리자는 보스가 아니라 코치여야 하고 팀장이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토의가 위력을 발산할 수 있다.
토의를 무기로 한 GE의 잭 웰치는 2000년 초에 등장한 미국 경영계의 샛별이었다. 그런데 이 토의는 그보다 40년 전인 1962년 이미 일본 전역에 확산되기시작했다. 일본식 분임 토의 이름은 QCC(Quality Control Circle) ‘품질관리서클’로 출발했다. 토의문화가 기업에서 가장 먼저 출발한 것이다. 1962년에는 니폰 무선전보 회사에, 1965년에는 토요다에 전파됐다. 창안자는 일본 통계학자 ‘가오루 이시가와’, 해마다 일본에서는 가오루 이시가와 상을 타기 위해 전국의 써클이 다 발표회에 참가한다. 예를 들어 1990년 12월 6일에는 2,590번째 일본 QCC 대회가 열렸다. 그해에 열린 QCC 대회는 무려 183회였다. 이틀에 한 번씩 대회가 열리니 QCC 대회는 가히 생활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14만 2,408명의 QCC 대표자가 참가했고, 3,941개의 문제해결 사례가 발표됐다. 모든 QCC 분임조에는 작명이 돼 있다. 화장품 회사인 ‘코제’의 ‘미다마 서클’, 미쓰비시의 RJK 서클은 일본 전체에서 유명한 선두팀들이다.
1999년 LG의 한 중역이 필자를 찾아왔다. “LG의 가오루 이시가와 박사가 되어달라”고 했다. 그 프로젝트가 성공했더라면 지금 한국기업에 얼마나 많이 퍼졌을까! 그 프로젝트를 차단한 사람은 김대중 정부 당시의 국정원장 임동원이었다. 그는 도청을 총지휘했다는 혐의로 사전 구속되어 감옥에 갔다. 사전구속 영장 발부 이유에는 “아무런 저항 흔적 없는 자연인 지만원을 여러 달 도청하여 활동을 차단시켰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정원 제2차장 김은성은 “이상하게도 DJ가 지만원이라는 사람을 지극히 미워했고, 임동원 원장으로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지만원에 대한 정보를 채근해서 임기 중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통신을 담당하는 8국장 김병두도 원장으로부터 지만원에 관한 정보를 채근받았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도청 내용에서 가장 많은 것이 강연 약속이었다고 진술했다. 저자는 왜 DJ로부터 미움을 받았는가? 그가 제의하는 모든 자리를 사양하고, 그의 햇볕정책을 퍼주기 공작이라 정의하고, 그의 대북 정책을 총독 정책이라고 혹평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민주화의 화신이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DJ)의 민얼굴인 것이다.
LG에서는 왜 필자를 찾아왔는가? 1970년 필자가 30세였던 대위 시절, 베트남 전쟁터에 가서 포대장을 하면서 진중 토의 문화를 정책시켰던 경험들과 41세부터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토의를 통해 과제를 수행했던 경험을 여러 개의 책에 소개했고, 수많은 강의 기회를 통해 토의가 내는 위력에 대해 설명을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경영진단을 할 때 관련 실무자들과 토의를 하는 것은 굉장한 위력과 학습효과를 낼 수 있었다.
토의의 걸림돌, 한국의 신분 문화
한국 기업의 애사심은 하급자로 내려갈수록 더 높다. 하급자들은 기업의 주인이 바로 자기라는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일을 열심히 하고 싶어 하지만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중간관리자들이고 간부들이다. 신분주의가 상하관계를 불통 관계로 악화시키는 것이다. 한국 축구를 획기적으로 개화시킨 히딩크,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축구계의 고질인 상하 선후배 관계를 헐었다는 점이다. 과거의 게임을 재생해 보고, 후배라도 선배의 실수나 버릇을 지적할 수 있도록 하여 지혜를 창출하는 토의문화를 설치한 것이다. 선후배, 상하 사이에 토의가 없으면 발전도 없다. 상급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함께 문제점을 찾아내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 가도록 기회와 동기를 마련해주는 ‘촉진자’(Facilitator)여야 한다. 앉아서 결재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건물의 리모델링(Renovation)을 할 때, 수주를 받은 한국팀과 다른 수주를 받은 영국팀이 일하는 과정을 관찰한 적이었다. 한 회사에 한국팀과 영국팀이 함께 편성돼 있는 회사에 대해 경영진단을 했기 때문이다. 영국팀, 리모델링 수주를 받기가 무섭게 부사장이 가장 먼저 건물의 층과 층 사이를 기어다녔다. 아래위가 붙은 고무 작업복을 입고, 안전모에는 전등을 달고, 손에는 커다란 랜턴을 들고, 녹음기를 가슴에 차고 먼지 많은 어두운 공간을 기어다니면서, 작업할 내용을 상세히 녹음기에 입력했다.
그리고 녹음 내용을 문서화한 후 본인이 할 일, 팀원들이 할 일을 정리한 후 이동 중에 통신으로 작업지시를 내린다. 속도와 정확도가 대단했다. 영국에서는 직급이 높을수록 현장 지식과 지혜가 많다. 반면 한국팀은 수주를 맡았을 때 어떻게 하는가? 맨 밑에 있는 대리급이 층 사이의 검은 공간을 누빈다. 그가 관찰한 내용을 문서화하여 결재를 올린다. 과장, 차장, 부장, 상무, 전무로 올라갔다. 대리가 과장 결재를 받으려는데 과장이 바쁘다. 과장이 부장에게 결재를 받으려면 부장이 휴가 중이다. 시간이 늘어진다. 지식과 지혜가 풍부한 영국 부사장이 관찰한 것과 그것이 부족한 대리가 관찰한 내용을 비교하면, 누구의 관찰 내용이 질적으로 우수할까? 질적인 면에서 상대적으로 열등한 것을 놓고, 결재에 결재가 릴레이로 이어지는 한국식 경영이 한심해지는 것이다. 한국 기업에서는 높은 사람이 의자에서 일을 하고, 선진국 기업에서는 높은 사람이 현장에서 일한다. 미국, 영국, 호주의 경우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하루종일 현장에 다니면서 서서 일을 한다. 자기 사무실 의자에 앉을 때가 드물다.
한국적 관료주의에 나타난 일반적인 현상을 필자의 경영 진단 경험에서 뽑아보았다.
1) 간부에 대한 불신감 : 문제나 태도를 말하면 손해 본다. 어쩌다 말해놓고는 즉시 후회한다. 회사의 문제점을 수용해주는 것이 아니라 비난과 질책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문제가 발견돼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2) 관료주의 : 결재 때문에 일할 맛을 잃는다. 급하게 진행돼야 할 일이 결재 때문에 지연된다.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하급자를 불러 욕부터 한다. 그리고 결재를 보류(Holding) 해놓고, 알아서 하라고 한다.
3) 간부의 무능 : 지침도 안 주고 일거리만 던진다.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조선 양반 스타일이다.
4) 신분 차별 : 신분 차별 때문에 하루에도 여러 번씩 기분이 상한다. 협력업체 직원들은 간부들에게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 모멸감 때문에 퇴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빠듯하게 운영하는 협력업체에 이렇게 해서 결원이 생기면 사람 구하느라 대기시간이 늘어난다. 사람 구하기도 힘들다.
5) 알력 : 어느 기업에서나 최고경영자에는 심복이 있다. 그 심복과 간부 사이에는 거의 예의 없이 불화가 있다. 간부들과 최고경영자 사이에 벽이 생기게 된다. 여기에 더해 심복이 설치면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은 회계장부에는 잡히지 않지만 천문학적이다. 유능한 경영자는 보이지 않는 비용, 물 밑에 가라앉은 커다란 빙산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차지철이 너무 설쳤기에 말년의 박 대통령을 감싸고 있던 고위직들의 마음이 박 대통령을 떠난 것과 같은 이치다.
6) 서로 미루기 : 의당히 해오던 일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묵묵히 계속하지만 생소한 일이 생기면 서로 미룬다. 살아남으려면 남에게 미루기를 잘해야 한다. 품질에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시간을 버린다.
7) 극도의 이기주의 : 한 달에 한 번쯤 분임 토의(QCC)를 열지만, 터놓고 말하기를 꺼려 한다. 남의 문제에 끼어들기 싫은 것이다. 자기 소관 분야의 문제를 얘기했다가는 마음에 상처가 될 정도로 질책부터 받는다. 달팽이 벽을 쌓을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와 같은 동대(同隊)의식, 공동운명체 의식이 없다.
8) 문제 은닉하기 : 개인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도 있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다. 구조적인 문제는 상급자들의 소관이다. 이런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면 상급자가 질책을 받는다. 그래서 쉬쉬하고, 쉬쉬하는 동안, 문제는 계속 발생한다.
9) 불안감 : 차장급 이하의 사원들은 언제나 불안하다. 심지어 부장급 회의가 있는 날에는 하루종일 불안에 떤다. 회의에서 돌아온 부장이 수첩을 책상에 던지면서 화를 낸다. ”왜 다른 부장들은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느냐?“ 회의에서 꾸지람을 받고 온 부장은 화풀이를 사원들한테 한다. 부장회의는 그 자체가 공포다.
일본 품질관리(QC)의 발전사
수리학적 품질관리를 실행시킨 시조는 미국의 슈하르트(walter Andrew Shewhort;1891~1967)라는 통계학자였다. 1926년 그는 벨 연구소(Bell laboratory) 제조공장에 적용할 ’슈하르트 컨트롤 차트‘를 창안해냈다. 각 공정의 작업 결과를 수치로 측정하여 이 수치가 일정 범위 내에 들어있으면 합격시키는 차트였다. 세계 제2차 대전시 미국은 각종 군수품을 대량으로 생산해야만 했고, 군수품이 불량하면 패전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 방위산업 업체에서는 이 ‘슈하르트 차트’가 생명이었다. 미군 당국은 이를 ’Z-1’표준이라고 불렀다. 1945년 맥아더 사령관은 미군에 납품되는 모든 군수품을 생산하는 일본 업체에서 Z-1표준을 강요했다. 바로 이 단계에서 일본 통계학의 거두인 ‘가오루 이시가와’와 ‘다구치 겐이치’가 뛰어들어 일본의 독특한 품질관리의 역사를 열기 시작했다. 제품을 만들어 내는 데에서도 일본은 먼저 미국을 모방한 후, 미국 제품을 능가하는 made in japan을 만들어냈듯이 품질관리 영역에서도 일본은 먼저 미국을 모방한 다음 일본 고유의 창작물로 발전시켰다.
미국의 품질관리는 사후관리였다, 품질검사(Quality Inspection), Z-1표준은 일단 제조-가공된 제품이 합격품인가 불합격품인가를 걸러내는 역할만 수행했지, 불량품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사전 조치 즉 예방조치를 취하는 품질관리가 아니었다. 미국의 품질관리는 경찰관 식 품질관리였다. 경찰이 목 좋은 곳에 숨어있다가 위반 차량을 잡아내듯이 미국의 품질관리 요원들은 계축기와 슈하르트 차트(Z-1 표준)를 가지고 불합격품을 찾아내 폐기하는 일만 했다. 시간도 많이 소요됐다. 왜냐하면 작업자들은 품질관리 요원들이 나타날 때까지 초조하게 검사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불량품으로 확인되면 거기에 투여된 원가는 증발돼 버린다. 그래서 일본은 사전 품질관리, 불량품질이 발생하지 않게 일하는 방법을 품질관리팀과 작업팀이 함께 사전에 토의 연구한다. 이런 일본식 품질관리 기법을 미국도 도입하였다. 미국의 감사원과 군 계약 감사국(DCAA:Defense Contract Audit Agency)은 우리 감사원처럼 사후 감사를 하지 않고, 사전 감사를 하여 낭비를 사전에 예방한다. 여기에 더해 일본의 품질관리는 전사원적 품질관리로 발전했다. Company wide quality control! 정문의 경비원도 품질에 영향을 미치고, 출근 시의 버스기사도 품질에 영향을 끼친다. 이들이 불손, 불쾌한 언행을 보이면 여러 사원들의 기분이 상한다. 화장실이 불결해도, 구내식당이 불결해 보여도 기분이 상한다. 직장 내에서 사원들간에 불쾌할 일이 생겨도, 상급자로부터 불쾌한 말을 들어도 기분이 상한다. 기분이 상한 사람들이 제품을 만들면 불량품이 발생한다는 것이 일본 사원들의 종교다. 그래서 상하좌우 모든 회사원들은 늘 상대방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한다.
대한민국 전철 차량 제조 공정을 하루종일 관찰한 적이 있다. 작업자들에 기율이 없었다. A가 사용했던 작업 도구를 B가 찾아 헤메고, 일하는 사람과 앉아서 잡담하는 사람이 범벅돼있었다. 작업 도구를 찾으러 이리저리 헤매는 사람의 기분이 어떠하겠는가? 바로 이들에게 시간은 자유재였다. 민주노총 요원들이 일하는 현장이었다. 일본에는 5S라는 기율이 있다. 작업장에서 준수해야 하는 5가지 원칙이다. 정리, 정돈, 청결, 기름치기, 작업 기율들이다. 작업 도구는 반드시 사용 후 제자리에 위치해야 한다. 작업장이 깔끔하게 청소돼 있어야 하고, 작업도구가 항상 청결하게 유지돼야 하고, 작업의 기율이 엄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주노총의 그 작업장은 난장판이었다. 2000년의 일이었다.
일본은 어떻게 품질관리에 눈을 뜨게 되었는가? 전후의 일본 통계학자들은 JUSE(Japanese Union of Scientist and Engineers)라는 클럽을 만들어 미국이 낳은 품질 이론가들을 줄줄이 모셔다가 공부를 했다. 슈하르트 박사는 일본에 ‘통계학적 품질관리(SQC;Statistical Quality control)를 가르쳐 주었고, 쥬란 박사는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프로젝트로 전환하여 집단지혜를 동원해 해결하라는 것을 강조했다. 데밍 박사는 “모든 의사결정은 여론, 직관, 경험에 의해 하지 말고 오로지 자료와 사실에 기초해서 하라. 이 세상에서 자료 없이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은 오직 신뿐이다.” 과학적 의사결정을 강조했다. GE의 품질관리 책임자였던 피겐바움(Fiegenhaum)박사는 TQC(Total Quality Control), 전사적 품질관리를 강조해주었다. 이것이 CWQC(Company Wide Quality Control)로 발전한 것이다. 일본 QC는 한 단계 더 발전했다. 온라인 QC와 오프라인 QC, 온라인 QC는 공장 라인에서 생산된 제품의 품질이 설계된 품질을 얼마나 정밀하게 반영했느냐에 대한 품질관리이었고, 오프라인 QC는 제품의 클라스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한 품질 향상 노력이었다. 예를 들면 전구의 수명을 1,000시간에서 2,000시간으로 늘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오프라인 품질은 Quality of Design이라 하고, 온라인 품질은 Quality of Conformance라 한다. 전자는 제품의 격을 의미하고 후자는 정밀성을 의미한다.
일본에는 데밍상(Deming Prize)이 있다. 미국인 스승 ‘데밍’을 기리는 상이다. 데밍상에는 비단 일본 기업들만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선진 외국 기업들도 도전한다. 데밍상은 세계 전체 산업계의 노벨상이다. 데밍상 수상업체가 만든 제품은 눈 감고 사도 후회할 일이 없다. 우리나라 같으면 승전국이 낳은 석학을 모셔다 열심히 배우고, 그의 이름을 따서 산업계의 노벨상을 제정할 수 있겠는가? 수리공학적 품질관리! 그게 무엇인지 한 가지만 소개해 본다. 1950년대 당시 일본 타일 제조 회사들 중 ’이나타일‘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타일을 빚어 거대한 ’로‘에 구으면 타일의 사이즈가 균등하게 구워지지 않았다. 쥬란 박사의 가르침에 따라 이 문제를 프로젝트화했다. 도사급 전문가, 경험자들이 달려들어 의견을 냈다. 결론이 나왔다. “타일의 규격이 일정해지려면 기다란 ’로’에 불길을 골고루 만들어 내야 하는데 그 누가 기다란 ‘로’에 불길을 골고루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 따라서 균등 사이즈에 대한 꿈은 실현이 불가능하다.” 이에 젊은 수학자가 나타나 실험을 했다. 수학의 편미분 개념을 활용한 것이다. 타일을 구성하는 재질은 7가지였다. 6개 요소는 종전대로 집어넣고(other things beeing equal) 한 개씩의 요소에 대해 양을 가감해 가면서 구워보았다. 이런 실험을 7개 요소 모두에 대해 할 참이었다. 그런데! 석회의 분량을 2%에서 5%로 증가시키니까 불길의 강약에 관계없이 타일의 규격이 일정하게 나왔다. 이것이 수리공학적 품질관리의 웅변적 사례였다. 데밍 박사, 경험과 여론에 의해 의사결정을 하지 말고 오로지 수리적 결론에 의해 의사결정을 하라는 가르침의 결과였다.
한⸱일간의 시스템 격차
일본 품질관리는 그 자체가 시스템이다. 1993년 필자가 [시스템이냐 신바람이냐]라는 책을 냈을 때만 해도 대한민국에는 시스템이 무엇인지 그 의미조차 알지 못했다. 사전을 찾아보니 ‘체계’, ‘조직’ 뭐 이런 것들로 해석돼 있는데 감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1993년 당시까지 한국에는 시스템이 없었다는 뜻이다. 필자는 은행 객장의 ‘순번대기번호표 장치’가 바로 시스템의 표본이라고 설명했고, 그로부터 시스템이라는 단어가 유행됐다. 은행 객장에는 질서가 없었다. 각 데스크 직원 앞에 손님들이 줄을 섰다. 새치기도 있었다. 흰 장갑을 낀 청경이 질서를 유지하지만 고객들은 무질서로 인해 신경을 쓰고 기분이 상했다. 사회의 저명한 식자들은 이 현상에 대해 ‘한국병’이라했다. 미국과 일본 등은 질서가 정연한데 한국의 은행들에는 무질서가 판을 친다면서 이를 민족성 탓이고 의식 탓이라고 진단했다.
“과거 한동안 은행 객장에는 질서가 없었다. 식자들은 이 무질서를 의식 탓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는 의식 탓이 아니라 시스템 탓이었다. 은행 객장에 순번대기번호표 시스템이 등장했다. 그 간단한 시스템 하나 설치되니까 우리도 선진국들처럼 질서가 좋아지지 않았느냐 무질서는 의식 탓이 아니라 시스템 탓이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 무질서한 것은 거기에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시스템 사회를 만들려면 두뇌들을 유치해 시스템을 곳곳에 설치해야 한다. 의식은 시스템의 산물이다. 세 대의 공중전화기가 있다. 한국 사람은 세 줄을 서고 미국 사람들은 한 줄을 선다. 짧은 줄을 선택해 섰더니 나중에 온 사람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했다. 이때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일찍 와야 소용없다. 줄을 잘 서야 한다. 운이 좋아야 한다. 결국 요행이 차례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점쟁이를 찾는 것이다. 반면 한 줄을 서면, 3대의 전화기 중 먼저 끝나는 전화를 먼저 온 사람이 차지한다. 논리가 차례를 정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선진국 시민에는 요행 의식이 아니라 논리 의식이 자라게 된다. 결국 시스템이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상이 필자가 1993년 처음으로 사회에 던진 메시지였다
1983년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내렸다. 내리기 전 기체 내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시내에서 공항까지는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에 손님은 택시 미터기 요금에 싱가포르 돈으로 5달러를 더 얹어주라고 했다. 택시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전기장판 전기줄처럼 꼬불꼬불 줄을 섰다. 바닥에 선이 그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좁은 공간에 사람을 차례대로 많이 세우는 방안이었다. 택시가 일렬로 들어와서는 7개 가닥으로 나누어 섰다. 한꺼번에 7대의 택시가 손님을 태우고 떠났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도 김포공항에는 택시도 일렬, 손님도 일렬로 섰다. 한 번에 한 개 택시가 짐과 사람을 싣고 떠나야 두 번째 택시가 전진했다. 외국에서 와 오래 기다리는 손님들이 몹시 짜증을 냈다. 택시가 한동안 오지 않으면 손님은 더 많이 기다려야 했다. 싱가포르에서는 손님을 카운트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을 세어서 택시회사에 연락하면 택시회사에서 손님만큼 택시를 보내주었다.
시너지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스템이 내는 에너지의 준말이다. 마을의 동쪽과 서쪽에 신발가게가 있었다. 하루에 열 켤레씩 팔렸다. 뚝뚝 떨어져 있던 가게를 한 곳으로 몰아놓았더니 하루에 100켤레씩 팔렸다. 당시 떨어져 있던 가게는 한 군데로 모았을 뿐인데 10배의 효과가 난 것이다. 각기 떨어져 있을 때는 낱개 가게였지만 합쳐놓으니까 ‘시장’이라는 시스템이 생긴 것이다. 10배의 효과를 낸 것은 바로 시장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효과인 것이다. 인쇄촌이 있고, 물류촌이 있고, 자동차 공장촌이 있다. 관련 업체들이 이웃에 종기종기 붙어있어야 하나의 완성품이 빨리 그리고 적은 물류 비용으로 생산될 수 있다. 먹자촌에는 음식 업체들이 경쟁을 한다. 하지만 먹자촌은 시너지 효과를 낸다. 이 사실을 모를 사람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는 행정 수도를 서울과 세종시로 분할시켰다. 정부 부처는 서로 회의도 많이 한다. 청와대와 국회를 자주 드나들어야 한다. 민원인은 한 건의 민원을 처리하기 위해 서울, 과천, 세종시를 여러 차례 다녀야 한다. 공무원들과 그 가족들의 생활이 지옥이고, 공무원들의 시간이 도로에 다 증발되고 비용과 교통 혼잡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필요하게 야기되었다. 이런 결정은 망국적 결정이다. 그런데 그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박근혜는 어쩌다 한 약속을 지킨다며 오기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2012년 이후의 결정이었다. 일본의 한 작은 기업도 이런 무모하고 무식한 결정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국가 품격이고 과학의 차이다.
한국 QC는 완장 QC
전투를 생각해보자. 전투는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 지휘관이 이래라저래라 소리치는 행위는 자멸 행위다. 병사들이 내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는 지휘관은 오늘 싸워야 한다. 모의연습 즉 시뮬레이션을 다각도로 실시함으로써 병사들에게 내일 전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상상케하고, 그 각각에 대해 병사들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미리 상상케 함으로써 병사들 스스로 살아남는 요령을 터득하게 해주어야 한다. 실제 전투는 병사들의 응용능력으로 치러지는 것이다. 전쟁은 지휘관의 고함에 의해 치러지는 것이 아니다. 내일의 전투 결과는 오늘 지휘관이 어떻게 병사들을 준비시키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이러한 진리를 알고 있는 지휘관은 한국군에 거의 없다. 이러한 준비 마인드는 기업인들에도 없다.
제조과정 역시 전투행위와 똑같다. 내일 수백 명의 작업자가 어떻게 일하는가는 오늘 간부들이 무엇을 어떻게 무장시켜 주어야 하는가에 달려있다. 내일의 작업장에서 근로자들이 얼마나 시간을 낭비할지, 어떤 불량품을 만들어낼지는 오늘 관리자들이 어떻게 내일의 현장을 연출시키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한국 QC는 참으로 한심하다. 1개월에 걸쳐 제작한 제품이 틀린 스펙과 틀린 디자인으로 제작돼있는 것이 오너 측 점검 단계에서 발견돼 엄청난 낭비가 발생하고 납기를 어겨 지체상금까지 보상해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설계 자체, 스펙 자체가 맞는지 틀린지 체크하는 QC는 대한민국 기업에 없다.
작업장은 공정의 연속이다. 첫 공정에서 두 번째 공정으로 제품이 이동하기 위해서는 QC요원(품질관리요원)을 기다려야 한다. 두 번째 공정으로 제품이 이동하기 전, QC요원이 나타날 때까지 대기하는 시간이 참으로 길다. 어떤 주문생산 공장에서는 QC요원을 기다리느라 하루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QC요원들은 시간 낭비를 의식하지 않는다. 불합격을 받으면 재작업을 해야한다. 여기까지에 대해 일본 QC요원들은 어떻게 하는가? 일본 QC요원들은 내일의 작업 내용에 대해 오늘 작업자들과 함께 제조과정에 대해 토의를 한다. 에러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예방해야 하는지 지혜를 찾아낸다. 하자를 미리 예방하는 것이다. QC요원들은 작업자가 저지를 수 있는 에러를 미리 예측하고 그 시각에 나타나 작업과정을 지켜보면서 주의를 환기시킨다. 에러가 예방되고 시간도 낭비되지 않는다. 설계나 스펙이 잘못되는 경우도 없다. 일본 QC요원은 스승이고 코치다. 반면 한국 QC요원은 고압적이고 불친절하다. 작업자들에 한국 QC는 경찰관이다. QC요원만 가지고 비교해봐도 일본 기업은 인격적인 반면, 한국 기업에는 직급과 직종에 따라 인격적 차별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일본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배워야 할 스승이라는 사실이 QC분야에서도 드러나 있다.
한국식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시스템인가? 단순한 이념인가? 민주주의는 은행 객장의 순번대기번호표 시스템처럼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제정된 ’정치 시스템‘이다. 수많은 지식과 지혜가 담긴 의견들을 수렴하여 공공선(public good)을 추구해 나가는 정치 시스템인 것이다. 수많은 의견들이 공동의 시장에 나와 다른 사람들의 창의력을 자극하고, 아이디어들을 업그레이드 시키고, 시장원리에 의해 채택도 되고 도태도 되는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이 공공선을 추구하는 민주절차인 것이다. 따라서 공돈의 장은 넓게 개방되어야 하며 특정 세력이 독점해서는 안되는 민주주의 구동의 엔진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법을 수호하는 임무와 책임을 가장 많이 지고 있는 판사와 검사들이 공론의 장을 제한시키고 있다.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만 발언권을 주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는 발언권을 차단시키고 인격적 모독을 시키고, 공직에서 추방하는 독재행위를 밥 먹듯이 하고 있다.
2024년 1월, 종합일간지, ‘스카이 데일리’가 2023년 추적한 5.18의 진실을 총편집하여 40면 분량의 ‘5.18 특별판’을 인쇄해 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배부했다. 신문의 대제목은 ‘5.18은 DJ 세력과 북이 주도한 내란’이었다. 인천시 시의회 의장인 허식이 이를 필요로 하는 주위 사람들에 나누어 주었다는 이유로 집권당인 국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저런 극단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은 국힘당에 설 자리가 없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다. 자기는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굳게 믿고 이를 헌법 전문에 넣겠다는 주장을 했는데, 인천시의회 의장이 반대의 소신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 한마디에 인천시의회는 허식 위원장을 탄핵시켰고, 그는 당을 탈당한 후 법적 절차를 밟고 있다. 국회는 5.18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국민에 대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는 5.18 특별법을 제정해 2021년 1월 5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이 원시적 독재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국회의원들이고 집권당 수장이라는 사실을 일본의 1950년대의 시스템 수준과 비교해 보라.
그는 대법원 판례까지 무시했다. 대법원 판례[2002.1.22. 선고 2000다37524.37531 판결]의 제5 판시사항의 요지는 이렇다. “공적 존재의 이념은 국가의 존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철저히 공개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문의나 의혹은 ’개연성‘이 있는 한, 광범위하게 문제 제기가 허용돼야 하고 공개토론을 받아야 한다. 정확한 논증이나 공적인 판단이 내려지기 전이라 해도 찬반 토론을 통한 경쟁 과정에서 선택도 되고 도태도 되게 하는 것이 민주적이다.” 5.18은 이념의 주제이고 공적인 존재다. 이렇게 판례가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찰에서 출세하고, 법무장관까지 지난 다음 집권당 수장을 담당하고 있는 법조인이 민주주의 구동 엔진인 공론의 장에, 자기와 다른 의견과 이념을 가지고 있다 해서 말 한마디로 바닥에서부터 출세의 길을 걸어온 인천시 시의회 의장을 단칼에 인격살인하고 출세길을 차단시킨 행위는 허식이라는 인격에 대한 폭력 행위에 해당하고, 민주주의 시스템을 유린하는 질서 파괴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 반민주주의적 폭력이 2024년에 집권당 수장에 의해 자행됐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이 아직도 멀었다는 한숨이 나오게 하기에 충분하다. 1865년에 태어난 윤치호 선생, “나와 다른 것을 인정 못 하는 자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경영하겠다고?” 1900년경에 지적됐던 행위를 124년 후에 대한민국 집권당 수장이 아무런 가책 없이 저질렀다는 것은 국힘당 수장 한 사람의 수준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부끄러운 수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은 우리보다 새까맣게 앞서 있다. 이것이 일본이라는 거울에 투영된 유치하고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자화상인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