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진상위 2023.12,26,자 보고서에 대한 반박 (대국민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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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5-20 21:00 조회10,6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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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가 2023.12.26. 자에 ‘5.18과 북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담은 보고서를 냈다. 필자는 서울 구치소에서 수감돼 있기에 이 보고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2024.4.25에 신백훈 박사가 보고서 전문을 보내주어서 집필 중에 있는 책을 퇴고한 후 반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간을 읽는 ‘독서 국민’이라면 5.18군사 작전은 북이 수행했는데, 조사위가 그것을 감추느라 애를 썼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18이 북한 소행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에는 필자가 제시한 42개 증거 말고도 일간지 스카이데일리가 추적한 증거 30개가 더 있다. 모두 72개인 것이다. 그런데도 조사위는 42개 증거가 전부라며 그중 일부에 대해서만 반격했고, 상당 부분에 대해서는 기피하기도 하고, 둘러대기도 하고, 허위 조작을 했다.
5.18은 광주- 전라도 특유의 산업이다. 광주는 5.18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5.18로 정치적 사회적 신분을 상승시켜 대한민국 정치 사회를 장악했다. 그런 5.18을 북한이 주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이 모든 누각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이 성역을 지키기 위해 5.18 세력은 특별법률까지 제정하여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모든 5.18 관련 재판은 광주법원이 배타적으로 독점하여 인권을 탄압하고 있다. 여기까지를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국민은 없을 것이다.
이런 광주의 횡포는 오로지 하나, “5.18 주역이 북한”이라는 표현 자체를 금지시키기 위한 것이다. 5.18은 북한 소행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한 이 횡포 자체가 ‘북한 개입’에 대한 증거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떳떳하면 왜 이런 치사한 행동을 하겠는가? 하지만 조사위는 5.18 세력의 이런 횡포와 ‘북한 개입’과는 사돈의 팔촌 관계도 없다고 주장한다. 5.18 조사위의 사물 인지 능력이 매우 낮은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조사위의 이 보고서는 광주단체들의 닦달에 억지 춘향으로 급조된 일종의 [딴소리 집합문]이다. 광주단체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내용을 거짓으로라도 만들어 보고서에 쓰라는 닦달을 했고 이에 못 이겨 조사위가 갖지도 않은 아이를 출산시킨 것이다.
필자는 믿는다. 첫째 비록 속성으로 작성했지만 이 ‘대국민 보고서’를 읽고서도 5.18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생각한 국민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둘째 이 ‘대국민 보고서’를 읽고서도 광주와 5.18세력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국민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촉박하게 작성한 ‘대국민 보고서’이지만 국가혼을 파괴하고 있는 ‘왜곡된 5.18역사’를 바로잡는 데 적극 활용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024. 5
지 만 원
‘북 개입 없다’는 518조사위 보고서에 대한 반론 |
목 차
승복력 문제
1) 5.18 조사위에 만연한 제척사유
2) 위원회의 부도덕한 일탈적 조사행위
2. 위원회의 사상적 좌표
1) 5.18 유언비어는 김일성 작품
2) 황석영을 통한 김일성의 문화 공작
3) 영화를 통한 김일성의 문화 공작
3. 5.18에 대한 미국의 평가
1) 미 CIA 보고서
2) 미 헤리티지 재단 연구소 보고서
3) 미 CIA 및 헤리티지 재단 연구소가 내린 결론
4. 조사위 최종 보고서를 검토한 이후 필자가 내린 결론 : “5.18은 분명히 북한 소행이었다”
1) 1980.3.28. 일본 통일일보 보도
2) 1980.5.10. 일본 내각조사실 첩보
3) 1980.5.22. 김대중의 전국 봉기 선언
4) 1980.5.14. 군수지원단 장교 70명, 100여 명의 이방인과 조우
5) 20사단 수색중대, 송정리에서 습격당해 집단입원 3주
6) 5월 18일 상황
7) 차량 돌진
8) 군분교 매복 기습사건
9) 아시아 자동차 점령
10) 17개 시군에 위장된 40여 개의 무기고 대부분 5.21에 털려
11) 금남로 옥상 점령한 무장괴한 부대에 의한 학살
12) 공수 10개 대대 광주 탈출
13) 광주교도소 공격과 청주유골
14) 특수군 600명과 민간조 600여 명
15) 광주에 실재한 간첩 손성모
16) 주걱턱 광수
17) 지휘체계 갖추어진 군사조직들의 활동
18) 사진에 나타난 지휘자들, 광주에 전무.
19) 황장엽, 김덕홍의 증언
20) 김정일과 김대중 조형물 광주 시가행진의 주역
21) 광주 폭동의 로고 인물, 1호 광수, 양아치 생활하고, 시위대장하고 사라졌다.
22) 총기 사망자 75%가 폭도 총에 사망
23) 5.18 역사 관리의 주역도 북한
24) 북한 문헌들이 5.18 역사 기록했다.
25) 사망자 12명, 광주 사람 아니다.
26) 광주시민 위해 희생한 국군, 왜 살인마로 모나
27) 세기적 모략 공작과 만행
5. 조사위 결론에 대한 반박
6. 결론
‘북 개입 없다’는 518 조사위 보고서에 대한 반론
승복력 문제
보고서의 생명은 승복력이다. 그런데 조사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승복력을이미 상실했다. 하나는 조사위 위원장 송선태가 동 법률이 정한 제척사유에 해당한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조사위가 핵심 관련자들을 밤중에 모텔로 불러내 협박, 회유하여 원하는 진술서를 작성케한 파행적 업무수행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1) 조사위에 만연한 제척사유
송선태 위원장은 5.18유공자다. 그리고 이른바 5.18을 내란으로 기획한 [자유노트] 작성자다. 518은 실제로 이 [자유노트] 내용 그대로 수행이 됐다. 그런데 [자유노트] 작성일이 1980.5.11.이다. 1주일 전에 이미 5.18계획서가 송선태의 수중에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5.18주역과 미리 연결돼 있는 매우 수상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조사위는 거의 다 5.18을 성역화하는 광주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아들의 재판을 아버지가 맡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낯 뜨거운 추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승복할 국민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5.18에 감추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으면 이런 낯 뜨거운 추태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2) 위원회의 부도덕한 일탈적 조사행위
위원회는 필자의 주장이 순전히 [보랏빛 호수]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실제 연구는 하지 않은 사람인 것으로 전제하였다. 그래서 [보랏빛 호수]만 희극화 시키면 필자의 명예가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으로 가정하였다. 이 내용은 녹취록에 저장돼있는 내용이다. 조사관도 아닌 비상근 위원인 이동욱이 업무 범위를 일탈하여 일선에 나섰다. [보랏빛 호수]는 탈북자 이주성이 저작했고, 소설 속 주인공은 5.18때 실제 북한특수군 신분으로 광주작전에 참전했던 실명 정명운이다. 조사관도 아닌 비상근 위원이니 이동욱이 정명운을 성남시 모 모텔로 밤 시간에 불러내 4시간 동안 딸의 직장을 약점 삼아 협박하고 회유하여 그가 원하는 바의 진술서를 받아냈다. 이어서 저자인 이주성을 성남시 인투 모텔로 밤 10시에 불러내 60분 이상 협박하고 회유하다가 녹음을 당하고 나서 이후 전화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 모든 내용은 인터넷에 공지돼 있다. 조사를 조사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협잡 공작행위로 진실을 왜곡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 무슨 신뢰가 있고, 무슨 승복력이 있을 수 있는가?
2. 위원회의 사상적 좌표.
한국군 최강의 군대는 공수부대다. 공수부대를 모략하면 한국군 전체가 모략된다. 전두환과 공수부대를 엮어 살인마로 모략하는 발상을 할 수 있는 거물은 오로지 김일성뿐이다. 김일성은 이 뜻을 그의 특기인 문화 공작을 통해 실현했다.
1) 5.18유언비어는 김일성 작품: 5.18유언비어는 김일성 작품이었다. 1960년 6월 25일, 6.25 제 10주년을 맞아 김일성은 미군에 대한 증오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을 세웠다. 증오심은 주민을 하나로 묶기 위한 가장 강력한 시멘트다. 박물관 안에는 인간의 상상 한계를 넘는 모략 내용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아름다운 여성의 유방을 두 명의 미군이 도려내 피를 흘리는 그림, 피가 튀지 않도록 여성의 머리 위에 백지를 올려놓고 대못을 박는 그림, 남자의 팔을 뒤로 젖혀 겨드랑이에서부터 각을 뜨는 그림, 톱으로 두개골을 자르는 그림, 임산부를 칼로 찌르는 그림 등 무수히 많다. 건물 앞 대형 돌판엔 미 8군 사령관 워커의 살인 명령이 새겨져 있다. “닥치는 대로 죽이라. 설사 그대들 앞에 나타난 것이 어린이나 노인이라 할지라도 손이 떨려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조선 사람을 죽임으로써 미국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라.”
이 신천박물관에 창작돼 있는 유언비어가 20년 후인 1980년 광주로 평행이동해 왔다. ‘미 8군 사령관 워커의 살인 명령’이 ‘전두환의 살인 명령’으로 평행이동해 왔다. 상상을 초월했던 광주의 괴담은 광주시민들의 상상력을 초과한 것이었다. 바로 모략과 거짓의 화신인 김일성이 창작한 괴담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놓고 5.18과 김일성이 무관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2) 황석영을 이용한 김일성의 문화 공작:그다음은 황석영의 네임밸류를 이용한 문화 공작이었다. 황석영이 지은 책은 많이 팔린다. 1985년 황석영이 자기 이름으로 전두환과 공수부대를 모략하는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이하 넘어넘어)를 발행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도 ‘5.18의 바이블’로 알려져 왔고 그 내용들은 사회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공수부대의 곤봉 속에는 무거운 철심이 박혀 있어서 맞기만 하면 피가 솟구친다는 표현으로 시작해 광주의 수많은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만행을 묘사했다. 묘사가 자세하고 구체적이어서 군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사실로 믿고 전두환과 공수부대를 증오했다. 그런데 필자는 이 책이 북한이 발간한 대남공작 역사책 2권(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광주의 분노)을 조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를 증명한 필자의 책이 [솔로몬 앞에 선 5.18]이다. 2011년 12월호 신동아 역시 이 사실을 밝혀냈고, 황석영은 이 책을 자기가 지은 책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원고를 주어서 자기 이름으로 발간했다는 사실을 신동아에 실토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황석영이 김일성에게 문화 공작의 도구요, 부역자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아울러 5.18이 김일성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납득이 갈 것이다.
3) 영화를 통한 김일성의 문화 공작: 그다음은 영화를 통한 문화 공작이었다. 김일성은 5,18에 대해 두 개의 영화를 제작했다. 하나는 1980년 바로 그해에 제작한 기록영화 [군사파쇼도당을 반대하는 광주 인민항쟁]이고, 다른 하나는 1991년에 개봉한 픽션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다. 김일성은 [군사파쇼도당을 반대하는 광주 인민항쟁] 중에서 42분짜리의 영상물을 발췌하여 [광주 비디오]를 제작해 전라도는 물론이고, 전국 곳곳에서 관람케 했다. 이 내용들 역시 황석영의 이름으로 발간한 [넘어넘어] 내용과 유사하다. 이 영화를 내레이트한 것이 황석영의 이름으로 발간한 [넘어넘어]라 할 수 있다. 이 비디오를 본 사람들은 물론, 비디오 시청자들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수많은 국민들이 다 전두환과 공수부대를 증오하게 된 것이다. 김일성의 대남 조직이 총동원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이 엄청난 심리전을 주도할 수는 없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김일성은 황석영과 간첩 윤이상을 북으로 데려가 픽션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매년 북한 전 주민에게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내용은 유언비어와 괴담을 스토리로 엮은 것이다. 황석영이 시나리오를 썼고, 윤이상은 배경음악을 작곡했다. 배경음악의 테마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에 대한 대가로 황석영은 김일성으로부터 20만 달러의 거금을 받았고, ‘재간둥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윤이상은 그 대가로 5층 건물의 웅장한 ‘윤이상 음악당’과 넓은 저택을 하사받았다. 이로부터 16년 후인 2007년에 남한에서 [화려한 휴가]가 개봉됐다. 이후에 제작된 남한의 5.18영화들은 모두가 5.18원조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파생품들이다. 남한의 모든 5.18 영화가 다 김일성의 뜻을 받들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김일성의 뜻! 전두환과 공수부대를 증오하게 만드는 것이 김일성의 뜻이다. 신천박물관이 미군을 증오케 하는 최고의 모략 수단이듯이 5.18은 대한민국을 증오케하는 최고의 모략 수단이요 최고의 자산인 것이다.
지금 현재 조사위는 전두환을 살인마로 몰아가고 있다. 공수부대를 살인마 집단이요 강간 집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증거는 없다. 거의 모두가 이름도 없는 광주 사람, 전라도 사람들의 ‘카더라’식의 증언들이다, 이에 대해 조사위는 협잡 수단, 공작 수단을 마구 동원하고 있다.
소 결
광주 말고 그 어느 나라 국민이, 목숨 바쳐 국민을 지켜주는, 국군을 살인마 집단이다, 강간 집단이다, 멸시하고 증오하겠는가? 반역자들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황석영처럼, 윤이상처럼 조사위도 김일성의 부역자가 된 것이다. 군납업체를 600명 집단이 점령하여 400여 대의 군용트럭과 장갑차를 빼앗아 40여 개의 무기고를 털어 5,000여 정의 총기와 30만 발의 탄약을 탈취하고, 정규사단의 이동 계획을 탐지하여 하루 전에 가두리장을 설치한 후 숨어있다가 이동하는 지휘부 차량부대를 기습하여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해 14대의 지프차를 빼앗고, 무기고에서 빼앗은 무기로 광주 사람을 학살하고, 광주시를 완파시킬 수 있는 2,100발의 폭탄을 설치하고, 광주교도소를 야간에 파상 공격하는 대담하고 고차원적인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등의 훈련된 반국가 행위를 정말로 광주시민들이 저지른 것들이라면 이는 광주의 불명예다. 아니 광주는 대한민국의 적이다. 이를 북한군 소행이라 하면 납득하기도 쉽고 광주의 불명예도, 공수부대의 불명예도 모두 씻어진다. 모두에게 윈윈이 되는 것이고, 대한민국이 명예로워지는 것이다.
이치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조사위는 어째서 광주의 피해가 꼭 공수부대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516억 원의 국가 예산을 탕진하면서 100명에 가까운 광주 사람들을 서울로 데려와 조사가 아닌, 협잡행위를 해야만 하는가? 5.18유공자들이 벌이는 이 수상한 행위를 놓고, 반역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할 국민도 드물 것이다.
3. 5.18에 대한 미국의 평가
1) 미 CIA 보고서
5월 단체, 광주 법관, 주사파 법관, 5.18 조사위는 광주에 북한이 왔으면, 미국이 모를 리 없다고 했다. 이들은 1980.5.9.및 동년 6.6.자 CIA 보고서와 2020.5.13. 자, 비밀 해제해 한국에 이양된 CIA 레포트에 북한군 개입 사실이 기재돼 있지 않다는 것을 제1차 증거로 제시해왔다. 5월 9일은 5.18이 발발하기 9일 전이며, 이날 미 CIA는 북한의 남침징후가 보이지 않고 있다는 내용을 몇 줄로 보고했다. 동년 6월 6일에 미 CIA는 판문점에서 만난 북한 장군의 말을 인용 보고했을 뿐이다. "북한이 행동을 취하면 전두환을 돕는다는 것임을 북한이 직시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 보고서로 보아 미국도 북한 개입을 모르고 있는데 일개 개인이 무슨 능력으로 북한군 개입을 주장하느냐"는 것이다. 이 주장은 현재 제기되고 있는 소송에서도 일관되게 제시하고 있다.
2020.5.13. 수많은 보도 매체들이 미국으로부터 비밀 해제되어 한국 정부로 이관된 외교문서가 43건 140쪽이라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는 공무상 사기였다. 미 대사관 홈페이지에는 2020.5.11.부터 122건 520쪽에 게시돼 있다. 한국 외교부가 건수는 3분의 1, 페이지 수는 4분의 1 정도로 줄여서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와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에 게시한 것이다. 조사위는 이번 2023.12.26. 자 5.18 조사위 보고서에서 이 122건 520쪽을 찾을 수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원한다면 옛날 전화번호부만큼 두꺼운 복사책을 제시할 수 있다. 이 520쪽 보고서는 재판부에도 제출돼 있다. 그런데 왜 못 찾았다는 것인가? 5.18 조사위가 참고한 [5.18 답변서](2021.9.8) 제 95쪽에서 100쪽 사이에는 미국의 공개한 9개 문서의 페이지 번호와 그에 해당하는 CIA 보고서 내용이 사진으로 제시돼 있다. 그런데도 5.18 조사위는 [5.18 답변서]에 적시돼 있는 122건 520쪽의 존재 자체를 찾지 못했다며 딴청을 부리며 기피했다. 이런 조사위를 어찌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이 520쪽 중 9개 쪽(p.233, 234, 237, 287, 288, 291, 310, 311, 324)에 기재돼 있는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간첩 등 불순분자와 공산당 선동자들이 광주 사태 전반을 장악했다.
2. 상당한 침투자들이 상륙했다.
3. 목포로부터 군중이 몰려와 광주 시위에 참가했다.
4. 550여 명의 극렬주의자들이 무기를 탈취하여 시위를 주도했고 통제했다.
5. FBI 보고에 의하면 5월 21일 현재 광주 시위대 규모는 15만이고 폭도가 확보한 총기는 3,500여 정, 폭도가 광주에서 몰고 다니는 차량은 238대라 한다.
6. 온건적인 광주시민을 배제한 채 극렬분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인민재판을 열어 몇 명이 처형되었다. (주: 실제로 4명의 청년이 건장한 어깨들에 의해 도청 안으로 연행돼 가는 사진이 4장 있다.)
7. 유언비어와 괴담이 집단 히스테리 증세를 일으켜 광주시민을 분노시켰다.
이는 김대중 추종자들과 간첩들의 공동 소행으로 보인다.
8. 낯선 외지인 폭도들이 광주시민에게 총기 소지를 강요했다.
9. 폭도들은 광주시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엄청난 양의 폭탄을 조립해 놓았는데 계엄군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기술자를 잠입시켜 폭탄을 해체함으로써 광주의 재산과 생명을 보존케 했다. 계엄군은 자기들에 허용돼 있는 자위용 발포권을 끝까지 사용하지 않고 광주시민의 생명을 보호했다. 광주시를 재탈환할 때에 계엄군이 사용한 전술은 기상천외한 방법이었고, 이 방법으로 인해 피해가 대단히 미미했다. 이 세 가지는 한국군이 매우 칭찬받아야 할 업적이었다. 계엄군은 검거된 폭도 1,700여 명 중 1,000여 명을 즉시 훈방할 만큼 너그러웠다.
여기까지의 미 CIA 보고서만 보아도 5.18은 김대중 추종자들과 북한에서 양성될 수 있는 특수 전투프로 집단 550여 명이 합작한 폭동이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런데 미국 CIA 보고서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해왔던 문재인정부와 5.18 진상조사위는 이 중요한 CIA 보고서 핵심 내용을 국민에게 숨겼고, 마지막 보고서를 쓰는 순간까지도 기피하고 딴청을 부렸다. 이것이 공무집행상의 사기행위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2) 미 헤리티지 재단보고서 (South Korea's Kwangju Incident Revisited)
미국을 최고의 정보 쏘스(source)로 내거는 5월 단체, 광주 법관들 그리고 5.18 조사위가 또 숨기는 미국 보고서가 있다. 1985년 9월 16일 미 헤리티지 재단 연구소 연구위원들이 광주에 와서 작성한 보고서다. (보고서 요약) 한국군은 자체 희생을 감수하면서 광주시민의 생명을 끈질기게 보호했다. 광주의 희생은 폭도들과 불순분자들에 의해 발생했는데도, 광주에는 공수부대와 전두환이 광주시민 1,000명 또는 2,000명을 학살했다는 괴담이 퍼져있다. 기독교 교회 목사인 '시민위원회' 위원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49명이 시체 확인 작업에 참여했는데 광주 사망자는 191명, 그중 50명은 교도소 공격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광주 사람들은 5.18 진압에 미국이 관여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한일 우호관계를 해치려는 불순분자들이 퍼드린 괴담이다.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광주시민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광주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계엄군은 그들에게 허용돼있는 자위권 발사 권한을 끝까지 유보하고 피해를 감수하면서 광주시민을 보호했다. 첫날부터 “김대중이 처형됐다”, “사망자가 40명이다”는 등의 괴담이 돌았다. 이는 계엄군에 대한 광주시민의 적대감을 유도하기 위한 고단위 심리전이었다. 폭도는 TV 방송국을 불질러 태웠고, 버스와 택시를 강제로 빼앗아 계엄군에 돌진시켰다. TNT 폭탄도 설치했고, 경찰관 4명을 차량 돌진으로 깔아 죽였다. 군납 자동차 공장을 습격했고, 장갑차와 트럭을 몰고 나갔다. 소도시 무기고를 습격하여 대량의 무기를 탈취했고, 건물 옥상에 '탈취한 기관총'을 걸어놓고 계엄군을 향해 마구 사격을 가했다. 5월 21일에는 광주교도소를 새벽 시간에 이르기까지 극렬하게 집중 공격했다. 폭도의 공격력을 당해낼 수 없는 계엄군은 5월 21일 광주에서 완전 철수했다.
광주 학생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폭력적인 극렬분자들에 주도권을 빼앗기고는 극렬분자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초 폭동에 가담했던 시민들도 너무나 상상외의 극단적인 폭력에 충격을 받았다. 5월 22일에는 의사, 변호사, 언론인, 종교인 등 광주 지도자들 60여 명의 수습위원회를 구성했고, 계엄군은 위원회에 협력했다. 하지만 폭도는 수습위원회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탈취된 무기는 소총 5,008정, 엽총 395정, 실탄 288,680발, 수류탄 526발, 다이너마이트 3,000상자로 집계되었다.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광주교도소를 공격하면서 발생했다. 광주교도소 공격은 중무장을 한 폭도들이 새벽 시간까지 주도했고, 계엄군은 방어를 했다. 이 과정에서 50명에 이르는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시민위원장은 총사망자 수가 191명이라고 했다. 광주사태는 분명한 반란사태(insurrection)다. 규모가 방대한 것을 생각한다면 사망자 수는 매우 근소하다. 이는 한국 정부가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의 결과였다. 한국 정부는 광주의 피해를 보상하는 데 최선을 기울였다. 광주의 피해는 과격한 폭도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지, 계엄군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요약 끝).
이상은 미국 CIA와 세계적으로 저명한 헤리티지 재단이 독립적 시각에서 관찰한 보고서 내용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3) 미국 CIA 및 헤리티지 재단 연구소가 내린 결론
1) 광주 폭동은 반국가 반란 (insurrection)이었다.
2) 광주시민들을 자극하는 악성 괴담이 유포되어 참여한 시민이 15만 명 규모였지만 이들을 조종한 극렬주의자들은 550여 명이었고, 이들은 북한 및 김대중 추종자들과 연결돼 있었다.
3) 극렬주의자들은 광주시민을 동원하기 위해, 전문적인 수법에 해당하는 군중 히스테리를 발작시키는 괴담을 유포시켰다.
4) 해안으로 상륙한 집단이 있었고, 목포로부터 많은 시위대가 광주로 이동해 폭동에 합류했다.
5) 극렬적인 폭도 550여 명은 군납업체를 털어 수백 대의 군용트럭과 장갑차를 탈취했고, 5월 21일 탈취한 무기가 5천여 정이나 되었다.
6) 극렬주의자들은 인민재판을 열어 광주시민 여러 명을 즉결 처형했다.
(주: 실제로 4명의 광주 청년이 건장한 어깨들에 의해 도청 안으로 연행돼 가는 모습이 담긴 4장의 사진이 있다. 광주시민이 인민재판을 열고 최소 4명씩이나 총살을 시켰다는 것은 폭도가 광주시민이 아니라는 데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7) 계엄군은 폭도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어 5월 21일 오후 광주시를 탈출했다.
8) 폭도들은 그들이 탈취한 무기를 광주시민에게 소지할 것을 강요했다.
9) 5월 21일 밤, 중무장한 폭도들이 대형 차량들을 앞세워 새벽 시간까지 교도소를 집중 공격했다. 여기에서 가장 많은 폭도 측 피해가 발생했다.
(주: 2017.8.29. 경향신문은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조사위원의 조사내용이라며 5월 21일, 공수부대에 보급한 탄약량이 1,279,701발이었는데 실제 그날(5.21)의 사용량이 484,484발이었다는 보도를 냈다. 5월 21일 실탄이 대량으로 사용될 만한 상황은 교도소를 공수부대가 방어할 때 말고는 없었다.)
10) 폭도의 극렬성에 대해 광주시민들이 의심을 했다.
11) 극렬 폭도는 광주시를 심각하게 파괴할 수 있는 TNT 3,000상자를 도청에 폭탄으로 조립해 놓았다. 계엄군은 광주시를 보호하기 위해 생명이 위태로운 공간에 전문기술자를 투입시켜 조립된 폭탄 모두를 해체했다.
12) 계엄군은 자신들에 허용돼있는 자위 수단으로서의 발포 권한을 자제하고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광주시민을 보호했다.
13) 계엄군은 광주시 탈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명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기발한 방법을 창안하여 상상외로 피해를 극소화 시켰다. 이는 한국군이 매우 칭찬받아야 할 본보기다. (주: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일반적 예측을 뒤집고, 17명만 사살됐다.)
14) 광주의 피해는 계엄군이 주도한 피해가 아니었다.
소 결
미국은 5.18 사태를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제 3자적 입장에 있는 존재이고, 5월 단체, 광주 법관 등이 정보 쏘스 측면에서 가장 우선시해왔던 존재였다. 그런데 미 CIA와 헤리티지 재단 연구소는 공히, '5.18은 김대중과 북한이 550여 명의 극단주의 폭도집단을 통해 주도한 반란(insurrection, Rebellion)'이라고 평가했다. 2024년 1월 초, 스카이데일리는 2023년에 법의학자와 육사 출신 장교들 그리고 당시 미 CIA 간부로 있었던 대북 전문가들이 제공한 증거자료 30개를 일간지 40면에 걸쳐 총정리 한 [5.18 특별판]을 인쇄해 널리 배포했다. 그 제목이 [5.18은 DJ세력과 북이 주도한 내란]이었다. 여기에는 지만원이 제시한 42개 증거 이외에 또 다른 30개의 증거가 제시돼 있다. 증거가 모두 72개인 것이다. 그런데 5.18 조사위는 스카이데일리가 제시한 30개의 증거가 42개 증거 중의 일부라는 허위사실을 내세웠다.
조사위원회는 보고서에서 ①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했고 ②불리한 핵심 증거는 다루기를 회피했고 ③판단이 유치할 만큼 미숙했다. 이 세 가지를 구체적으로 열거하기 전에 먼저 필자는 '누가 봐도 5.18은 북한 소행'이라는 것을 단박에 직감할 수 있는 근거들을 먼저 정리한다. 이 근거들은 미국 두 개 기관의 평가와 정확히 일치한다.
4. 조사위 최종보고서를 검토한 이후 필자가 내린 결론, '5.18은 분명한 북한소행이었다!‘
아래 내용만 보아도 누구든 5.18은 북한 특수공작부대가 주도한 게릴라전이고 심리전이었다는 것을 직감할 것이다.
1) 1980.3.28. 일본 통일일보의 보도다.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직후 김일성은 강철만 상장(3성)으로 하여금 남한에 게릴라를 보내 ’자발적 의용군‘으로 위장하여 폭동을 일으킬 준비를 하게 했다는 보도와 이들이 북한에 지원을 요청하는 절차에 따라 남침을 할 것이라는 계획하에 군사태세를 서두르고 있다는 요지의 보도였다. 실제로 김일성은 10.26 직후 '폭풍 5호'의 명령을 내려 해주에 10만 대군을 대기시켰다. 육해공군에 즉각적인 출동상태에 돌입할 것을 명령했고, 간첩 조직에는 남한 내 전민 봉기(전국 폭동)을 주도하라고 명했다.
2) 1980.5.10. 일본 내각 조사실이 한국중앙정보부에 김일성이 5월 중 남침할 것이라는 극비 정보를 중국에서 받았다며 전해 왔다.
3) 1980.5.16. 김대중은 5월 22일전국 시위를 벌이자는 공고를 했다. 김대중은 또한 정권을 잡았을 때를 예비해 24명으로 구성된 내각 명단을 작성했다. 이로 인해 5월 17일 김대중이 전격 구속되자 전민 봉기 대신 광주봉기가 4일 앞당겨 발생했다.
4)1980,5.14. 광주 소재군수지원단 소속 장교단 70여 명이 증심사(무등산 입구의 절) 옆 도로를 지나던 중 전라도 말씨를 쓰지 않는 매우 낯선 이방인 같은 청년 집단 100여 명과 조우했다. 눈에서는 살기가 돋고, 옷은 남루하고, 체격이 단단하게 단련돼있는 집단이었다. 증심사는 광주사태를 현장 지휘한 고급간첩 손성모가 광주시민들과 함께 작전을 모의하던 일종의 작전지휘소였다. 간첩 손성모의 정체는 후술한다.
5) 1980.5.15. 당시 중앙정보부는계엄사에 신안군 앞바다에 북한 공작조가 침투했다는 첩보를 제공했다. 계엄사는 20사단 수색중대(130명)를 출동시켰다.
5월 17일, 무장한 병사들이 트럭에 탑승하여 송정리 근방을 통과할 때, 갑자기 수백 명의 괴한들이 습격했다. 수색중대는 사단 내에서도 A급 병사들로 구성돼 있다. 이런 130여 명의 A급 장병이 괴한에 끌려가 집단 몰매를 맞고 단체로 3주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다. 무장한 A급 장병 130명을 납치해 가서 죽지 않을 만큼 때려눕힌 괴한은 몇 명일 것이며, 이들의 무공 실력은 도대체 얼마나 출중한 것일까? 이들은 차량 10여 대와 소총을 모두 탈취당했다.(5.18 특별판 19쪽). 괴한 집단은 왜 사살하지 않고 중상만 입혔을까? 사살하면 북한군 소행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위장한 상태에서남남 전쟁을 유발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 침투했다.
6) 5월 18일 상황이다.5월 17일 자정, 전국에는 산천초목이 얼어붙는다는 '강화된 계엄령'이 선포됐고, 예비검속이 실시되어 젊은 사람들은 모두 경찰의 눈에 뜨일까 무서워 집 안에 숨어있었다. 그런데 5월 18일 오전 9시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이변이 전남대 앞에서 발생했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얼룩무늬 공수복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광주에서는 300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전남대에 공수부대가 금방 도착했는지 어떻게 알고 돌멩이가 든 가방을 메고 와 시비를 걸면서 돌멩이를 던져 7명의 공수대원 얼굴에서 피가 흐르게 했다. 공수대원들이 화가 나서 쫓아 갔지만 300명 부대의 달아나는 속도를 당할 수 없었다. 공수부대와 광주 젊은이들 사이의 감정을 악화시킨 이간작전이었다. 이것이 게릴라전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들 300명은 금남로로 달려가 파출소와 차량들에 불을 질러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게 해서 수많은 시민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온 유언비어들을 살포했다. 모두가 다 정밀하게 사전에 준비된 행동들이었다. 이런 배짱과 기획 능력과 체력을 가진 300명의 어깨들을 과연 광주시민들이 조직할 수 있었을까? 광주에서 사망한 154명 그리고 광주에서 체포됐던 시민들의 30%는 10대 전후의 아이들이었고, 50%가 의식주 생활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하층 계급이었다. 각처에 뿔뿔이 흩어져 생활고에 시달리던 사람들 중에 이런 무서운 체력을 가진 젊은 어깨들이 300명씩이나 조직될 수 있었을까? 광주와 조사위는 이 젊은이들이 누구들인지 설명하기를 기피하고 있다. 이 300명을 구성한 사람, 그리고 지휘한 사람은 아직까지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들이 준비해온 유언비어의 일부다. "전두환이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으로 전라도 사람 70%를 다 죽여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보냈다. 벌써 40명이 죽었다. 여대생의 유방을 도려내고, 대검으로 머리껍질을 벗겨 전봇대에 매달아놓았다.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임산부 얼굴에 던졌다..." 전두환을 살인 명령자로 모략하고, 공수부대를 "귀축같은" 악마로 묘사한 괴담들이었다. 이 괴담은 광주 사람들의 상상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황해도 신천박물관에 전시돼있는 상상도를 묘사한 것이고,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살인 명령을 전두환의 살인 명령으로 평행이동해온 것이다 300명의 어깨 부대가 준비해온 괴담은 북한이 만든 유언비어였던 것이다.
5월 18일부터 공수부대 대대장들은 광주 향토사단인 제31사 사단장 정웅 소장(2성)의 작전지휘를 받게 돼 있었다. 정웅은 김대중 계열의 인물로 공수부대 2개 대대 대대장 2명에게 내려서는 안 될 의심스러운 명령을 내렸다. 당시 2개 대대에서 출동할 수 있었던 병력은 합쳐서 불과 400명, 21일 오후 4시에 금남로에 가득 들어찬 시민은 수만 명, 100: 1 이상의 중과부적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정웅은 양개 대대장에게 명령했다. "충장로의 골목길들을 모두 막고 젊은 놈들을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다 체포 연행하라. 목숨 걸고 임무를 수행하라"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공수부대, 저항하는 다수 젊은이들로부터의 저항을 이겨낼 수 없었다. 곤봉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다른 일반 부대 병사들이 이런 상황에 처하면 그들은 총을 자동적으로 발사하게 돼 있었다. 곤봉을 휘두르는 모습이 발생할 것을 미리 예측한 촬영사들이 미리 금남로 옥상들을 점거하고 있다가 그들이 원하는 장면이 나타나자 놓치지 않고 촬영했다. 그래서 곤봉 사진들은 다 위에서 밑을 향해 찍혀 있다. 이 곤봉 사진들이 인화되어 시민들에 배포되자 시민들은 더욱 분노했다. 대한민국 땅에서 이렇게 정교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광주와 국군 사이를 이간질하여 남남 전쟁을 유발시키는 심리전 능력을 가진 조직이 광주 말고 어디에 또 있을까? 여기 이 5월 18일 상황 하나만 보아도 이와 같은 능력은 광주 말고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능력에 해당할 것이다.
7) 공수부대 최악의 노이로제는차량 돌진 공격이었다. 소단위로 갈라져 행동하면 성난 군중에 밟혀 죽고, 대대 단위(200명)로 정렬해 있으면 시속 100키로로 달려드는 화물차에 깔려 죽는 막다른 골목에서 신음하는 것이 공수대원들의 운명이었다. 3,000명이 넘는 한국군 최강의 공수부대를 이토록 죽음의 구덩이로 내모는 실력을 가진 일반 국민들이 광주에 말고 어느 도시에 또 있을 수 있는지 국민은 생각해야 할 것이다. 특히 5월 20일의 광주역에서 전멸당할 위기에 처했던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전남대로 철수해서까지 24시간 동안 포위되어 전멸 위기에 몰려있었다. "차 온다"는 외마디 외침은 곧 지옥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경고음이었다. 조사위는 이런 살인 능력이 광주의 어느 시민들로부터 형성됐는지 밝혀야 한다. 이를 밝히지 못하면 차량 돌진과 포위 압박은 북한특수군의 소행일 수밖에 없다.
8) 군분교 '매복 기습 작전'을 소개한다.5월 21일은 북한특수 용병급 부대가 아니면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군사작전이 아침부터 밤중을 넘어 22일 새벽에까지 연달아 이어졌다. 이른바 '군분교' 매복 습격사건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고난도의 정교한 매복작전이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차량이 전교사나 광주 시내로 가려면 작은 하천을 건너는 '군분교'라는 교량을 거쳐야 한다. 특수군 부대 600명 중 B조인 300명이 5월 20일 공수부대 5개 대대를 광주역 광장에 포위해 놓고 자동차 돌진 공격을 반복하는 동안 또 다른 300명의 A조는 20일 오후 군분교로 와서 20사단이 광주로 출동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작전 준비를 했다. 그들은 간첩을 통해 20사단 부대가 5월 21일 오전 8시경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하고 그 시각에 군분교를 통과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하에 하루 전인 5월 20일 오후에 군분교에 가두리장을 설치하는 대공사를 했다. 수많은 중장비들을 동원하여 더러의 도로에는 절개 공사를 하여 차량 통과가 불가능하게 만들고, 더러의 도로에는 부피가 큰 버스, 철 구조물, 목재 등으로 장벽을 쌓아올렸다. 5월 21일 오전, 300명의 전투조는 구조물 뒤에 숨어 매복을 했다. 20사단 지휘부 지프차 차량부대가 나타나자 노인 부대가 나타나 20사단 병사들에게 손을 흔들며 박수를 쳐서 환영의 제스처를 표했다. 병사들은 자기들을 환영하는 줄로만 알고 그들이 안내하는 대로 따랐다가 가두리장에 갇히고 말았다. 순간 매복해 있던 어깨 300명이 몽둥이, 낫. 화염병으로 20사단 부대를 공격했다. 기습을 당한 장병들은 차량과 무기와 무전기와 군수 장비들을 팽개치고 도주했다. 300명의 괴한들은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해 14대의 지프차를 타고 인접해 있는 군납업체인 아시아 자동차로 달려갔다. 이때 촬영된 사진에 나타난 괴한부대의 모습에서는 국제 용병급 전투프로의 아우라가 서릿발처럼 솟아나 있다. 그런데 조사위는 이 사진을 기피했다.
이 내용은 전두환 내란재판용으로 사용된 1995년 7월 18일 자 검찰 조사보고서 [5.18 관련 사건 수사기록] 제92-93쪽에도 기재돼있다. 스카이데일리 [5.18 특별판] 제14면에는 사진과 함께 보충자료들이 실감 나게 묘사돼있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는 5.18편에 서서 5.18 측을 변호하던 유명한 성직자까지도 "군분교 사건 한 가지만 보아도 5.18은 북한의 특수작전임이 분명하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스카이데일리 [5.18 특별판] 1쪽 상단에는 가두리장의 장엄한 모습이 사진으로 제시돼 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작전을 수행한 지휘자가 광주에는 없다.
9) 검찰 보고서와 상황일지에 의하면 군납업체인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괴한부대 600명이 접수했다. 5월 21일 오전 9시, 군분교 바로 이웃에 있던 군납업체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는 600명의 어깨 부대가 집결했다. 군분교에서 이동한 300명과 대형 버스를 몰고 온 또 다른 300명 부대였다. 북한 자료와 조사위는 여기에서 군용차량 414대가 탈취되었다며 판단의 일치를 보였다. 남한 자료들에는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400대 내외로 기록돼 있다. 이 414대의 군용차 말고도 광주에서 탈취당한 차량은 버스, 대형트럭, 택시 등 또 다른 800여 대가 있었다. 이 800여 대의 차량들을 빼앗은 집단은 광주의 어느 집단이며 누가 무슨 목적으로 빼앗았는가? 조사위는 아무리 자가용 시대가 아니었다 해도 광주에 운전자가 수백 명이었다는 말만 반복한다. 군용차량 414대를 북 특수군이 운전한 것이 아니라 광주의 운전자들이 운전했을 수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800대의 차량을 운전하는 운전자는 누가 하루 이틀 사이에 무슨 목적으로 갑자기 징집했다는 것인가? 조사위 주장대로라면 이들 600명은 414대의 트럭과 4대의 신형장갑차를 운전하는 운전병 400여 명을 별도로 아시아 공장에 따로 데려왔다는 것이 된다. 조사위 주장대로라면 5월 21일 오전 09시에 아시아 공장에는 어깨부대 600명과 운전수 400여 명, 계 1,000여 명이 점거해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조사위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다.
10) 17개 시군에 위장된 44개 무기고 대부분을 4시간 만에 털어 5,000여 정의 총기를 탈취하고 8톤 트럭 분의 TNT 상자 3,000개를 탈취하여 도청 지하에 2,100발의 폭탄을 제조했다. 2,100발의 폭탄을 해체하기 위해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는 해체 전문가 5급 갑의 배승일 문관과 2명의 조수를 비밀리에 투입시켜 5월 24일과 25일 양일에 걸쳐 뇌관 분리 작업을 했다. 이는 2007.1.16. 연합뉴스와 월간조선 2020년 5월호에서도 보도가 됐지만 조사위는 이마저 부정한다. 조사위는 다이너마이트로 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은 광산 근로자도 할 수 있다고까지만 주장한다. 그러나 그 어느 광주 사람이 자기의 가족과 재산이 있는 광주시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이 엄청난 양의 폭탄을 조립해 놓았겠는가? 누가 누구의 지시를 받아 무슨 목적으로 2,100발씩이나 조립해 놓았는지를 조사위가 밝히지 못하면, 이 폭탄 제조 만큼은 북한군의 소행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무기탈취에 대해서도, 광주시민들이 탈취했다면 몇 개의 무기고에서 몇십 정 정도씩은 탈취할 수 있다. 그러나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있는 44개 무기고 대부분을 4시간 만에 털어 5,000여 정의 각종 무기와 탄약 30만 발을 탈취한 행위는 지휘체계가 있고, 체계적으로 훈련돼있고, 사전답사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기동하는 대규모 조직체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누가 지휘해서 무슨 목적으로 이 많은 무기를 탈취했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광주에서 사망한 사람이나, 체포된 사람 모두 그 80%가 어린 학생이고, 식모이고, 구두닦이, 공원, 점원 등 생계조차 어려운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갑자기 슈퍼맨으로 변해 이렇게 일사불란한 조직으로 움직여 17개 시군으로 달려가 분해하지 못하면 들 수도 없는 중화기 등, 그들이 생전 만져보지도 못한 무서운 물건을 탈취해 왔겠는가? 사용법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무서워할 총기는 무슨 목적으로 훨훨 날아다니면서 철문을 부수고, 경비병을 제압하여 탈취해 왔다는 것인가? 조사위는 무기고 탈취가 5월 21일뿐만 아니라 22일과 23일까지도 이어졌는데 왜 4시간 만에 털었다고 주장하느냐 반문한다. 참으로 딱한 사람들이다. 지진이 나도 여진이 있는 법이다. 22일과 23일에 잔챙이들이 몇 정씩의 무기를 탈취한 것은 여진에도 해당한다. 소방수가 물총을 쏘면 많은 물방울이 튀어 흩어진다. 그러나 굵은 물줄기는 소방의 기능을 수행한다. 무기고를 4시간 만에 5천여 정을 털었다는 기록은 북한 문헌들에도 나타나 있다. 차량수와 무기수 그리고 탄약 양에 대한 통계는 남한 기록이나 북한 기록이나 대동소이하다. 끝자리 숫자들은 달라도 규모는 일치하는 것이다. 문제는 북한 기록은 1982년에 나왔고, 남한 기록은 2004년에야 검찰청 지하 창고에서 공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수사자료 공개 시점이 2004년 이었던 것이다. 2004년까지 남한 자료가 공개되지 않았는데 북이 1982년에 발간한 책에 그 정보가 어떻게 다 들어있는가? 구두닦이들이 무엇 때문에 생소한 무기를 5천여 정씩이나 17개 시군을 돌아다니면서 털었는가? 구두닦이, 음식점 배달원, 구두공, 석공, 목공, 식모, 행상들이 군용차량을 생산하는 자동차 공장에 600명씩이나 모여 400여 대의 트럭과 장갑차들을 운전하여 끌고 나와 17개 시군으로 달려갔다는 말인가? 이 기록은 검찰 기록과 북한 문헌 여러 곳에 엄연히 존재한다. 광주시민이 실제로 했던 행동은 고작 ① 5월 24일까지는 각자도생으로 숨어있었고 ② 도청이 비어지자 25일부터 들어가 자기들끼리 갑론을박 의견충돌하다가 우두머리 뽑고 그 우두머리가 간부들 직책을 나눠준 후 계엄군에 손들고 항복한 것뿐이다. 25일 밤중에 도청에서 낯선 사람들끼리 처음 만나 수습위원회를 구성한 것이 고작인 광주의 젊은이들이 이 엄청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수습위원장이 김종배이듯이, 무기 탈취 대장도 광주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구두닦이, 식당보이가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주장을 믿을 사람 거의 없을 것이다. 장르가 어울리지 않는다. 구두닦이가 무엇에 쓰려고 생전 만져 보지도 못한 무기를 해남에까지 트럭을 몰고 가 무기고 경계병을 제압하고 무기를 실어 왔다는 것인가? 이를 믿으라 하는 사람이 송선태 위원장 등 5.18유공자들인 것이다.
11) 금남로 옥상을 사전 점령한 무장괴한 부대가 금남로 시민을 대량 학살 시켜놓고 이를 도청 앞 발포사건이라고 뒤집어씌웠다. 5월 21일 오후 1시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계엄군이 도청 앞 시민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하여 도청 앞을 피바다로 만들었다고 알려진 시각이다. 그런데 당시 금남로를 채우고 있던 광주시민들의 증인과 당시 의사들의 검안 보고서를 법의학자와 육사구국동지회 등 장교 출신들이 합동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날 24시간 동안 사망한 시민 총 62명 중 도청 앞 공수부대에서 사망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광주가 도청 앞 사망자라고 그토록 선전했던 꼬마 상주 아버지 조사천도 도청에서 1km 떨어진 금남로 가톨릭센터 빌딩 밑에서, 옥상을 점거한 무장조로부터 70도 각도로 내려다보고 쏜 카빈총에 맞아 머리-턱-가슴 순으로 손상을 입고 사망했다. 이는 스카이데일리 [5.18 특별판] 제10-11쪽에 분석돼 있다. 이 시각에 계엄군에는 실탄이 지급돼 있지도 않았고 장교 지휘관들에만 몇 발씩 지급돼 있었다. 반면 이날 사망한 62명 중 절반 이상은 금남로 옥상을 미리 점령한 무장괴한들이 옥상에서 내려다보고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도청 앞에 집합해 있는 공수부대를 향해 시민군이 장갑차를 지그재그 궤적으로 돌진시켜 공수대원들이 즉사하고 중상을 입었다. 이러한 공격은 두 번 더 계속됐다. 이때마다 공수부대 장교들이 달려오는 차량을 향해 실탄을 발사했지만, 당시에는 실탄이 보급돼있지 않아 그 양은 불과 몇 십 발이었다. 이렇게 도청 앞 총소리를 유도해 놓고, 그 총소리에 편승해 계엄군의 시야가 미칠 수 없는 금남로 공간에서 옥상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학살을 계엄군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순진하게 살아가는 국민들은 상상을 할 수 없겠지만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모략 수법이다. 마치 김대중이 강원도로 도망을 가서 선거를 치를 때, 상대방 완장을 차고 고무신을 돌리게 해놓고 이를 촬영하여 상대방을 모함했듯이, 자기 집에 폭발물을 터뜨려놓고 이를 박정희의 암살 음모라고 뒤집어씌웠듯이 도청 앞 발포는 모략이었다. CIA 등 미국의 두 기관이 평가했듯이 당시 공수부대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했다. 광주시민을 그렇게 소중하게 지켜주었는데 왜 학살자로 모략하는 것인가?
필자는 광주시민 대부분이 공수부대의 진정성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사진이다. 현장 사진들을 보면 5월 27일 공수부대가 철수할 때 많은 남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철수하는 계엄군을 향해 박수를 치고 포옹을 해주는 장면이 있고, 거리를 청소해주는 계엄군 아저씨를 10여 명의 꼬마 여학생들이 따르고 웃고 하는 장면이 있다. 공수부대가 살인집단이라고 생각했다면 절대로 이러한 모습이 촬영될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필자가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의 경험이다. 2002년 겨울, 필자는 북한 개입 표현으로 인해 광주 서부 경찰관들에 의해 안양에서 뒷수갑이 채인 채 6시간 내내 따귀 맞고 머리 쥐어박히고 온갖 쌍욕을 들으면서 그야말로 곧 도축될 짐승처럼 끌려가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14명이 한 방에 있었다. 필자는 5.18을 폄훼했다는 죄로 끌려왔기 때문에 언론에 많이 보도돼 있었다. 감방 사람들도 이를 다 알고 있었다. 필자는 13명의 수용자들로부터도 이지메를 당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교도관들과 의무실장이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감방 동기 13명 모두가 따뜻하게 대하면서 필자의 편을 들어주었다. 13명 모두가 입을 맞추듯 이야기를 해주었다. "5.18을 광주 사람이 하지 않았다는 건 광주 사람들이 더 잘 안다. 5.18 단체 놈들이 조폭이고 사기꾼 놈들이다. 그놈들 때문에 광주 사람들이 싸잡아 욕을 먹고 손해를 본다. 우리 집 옆 사람은 1톤 차에 휘발유 드럼통을 주유소에서 계속 집으로 실어 나르다가 총 맞아 죽었는데 1억을 받고 유공자가 됐다. 인우보증으로 유공자가 돼서 으스대고 다닌다..." 필자는 광주시민 대부분이 이처럼 샤이(shy)그룹에 속해 있다고 평가한다.
12) 5월21일 오후에는 공수부대 10개 대대(3,000여 명)가 포위 섬멸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탈출하는 황당하고도 치욕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5월 19일, 11공수 여단장 최웅 준장은 상부에 "우리 애들 다 죽습니다. 철수시켜 주십시오" 하소연을 했고, 계엄사는 이를 수용하여 20사단과 병력교체 하기로 했지만, 특수군 집단은 20사단 병력이 고속도로와 철로로 접근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3공수여단 5개 대대를 포위해놓고, 자동차 돌진 공격을 연속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300명 부대로 하여금 20사단의 도로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군분교에 가두리장을 설치하고 20사단 부대를 기습 공격하게 했다. 이 어마어마한 작전을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정보력, 기획력, 작전 수행 능력을 보유한 집단이 대한민국 민간인 집단이라면, 대한민국은 군대를 모집해 구태여 훈련을 시킬 아무런 이유가 없을 것이다. 민간인의 평소 작전 능력이 이렇게 훌륭한데 무엇 때문에 군을 따로 유지하고, 청년들을 징집해야 하는가? 그것도 의식주 문제에 허덕이는 껌팔이, 구두닦이와 10세 미만에서 20세 미만의 아이들 실력이!
예비군을 수백 명 모집해 작전을 펴도 이런 능력은 나올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는 국제 용병급 이상의 능력이다. 결국 전남대에 포위돼 5월 20일 자정부터 21일 오후 5시까지 생사를 건 사투를 실탄 없이 벌여야 했던 5개 대대와 도청을 지키던 또 다른 5개 대대는 5월 21일 오후 5시 가까스로 광주시를 탈출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10개 대대의 공수 병력을 이 정도로 압박하며 섬멸시킬 수도 있었던 능력이, 개념 없이 살아가는 식당 종업원급 청소년들과 하층 계급에 존재했다는 것은 이솝우화보다 더 황당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존재가 북이 최고로 아끼는 정예 특수군이 아니면, 무슨 존재였다는 말인지, 조사위는 답해야 한다. 누가 어떤 사람들을 모아서 이런 초인적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인지 밝혀야 하는 것이다. 이 600명이 급조된 광주의 양아치 부대다?
13) 교도소 공격과 청주유골: 5월 21일 연속된 초특급의 특공작전은 21일 밤에서 22일 새벽에까지 이어진 광주교도소 공격으로 마무리됐다. 야간공격은 특전부대 용사들도 벌벌 떠는 공포와 지옥의 작전이다. 그런데 구두닦이 계급, 10대 20대 아이들이 야간에 총을 들고 삼엄하게 방어되고 있는 교도소를 연속 공격했다는 것은 상상 밖의 현상이다. 이들은 이날 낮에 어째서 땅끝마을까지 트럭을 몰고 가 그 많은 총기와 실탄과 수류탄들을 탈취해 왔는가? 더구나 수류탄은 군 장교들도 가까이하기 싫어하는 공포스런 폭발물이다. 젊은 사람들이 어쩌다 무기를 턴다 해도 한두 정일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무기는 보기만 해도 공포스런 존재다. 5,000여 정의 무기를 전남지역의 광범위하게 곳곳에 숨어있는 무기고를 털어 확보했다는 사실은 그냥 '무기를 많이도 털었다'는 정도로 지나칠 사건이 아니라 전술적 전략적 측면에서 음미해야 할 중대한 사건이다.
5만 폭도를 이끈 핵심은 600명이다. 그러면 넉넉잡고 무기는 1,000정만 털면되었다. 그런데 왜 그 8배나 되는 5천여 정의 무기를 무기고를 지키는 경계병과 전투를 하면서 털었을까? 두 가지 목적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미 CIA 보고서의 첩보 내용 그대로 광주시민에게 강제로라도 총을 들게 해서 계엄군과 싸우라고 넉넉히 털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광주교도소에 간첩 수 170명을 포함한 2,700명의 수용자들에게 총을 주어서 폭동의 동력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실제로 5월 21일, 북한에서는 교도소를 속히 공격하라는 무전들이 날아왔다. 5.18 작전은 전면 남침의 물꼬를 트는 중차대한 마중물 작전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이 직접 지휘했을 것이다. 교도소를 공격하라! 어느 명령이라고 회피하겠는가?
조사위는 보고서에서 교도소 공격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97년 대법원 판결서에는 교도소 공격이 5회에 걸쳐 있었고, 그 과정에서 무장 시위대가 10여 명 사살됐다고 기재돼있다. 이는 민주화의 범위를 넘는 것이라는 판결문 기재도 있다. 조사위는 이 대법원 판결까지도 부정한다. 미국 헤리티지 재단 보고서는 교도소 공격에서 가장 많은 시민이 사살됐다고 기록했다. 조사위는 시위대가 초저녁과 새벽 시간대에 걸쳐 두 차례만 가볍게 교도소에 접근한 상황 기록밖에 없다며 교도소 공격을 부정한다.
상황일지! 필자는 숨 가쁘게 진전되는 베트남 작전에서 상황병의 한계를 경험한 사람이고, 상황장교를 1년 이상 벙커에서 담당했던 사람이다. 상황 일지는 누락되는 수가 많다. 특히 작전이 치열하거나 고될수록 상황은 누락되기 쉽다. 그래서 종군기자가 따르고, 전문적인 전사 기록 장교들이 따르는 것이다. 병사들의 기록 능력과 대대장, 중대장들의 상황 인식 사이에는 많은 격차가 있다. 따라서 조사위의 주장은 대단한 착각이다. 군을 모르는 문외한들인 것이다. 상황일지는 판단 징후 중의 하나일 뿐, 전부가 아니다. 5월 21일, 교도소 공격이 있었다는 것을 수십 개 사실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퍼즐 맞추기에 의해 증명된다.
(1) 기록이다. 상황일지에 냄새가 나 있고(2회 공격), 대법원 판결서에 5회에 걸친 공격이 있었다고 기록돼있다. 일단 5월 21일에 2차례 이상의 교도소 공격이 있었다는 것까지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미 헤리티지 연구소 보고서 내용이 더해진다. 교도소 공격에서 가장 많은 폭도가 죽었다는 내용이다.
(2) 여러 공수대원들사이에는 교도소에서 무지하게 많은 사격을 했는데 이상하게 시체가 없다는 말들이 퍼져있다.
(3) 2017.8.27. 경향신문은 2007년에 국방부 과거사 조사위원회가 밝힌 탄약(실탄) 소모량 현황을 보도했다. 5월 21일 당일 공수부대에 불출한 실탄이 1,279,701발이고, 그중 실제 사용한 양이 484,484발이었다고 했다.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 작전 내용을 보면 계엄군은 교도소 방어 당시 말고는 실탄을 배급받지 못했다. 실탄은 장교 지휘관들에게만 몇 발씩 있었다. 그나마 31사단 한동석 중위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실탄은 도청 앞에서 불과 몇십 발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 50만 발에 가까운 실탄이 사용되었을 개연성이 가장 높은 상황은 교도소 방어뿐이다. 더구나 김일성에게 교도소 공격은 폭동을 타 지역으로 확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고, 그래서 그 공격은 김일성이 직접 지시했을 것이다.
(4) '무등산의 진달래'라는구슬픈 노래가 아리랑곡처럼 불리고 있다. 이 노래는 광주에서도 비공개된 모임에서 불려지고 있다고도 한다. 그 가사에는 '북한에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둔 전사들이 광주에 와서 동강 난 조국을 하나로 잇기 위해 억세게 싸우다 무리죽임(떼죽음)을 당해 무등산의 진달래도 피어나있다"는 사연을 노래하는 슬픈 곡조의 노래다.
"동강난 조국을 하나로 다시 잇자 억세게 싸우다가 무리죽음 당한 그들 사랑하는 부모 형제 죽어서도 못 잊어 죽은 넋이 꽃이 되어 무등산에 피어나네.."
북한은 이처럼 직설적으로 조국 통일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들을 광주에 보냈고, 그들이 억세게 싸우다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이러니까 북한에서는 해마다 5월이 오면 28개 전 도시에서 5.18기념 행사를 성대하게 벌이고 있는 것이다. 북한 전사들이 떼로 죽었다면 그 장면은 오로지 교도소 공격 시의 장면밖에 없다. 도대체 몇 명이나 죽었기에 '떼죽음'(무리죽음)을 당했다고 저리도 슬피 노래를 부르는가? 그 단서가 있다.
(5) 3점의 북한 서적들과북한의 기록영화에 475명의 숫자가 "분통 터진다"는 표현과 함께 연속적으로 기재돼 있다. 1980년 6월 5일, 일본 천주교정의평화협의회가 기자회견장에서 퍼뜨린 '찢어진 깃폭'에 475명이 도청에 무더기로 쌓여 있다고 했다. 5.18 전 기간에 걸쳐 사망한 광주시민은 불과 154명, 어떻게 그의 3배가 넘는 475명이 죽었다며 반복적으로 분개할 수 있는 것일까? 1982년 북한 조국통일사가 펴낸 [주체의 가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제 591쪽에도 475명을 기재해놓고, 공수부대 놈들의 만행에 치가 떨린다고 했다. 1985년 북한 노동당 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의 86쪽에도 있다. 1980년 바로 그해에 조선기록영화사가 편집한 기록영화 [군사파쑈도당을 반대하는 광주 인민항쟁]에서는 "하루에 475명이나 죽였다"며 내레이터가 전두환과 공정대 놈들을 향해 악을 써가면서 분노를 분출하고 있다.
북한은 왜 하고많은 숫자 중에 꼭 475명을 줄기차게 노래할까? 떼죽음은 분명히 당했다고 노래에까지 반영을 했으면 그 숫자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몇 명일까? 475명이 이렇게 반복적으로 분노의 감정으로 표현돼 있다면 이 숫자는 허투로 흘려버려도 되는 숫자가 분명 아니다. 그런데 475명과 굉장히 가까운 숫자인 430이 또 나타났다. 추수를 할 때 이삭이 존재하듯이 430명은 추수한 숫자이고 45(475-430)는 이삭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430구의 실체는 있는가?
(6) 2014.5.13. 무연고 유골430구가 청주시 흥덕지구 축구공원 조성과정에서 발견됐다. 이 430구는 광주에서 온 유골이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매우 많다. 이 많은 이유가 모두 부정되기 전에는 이 430개 유골은 분명 광주에서 온 유골이다.
① 2014.5.13. 수많은 매체들이 청주 흥덕지구 야산에서 1m 깊이로 넓게 파인 운동장에 나무판(칠성판) 규격이 일정하고, 유품이 전혀 없고, 하얀 비닐로 둘둘 감아 포장된 뒤 매직으로 군번처럼 일련번호가 쓰여있고 지하 1m 깊이에 대오를 갖추어 정렬돼 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청주시는 "혐오감을 일으킨다는 매우 군색한 이유를 들어 보도 통제를 가했다. 이 순간부터는 간첩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게 하는 수상한 징후들이 연속 드러난다.
② 대한민국에서 시체를 하얀 비닐로 둘둘 말아 포장한 경우는 오직 5.18 때의 광주식 포장뿐이다. 더위에 시체에서 부패한 액체가 계속 흘러나오기 때문에 재빨리 비닐로 감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도청 안에는 하얀 비닐로 시체를 포장하는 장치가 설치돼 있었고, 그곳에는 하얀 비닐 더미가 어지럽게 널려진 모습이 촬영돼 있다. 다른 지방에서 한 사람씩 사망한 사람은 비닐로 감지 않는다.
③ 430이라는 숫자는 절대적으로 광주에서 나온 숫자다.
㉠ 1989년 2월, 전남대 5.18 연구소가 작성하여 보관하고 있는 당시 43세 최봉희 여교사의 증언이다. "시립공동묘지 작업자가 5월 29일까지 그의 손을 거친 시체가 모두 594구였다고 말했다." 당시 광주 사망자는 164명으로 공식화돼있었다. 164+430=594다. 430구는 정확히 광주 숫자인 것이다.
㉡ 1988년 7월, 역시 전남대 5.18 연구소 조사자료에는 당시 60대 여성 안병복의 증언이 기록돼있다. "5월 27일 새벽, 시체를 가득 실은 여러 대의 화물차가 시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광주를 5월 27일 새벽에 떠난 430구는 왜 하필 200km나 떨어진 청주시로 갔을까? 지하 1개에 가매장돼야 하는 시체는 간첩이 감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곳에 가져가야 했다. 광주 근처에 묻으면 빠르게 진전되는 도시 확장 속도 때문에 금방 발각이 된다. 문경새재는 지금도 간첩의 소굴이다. 문경새재는 청주의 이웃이다. 간첩 손성모는 광주폭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고 문경에서 체포됐다. 손성모가 무등산 입구의 증심사를 근거지로 활동한 사실은 곧 뒤에서 밝힐 것이다.
④ 청주시는 이 무연고 유골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확실한 것은 청주시가 이 430구를 화장하지 않고 컨테이너 박스에 철제 진열대를 따로 만들어서 차곡차곡 정돈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화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확인됐는가? 두 가지다. 하나는 데일리뉴스 등 여러 개의 메디컬 뉴스다. 2014년, 충청북도에 소재한 총 4개 화장터에서 2014년에 화장한 무연고 유골은 모두 18구뿐이라는 보도가 여러 매체에서 발견된다. 구당 단가가 80만 원, 당시 전라도는 구당 화장 단가가 100~120만 원이었다. 조사위는 화장 증명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필자는 필자 사건을 심리한 2심 재판부를 통해 청주시에 사실확인 신청서를 냈고, 청주시는 많은 자료를 보냈다. 청주시에 불리한 자료가 많았다. 화장 증명서는 없었다. 화장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또 있다. 원래 규정에 의하면 무연고 유골이 발견되면 지자체는 즉시 조달청 나라장터에 화장 및 봉안을 위한 입찰 공고를 내게 돼 있다. 그런데 청주시는 다른 케이스에 대해서는 원칙대로 했지만 430구에 대해서는 이름도 없는 '현대장묘개발'이라는 영세 업체에 구당 2만 원씩에 수의계약했다. 2만 원은 화장 시가의 2%에 해당하는 돈이다. 화장을 하지 않은 것이다. '현대장묘개발'은 그 2만 원으로 무엇을 했는가? 넓은 칠성판 위에 하얀 비닐로 말려있던 유골을 1구씩 털어 불투명한 회색 비닐봉투에 넣고 그 위에 일련번호를 쓴 후 컨테이너 박스 철골 설치대에 질서 있게 정리해 놓았다. 화장을 하려면 왜 이런 작업을 해야 하는가?
청주시는 화장 증명서를 보내지 않았다. 청주시와 조사위는 430구에 대해 해명을 하는데 그 논리가 희극적이다. 1994년 10월 19일부터 95년 5월까지 7개월 동안 서로 다른 109개의 공동묘지에서 작업 중 발굴된 것은 집단으로 이장한 것이 바로 1m 깊이에 하얀 비닐에 쌓인 채 군번 같은 번호를 달고 누워있는 430구라는 것이다. 아무리 다급해도 시청 체면에 이런 황당한 이유를 댈 수 있는지? 그리고 이 황당한 이유를 인용하여 청주유골의 광주 관련성을 부정하고 있는 조사위는 또 얼마나 황당한 존재인지? 국민은 평가해야 할 것이다.
뚝뚝 떨어져 있는 109개의 공동묘지에서 7개월 동안에 발굴된 430구를 집단이장했다는 조사위의 말을 분해해 보자. 7개월이 시작되는 첫날인 1994년 10월 19일 수유리 공동묘지에서 3구가 나왔다고 치자, 그러면 서울시는 원칙대로 조달청 홈페이지 나라장터에 입찰 공고를 하지 않고 여의도에 1m 깊이의 땅을 파고 칠성판을 구해 하얀 비닐로 3구의 유골을 둘둘 감고 묻었을 것이다. 1개월 후인 1994년 11월 19일, 역삼동 공동묘지에서 무연고 유골 5구가 발견됐다고 하자, 이 역시 서울시가 입찰 공고를 생략하고 여의도에 실어가 3구가 묻혀있는 곳을 다시 파서 5구를 똑같은 크기의 칠성판을 구해서 올려놓은 후 하얀 비닐로 감싸고, 매직으로 일련번호를 써서 나란히 높인 다음 다시 흙을 쓸어 덮고, 이렇게 하기를 7개월 동안 109번이나 반복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코미디가 어디 또 있겠는가? 이는 조사가 아니라 코미디 난장판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청주시는 현대종묘개발에 화장비를 지급하지 않았고, 충북도 전체의 화장터에는 430구를 화장한 기록이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18구만 화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청주시는 법원에 화장 및 봉안 증명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청주시와 조사위가 황당한 소설을 쓴 것이다. 사실이라면 왜 이런 구차한 소설을 쓰겠는가?
⓹. 430구 유골이 잘 진열돼있는 컨테이너 박스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런 것을 추적하는 것이 과학자의 매너다. 2014년 9월 19일부터 10월 4일까지 인천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모든 참가국들이 일찌감치 참가 신청을 끝냈다. 끝날 때까지 북한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불참이었다. 그런데 청주 유골이 보도된 지 11일 만인 5월 24일,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게임에 참여하겠다고 뒤늦게 신청했다. 미국 FOX 뉴스는 북한의 의도가 매우 수상하다는 뉴스까지 내보냈다. 2014.7.17. 갑자기 별도의 남북 실무자 접촉이 판문점에서 이루어졌다. 남측 대표는 권경상(아시안게임 조직위 사무총장 겸 청산실장)과 정기영, 김영일이었고 북측 대표는 손광호, 장수명, 고정철이었다. 2014.8,17. 매우 수상한 모임이 있었다. 북측 간첩 사령관 김양건이 남한의 수상한 인물 3인방 박지원, 임동원, 김홍일을 콕 집어 김대중 사망 5주기를 기념하는 화환을 김정은이 증정할 테니 개성으로 와서 받아가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를 간첩들의 접선이라고 평가했다. 여기에서 청주유골 컨테이너 박스를 어떻게 북으로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이틀 만인 8월 19일, 북한의 수상한 일행이 8명씩이나 인천공항에 왔다. 구체적인 실행을 위한 사전 정찰 및 절차를 확인하고 갔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마침표를 찍는 매우 이례적이고 이변과도 같은 이벤트가 발생했다.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김정은의 전용기가 인천으로 날아온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북괴 수장의 전용기가 한국에 날아온 경우는 이것이 최초였다. 북한에서 가장 바쁜 북한 권력 3인방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이 감히 그 어마어마한 위원장의 전용기를 몰고 폐막식을 빙자해 인천에 와서 하루종일 VIP룸에서 하품만 하다가 이륙했다. 외빈은 개막식에 오지 폐막식에는 오지 않는다. 북괴 권력 3인방이 폐막식에 오려고 감히 위원장 전용기를 몰고 왔다? 이는 도저히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필자는 그 전용기에 공화국 영웅 430구가 실려갔을 것이라 확신한다. 430구를 화장한 근거는 없다. 그렇다면 조사위는 컨테이너 박스의 행방을 말끔하게 밝혀야한다.
여기까지에 논리적 모습이 있는가? 정보는 많은 근거들을 가지고 창조하는 것이다. 필자와 조사위가 다른 점은 바로 이 창의력이다. 조금 과장된 감은 있지만 조사위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이나 갈릴레이의 이론이나 뉴톤의 이론을 맞는지 틀린지를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교도소 공격에서 떼죽음을 당한 적의 숫자가 475명인지, 그중 대부분인 430명이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해 추적한 필자의 노력은 어디까지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학자적 노력인 것이지, 광주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조사위의 조사 행위는 지능과 논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감사원 감사관들이 체크리스트 작성해 사실과 사실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을 무시하고 체크 사항 따로따로에 대해 0,×를 치고 있다. 노조원들이 모여 지동설의 정당성을 체크하겠다는 것이다.
14) 특수군 600명과 노인, 어린이들로구성된 조역 부대 600여 명에 대하여 설명한다.
북한의 책들에 475명이 반복돼 있듯이 600명이라는 숫자도 북한 책들에 반복돼있다.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 군중의 한 집단은 "(광주의 분노 35쪽), "600여 명의 광주학생 시민들은.."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95쪽)"을 비롯한 북한의 정기 간행물에 반복돼 있다. 또한 안기부의 상황일지와 검찰보고서 제92-93쪽에도 600명이 300명씩 나누어져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스카이데일리 [5.18 특별판] 21쪽에 제시돼 있듯이 "연고대생 600명"을 가장 먼저 방송한 매체가 북한 방송이었다. 광주에서 계엄군의 심리상태를 교란시킨 '모란봉의 꽃' 전옥주(본명 전춘심)는 "연고대생 600명이 우리를 도우려 오고 있다"며 희망을 주는 방송을 하고 다녔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는 "5월 22일 15:08, 서울서 대학생 5백여 명 광주 도착, 환영식 거행"이라는 상황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는 이후 여러 가지 조작들이 가해졌다. 이 서울 대학생이 그 유명한 연고대생이 아니냐는 여론이 일자 5.18기념재단은 2013년 8월 이전에 ’시위 도중 연행된 시민 학생 등 800여 명 석방되어 도청 도착‘이라고 갈아치기했다. 이것이 불합리함을 네티즌들이 지적하자 다시 '서울서 온 대학생'으로 원상 복구되었다. 2016년 6월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였던 김양래를 2017.10.12. 서울중앙지법, 법정에서 "전두환이 투입시킨 게릴라 부대"일 것이라고 답했다. 이 500여 명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광주 동아일보기자 김영택은 이 500여 명의 복면 부대가 광주 사람이 아닌 외지인이며 전투 능력이 있는 훈련된 부대이기 때문에 전두환이 투입시킨 게릴라 부대일 것이라는 요지의 박사 논문을 썼다. 이렇게 코너로 몰리자 5.18기념재단을 2021년 6월 이전에 아예 [5월 22일 15:08]이라는 난 자체를 삭제해 버렸다. 이렇게 해놓고 조사위는 이 기록이 애초에 근거 없이 뛰어든 기록이었다는 황당한 변명을 했다. 2021년 6월 경이면 조사위가 한참 조사업무를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조사위의 작용에 의해 5.18 기념재단 상황 기록이 삭제되었다고 의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역사인가? 이렇게 기록 조작을 일삼는 조사위 사람들과 5월 단체들을 믿을 국민은 주사파 말고는 없을 것이다.
2020.5.11. 한국 정부에 이관한 미 CIA 보고서에는 15만 군중을 지배하는 핵심 극렬 조직은 550명 정도라고 밝혀져 있다. 그렇다면 500여 명과 600명의 숫자는 허투루 볼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숫자다. 이 숫자는 교도소에서 무리죽음 당했다는 475명과도 논리의 맥을 형성한다. 600명 중 475명이 죽은 것이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난 기록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부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승복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게릴라군의 핵심 부대는 전투부대, 만능의 맥가이버 실력을 가진 특수부대다. 그런데 게릴라 군인부대에는 필수적으로 민간인 조연 부대가 함께 편성돼 있다. 6.25 때 인민군은 무수한 민간 게릴라 부대, 남녀노소 어린이 노년의 게릴라 조연 부대를 활용해 미군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다. 광주에는 얼추 계산해 또 다른 600명 정도로 추산되는 어린이, 노년의 군중이 군대식으로 질서를 지키고 있는 모습들이 담긴 사진들이 많다. 당시 광주시민들은 날아다니는 총알에 맞아 죽는다면서 문을 잠그고 이불까지 쓰고 두문불출했다. 600명 정도로 추산되는 어린이와 부녀자들, 노인들이 절도있게 통제되어 정렬해 있는 군중은 광주시민일 수 없었다.
1968년 1월에는 청와대에 30여 명의 암살 부대가 침투했고, 그해 11월에는 울진 삼척에 120여 명의 무장 게릴라가 내려와 이승복 어린이를 살해했다. 이처럼 맥가이버 간첩들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태백산맥이나 잠수함을 통해 소부대 단위로 광주 주위에 들어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업힌 아이, 안긴 아이들을 포함한 민간집단은 이들이 확보해 놓은 해안 통로를 통해 대형선박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전남지역은 북한의 안방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허술했다. 여기에 더해 당시 합참의장 유병현은 엄연히 계엄사령관이 5.18사건을 관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월권을 하여 해군총장에게 전남 해안을 지키던 가용 병력까지도 전라북도 변산반도로 이동시키라는 ’각별한 부탁‘을 했다. 당시에는 5.18을 지휘하는 작전권은 오로지 계엄사령관에 있었다. 합참의장과 해군총장은 열외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5.18 작전 중 이런 원천적 조치를 계엄사령관 통제를 받지 않고 몰래 한 것이다. 이는 용납이 안 되는 행위였다. 왜였을까? 결론적으로 550명이든 600명이든 광주 현장을 주도하는 북한 특수군은 광주에 실재했다. 500여 명이나 550여 명은 추산치이고 600명은 남북한 문서에 기재돼있는 분명한 수치다. 그리고 전남 해안은 민간부대가 충분히 드나들 수 있었던 허술한 해안이었다.
15) 광주에 실재한 손성모: 간첩 손성모는광주 현장에 실재했다. 광주 현장 사진 5점에는 유명한 간첩 손성모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손성모가 광주 시위 현장에서 활개를 치고 현장 지휘자로 행동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사진들이다. 그는 1981년 청주 지역에 인접한 문경에서 체포되어 간첩 혐의로 복역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0년 김대중은 그를 19년 만에 석방하여 김정일에 보냈다. 이후 손성모는 북에서 '광주에서 세운 공로'로 일약 영웅이 되었다.
탈북자 1호 박사인 안찬일은 안찬일 TV를 통해 2021.4.30. 손성모에 대한 북한 소식을 자세히 전했다.
① 광주 증심사는 5.18 시민군(김일성이 말한 의용군)과 간첩 손성모의 핵심 활동 공간이었다.
② 손성모는 증심사에서 비전향 장기수 류낙진의 딸 류소영과 함께 5.18 공작을 했다. 손성모는 사실상 5.18을 기획하고 지휘했다. 그 결과 북한에서는 일약 영웅이 되고 명사가 되었다. 북한 최고의 훈장인 공화국 영웅 훈장을 받고, 1급 국기훈장도 받아 김정일의 총애를 받고 있다. 손성모 한 인물만 보아도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것이 된다. 그런데 조사위는 이 대목을 반박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다.
16) 이른바 주걱턱 광수, 현장 사진에는턱의 길이가 한 뼘으로 착각케 할 만큼 얼굴 길이의 3분의 1이나 되는 기형의 인물이 있다. 이러한 기형은 세계적으로 다시 없을 듯한 희귀한 기형이다. 인민군부대 부사령관이다. 광주 현장 얼굴이 북한 인물 DB 사진과 빼박으로 닮아 보인다. 단 한 사람의 북한군이 광주에 왔어도,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것이다. 조사위는 이 인물에 대해서는 반박하기를 회피했다.
17) 누가 봐도 북한군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하기 어려운 '지휘체계가 갖추어진 군사행동'을 보이는 현장 사진들이 2021.9.8.에 발행된 [5.18 답변서] 제 53~58 쪽에 걸쳐 20여 개가 제시돼 있다. 제1호 광수는 광주의 7개 장면에서 현장 지휘자 신분으로 촬영돼 있다. 전남도청 안에 보이는 1호 광수가 손을 번쩍 들어올리고 10여 명의 군병을 지휘하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다. 모두 다 20사단에서 빼앗은 장교 우의를 입고 있었다. 이는 무슨 뜻인가? 5월 21일 군분교에서 20사단 차량부대를 공격한 괴한들이, 차량에 있던 우의를 빼앗아 입고, 도청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당시 20사단 상황일지에는 20사단 차량부대는 괴한부대 300명에게 장교 우의 18개, 방독면 18개, 무전기 16대, 전투복 35벌 등을 빼앗겼다는 기록이 있다. 도청 안에는 또 방독면을 쓰고 폭발물을 만지고 있는 사진도 있다. 그런데 한국군 장교용 우의를 입은 10여 명의 괴한들이 총을 거꾸로 메고 있다. 비가 오지 않을 때 총구를 땅으로 향하도록 어깨에 메는 군대는 인민군이다. 조사위는 총을 거꾸로 메는 것은 인민군의 총기 휴대 관행이라는 사실까지는 보고서에서 인정했다. 그러나 우천 시에는 한국군도 총을 거꾸로 멘다며 사진 촬영 시각에 비가 왔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것이 거짓인 이유가 있다.
①사진에는 땅이 젖어있지 않았다. ②촬영 당일인 5월 22일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는 기상정보가 있다. 상황일지에도 '맑음'이라고 기재돼 있다. ③똑같은 인물들이 같은 시각에 똑같은 우의를 입은 상태에서 촬영된 또 다른 사진에는 우의를 착용하지 않은 군병들과 우의를 착용한 사람들이 함께 촬영되었고, 도청 정문 밖에는 우산이나 우의가 없는 민간부대가 수백 명 단위로 모여있는 사진들이 있다. [5.18 항소이유서] 제 56쪽 상단에 있는 두 개의 사진이다. 이들 사진에도 땅은 젖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우의를 입고 총을 북한식으로 거꾸로 멘 군병들은 20사단을 습격한 괴한부대이자 인민군일 수밖에 없다.
특히 56쪽 좌측 상단의 사진을 보면 지프차를 타고 밖에서 도청 안으로 진입하는 군병에 매우 박력있고 날렵한 제스처로 지프차의 진로를 정해주는 통제자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다. 그의 옆에는 금방 지시를 받고 난 우의 병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정문 밖에는 우의나 우산이 없는 수백 명의 군중이 있다. 이 시각에 연속 이어 우의를 입은 괴한들이 포장이 쳐진 트럭에 승차하고, 트럭 앞에는 굵은 나뭇가지를 얽어매 위장을 하고 도청 정문을 나가는 모습이 찍혀있다. 정문 밖에는 이 출동 괴한들의 장도를 축원하기 위해 집결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수백 명의 군중이 몰려있다. 이들은 광주시민이 아니다. 군중의 맨 앞 사람들은 정문을 향해 반달 모양의 반원을 그리며 강강술래식으로 손들을 잡고 있다. 확대경으로 보면 금방 보인다. 누군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군중이고, 통제되고 있는 군중은 광주 사람일 수가 없다. 거의 같은 시각에 연속 촬영된 이 세 개의 사진에는 비가 오지 않았고, 땅도 젖지 않았다. 조사위가 거짓말을 꾸며낸 것이다.
전경 전투복을 입고 전경 철모를 쓰고, 전경의 진압봉까지 차고, 한 사람은 손을 뻗어 지휘를 하고, 나머지 어깨들은 지휘를 받고 있는 모습도 있다. 지프차를 타고 도청 앞으로 진입하는 지프차를 향해 손을 쫙 뻗어 갈 길을 제시하는 어깨의 손에는 무전기가 쥐어져 있고, 손등에는 무전기 파지용 밴드가 걸쳐져 있다. 공격하려고 여러 대의 트럭에 타고 있는 군병들에게 사용 가능한 총만 전달하기 위해 10명 내외의 어깨가 조직적으로 릴레이 줄을 서서 한 사람은 총의 약실과 연발 기능을 점검하고, 그다음 사람은 격발 기능을 점검하여 옆으로 전달 전달을 반복하여 차량에 탑승한 공격조에게 총기를 전달하는 분업형 지휘 장면도 촬영돼 있다. 부지런히 탄창에 실탄을 장입하여 큰 박스에 담는 모습의 사진도 있다. 이 역시 전투병 조직에게 실탄을 배급하기 위한 전투준비 행위다. 수류탄과 TNT 더미 위에 앉아 사용 가능한 수류탄을 골라 큰 용기에 담는 작업을 하는 사진도 있다. 수류탄 더미에서는 유독가스가 발산되기 때문에 사용 가능한 수류탄을 골라 큰 박스에 담는 작업을 하는 어깨들은 방독면을 쓰고 있다. 이는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전문지식이다. 광주의 구두닦이나 10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일반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조사위는 고교생들도 호국단 훈련 시 이런 것을 배웠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둘러댄다. 그리면 이런 광주 청년들의 지휘체계를 구성하여 조직적으로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인가? 조사위에 묻는다. [5.18 답변서] 53쪽에 있는 두 대의 지프차에 승차한 어깨들 모습이 광주의 젊은이들 모습인가? 이렇게 대추 방망이처럼 다듬어진 몸매는 일반 국민들의 몸매일 수 없다. 300명의 어깨들이 20사단 지휘부 차량을 타고 아시아 자동차 공장으로 가는 사진은 영화에서나 볼수 있는 전투 프로의 모습이다. 군분교에서 20사단을 기습 공격한 300명의 정체는 무엇이고 그 지휘자는 누구인가?
[5.18 답변서] 제 53쪽 상단 우측 사진은 10명 정도의 무장한 어깨들이 도청 정문을 닫아놓고 정문을 통제하고 있는 사진이다. 이들 10명을 지휘한 사람은 누구인가? 5월 24일, 도청을 들어가려다 거부당한 [항쟁본부] 간부들조차 도청 접근을 거부당했을 정도로 도청 출입을 통제했다면, 도청을 이렇게 삼엄하게 지킨 주인공들은 과연 누구들인가? [5.18 답변서] 제 54쪽에는 장갑차를 유도하고 있는 건장한 어깨가 몽둥이를 들고 있는 사진이 있고 51쪽에는 여러 대의 차량에 탑승하여, 출동을 대기하고 있는 군병들에 중기관총을 전해주는 사진이 있고, 트럭의 보닛에 타이어를 묶어 요새로 만들고 중기관총을 설치하고 달리는 3명의 전투 프로들의 모습이 있다. 같은 쪽 상단에는 투박한 손에 무거운 유탄발사기를 한 손에 가뿐히 들고, 가슴에는 유탄으로 가득 찬 유탄 주머니를 차고, 옥상을 점령하고 있는 전투프로급 괴한들이 여러 명 몰려있다. 이는 특수무기다. 필자는 이 모든 사진을 당시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인 김양래에 법정에서 보여주었다. 2017.10.12.이었다. 이에 김양래는 이들이 광주 사람이 아니라 게릴라 부대로 보인다고 답했다. 이어서 그는 전두환이 투입시켰을 것이라고 답했다. 5.18의 성역화를 총책임지고 있는 김양래까지도 이 사진들을 보자마자 광주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군복무를 필한 국민이라면 이들 사진 속 주역들이 광주시민이라고 답할 국민 없을 것이다. 광주 시위에서 죽거나 체포된 사람들은 거의가 다 개념 없는 하층 계급이거나 생활전선에서 뛰다가 총을 맞거나 잡힌 사람들이다. 광주에서 개념 있는 사람들은 다 꼭꼭 숨어있었다. 5.18의 영웅이라는 윤상원도 숨어있었다. 광주의 개념 없는 사람들이 위와 같이 전투 프로의 모습을 보였다면 광주는 이 지구상에는 다시없는 전투 프로족의 도시다. 조사위는 이 사진들의 주인공들이 누구이고 누가 지휘했는지 밝혀야 할 것이다.
18) 사진에 나타난 지휘자들, 광주에 전무:5.18 우상화의 최대 약점은 엄청난 군사행위들은 있었는데 그리고 작전을 수행한 현장 지휘자들은 사진들에 나타나 있는데, 현장 지휘자도 광주에 없고 총사령관도 광주에 없다는 사실이다. 5.18 항쟁 총사령관 김종배가 지금 현재까지 5.18 최상의 영웅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에 못지않은 윤상원이 5.18의 실질적인 영웅이라며 신격화되어 있고 그의 출생지가 성역화돼 있다. 이 두 사람 위에 있는 5.18 영웅은 없다. 5.18사태 10일 동안, 이들이 보인 족적은 무엇인가? 5월 18일부터 5월 24일 낮 시간까지 이들은 총소리만 나도 개인 단위로 꼭꼭 숨어있었다. 5월 24일, 도청에 들어가려다 도청을 장악한 인물들에 의해 거부당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들이 한 사람씩 도청에 들어간 날은 5월 25일이다. 이들은 5월 22일 일부 유지들이 이름만 지어놓은 '수습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놓고 패가 갈렸다. 강경파는 김종배를 추대했고, 온건파는 김창길을 지지했다. 하지만 강경파 중 한 사람인 박남선이 김창길을 권총으로 위협해 내보내고, 김종배가 위원장이 되었다.
어마어마한 직책인 '기동타격대' 대장은 19세의 구두공 윤석루가 맡았다. 위원장은 김종배, 내무위원장 허규정, 외무위원장 정상용, 상황실장 박남선 이들 직책은 그들이 만들어서 맡았지만, 그 역할을 실행한 적이 없다. 이들은 5.18 최상의 유공자들이라고 국회의원도 하고 설치고 있지만 수백 장의 현장 사진에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다. 사진에 현저하게 나타나 있는 주역들은 무수히 많은데, 5.18 최상의 영웅이라는 '수습위원회' 간부들의 얼굴은 수백 장 사진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에 더해 광주의 최고 운동권 인물인 윤한봉과 박관현은 미리부터 꼭꼭 숨어 먼 곳들로 도망가 있었고 정동년은 5월 17일 체포되어 감옥에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5월 18일로부터 21일에 이르기까지의 세계 용병급의 대규모 작전을, 어느 조직을 통해 지휘했다는 것인가? 이렇게 자명한 결론을 놓고, 조사위가 요설적 둘러대기를 하는 것이다. 누가 무슨 조직을 지휘하여 5월 18일부터 21일까지의 작전을 지휘했는지 밝히지 못하면 현장 지휘자들과 조직들은 북한군이 되는 것이다.
19) 황장엽과 김덕홍이 동시에5.18은 북이 주도했다고 증언했다.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삼이 2013.4.22 TV조선 '신율의 시사열차'에 출연하여 황장엽과 김덕홍이 증언한 내용을 공개했고, 이어서 월간조선 5월 호에 장문의 기사를 발표했다.
황장엽 증언: "광주 학생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북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을 남한에 전가한 일"
김덕홍 증언: "조선노동당 대남부서에 소속된 사람들 상당수가 광주 민주화운동 끝난 후에 일제히 훈장 받았다“
조사위는 애매한 표현으로 이 증언을 평가절하한다. 이 증언은 황장엽과 김덕홍이 김대중에 의해 24시간 감시당하는 와중에서도 김용삼 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내용이다. 황장엽과 김덕홍은 대북 정보원으로서는 가장 높은 서열에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동시에 5.18은 북괴가 주도했다는데, 무슨 근거로 이를 조사위가 평가절하하면서 북한의 개입을 부인하려 드는 것인가? 이 최고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서열 높은 북한 인물들의 증언을 무시할 수 있는 조사위의 정보력은 과연 어디에 근거를 두는 것인가? 그 근거를 대지 못하면 5.18은 황장엽 등의 발언 그대로 북이 주도한 것이 된다.
20) 광주시 전체가 5.18은 김정일과 김대중이 공동한 작품이라고 선전한 사실이 있다. 2015년 5월 18일, 광주시 전체가 1년 동안 준비한 5.18 축제 '시가행진'이 장관을 이루었다. 사람 크기의 10배가 넘는 대형 조형물이 시가행진 대열의 앞장에 서서 전기로 구동됐다. 김대중과 김정일이 주체사상 횃불을 함께 치켜올리고 있는 조형물이었다. 이 행진에는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체결 등 주사파 구호들이 담긴 현수막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한마디로 붉은 기운이 넘치는 행진이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당시의 대통령은 박근혜, 5.18 신봉자이자 전두환을 증오하는 입장에 있었다. 광주에 태클을 걸 사람이 없었을 때였다. 조사위는 이 사실에 대해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이 조형물 이상으로 5.18이 김대중과 김정일 합작품이라는 것은 강조하는 표현이 더 있을까? 광주시 전체가 5.18은 두 인물의 작품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2024년 1월 초에 발행한 스카이데일리의 [5.18 특별판]의 제목이 바로 [5.18은 DJ 세력과 북이 주도한 내란]이다. 일간지 스카이데일리가 2023년 한 해 동안 집중 추적한 30개의 증거들을 가지고 평가한 내용과 그 8년 전에 광주시가 조형물을 통해 표현한 내용이 100% 일치하는 것이다. 김대중과 김정일이 공동 주도했으면 광주에는 북한군이 온 것이 아니겠는가?
21) 1호 광수는 광주 현장의 로고 인물이다. 그런데 이 인물이 광주에 없다. 1호 광수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7장이다. 이 7개의 사진 중 특별히 의미가 있는 장면은 ①기관총을 경찰용 페퍼포그 차에 거치한 채 대추나무 자세로 레이저 광선을 분출하고 있는 장면과 ②도청 내에서 장교용 우의를 입고, 같은 우의를 입고 있는 10여 명의 군병을 앞에 놓고 손을 번쩍 올린 채 지휘하고 있는 장면이다. 영화감독 강상우는 1호 광수를 찾기 위해 촬영팀과 함께 2015년부터 4년 동안 서남지역을 그의 말대로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2019년 5월 영화 [김군]을 개봉했다. 영화 [김군]의 주인공은 당시 21세의 여성 '주옥'이었다. 주옥의 부친이 운영하는 막걸리집에 '김군'이 자주왔다고 했다. 아버지가 이름을 물으니 "그냥 '김군'이라고 불러주세요"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김군은 광주천 다리 밑에 천막을 치고 7-8명 단위로 양아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했다. 시위가 발생하자 주먹밥과 음료수를 가지고 나갔는데 지휘자처럼 높은 차에 앉아 활동하는 것을 보고, 반가워 먹을 것을 건네주었는데 "김군과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해 한다"고 회상했다. 시위가 끝나자 곧바로 다리 밑에 있던 양아치들이 다 사라졌다고 했다.
이 '주옥'의 증언을 보면 김군은 북한 인물이라는 생각들이 스칠 것이다. 경찰도 검문을 꺼리는 신분이 양아치다. 7-8명이 양아치로 위장해 시내 정찰을 하고 시내의 구조를 숙달시키고 있다가 작전을 마치고 북으로 사라졌을 것이라는 직감이 드는 것이다. 1999년 5월 18일, 방송 3사는 1호 광수 얼굴을 포함해 4점의 얼굴을 하루종일 스퍼트 뉴스로 내보내 현장의 주역들이여 영웅들이여 나서달라” 호소했지만 나서는 사람 없었다. 2015년 10월부터 2016년 3월까지 6개월 동안 광주시가 주도하여 1호 광수를 포함해 혁혁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들이 담긴 사진을 대형으로 확대해 번화한 공간들에 전시하고, 영웅들이여 나서 달라 호소했지만 나서는 사람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정도 되면 1호 광수는 광주에 없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런데 조사위 위원장 송선태가 협잡행위를 벌였다. 2022년 5월 4일, 송선태는 김종철(19세)이 송암동 주택가에서 계엄군에 의해 즉결 처분당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그가 제1호 광수이고 살아있다며 곧 나타날 것이라고 수많은 매체를 통해 발표했다. 그런데 5월12일, 김종철은 온데간데 없고, 당시 20세였다는 차복환을 제1호 광수라고 대대적인 방송을 했다. 차복환은 장흥에서 광주로 올라와 상패 만드는 업체에 종업원으로 있다가 5월 22일, 도청에서 트레이닝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고 페퍼포그 차량에 잠시 탔다가 곧바로 내려와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시위 현장을 아주 떠났다고 했다. 그런데 1호 광수가 포착해 있는 장면은 7개나 된다. 그 중 하나가 페퍼포그에 앉아 레이저 광선을 뿜어내고 있는 사진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6개 장면에 있는 1호 광수는 다 누구들인가? 더구나 도청 앞에서 손을 높이 올리고 총은 거꾸로 멘 10여 명의 군병을 지휘한 1호 광수는 누구여야 하나? 차복환은 페퍼포그에 군복만 입고 잠시 앉아 있던 사이에 사진이 찍혔다고 한다. 그런데 도청 안에게 지휘하고 있는 1호 광수는 장교용 우의까지 입고 있다. 하지만 차복환은 우의를 입었다고 하지 않았다. 송선태의 이런 행위는 조사행위가 아니라 '수작질'이다. 스카이데일리의 [5.18 특별판] 17쪽에는 "차복환은 가짜 분명"이라는 헤드라인 아래 가짜인 이유를 밝혔다. ① 차복환은 콧볼과 윗입술 사이의 법령선에 돼지점이 크게 돌출돼있는데 반해, 1호 광수 얼굴엔 그런 점이 없다는 사실을 밝혔고 ② 의료진의 분석 결과 차복환은 1호 광수가 아니라는 분석 결과를 밝혔다. 얼굴의 광대뼈 사이의 거리를 A로 놓고, 목의 직경을 B로 놓았을 때, B÷A의 값이 1호 광수는 0.87인데 반해 차복환은 겨우 0.73이라는 것이다. 1호 광수는 운동을 많이 하고 체력단련을 많이 해서 목이 굵은 반면, 차복환은 체력을 단련시키지 않은 목이라는 것이다. 생김새 자체도 얼굴형이 1호 광수는 럭비볼형인데 반해 차복환은 조선무처럼 턱 부분이 펑퍼짐하고, 나이테부터가 다르다. 여기에 돼지점까지 다른 것이다. 20세의 차복환이 광주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출몰하며 현장을 지휘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행위다. 1호 광수가 없으면 5.18의 현장 지휘자가 없다는 것이다. 사진에는 분명히 1호 광수가 현장 지휘자 역할을 했는데, 그 현장 지휘자가 광주에 없는 것이다. 조사위 위원장이 감히 '수작질'을 하고 있는 이 사실은 조사위의 보고서에 대한 신뢰성을 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22) 총기에 맞아 사망한 광주시민이116명, 그중 75%에 해당하는 85명이 무기고에서 꺼내온 폭도에 의해 사망했다는 통계가 있다. 광주의 모든 관련자들과 가족이 참여한 합동조사반의 검증 결과였다. 한두 발이라면 우연일 수 있겠지만 75%가 폭도 총에 죽었다는 것은 구조적이고 시스템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이 통계가 시간이 가면서 거꾸로 뒤집히고 있다. 누구에 의해 뒤집히고 있는가? 5.18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는 결론을 조작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5.18 성역화 사람들이다. 사인은 땅속에 묻히기 전에 규명되는 것인데, 땅에 묻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사인을 다시 조사한다는 말인가? 국민을 우습게 보는 '수작질'인 것이다.
23) 5.18 역사관리의 주역도 북한: 5.18 역사는 북한이 집중하여 관리한다. 5.18 역사를 보존하는 방법과 그 강도가 남북한 사이에 현저하게 다르다. 남한에서는 5.18을 5월 18일에만 광주 한 곳에서 열리지만, 북한에서는 28개 도시 전역에 걸쳐 여러 날 동안 성대하게 거행된다. 남한과는 규모와 열정에서 차원이 다르다. 역사책을 통해서도 5.18은 김일성 수령이 지휘한 사건이라고 가르친다. 북한의 최고인 것에는 김일성이 영예의 상징으로 5.18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5월 18일, 김일성이 중요한 일정을 잡는다. 1980년에는 광주 현장 폭동 현장을 담은 기록영화를 제작하여 그중 일부를 편집해 [광주 비디오]를 제작해 남한 국민을 선동했다. 이 어마어마한 지휘를 할 수 있는 인물은 오로지 김일성 한 사람뿐일 것이다. 이에 더해 1989년 황석영과 윤이상을 데려다 엄청난 보상을 해주면서 픽션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해 해마다 북한 주민에 반복해서 관람시킨다. 여기에 더해 '무등산의 진달래'가 아리랑처럼 구슬프게 불리고 있고 이는 광주에까지 침투해 있다고 한다. 무등산의 진달래는 북한의 자식들이 통일을 위해 광주에 가서 떼죽음을 당했다는 노래다. 이러한데도 김일성과 5.18이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조사위는 북한에 현존해 있는 이 사실들이 어째서 5.18과 무관한 것이라고 결론을 냈는지 설명해야 한다. 조사위는 겨우 "북한에서는 4.19에 대해서도 행사를 한다"는 말로 이 모든 것을 지우려 한다. 하지만 4.19와 5.18은 북한에서도 차등이 많이 진다. 4.19는 28개 도시에서 기념행사를 하지 않는다. 기록 영화도 없고, 픽션 영화도 없다. 노래도 없다. 4.19를 영예의 상징으로 하사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4.19는 간첩 '이석'이 배후 조종했다. 탈북자들중 많은 이들이 4.19도 김일성 작품이라고 말한다. 김일성은 4.19나 5.18 같은 폭동을 주도하고도 남을 인물이다. 감히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라고 30여 명의 살인기계를 청와대로 보냈다. 울진 삼척에 120명의 무장조를 보냈다. 문세광을 보내 박정희 대통령을 쏘게 했다. KAL 858기를 공중에 폭파시켰다. 아웅산에 공작조를 보내 내각 모두를 살해했다.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겠다며 금강산 댐을 건설했다. 이 모든 일은 우리 국민들의 상상력 밖에 있었다.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도 이런 끔찍한 테러를 가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공격을 왜 하지 않았겠는가? 조사위는 주장한다. '북한은 4.19를 주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북은 4.19를 기념한다. 5.18도 그런 것이다.' 조사위의 인지능력이 수준 이하인 것이다.
24) 북한 문현들이 5.18의 역사를기록했다.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과 [광주의 분노]는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독서인구가 읽은 [5.18 바이블]이라는 [넘어넘어]의 내용이 됐다. 북한 문헌이 남한의 거의 모든 독서 인구들에게 주입돼 있다는 사실을 이 이상 어떻게 더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을까? 5.18폭동의 본질을 이 두 개의 북한 책들 이상으로 정확하게 규정한 남한 책은 없다. 첫째 5.18이 '정치 시위와 군사 전투의 배합전'이었다고 정의된 것이다. 북한 군사전략의 핵심은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사람들은 군 장교 출신들이다. 남한의 군사전략에는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따라서 광주폭동을 '정치 시위와 군사 전투의 배합전'이라는 표현은 광주시민들도, 한국군도 한 적이 없다. 북한 책들에는 한국 장교들에게도 생소한 군사용어들이 폭동 과정을 설명하는데 동원된다. ’역포위‘라는 개념은 한국군 군사교리에 없다. 광주폭동의 주동 세력에 전투 서열이 매겨져 있었고, '통신 지휘소'라는 말은 한국군 현역 군인들 사이에도 의식하지 않는 개념이다. 금남로 유동삼거리 끝에 있는 가톨릭센터에 '괴뢰군 통신 지휘소'가 있었다는 표현은 거기에 북괴군 통신 지휘소가 설치돼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계엄군 통신 지휘소는 전교사에 있었다. 그렇다면 북한군의 통신 지휘소는 어디에 있었겠는가? 증심사에서 가까운 금남로 끝쪽 높은 건물에 있었을 것이다. 가톨릭센터에는 폭도들이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있었다. 한국 측 문헌이나, 보고서나, 상황일지에 광주전쟁의 전략과 전술과 교훈이 기재돼있는 곳은 없다. 그런데 북한 책들에는 이 세 가지가 명확하게 기술돼 있다. 광주에서 체포된 730명의 신원을 파악하여 성분 분류를 해서 가장 먼저 통계 숫자를 밝힌 문헌은 북한 책들이다. 계엄군에 돌진하다가 가로수를 들이박고 멈춘 버스의 번호판 번호(광전교통 전남 5A 3706)까지 기재해놓고, 각 충돌지점에 있었던 피아 병력 숫자를 대비시키고, 무기고를 털 때의 전투 과정을 눈으로 보듯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통계수치도 남한 자료와 거의 일치한다. 파출소 이름들도 나오고, 파출소, MBC, 세무서 등 각 주요 지형물 근방에서 충돌한 상황을 스토리텔링식으로 묘사했다. 전사를 기록하는 전문요원들이 현장에 배치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구체적 상황들이 묘사돼있는 것이다. 이를 놓고,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조사위는 평가절하하려 할 것이고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의 전사 기록 요원들이 파견되었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 부분은 군사전문가라야만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지, 조사위 사람들이 전문가 도움 없이 자체 판단할 분야가 아니다. 똑같은 북한 책 내용이 황석영의 이름으로 발행된 책에 올라있으면 '5.18의 바이블'이고, 필자의 이름으로 발행된 책에 올라있으면 쓰레기라는 조사위, 국민은 심판해야 한다.
25) 광주 사망자 12명은 아직도 신원불상이다. 서양 사람도 아닌 남북한 사람들의 얼굴인데 남한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면 북한의 신분이 아니겠는가? 부산 국제신문 이양우 기자가 인솔한 기자팀이 1980.5.22. 교도소 근방의 동네 창평에서 북한군 시체로밖에 볼 수 없는 시체 2구를 보았다는 사실을 그의 저서 [시민군 계엄군](종로서적)에 밝혔다. 사방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두리번거리는 장정들이 2대의 리어커에 관을 하나씩 싣고 야산으로 밀고 올라가는데 가족같이 느껴지는 사람이 없었고, 관에는 하얀 찔레꽃들이 매어져 있었다고 했다. 하얀 찔레꽃은 북한이 조의를 표하는 꽃이다. 그런데 이양우 기자는 그 하얀 찔레꽃이 광주도청에 진열된 여러 개의 관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을 관찰했고, 그에 대한 사진도 제시했다. 똑같이 광주에서 죽었는데 왜 일부 관에만 하얀 찔레꽃이 얹혀져 있는 것인가? 창평의 야산으로 돌아간 2구의 시체는 분명 광주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5월 24일, 도청 앞에서 군중을 향해 기관총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제1호 광수 역시 다른 날들과는 달리 철모에 하얀 찔레꽃을 두르고 있었다. 이 역시 상당한 논증 없이 함부로 무시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시체 관에 하얀 찔레꽃을 매달아 놓은 것이 그리고 조의 의미로 철모에 하얀 찔레꽃을 두르는 것이 광주인들의 관습인가?
26) 광주시민을 보호해준 공수부대 계엄군을 극구 살인마로 몰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조사위는 전두환과 공수부대가 광주시민을 마구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전두환과 공수부대가 유독 광주시민만 의도적으로 살해하려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파악했는가? 그 동기가 명확해야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공수부대가 광주시민을 의도적으로 살해하려 했다면 어째서 공수부대는 실탄도 없이 몸으로만 진압했으며, 겨우 3,000명의 특전부대가 10일 동안에 겨우 154명 중 25%인 40명 정도밖에 죽이지 못했는가?
미 CIA 보고서와 미 헤리티지 보고서는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폭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했다며 극찬하고 있다. 시위가 진압된 후 계엄군은 대형트럭에 쌀과 일용품을 산더미처럼 실어다 광주시민에 나누어주고, 청소도 해주고, 꼬마 아이들과도 놀아주었다. 철수하는 계엄군을 환송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박수 쳐주고 포옹도 해주었다. 1985년 총선에서 전두환이 이끄는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이 가장 많이 당선된 지역이 전라남북도였다. 전라도 로고 인물 박지원은 전두환의 위대한 업적이 5.18진압이었다고 극찬했다. 조사위는 이런 전두환과 이런 전라도가 왜 지금은 정반대로 뒤집혀졌는지 그 배경과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미 CIA는 5.18을 북의 소행이라고 밝혔고, 미 헤리티지 연구소는 광주의 피해가 계엄군 탓이 아니라고 했다. 20사단을 습격하고, 군납업체를 점령하여 400여 대의 군용차를 빠앗아 전남지역 수십 개 무기고를 털고 교도소를 공격하고, 광주시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TNT 폭탄을 조립한 행위가 분명히 존재하는 데도 조사위는 설득력 없는 이유를 대며 이 모두가 사실이 아니라 한다. 이는 억지이지 합리적 조사행위가 아니다. 미 CIA 보고서도 찾지 못했다고 변명한다. 개인도 찾아내는 미 CIA 보고서를 516억 원을 4년에 걸쳐 사용한 107명의 조사위가 찾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5.18답변서] 95~100쪽에 CIA 보고서 사진까지 제시돼있는 데도 찾지 못했다고 딴청을 부리는 것은 공적 기관의 행실이 될 수 없다. 조사위에 이런 저급의 사람들밖에 없는 것인가?
27) 세기적 모략 공작과 만행: 마지막으로 최후의 결전 공간을 마련한다. ‘광수’ 공간이다. ‘광수’는 광주에 왔던 북한 인물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필자는 2014년 10월 [5.18분석 최종보고서]를 끝으로 13년 동안 전두환 내란사건 수사 및 재판기록과 북한 문헌, 통일부 자료, 5.18단체 자료 등을 가지고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전이었다“는 결론을 냈다. 이 결론을 접한 회원 중에 필명 노숙자담요(이하 노담)가 있었다. 그는 미국 교포로 미국 정보기관에서 안면인식 부서에서 근무한 후 퇴직한 사람들 8명을 이끌고 중국정부가 추진하는 안면인식 프로그램 사업에 참여하여 중국에서 일하고 있다. ’5.18 주역이 북한이라면 광주 현장 사진 속 인물들이 북한 얼굴이 돼야 하는 것 아니냐? 며 얼굴인식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2015.5.5. 제 1호 광수를 찾아내자 네티즌들이 열광했다. 3년 동안 661명을 찾아냈다. 661명 모두에 대해 북한의 직책을 밝혀냈다. 찾아낼 때마다 네티즌들이 열광했다. 첫눈에 보아도 너무나 두 얼굴이 같은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흥분한 손상대-손상윤 형제가 ‘뉴스타운 호외지’를 통해 사비를 들여가며 대도시에서 총 30만 부를 나누어 주었다. 김성웅 목사님은 사비를 들여 매 주말마다 광화문 종각 앞에 광수 사진전을 열어 행인들에게 광수를 소개했다. 지나가는 시민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감탄의 표현들은 신백훈 박사가 10여 차례나 촬영하여 유튜브 방송을 했다. 그만큼 1980년대 광주 현장 얼굴과 북한 인물의 얼굴이 똑같아 보였던 것이다.
그러면 노담은 어떤 방법으로 공개돼 있지도 않은 북한 얼굴을 찾아내 광주 현장 사진 속 얼굴과 일치하는 얼굴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는가? 미국은 일찌기 컴퓨터가 문자를 검색해 내듯이 그리고 컴퓨터가 지문을 검색해 내듯이 얼굴을 검색해낼 수 있는 안면인식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하지만 미국은 인권 보호 차원에서 범인 검색 등 필요한 분야에서만 활용하고 일반 국민들에 대한 활용을 제한시켰다. 반면 인권을 경시하는 중국에서는 얼굴로 음식값도 내고 버스값도 내고 은행 결재를 한다. 이처럼 노담 역시 광주 현장 속 얼굴을 검색기에 입력시켜 북한 인물이 저장돼있는 ‘북한 인물 DB’(데이터 베이스)를 탐색해서 같은 얼굴을 끄집어낸 것이다. ” 이 얼굴은 컴퓨터가 찾아냈으니 믿으십시오“ 이렇게만 말하면 일반 비전문가는 실망할 것이다. 그래서 노담은 얼굴 특징들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대부분의 얼굴들은 첫눈에도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때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얼굴들도 있었다. 이때는 특징 분석 내용과 기하학적 도면을 자세히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이런 학습 과정에 참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분석은 하지 못해도 분석해 놓은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올라갔다. 새로운 수학 과목을 접할 때마다 학습이라는 고통을 겪어야 했듯이 노담의 영상분석 요령을 이해하고 소화하는 데에도 많은 학습의 고통이 있었다. 하지만 단 몇 사람의 얼굴이라도 찾으면, 광주에는 북한 사람들이 온 것이 아니겠는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안면분석을 믿지 않고 경원시한다. 안면을 인식하는 것은 주관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광수’를 비웃고 광수를 멸시하는 것이다. 안면분석이라는 과학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 국과수 사람들, 검사, 판사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의 몰지각하고 경솔하고 불성실한 태도가 새로운 분야를 학습한 사람을 생사람 잡듯 한 것이다. 여기에 5.18조사위가 가세했다. 조사위의 얼굴 분석에 대한 실력은 조사위 연말 보고서 제 132쪽에 나타나 있다.
① 지만원은 얼굴의 몇 개 특정 부위가 유사하다거나 각 부위를 연결한 선의 형태가 같다는 것을 근거로 동일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비전문적인 방법이다.
② 전문적인 방법은 ‘피사체의 촬영 각도, 촬영 당시의 조도, 동작, 표정 및 크기 등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③ 촬영 시기가 수십 년 격차가 나는 두 사진은 비교분석에 사용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기 전에 조사위가 위에서 정리한 지식은 2016년 6월 16일 자 국과수 문기웅 감정관의 감정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부터 지적하고자 한다.
국과수 문기웅 감정관의 감정서 내용
① 두 인물의 얼굴 사진은 20여 년간의 격차가 있어서 두 얼굴이 동일인인지 에 대한 분석에는 사용할 수 없다.
② 사진의 해상도와 계조(gradation)가 20년 전후의 사진에 각기 달라 동일인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③ 몸 전체의 사진이 나와야 동일인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검찰 판단>
수십년 전 사진은 화질이 조악하다. 지금은 고화질 시대다. 두 사진을 비교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 법원의 판단 :2022.2.26.선고 2020노804)
① 피고인이 제시한 것은 두 얼굴이 외관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 구체적 수치가 없다.
② 국과수는 얼굴 판독에 권위 있는 기관이다. ’1980년 사진‘은 동일인 여부를 밝히는 분석에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 국과수의 감정이다.
③ 1980년의 광주 현장 사진은 동일인 여부를 판단하는 데 사용할 수 없다.
④ 동일인 여부를 판단하려면 피사체가 촬영된 장소, 시각, 시선, 자세, 복장, 두발 등 여러 가지 요소를 종합하여 육안으로 판단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조사위의 주장은 이 모두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면 위 내용들이 진실한 과학적 내용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① 국과수 문기웅 감정관과 조사위는 몸체가 다 나와야 동일인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문기웅은 피사체의 몸 전체가 있어야 한다고 감정했고 조사위는 피사체의 크기가 판단요소라고 했다. 이는 코미디다, 동일인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얼굴만으로 충분하다.
② 판사들과 조사위는 동일인 여부를 판단하려면 육안으로 시선, 조도, 장소, 시각, 자세, 두발, 의복 등을 종합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이 역시 코미디다. 수천- 수억의 인구 속에서 동일인을 찾아내는 작업은 컴퓨터만이 할 수 있고, 육안 검색은 불가능하다.
③ 국과수, 검사, 판사들은 다 같이 수십 년 격차가 나는 사진은 동일인 여부를 분석하는 데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해상도와 계조가 다르기 때문이라 했다. 이 역시 코미디다. 안면 분석에 필요한 것은 해상도가 아니라 얼굴의 특징과 얼굴의 주요 부위 상처, 점, 백반, 혹, 기형 등의 모든 변곡점들을 연결해서 그린 지문그림이다.
④ 조사위는 그의 보고서 126~131쪽에 그려져 있는 황장엽 얼굴 분석에서 사용된 기하학적 지문이 얼굴 비교분석에 사용될 수 없는 이상한 방법이라고 폄훼하고 희화화한다. 그러나 기하학적 도면은 안면 비교분석의 교과서적인 ABC다. 조사위가 무식한 것이다. 인터넷에 ’안면인식‘ 또는 ’안면분석‘’얼굴인식‘ 등을 검색해 보라. 얼굴에 그어진 기하학적 도면부터 뜰 것이다.
국과수- 검찰- 판사- 조사위 주장이 코미디인 것을 증명하는 기사들
① 2017.7.13. KBS 뉴스에는 ’25년 전 탈옥수, 안면인식 기술에 덜미’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25년 전에 탈옥한 죄수가 ‘이제는 괜찮겠지’ 하고 자기 자신의 운전면허증을 갖고 싶어 차량청에 가서 증명사진을 찍는 순간 곧장 체포됐다는 뉴스다. 25년의 차이가 났는데 그 사진으로 현재의 얼굴을 컴퓨터가 찾아낸 것이다. 조사위와 판사들이 말하는 피사체의 촬영장소, 시각, 시선, 의복, 두발, 자세를 컴퓨터가 고려했는가? 무식한 판검사, 무식한 국과수, 조사위가 생사람을 잡고 있는 것이다.
② 2020.5.19.자 news1 기사다. ‘안면인식 기술로 두 살 때 헤어진 친부모와 32년 만에 상봉’ 이라는 제목의 뉴스다. 어린 두 살 때의 젖먹이 사진과 34살이 된 성인의 얼굴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컴퓨터가 찾아준 것이다. 국과수 문기웅, 이영남 검사, 김태호 판사, 장윤선, 장성학, 김예영 판사, 이종구 대법관을 포함해 수십 명의 광주법원 판사들이 생사람을 잡은 것이다.
③ 중국은 176명의 어린이 사진을 가지고 수십 년전 헤어진 부모를 다 찾아주었다고 한다.(NBNews. 2023.3.23)
④ 2023.4.12. 조선일보 기사다. ’칠흑 속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 누군지 97% 알아맞힌 이 기술‘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우리나라 보안업체 에스원이 운영하는 안면인식 프로그램이다. 칠흑 속에서 마스크까지 쓴 얼굴을 찍어서 누군지 찾아내는 것이 현실인데 무슨 해상도가 필요하고 계조가 필요하고 몸체의 크기가 필요할까?
⑤ 2023.5.11.자 동아일보는 ‘통장-카드 없이 얼굴 인증만으로 출금 OK’ 라는 제목으로, 신한 은행이 금융권 최초로 신분증, 통장, 카드 없이 입출금 등 거래를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상만 보아도 안면인식을 판사의 육안으로 해야 한다는 판결문은 그야말로 무식이 유식을 때려잡는 전근대적 만행이라 할 수 있다.
광주 판사 주사파 판사들과 광주의 역할
5.18기념재단이 80대, 90대 노파를 포함해 15명의 광주- 전남 주민에게 개별접촉해 “이 얼굴이 당신 얼굴이라고 우겨라”는 요지로 소송에 나설 것을 권고했다. 눈도 귀도 어둡고 글은커녕 말귀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80~90노파가 어떻게 인터넷에 있는 자기 얼굴을 인식했다는 것인가? 이들 모두는 전혀 닮지도 않은 얼굴 사진을 내놓고 “이것이 제 OO광수다. 내가 내 얼굴을 모르겠느냐” 이렇게 주장했다. 판사들은 5.18현장 사진은 1980년에 촬영됐기 때문에 동일인 여부를 판단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래서 피고인인 필자가 1980년 현장 얼굴 사진을 사용한 것은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허위라고 했다.
판사들은 국과수의 감정서에 따라 동일인 여부를 판단하는데 1980년 사진은 사용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1980년 사진은 고소인에게도 사용될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판사들은 같은 1980년 사진은, 피고소인은 사용하면 안 되고 고소인은 사용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뉴스타운 화보에 실린 얼굴에 대해서도 천만 원씩, [518 영상고발]에 대해서도 천만 원씩, 홈페이지에 실린 것에 대해서도 천만 원 씩, [무등산의 진달래]에 실린 얼굴에 대해서도 천만원씩, 그리고 매번 5.18 단체 4개에 대해서도 천만 원씩 배상하라 한 것이다. 이런 야만적 횡포가 민주화를 팔아 이익을 챙기고 있는 광주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로부터 이렇게 강탈해간 3억에 가까운 돈은 모두 5.18기념재단으로 송금했다.
광주의 만행의 수법과 사례를 유형별로 한 개씩만 소개한다.
① 목포 거주 90대 노파 김진순의 경우 : 김진순은 아들 이용충이 사망한 사실을 1980.6.30.에 경찰의 연락을 받고, 경찰서에 가서 유리관 속에 진열된 점퍼, 손목시계 등과 사진을 보고 처음 알았다. 이 사연은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사이버 추모 공간에 기록돼 있다. 그런데 5.18기념 재단은 ’5월 23일 관을 잡고 있는 여인이 나다‘라는 요지로 고소장과 소장을 썼다. 여러 차례 기일을 어기고 증인 출석을 않던 그녀가 4번째 나왔지만 그녀는 “경찰서”, “ 유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런데도 판사들은 그녀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자세하여 모순 없는 진실한 사실”이라고 판결했다. 과연 5.18기념재단에 송금한 배상금이 그녀에게 전달이 됐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② 광주에서 고1로 중퇴하고 19세에 다방종업원으로 일하던 박철, 그 역시 5.18기념 재단의 권고로 민형사 소송에 이름을 올렸다. 흔들려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사진을 내놓고, “이 사진이 증인의 얼굴이라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김경진 판사의 질문에 “내가 내 얼굴 모르겠느냐” 이렇게 답했고, “이 사진 얼굴이 어떻게 제 388호 광수의 얼굴과 같으냐?”는 변호인 질문에 “장발한 게 같지 않느냐”고 답했다. 그래도 판사들은 증인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자세하여 모순 없는 진실한 사실”이라고 판결했다. 재판이 아니라 아수라판인 것이다.
③ 노담은 71광수를 황장엽으로 판독했다. 박남선은 팀장으로 보이는 제 71광수가 자기여야 하는데 지만원이 황장엽 얼굴과 비슷한 얼굴을 창작하여 합성시켜 놓았다고 고소하고 손해배상청구도 했다. 원본 사진의 위치가 조선일보 사진 DB의 몇 페이지에 있다며 그 위치로 찾아 들어가는 경로를 설명하고, 그 원본 사진을 또 촬영하여 제출하고 설명을 했는데도 판사들은 무시했다 그리고 박남선의 주장은 “구체적이고 자세하여 모순 없는 진실한 사실”이라고 판결했다. 만일 방송에서 이런 내용으로 코미디 소재를 삼는다면 아마도 대성공을 거두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80년 사진은 얼굴 비교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고 정의해 놓은 판사들이, 필자가 사용하는 것은 범죄이고, 광주 전남 사람이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 하는 것이다. 이는 지역차별이고, 계급 차별행위이다. 점령군이나 할 수 있는 막가는 횡포다.
5.18조사위의 또 다른 코미디
조사위는 보고서 말미에 홍OO가 도청 앞에서 도청 정문을 굳게 닫고 경비하고 있는 10여 명의 어깨부대 중에 소속된 75광수가 자기라고 주장한 신청 사건에 대해, 홍의 주장이 사실이고, 노담의 분석이 근거없는 것이라고 결론 냈다. 2018년 5월, 홍OO가 자기가 75광수라고 언론에 나왔을 때 노담은 홍OO얼굴과 75광수 얼굴과 북한 거물 리선권 얼굴을 놓고 어째서 75광수가 홍OO의 얼굴이 아닌지 4개 면에 걸쳐 특징 분석기법으로 분석해 보였다. 산근의 높이, 눈꼬리에서 광대점을 잇는 선이 홍은 오목하고, 75광수는 밖으로 뻐드러져 있고, 하부 골상이 상이하고 얼굴 판형 자체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코끝을 비교했고, 코의 생김새 자체가 다르고, 법령선이 현저하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75광수의 법령선은 입을 감싸고 흐르는데 홍OO의 법령선은 광대점을 감싸는 뻐드렁형임을 지적했다. 얼른 보기에도 세 얼굴 중 홍OO 얼굴만 이단으로 보인다. 75광수가 케네디 얼굴이라면, 홍OO의 얼굴은 트럼프의 얼굴 정도 될 것이다. 그런데도 조사위는 홍OO의 얼굴이 75광수 얼굴과 일치하다고 결정했다. 홍OO이 무슨 근거로 75광수인지에 대한 아무런 분석이 없다- 조사위가 루이 14세인 것이다.
또한 홍OO은 자기가 도청 앞에서 입고 있었던 옷을 증거라며 내놓았다. 얼룩덜룩한 무늬는 같아 보이지만 주머니의 각도와 크기가 다르다. 노담은 주머니 덮개를 비교 분석했다. 75광수가 입은 옷은 홍OO이 입고 있었다고 제시한 옷이 아니다. 양개 주머니 덮개의 길이를 일치시키도록 사진의 크기를 조정한 후 덮개의 폭을 재보니 폭의 길이가 너무 차이가 났다.
그다음의 상황 설명이 당시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다. 홍OO은 5월 22일부터 전남도청을 자기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말한다. 10~14명이 특수기동대로 편성되어 특수기동대 버스를 타고 광주 시내를 순찰하고 다녔다고 한다. 5.18최고 유공자들은 그들의 증언집에서 5월 24일 도청에 들어가려 했지만 위엄있어 보이는 관료가 집에 가라 해서 돌아왔고, 5월 23일까지는 모든 간부들이 꼭꼭 숨어있었다고 한결같이 증언했다. 또한 ’특수기동대‘라는 시민조직은 없었다. 5월 26일 새벽에 처음 생긴 조직이 19세 윤석루(무기징역)가 대장인 ’기동타격대‘였다.
얼굴 판형 자체도 다르고, 입고 있었다는 얼룩옷의 무늬도, 주머니도 다르다. 상황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을 진술하여 알리바이가 맞지 않은데 조사위는 무슨 근거로 홍OO이 75 광수와 동일인이라는 판정을 내렸는가? 이런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면, 루이 14세가 되고, 관심법 궁예가 될 것이다. 이 하나만 보아도 조사위의 조사 실력과 의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5. 조사위 결론에 대한 반박
1) 무기고 탈취에 대한 조사위 해명 : 무기 탈취는 5월 23일에도 있었다. 따라서 5월 21일, 4시간 만에 44개 무기고를 다 털었다는 지만원 주장은 틀리다. 무기고 위치를 사전에 정탐했다는 정보를 경찰 등 아무 데에서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기고 위치를 사전에 파악했다는 지만원의 주장은 허위다. 무기 탈취 방법도 전문 수준이 아니었다, 부수는데 2~3시간이 걸린 곳도 많다.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광주시민이 62명이나 된다.
<반박>탈북자 수기에서 북한군 안창식 대위는 그의 내연녀에게 무기고 위치를 3개월 만에 다 파악했고,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본인을 포함해 여러 명이 중상을 입거나 사망했다고 말해주었다. 이는 광주시민들의 ’카더라‘ 식의 증언과는 무게가 다르다. 염탐행위까지 감지하려면 곳곳에 CCTV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염탐에 대한 보고가 없기 때문에 무기고 염탐 행위가 없었다는 말은 코미디다. 무기고 하나를 부수는데 2~3시간이 걸렸다는 것도 이솝 우화급이다. 무기고 문 하나 제거하는데 중장비를 가지고 2~3시간씩 걸렸다는 정보가 어디에 기록돼 있나? 5월 23일에도 무기고가 털렸다는 것은 지진 후에 발생하는 꼬마 여진일 수도 있어도 이것으로 5월 21일 대작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광주시민 62명이 무기고 탈취에 동원됐다면 그들이 탈취행위를 지휘했는가? 누가 이 엄청난 집단적 군사작전을 지휘했는가? 62명이 지휘했는가? 개념 없이 뛰어든 부나비들이 광주의 구두닦이 등 하층계급에 속했던 사람들이다. 이것을 변명에 활용하는 조사위의 노력이 딱해 보인다.
2) 황장엽과 김덕홍의 발언에 대한 조사위의 변명: 북한이 광주 시위에 관여했다는 두 사람의 말은 수백 명이 아니라 몇 명 단위의 고첩이나 공작원 수준이었다는 말인 것으로 해석된다.
<반박>김덕홍은 사건 종료 후 대남부서의 상당수가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 했다. 황장엽은 광주 시위 전체를 북한이 저지르고 그 책임을 남한에 전가했다고 밝혔다. 조사위의 자의적 해설처럼 몇 명 단위의 고첩이 광주 시위에 관여했는데 대남부서 간부들의 상당수가 김일성으로부터 훈장을 받았겠는가? 황장엽은 시위 자체는 북한 공명주의자들이 김일성을 꼬득여 사건을 일으켜놓고, 그 책임을 전두환과 공수부대에 뒤집어씌웠다는 말을 했다. 몇 명 단위의 고첩을 지휘한 것이라면 황장엽과 김덕홍의 말대로 김일성에까지 기별이 가지 않는다. 참으로 군색하기 이를 데 없고, 코미디를 구경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몇 명 단위의 간첩들이 저지른 소소한 일을 황장엽, 김덕홍이 어찌 알겠는가?
3) TNT 폭탄 설치 사실에 대한 조사위 해명과 반박: 전남도청에 TNT로 2,100발의 폭탄을 조립해 놓은 사실, 이를 광주지역 계엄군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기술자 5급 갑의 문관 배승일이 2명의 조수를 데리고 광주의 온건파 젊은이들의 안내를 받아 잠입하여 목숨 걸고 이틀 동안 해체했다는 사실은 뉴스매체에 중복해서 드러나 있다. 그런데 조사위는 2,100발의 폭탄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고, 화순탄광 광부와 호남 탄좌 광부도 폭탄을 제조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 이들 몇 명의 광부도 폭탄을 제조할 수 있다는 것만 제시했다. 이들 몇 명의 광부가 누구의 지휘를 받아 도청에 들어와 무슨 목적으로 그 많은 폭탄을 제조해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조사위가 해명조차 기피한 것이다. 광부가 자기 가족, 재산 다 날아가라고 2,100발씩이나 자의적으로 강압 없이 조립했다는 변명은 참으로 딱해 보인다.
4) 군분교 습격 사건에 대한 조사위 해명: 시위대는 20사단 이동정보를 몰랐다. 이동하는 20사단 지프차 차량부대를 공격한 것은 우연이다. 공격한 시위대는 도망가는 군인들을 사살하지 않았다. 북한군이었다면 사살했을 것이다.
<반박>이동정보는 간첩을 통해서나 알 수 있는 정보인데 조사위가 간첩 정보까지 조사했는가? 북한 침투조의 목적은 남남갈등과 남남 전쟁을 유발시키고 직접 계엄군을 사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어느 바보 사령관이 북한 병력 600명을 한국군과 노골적으로 교전 전투를 하라고 내려보내겠는가? 조사위의 지능이 측정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사위는 이들 300명이 누구의 지휘를 받았는지 그 구성원이 광주의 부나비 신분(구두닦이, 자개공, 구두공, 껌팔이) 그리고 미성년자가 80%를 차지하는 광주시민 조직이었는지 왜 밝히지 못하는가? 300명 집단이 20사단 병력을 공격한 다음 사살하지 않았기 때문에 300명이 북한군이 아니라는 조사위의 변명은 지능을 의심케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어떻게 습격하기 하루 전날밤에 수많은 중장비를 동원해 가두리장 공사를 했겠는가?
5) 총기 사망자의 75%가 시위대가 휴대한 총에 의해 사망했다는 계엄사 통계가 허위라는 조사위의 해명: 1980년의 통계는 부정확하다. 그 이후에 다시 조사한 통계가 맞다.
<반박>계엄사의 통계는 계엄사가 작성한 자료와 안기부가 작성한 자료에 기록돼있지만 그 통계는 당시 광주를 대표하는 모든 민관 조직이 다 참여하고 유가족이 참여한 합동조사위원회에서 작성된 통계다. 1980년 5월에 땅에 묻혀 뼈만 남아있을 사망자를 무슨 수로 다시 꺼내 사망원인이 카빈인지 M-16인지 다시 조사한다는 말인가? 조작의 명수인 광주 특히 5.18관련자들, 기록을 조작한 것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신뢰성 없는 광주인들이 새로 작성한 통계는 그 자체로 신뢰를 상실한다. 광주시민을 쏘아죽인 주체가 광주의 부나비들인가? 아니면 남남 전쟁 유발시키기 위해 내려온 전문 게릴라들인가? 국민이 먼저 알 것이다. 당시에 조직된 현장 조사 위원들을 믿을 것인가? 조작을 일삼는 지금의 광주인들을 믿을 것인가? 2019년 세계 수영선수권 대회를 유치하기 위해 국무총리 서명까지 위조했던 존재가 광수시가 아니었던가?
6)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점령한 600명 숫자에 대한 조사위의 해명: 아시아 자동차에 600명이 09:00시에 집결할 수 없다. 군분교 300명이 한 시간 내에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 갈 수 없다. 아시아 자동차 공장은 시차를 두고 털렸다. 모두 414대 털렸다. 군용트럭 414대를 포함해 모두 1,299대가 털렸고, 그중에는 영업용택시 367대와 자가용 175대가 탈취당했다. 운전자가 1300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아시아 자동차에서 414대의 군용트럭을 운전할 수 없었다. 414대의 트럭을 운전한 사람은 외지인이 아니라 광주의 운전자들일 수 있다.
<반박>조사위는 군분교 계엄군을 공격한 300명이 한 시간 내에 아시아 공장은 갈 수 없다는 이해할 수 없는 해명을 한다, 두 지점 사이는 10분 거리도 안 된다. 군용트럭 말고도 800~900여 대의 화물차와 버스를 탈취하였다면 그 화물차와 버스는 누가 운전했는가? 1,300대의 차량이 동원되어 작전을 했다면 작전 규모가 어마어마할 텐데 그 차량들을 누가 다 지휘했는가? 식당 종업원이 했는가? 다방종업원이 했는가? 안기부 일지와 군 상황 일지와 검찰 보고서가 다 600명을 인정하는데 조사위는 이를 부정하는 상황일지들만 모아놓았다. 20사단을 군분교에서 습격한 300명이 광주의 운전수 부대였다는 것인가?
조사위가 이 부분에서 가장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 경비병이 없었는데 지만원은 삼엄하게 경비되고 있었다는 글을 썼다는 것이다. 초점을 흐리기 위한 것이다. 필자는 일반적인 군수품 제작업체의 경비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당시 아시아 공장에 무슨 사정이 있었다면 그것은 일반화된 사정이 아니라 특수사정이다. 핵심은 검찰 및 안기부 자료에 기록돼 있듯이 600명이 진입하여 장갑차와 군용트럭 400대 규모를 몰고 나왔느냐에 대한 것이다, 그 400대를 필자는 침입자들이 몰았을 것이라 했고, 조사위는 광주의 일반 운전수들이 동원됐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면 검찰이나 안기부 기록에는 600+414=1,013명이 아시아 공장에 갔다고 적시돼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그 400여 명의 운전수가 600명 중 일부라는 말인가? 조사위야말로 자의적 횡설수설을 내놓고 조사를 방해하는 집단이 아닐 수 없다.
7) 신원미상자 12명에 대한 조사위의 해명: 조사위는 조사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 검증이 불가능하다고 해명한다.
<반박>12명을 검증하라고 12명의 신원불상자를 42개 증거의 하나로 적시한 것이 아니다. 북한에 묻혀있는 유골도 신원이 확인이 되어 미국으로 보내지고 있을 만큼, 신원 확인 능력이 발달돼 있는 이 시대에 신원이 광주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 북한 사람의 시체일 것이라고 직감할 것이다. 이 12구의 신원 불상 시체를 보면 북한 사람이 광주에 와서 죽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북한에서 불리고 있는 ’무등산의 진달래‘라는 노랫말에 북한의 영웅들이 조국 통일을 위해 광주에 와서 억세게 싸우다 떼죽음 당했다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신원불상의 그 시체는 단연 북한 사람 시체일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조사위는 엉뚱한 말로 핵심을 비껴가고 있는 것이다.
8) 5.18답변서 52~58에 걸쳐 제시돼 있는 20여 장의 군사작전 준비 사진들에 대한 조사위의 해명과 반박: 이 20여 개의 사진에 나타나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훈련돼있는 조직적인 팀워크의 행동이고, 지휘자가 있고 지휘 받는 자가 있고, 무전기들을 들고 있고, 출동을 위해 트럭 위에 탑승하고 있는 군병들에게 사용 가능한 총기를 조직적으로 점검하여 릴레이로 서서 패스하고, 수류탄을 골라 박스에 넣고, 실탄을 탄창에 장입하고, 기관총 실탄 대를 준비하는 등 전문적이고도 조직적인 전투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22개 사진 중 12개만 뽑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에게 2017.10.12.에 법정 질문을 했을 때 김양래는 게릴라 부대로 보이고, 전두환이 투입했을 것이라는 답변을 했다. 그런데 조사위는 이 정도의 행동은 고등학교만 나와도 취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해명한다. 그렇다면 그런 젊은이들이 누구들이며 이런 조직적 행위를 지휘한 사람이 누구이고, 어디를 향해 출동하는 모습인지 설명해야 한다. 참으로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고등학교 나온 20~30대 어깨들을 누가 소집해 지휘체계까지 형성시켰는지 답해야 한다. 516억 원의 국민 세금을 가지고 계속 이런 이솝우화 뺨치는 장난질을 일삼고 있는 것이 아닌가?
9) 600명에 대한 조사위 해명: 300명씩 두 개 집단으로 구성된 600명이 활동했다는 기록은 검찰 수사 결과서와 안기부 자료, 상황일지에 있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없고, 북한 책 2권에도 600명이라는 숫자가 있지만 그중 한 권에는 600명이 5월 26일에 도청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빙성이 없다. 5.18기념 재단 홈페이지에 기록된 서울서 온 대학생 환영식은 없었다. 따라서 500명, 600명 설은 전혀 근거가 없다.
<반박>광주가 가장 높은 신뢰성을 부여하는 미 CIA 보고서에는 시위를 주도하고 핵심 극렬주의자가 550여 명이라 했지만, 조사위는 미 CIA가 북한군 소행임을 기록한 9개의 보고서를 외면하고 딴짓을 부렸다. 숫자 475명이 떼죽음 당했다는 표현은 3개의 문서와 1개의 기록 영화에 강조돼 있다. 600명이라는 숫자를 북한이 기록한 것은 그 자체로 강조의 의미가 있다. 북한 자료에는 5월 21일 600명의 한 집단이 4시간 반 만에 군용트럭 400여 대와 소총 3,500여 대를 털었고, 모두 5,400여 정의 총기, 3,600상자의 폭약, 수류탄 500발, 실탄 29만 발을 탈취했다고 기재돼 있다. 이 엄청난 무기를 단 하루에 탈취하려면 얼마나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장정들이 필요했겠는가? 같은 북한 자료는 황석영 이름으로 쓰면 진실이고, 다른 사람이 쓰면 가짜라는 조사위의 해명은 실로 자의적이다. 이 600명이라는 숫자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조사위의 해석이야말로 지극히 자의적이고 해학적이다.
10) 도청으로 연행돼가는 4명의 청년에 대한 조사위 해명: 계엄군이 시외곽으로 퇴각한 후 5월 22일부터 도청은 광주 시위대가 통제하고 있었다. 5월 22일 시민수습조직이 간첩 의심자를 체포해서 도청 내 조사계에 넘겨주었다.
<반박>5월 22일의 도청은 부지사실만 광주 유지들에게 개방돼 있었다. 22일과 23일, 청년 4명을 도청으로 연행해가는 어깨들은 수십 명에 이른다. 광주 시위의 주역들은 개념 없는 하층인들이다. 이런 구두닦이 인생들에게 이렇게 건장한 체력과 정보수집 능력이 길러져 있었다는 말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러한 이야기는 누구든지 둘러댈 수 있다. 누구인지 밝혀야 설득이 될 것이다. 미 CIA 보고서에는 극렬주의자들이 시민을 체포해 인민재판을 열고 즉결처분을 했다고 밝혔다. [5.18답변서] 98쪽 우 하단 사진에서 잡혀가는 사람은 해남의 김인태이고, 99쪽 우하단 사진에서 잡혀가는 청년은 학원 선생인 김중식이다, 이 두 사람은 즉시 즉결 처분되어 사망한 것으로 분석돼 있다. 조사위가 임기 응변으로 둘러대는 수법은 그 누구도 그렇게 둘러댈 수 있는 임기응변 수준이다. 그런데 그 둘러댄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체 설명이 없다. 끌려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끌고 가는 20여 명의 어깨들은 어디서 누가 조직한 사람들인지 밝히지 못하면 조사위 설명은 둘러대는 요설에 불과하다. 5월 22일부터 24일까지의 도청은 광주 시민의 자유공간이 아니었다. 5.18항쟁 본부 지휘부 사람들 스스로가 밝혔다. 총은 광주 사람이 탈취한 게 아니고 도청은 5월 24일까지 광주시민들이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이들이 간첩행위를 했다면 어떤 혐의인지도 매우 궁금하다, 누구의 간첩이고 무슨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인지도 납득되도록 설명해야할 것이다. 5월 22~24일까지 도청은 광주시민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도청안에 조사계가 있었다면 그 조사계는 누가 지휘했는가? 조사위는 단연 없었다. 조사위는 ’요설위‘로 불려야 할 판이다.
11) 지휘자가 없었다는 필자의 주장에 대한 조사위의 해명: 지만원은 5.18민주투쟁위원회가 지휘했다고 주장하지만, 민주투쟁위원회는 5.18을 지휘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니다.
<반박>지만원은 시위를 이끈 지휘자도 없고 시위를 조직한 사람도 광주에 없다고 했다. 15만 명이 동원되고, 무기고와 군납업체를 털고, 계엄군을 섬멸시킬 단계에까지 압박하며 광주로부터 몰아낸 엄청난 물리력을 핵심 구동 조직 없이 가능할 수는 없다. 도대체 누가 핵심적 물리력을 조직했고, 지휘했는지, 지휘자가 없으면 시위의 주체는 절대로 광주인들이 아니다. 필자는 이 부분을 지적했을 뿐, 5.18을 민주투쟁위원회가 지휘했다고 표현한 적이 없다. 필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조사위가 지휘의 뜻도 모르고 있다는 한심한 국면이 바로 이 국면일 것이다. 현장 사진에는 지휘자 얼굴이 있는데 어째서 그 얼굴들이 광주에 없다는 말인가? 이 이상의 코미디는 다시 없을 것 같다.
12) 북한 교과서에 대한 조사위의 해명: 2015.11. 저자 서옥식 연구위원이 [북한 교과서 대 해부]라는 책에서 북한이 역사 교과서에 5.18 등 남한의 민주화 운동은 김일성의 영도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저자는 그 사실에 대해 북한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서옥식 저자가 왜곡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북 교과서 내용은 왜곡된 것이다.
<반박>북한 교과서에 남한의 민주화 운동은 다 김일성 지령으로 발생한 것이고 그 으뜸이 5.18이라고 기재돼 있다는 것까지는 사실이다. 이는 거물 간첩 출신 김용규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누차 밝힌 사실과 100% 일치한다. 북한이 5.18을 주도하지 않았는데도 북한이 교과서에 허위사실을 기재한다는 것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도 있을 수 없다. 교과서 내용이 다른 증거들을 더욱더 보강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필자가 제시한 42개 정황증거중 하나이고, 스카이데일리의 [5.18특별판] 내용들과 어울리고 보완적인 항목이다.
해학적인 것은 저자 서옥식의 교과서에 대한 평가가 ’왜곡‘이라는 평가였기 때문에 북한 교과서 내용은 증거 가치가 없다는 조사위의 해설이다. 이는 지능의 문제로 보인다.
13) 총을 거꾸로 메었다는데 대한 조사위의 해명: 총을 거꾸로 메는 것은 북한군의 관행이고 규칙이지만 5월 22일과 23일에는 비가 내렸다. 바가 내리면 한국군도 총을 거꾸로 멘다, 사진을 보면 땅이 젖어있었다.
<반박>이 사진은 [5.18답변서] 53쪽 좌측 상단 사진이다. 땅이 젖어 있지 않다. 같은 시각에 촬영된 사진이 두 장 더 있다. 56쪽 상단에 있는 두 장의 사진이다. 이 두 사진에는 우의를 착용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고 이들을 태우고 출동하는 트럭을 바라보는 수백 명의 군중이 도청 앞에 모여잇다. 바가 와서 땅이 젖어 있다는 해명은 거짓말이다. 조사위는 엉뚱한 다른 장소에 약간 비가 내리고 있는 사진을 제시하면서 가는비가 내리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도청 안 사진이 아니다. 조사위가 눈속임을 위해 노력한 증거다.
14) 교도소 공격은 사실상 없었다는 데 대한 조사위 해명: 상황일지를 보면 교도소 공격은 5월 21일 초저녁 7시경과 5월 22일 00시 40분경, 2회밖에 없었고, 그 후에 3회 더 있었다. 교도소 공격 때에는 시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교도소장의 증언이다. 교도소를 공격하라는 북으로부터의 무전 교신은 있었고, 제3공수여단을 오후 4: 30분에 교도소에 배치된 것은 맞지만, 3공수여단이 교도소에 배치된 것은 단지 경비 강화 목적이었지 방어목적이 아니었다. 5월 21일 밤에 475명이나 사살됐으면 그 많은 시체를 500명 중 살아있는 25명이 어떻게 다 치웠겠는가? 이렇게 많이 죽었다면 그들이 지참했던 군장들은 왜 하나도 남겨져 있지 않느냐, 이는 불가능이다. 475명을 죽이려면 눈으로 직접 보고 조준 사격을 해야만 가능하다.
<반박>조사위는 상황일지가 모든 사항을 다 기록한 존재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 병사들의 상황일지 기록은 누락될 때도 많고 부정확할 때도 많다. 여러 가지 기록과 증언들을 종합해서 기록하는 것이 전사이며, 상황일지는 전사의 극히 일부다. 조사위는 군대를 미필했거나 장교로서의 상황근무를 해본 경험이 없는 것 같다. 이 부분이야말로 전략적 관점에서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먼저 조사위의 동떨어진 전투개념부터 지적하고자 한다. 475명을 사살하려면 조준 사격이 가능해야만 한다는 조사위의 전투지식은 너무 엉뚱한 지식이다. 평평한 개활지는 총 한 방에 여러 사람이 피해를 당할 수 있다. 군에서는 이를 대량살상이 가능한 ’최저표척사‘라고 칭한다. 기관총 한 알이 여러 사람을 꿰뚫고 나갈 수 있는 곳이 평평한 교도소 주위다.이렇게 군사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군 전투시건을 조사하니 피차 힘들고, 국민만 답답한 것이다.
교도소 공격 사실은 대법원 판결서에 명시돼 있다. 5차례의 공격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 교도소 공격은 민주화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판결서에 적시했다. 교도소를 야밤에 공격하는 행위는 매우 공포스러운 행위라서 절대적인 필요성이나 강력한 명령이 있기 전에는 정예군도 꺼리는 행위다. 그런 공격을 구두닦이, 껌팔이 아이들이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는 광주 민간인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정예출신 조직이 강력한 명령, 목숨 걸고 수행하라는 명령이 있기 전에는 아무도 하고싶어 하는 행위가 아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교도소 공격은 광주의 껌팔이, 구두닦이. 중고생들의 행위가 아니라 북괴만이 할 수 있는 행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발 더 나아가 북한이 북조선의 아리랑이라는 ’무등산의 진달래‘에서 원통하고 슬프게 표현하는 “동강난 조국을 하나로 잇기 위해 억세게 싸우다가 무리죽음 당한 그들”이 무등산의 진달래로 피어난다는 노골적인 가사로부터 무리죽음(떼죽음) 당한 곳이 어디인가를 추적하게 되었다. 북한 자료의 문헌과 기록영화에서 475명이 무리죽음 당했다는 분노의 표현들이 4곳에서나 드러나있고, 이 475구 중 뭉치 시체가 어디로 갔을까에 대한 추리와 추적을 하게 됐다. 미국 해리티지재단 연구보고서에는 당시 광주의 성직자 대표로부터 “가장 많은 피해는 교도소 근방에서 발생했다”는 증언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전남대 5.18연구소 증언기록에는 시립공동묘지 관리 직원의 손을 거친 시체가 광주의 공식 사망자 164명 이외에 430구를 더 처리했다는 내용이 있고, 2014.5.13.에 청주시 흥덕지구에서 광주에서만 있을 수 있었던 비닐 포장 시체 유골 430구가 군번 같은 일련번호를 달고 1m깊이에 가매장된 사실을 발견하였다. 5.18연구소 기록에는 5월 28일 새벽 시체를 잔뜩 실을 대형트럭이 덮개 천막을 휘날리며 교외로 빠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 했고, 당시의 외곽도로는 차단돼 있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2005~2007년 국방부 과거사 조사위(위원장 이해동목사)는 5월 21일 하루에만 공수여단 실탄사용량이 484,484발이었다고 했다. 5.18상황 전체를 조감해볼 때 이렇게 엄청난 실탄을 사용했을 수 있는 상황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교도소 전투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 조사위는 청주유골 430구를 청주시가 화장한 화장증명서가 [출토유골 화장 및 봉안준공계] 용역자료에 첨부돼 있다고 해명했지만 그 사진을 제시하지 않았다. 430구가 화장돼 있다면 1994년 데일리메이디 등 무연고 유골 화장통계에 잡혀있어야 했지만 모든 메디칼 뉴스에는 2014년에충청북도 4개의 화장터에서 화장한 총 유골수는 18구뿐이다. 호주교포 한 분이 청주에 가서 장묘업계 회장을 만나 보았지만 430구에 대한 화장은 없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화장을 할 유골을 왜 컨테이너 박스에 철골로 특별 진열대를 일부러 제작하여 불투명한 봉지에 재포장하여 또 다시 번호를 써놓은 것인가? 김정은 전용기는 왜 왔는가? 교도소 공방전에 대한 판단은 이런 사실들을 연결하여 논리적으로 추론한 결과다. 청주유골 스토리 하나만 보아도 이것이 5.18과 무관하다고 발뺌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를 5.18연구의 연구다운 꽃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김일성의 제 1철칙은 증거를 은닉시키는 것이다. 북한특수군이 증거를 남기면 김일성이 국제재판에 회부된다. 북괴의 증거인멸 기술은 조사위의 판단 범위 밖에 있다.
15) 서울서 온 대학생 환영식 없었다는 조사위의 해명과 반박: 이 내용은 5.18기념재단 역사일지 ’타임라인‘에 1980년부터 최근까지 40여 년 동안이나 기록돼 있었다. 그동안 4차례에 걸쳐 기록을 변조 조작하다가 2021년 6월경에는 아예 기록 차체를 삭제해 버렸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리고 이번 2023년 연말 보고서에는 ’5월 21일의 교도소 공격에서 475명이 다 죽었다 하면서 5월 22일에 무슨 환영식 거행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500여 명의 외지인 청년이 존재했다는 것은 수많은 증거들에서 나타난다. 1997년 전두환 내란 사건에 관여한 대법관 박만호 변호사는 최근 요로에 “김영택 기자의 500여 명 외지인에 대한 해명 없이는 지만원을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는 리포트를 전파했다고 한다. 김영택 기자는 500여 명의 외지인이 군사 행동을 했고, 이런 군사력은 전두환이 투입시킨 비밀 게릴라일 수밖에 없다는 논지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연고대생 600명은 북한이 가장 먼저 방송했고, 전옥주는 방송을 줄기차게 했다. 연고대생 600명이 우리를 도우려 오고 있으니 힘내서 모두 나서라는 호소를 하고 다녔다. 아시아 자동차 점거, 무기고 습격, 군분교 습격, 20사단 수색중대 습격 사건은 이 600명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문제는 5월 22일 환영식을 거행했다는 기록이다. 과연 그날 환영식을 거행했을까? 북한이 자료에 상징성 있는 표현을 심어놓듯이 광주 상황일지에도 상징적 표현으로 무언가가 기록돼 있을 것이다. 북에서 600명이 와서 500명 가까이 밤중 야간 공격에서 사망했다면 북한 원정대는 슬픔에 싸였을 것이다. 그에 대한 추모의 행사는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추리가 500여 명을 위한 행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찾게 만든다. 애통해하는 모습, 북한 원정대 민간 그룹이 모두 모이고 지휘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관 앞에서 애도하는 모습이 분명 있어야만 한다. 이에 대한 사진이 바로 [5.18답변서] 제61쪽과 62쪽 사진들이다. 60쪽 좌하단 사진들에 나타난 얼굴들은 모두 납덩이처럼 침통하다. 황장엽 얼굴도 침통하고, 김경희(김정일 동생)도, 모두가 납덩이처럼 무겁고 침통하다. 60쪽 상단의 대형 사진은 시체관들이 진열돼있는 넓은 공간에 질서 있게 집합해 있는 수백 명의 군중이 있다. 당시 이러한 군중을 동원할 수 있는 집단은 광주에 없었다. 1층과 2층이 모두 계단식으로 구성돼 있다. 수백 명 군중이 질서 있게 서서 시체관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면, 이것이 추도식이 아니겠는가? 같은 60쪽 우측 하단 사진에는 유명한 얼굴 김중린(북한판 CIA국장)의 침통해하는 모습이 있고, 리을설이 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61쪽 하단에는 리을설과 김정일의 첫부인 홍일천이 울고 있고 그 옆에 유명한 간첩 손성모가 침통한 얼굴로 서 있다. 이 사진에는 또 필자가 1996년 북경 켐핀스킨 호텔에서 3일간 파트너로 친구처럼 지냈던 원동연(최근 통전부 부부장)의 얼굴도 보인다. 이 애통해하는 집합체가 바로 외지인 500여 명에 대한 행사였다고 생각한다. 환영식은 그냥 적당히 걸어놓은 ‘위장용어’이고, 실은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의 추모식이 열린 것이다. 한 개 한 개를 낱개로만 떼어서 생각하면 아무런 추리가 없다. 모두를 연결할 때에 퍼즐이 풀리는 것이다. 본질이 이러하기 때문에 5.18기념 재단 상임이사였던 김양래가 2017.10.12. 법정에서 ’서울서 온 대학생‘ 환영식의 의미가 뭐냐는 질문을 받고, 규명한 바 없다고 했고, 지금의 조사위는 아예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애도식‘을 ’환영식‘으로 위장해서 기록했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위장용어에 묻어서 기록하는 것은 북한 수법이나 광주 수법이나 똑같다. 위장망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찾아내는 분석가가 고급정보관이고 고급 분석가인 것이다. 1급 정보의 95%는 다 공개된 정보다. 이것을 퍼즐로 잘 꿰어맨 것이 1급 정보인 것이다. 5월 22일 15:08분 환영식은 곧 15:08분에 [5.18답변서] 60쪽 상단에 있는 사진에서처럼 관을 진열해 놓고 단체추모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을 위장해 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60쪽과 61쪽 하단 사진들을 보태면 그림은 더욱 선명해진다. 이처럼 정보는 줍는 것이 아니라 캐내서 가공하는 것이다. 필자와 조사위가 다른 점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16) 북한 전역에서 5.18행사 매년 거행한다는 데 대한 조사위 해명:북한이 도시 전역에서 해마다 5.18기념 행사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북한은 비단 5.18만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4.19, 부마 민주항쟁, 6.10민주항쟁에 대해서도 기념한다. 따라서 5.18에 대해 매년 전역에서 기념행사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북한의 광주 개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박>북한은 해마다 28개 전 도시에서 한 해도 빠짐없이 5.18기념행사를 한다. 남한의 5.18행사는 광주 한곳에서만 한다. 남북관계 차이가 엄청난 것이다. 북한은 어쩌다 생각날 때 수년의 한 번씩 4.19, 부마 민주항쟁, 6.10민주항쟁에 대해 기념하는 모양이다. 조사위가 제시한 자료에 그렇게 나타나 있다. 5.18행사와는 격이 천지 차이로 다르다. 4.19, 부마 민주항쟁, 6.10민주항쟁은 북한식 표현이다. 북한 교과서에도 남한의 모든 민주화 운동은 김일성이 지휘한 것이라고 기재돼 있고 그 으뜸이 5.18항쟁이라고 기록돼 있다. 가장 지위가 높았던 거물 간첩 출신 김용규는 인민군 대좌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그는 남한의 속없는 국민을 향해 외쳤다. “5.18을 위시한 남한의 모든 크고 작은 소요는 필연적으로 김일성이 주도했다”, “김대중은 북이 키웠다” 일본 산케이 신문 연재에서도 밝혔고, 그의 저서[소리 없는 전쟁](1999.윈민)에서도 애타게 외쳤다. 더구나 한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대북전문가 이명영교수(성균관대)는 저서 [통일의 조건]에서 4.19는 간첩 ’이석‘이 배후 조종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960.4.11. MBC가 김주열 군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최류탄 탄체가 얼굴에 박혀진 상태에서 바닷물 속에 여러 날 이리저리 밀려다니다가 떠올랐다는 방송을 했다. 최류탄은 하늘을 향해 높이 던지면 포물선 궤적을 그리며 자연 낙하하는 깡통이다. 이런 최류탄이 얼굴에 깊이 박혀, 바닷물 속에서 여러 날 동안 파도에 밀려다니면서도 굳건히 얼굴의 일부인 것처럼 접착돼 있다는 것은 과학 상식상 불가능한 현상이다. 하지만 방송을 본 국민들은 흥분부터 한다. 이는 절대적으로 누군가에 의한 공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을 간첩 ’이석‘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최근 탈북자로 글을 시원시원하게 잘 쓰는 김태산 역시 4.19는 김일성이 만든 작품일 것이라는 요지의 글을 썼다. 결론적으로 조사위의 해명은 본질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어느 미친 정권이 자기들과는 전혀 무관한 5.18사건을 해마다 28개 도시전역에서 기념하고, 무등산의 진달래라는 노래를 만들어 우리 인민군대가 통일시키려고 광주에 가서 무리죽음 당했다고 전 주민에 애창시키고, 엄청난 물질적 보상을 해가면서 황석영과 윤이상을 3년씩이나 북한에 불러들여 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하여 해마다 전 주민에 반복 상영하여 주겠는가? 28개 도시 전역에서 5.18을 성대하게 기념하는 현상이 분명히 계속되고 있는데 북한과 5.18 사이가 사돈의 팔촌 관계도 아니라는 조사위의 이 주장은 논리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망언인 것이다.
17) 북한 조선기록 영화촬영소가 편집한 기록영화[군사 파쏘도당을 반대하는 광주인민항쟁]에 대한 조사위 해명 : 북한은 남한 기자와 외국 기자들이 촬영한 동영상과 사진을 모아 편집만 했지 촬영은 하지는 않았다. 촬영을 북한이 했다는 지만원의 주장은 허위다.
<반박> 조사위가 이렇게 주장하려면 어느 어느 부분이 남한의 어느 기자 작품이고 외국 기자의 누구누구 작품인지를 설명해야만 한다. 무턱대고 “그것이 다 한국 기자 외국 기자가 촬영한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면 그 주장 자체로 성실성과 진실성을 상실한다. 또한 기록 영화를 직접 촬영해서 제작했든 자료를 모아서 제작했든, 그 제작은 북한이 했고, 그것도 1980년 바로 그해 재빨리 내놓았다. 조사위는 핵심을 물타기하려고 촬영이니 편집이니 하면서 초점을 비껴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북한이 제작한 것은 사실 아닌가? 여기에서 내레이터는 시종일관 흥분한 어조로 전두환과 공수부대에 한순간에 475명씩이나 죽었다며 증오감을 분출하고 있다. 북한과 5.18이 무관하다면 미쳤다고 북한이 정권 차원에서 이런 모략 영화를 만들겠는가? 여기에서의 핵심 쟁점은 북한이 모략 영화를 만들었고, 이중 42분 분량을 따로 편집해 [광주 비디오]로 대량 제작하여 남한 사회에 관람시켰다는 엄연한 사실이 북한과 연관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판단일 것이다. 조사위는 이 큰 그림을 애써 외면하면서 문제의 본질이 마치 촬영이냐 편집이냐에 대한 것인 양 초점 흐리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18) 북한에서 최고인 것에 5.18글자 명예의 상징으로 하사: 탈북자들은 김일성이 북한의 최고인 것들에 5.18을 명예의 상징으로 하사한다며 그 사례를 10개 내외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 하나인 ’5.18무사고 정시견인초과 운동‘은 광주사태 이전의 이름으로 5.18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중 3개는 김일성이 5월 18일날 방문해서 칭찬을 해주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만 톤짜리 프레스 1, 2호에 대한 것과 나머지 6개에 대해서는 규명하지 못했다.
<반박>탈북자들의 증언은 이름 없는 광주시민들의 증언과는 무게가 다르다. 5.18식품가공 공장, 5.18공장, 5.18전진호, 5.18청년 제철소, 5.18누에고치반, 5.18청년호 1호, 5.18청년호 2호에 대해서는 확인을 못했고, 5.18영화 연구소, 5.18단조 공장에 대해서는 김일성 방문 날짜에 따라 5.18을 붙였다는 것이다. 참으로 비열한 둘러댐이다. 그러면 김일성이 수많은 5월 18일에 그 두 곳밖에 간 적이 없다는 것인가. 김일성이 5월 18일 방문한 곳들이 수도 없이 많을 텐데 어째서 ’5.18영화 연구소‘와 ’5.18단조 공장‘에만 5.18이라는 글자를 달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방문 날짜에 따라 이름을 붙였다면 1.1공장, 1.2 공장......12.31공장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조사위의 상임위원들과 비상임위원들은 이걸 말이라고 듣고 앉아 고개를 끄덕이고 거수투표를 했다는 말인가? 조사가 아니라 코미디를 위해 국민들 세금 516억 원을 이 사람들의 급여와 활동비로 제공한 것이다.
19) 광주 시위에 예비군 참여 없었다는 데 대한 조사위 해명 : 지만원은 항쟁 사령관 김종배의 증언집에서 5월 25일의 활동을 소개하면서 “앞으로는 예비군들도 좀 동원하고 체계적으로.....”라는 표현을 들어 5월 21일 시위에 예비군 참여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예비군 출신이 4명 있었다.
<반박>조사위의 해명, 예비군 출신 4명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말은 5월 18일부터 21일까지의 군사행동에 변수가 되지 못한다. 이것을 해명이라고 내놓은 것을 보면 조사위의 지적 수준이 참으로 비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군분교 기습을 예비군 4명이 했고, 무기고 탈취를 예비군 4명이 지휘했다는 것인가?
20) 제 71광수는 황장엽이 아니라 박남선인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조사위의 주장: 조사위는 71광수는 황장엽이 아니라 박남선인 것으로 법원이 판단했다.
<반박>바로 이 부분이 5.18을 숭배하는 법관들의 횡포, 그 상징이다. 이 이야기를 읽는 모든 이들은 필자가 제공하는 진실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조사위는 이 사건 박남선의 검찰 진술 및 소장과 고소장 그리고 피고인의 답변서를 생으로 무시했다. 이는 진실 조사가 아니다. 박남선과 피고인이었던 필자의 주장을 요약한다.
박남선: 나는 600명 시위를 지휘했던 사실상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런데 유공자 급수 1급에서 14급이 있는데 나는 겨우 10등급밖에 받지 못해 억울하다. 나는 잘 때도 군화를 신고 잤다. 71광수는 체포조를 지휘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가 바로 나였다. 그런데 지만원이 황장엽 얼굴과 비슷한 얼굴을 만들어 합성시켜 놓았다.
지만원 : 71광수는 군화를 신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제 단화를 신고 있다. 이 사진은 조선일보 5.18민주화 운동 사진 DB(데이터 베이스)의 제 몇 쪽에 있다. 찾아가는 경로는 이러이러하다. 재판부에서 이 경로에 따라 검색해 주시기 바란다. 조선일보 사진 DB에 있는 사진을 촬영하여 제출한다.“
황장엽 얼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얼굴에 굵은 S자형 근육이 돌출해 있는 것이다. 황장엽은 60대, 박남선은 20대, 얼굴의 나이테 자체가 다르다. 그래서 박남선은 지만원이 황장엽 얼굴과 비슷한 얼굴을 창작해 합성시켜 놓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판사들: 박남선의 주장은 구체적이고 자세하여 모순 없는 진실한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다 기록돼 있는 사실이다. 여기까지를 읽은 국민은 거의 모두가 박남선과 판사들의 횡포와 법적 폭력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조사위에 묻는다. 그리고 촉구한다. 박남선이 71광수인지, 다시 독자적으로 조사해 주기 바란다. 공식적 요구다. 법관들은 1980년 사진은 해상도가 낮아 얼굴 비교 분석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던 국과수 문기웅의 감정서를 인용했다. 그런데 1980년 사진을 왜 피고인만 사용하면 안 되고, 박남선은 사용해도 되는것인가? 박남선은 특수 성골 계급이고, 지만원은 노예인가?” 이 부분 역시 조사위의 조사를 촉구한다.
21) 광수에 대한 조사위 해명: 노담과 지만원이 제시한 광수는 비슷한 얼굴을 찾아 매치시켜 놓았을 뿐, 그 방법이 비과학적이고, 안면 분석은 특징이나 얼굴 부위를 연결한 도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의 크기, 조도, 촬영각도, 자세, 의복 등 주변사항을 종합하여 육안으로 하는 것이다.
<반박>인터넷에 ’안면인식‘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자료가 얼굴도면이다. 이 세상에서 한 장의 얼굴을 수천만-수억의 얼굴이 저장돼 있는 얼굴 DB에서 한 얼굴 한 얼굴을 대조하여 같은 얼굴을 찾아내는 작업을 육안으로 한다는 것은 굉장한 무식이다. 같은 얼굴을 찾아내는 작업은 특수 프로그램이 깔린 컴퓨터만 할 수 있다. 판사들, 국과수 문기웅 감정관은 무식으로 직책을 이용하여 생사람을 잡은 것이다. 661명의 광수를 보고 수많은 국민들이 감탄을 했다. “어쩜 이리도 똑같이 생겼을까!” 그래서 광수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법관들 역시, 조사위 역시, 두 얼굴이 비슷해 보인다는 것까지는 인정했다. 컴퓨터가 찾아낸 얼굴은 육안에 비슷해 보일 수밖에 없다. 만일 법관이나 조사위 사람들이 안면인식에 대한 컴퓨터 로직을 조금만 배웠더라도 이런 엉터리 주장으로 생사람을 때려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노담의 입장에 서 보라. 광주 현장 사진에는 수십-수백 명의 얼굴들이 있다. 그 하나하나를 오려내 컴퓨터로 하여금 그 얼굴을 북한 인물이 저장돼 있는 통일부 등 북한 인물 DB에 저장된 수만 명의 얼굴 하나하나와 대조하여 같은 얼굴을 찾아내 전시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사람 있는가? 처음 접하는 사람은 이제야 무릎을 칠 것이다. 조사위는 얼굴에 주요점들을 연결하여 지문을 만드는 것은 안면분석에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무식한 것이다.
사람들은 지문의 정확도를 믿는다. 지문은 어떻게 대조하는가. 5천만 국민의 지문이 저장돼있는 지문DB가 있다. 지문 한 개가 채취되면 경찰은 지문을 지문DB에 연결한다. 컴퓨터는 지문의 변곡점들에 점을 찍고 그 점들을 선으로 이어 구성된 기하학적 도면으로 변환시킨다. 지문DB에도 역시 컴퓨터가 그린 도면이 있다. 컴퓨터는 input된 도면과 지문DB에 저장된 도면을 1:1로 비교해가면서 같은 도면을 찾아낸다. 얼굴 지문 찾는 로직과 지문의 도면을 찾는 로직이나 컴퓨터 flow chart는 일치한다. 국과수 문기웅 감정관, 검사, 판사, 조사위 모두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기본 학문에 접근해보지 못하고, 그들이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는 위험한 자만심으로 갈릴레이를 때려잡고 있는 것이다.
22) 당시 합참의장 유병현 대장의 월권 조치에 대한 조사위 해명: 5.18 당시 합참의장 유병현 대장은 ’5.18 직전‘이라는 표현 없이, ’광주사태가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해군 참모총장에게 각별히 부탁해 해군의 가용전력을 변산반도로 돌려 이북의 전투부대가 침투하지 못하게 했다“는 글을 그의 회고록에 썼는데 지만원은 유병현 대장이 5.18 직전 해군 전력을 변산반도 이북으로 이동시켜 전남 해안을 비워주었다고 썼다. 표현이 부정확했고, 실제 조사 결과 병력 이동은 별로 없었다.
<반박>필자가 여기에서 중요하게 제기하는 문제는 5월18일 직전이든, 직후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5.18폭동이 전국에 확대되지 않도록 하려면 전남 해안을 봉쇄해야 한다. 그런데 유병현은 북의 전투부대가 침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해군 병력을 전라북도로 집중 배치하도록 한 것이다. 폭동이 타 지역으로 번지지 않게 하려는데 왜 전남 해안을 비워야 하나? 부대 이동 이유가 자가당착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합참의장의 월권행위다. 5.18작전은 전적으로 계엄사령관의 직무 영역이다. 그런데 직무 밖에 있는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바이패스하여 작전부대를 지휘했다는 점이다. 전국적으로 5.18기간 중 전남 해안을 지켜야 할 해군 병력을 전북으로 이동시켜 전남 해안 경계력을 약화 내지는 무력화시킨 것이다. 조사위는 ‘병력’과 ‘가용 병력’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군을 아는 사람은 그 말이 그 말인 것으로 인식한다. 유병현은 전남 해안의 경비를 약화시키는 내용으로, 계엄사령관 권한을 월권하여 해군총장에게 ‘각별한 부탁’을 한 것이다. 이것이 어째서 북한의 접근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인가? 유병현이 매우 수상한 행동, 간첩으로 의심 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23) 1호 광수의 석면 장갑 표현에 대한 조사위 해명: 1호 광수가 끼고 있는 장갑은 보다 고화질로 촬영된 사진을 보니 면장갑이었다. 기관총도 총열을 교환하지 않는 총이다. 그런데도 지만원은 석면 장갑이라 했고, 기관총도 총열을 교환하는 총이라고 했다. 총기에 대한 지식이 없이 무리하게 주장했다.
<반박> 필자는 군사 전문가로 1990년대 10년 동안 독보적인 군사 평론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소위 때 베트남전에 가서 대위 때까지 작전을 했다. 하지만 필자는 부하들이 다루는 장비에 대한 기계적 지식이 없다. 각 장비의 성능과 역할만 알고 작전 요령에 대해서만 상상력을 동원해 적을 이겼다. 필자에게 장갑과 기관총에 대한 지식은 육사 생도 시절에 배운 거라 미세한 부분까지 다 알지 못한다. 기관총들 중에는 총을 많이 사용했을 때 총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면 안 되기 때문에 사전에 석면 장갑을 사용해 기관총 총열을 교환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1호 광수가 소지한 기관총은 소총의 연장선상에 있는 기관총인 모양이다. 필자가 기재한 내용은 일반적인 지식이고, 그 지식은 1호 광수가 소지한 기관총에는 예외인 모양이다. 여기는 북한군 개입 여부를 따지는 공간이기에 이런 사소한 에러는 문제가 전혀 되지 않는다. 조사위는 초장에 필자의 부정확성을 부각시켜, 군사지식이 없는 사람인 것으로 폄훼하고 있다. 석면장갑이다, 총열을 교환하는 기관총이 아니다 하는 것은 병사의 지식이지, 장교의 지식에 해당하지 않는다. 지휘관은 판단력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지, 병사가 가져야 할 지식 전부를 알아야 하는 직위가 아니다. 장갑과 기관총에 대한 세밀한 내용, 병사가 알아야할 내용을 몰랐다 해서 북한군 개입 여부를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몰아가는 조사위의 수준과 저의가 심히 의심된다. 결론적으로 1호 광수는 광주 현장의 지휘자다. 1호 광수가 광주시민이 아니면 노담의 분석 그대로 북한의 농업상(장관)을 지낸 김창식이 1호 광수인 것이다.
영화 [김군]의 결론 역시 1호 광수는 광주천 다리 밑에서 7-8명 단위로 양아치 생활을 하다가 시위 당시 대장 노릇을 하더니 시위가 끝나자 7-8명 모두가 영원히 사라졌다 했다. 더구나 영화 주인공 ‘주옥’은 차에 올라타 있던 1호 광수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영화에서 증언했다. 조사위는 이 영화 [김군]을 조사하지 않았다. 기피한 것이다.
24) 현장기록 내용이 북한이 더 우세하다는 데 대한 조사위 해명: 북한 기록에는 상황이 잘못 기술된 내용들이 있다. 계엄군 통신지휘부가 가톨릭센터에 있다고 기술돼 있는데, 당시 가톨릭센터에는 계엄군 통신지휘소가 없었고, 공정대 31연대도 없고, 경찰에는 총기가 지급돼 있지 않았는데 총기가 지급돼 있다고 기록돼있다. 남한의 문헌인 [광주사태의 진상], [계엄사], [5공전사], 상황일지, 전투상보 부대원 수기 등도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고 교훈도 있다. 지만원이 이런 책에 접근이 안 돼있는 것 같다.
<반박> 필자가 제시한 내용은 북한이 1982년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과 1985년 발행한 [광주의 분노]다. 이 두 책에 기술돼 있는 내용들이 1982년 황석영 이름으로 발행된 [넘어넘어]에 수록돼 있고 이는 지금까지 일반에게 '사실'로 알려지고 '5.18의 바이블'로 알려져있다. 조사위의 해명대로라면 황석영 저 [넘어넘어]도 많은 허위사실들이 있다는 말이 된다. 조사위가 지적한 내용들은 낱개 세부의 표현에 있을 수 있는 오류이거나 에러일 수는 있지만 대체로 우리 상황기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사위는 남한의 [계엄사] [5공 전사] [광주사태 진단] 등의 기재 내용이 북한 책처럼 스토리텔링식이 아니고 현장을 자세하게 묘사한 책이 아니라 논문 형태이거나 보고서 형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5.18 작전이 군사작전과 시위 작전의 배합이었다는 사실을 필자에게 가르쳐 준 책이 북한 책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북한 측 전략과 전술, 그리고 교훈이 딱 부러지게 정리된 한국 책이 없다는 것이다. 조사위는 남한 책 어디에 5.18의 시위 전략과 시위 전술 그리고 시위가 왜 통일로 연결되지 못했는지에 대해 정리돼 있는지 밝혀야 한다. 북한의 5.18 전략은 시내 중심부를 중심 시위 구역으로 하고 주위에서는 성토대회, 성명 발표, 농성을 결합, 집중과 통일, 그리고 중단 없는 투쟁을 연속하여 "정치적 효과"를 높혔다. 사용된 전술을 요약한다. '적의 저지선은 과감하게 돌파했고, 포위는 역포위로 전환했다. 큰 대열과 작은 대열을 결합했다. 빠른 기동으로 속도전을 벌였고, 바리케이트에 의한 방어로 주도권을 확보하여 적을 피동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작은 돌과 큰 돌과 화염병을 결합했고, 현장 치료대도 수행케 했다. 대중선동과 시위를 결합하여 많은 군중을 확보했다.
북한 책에 기록된 3개의 교훈이 있다. 이 교훈 속에 바로 5.18은 북한 소행이라는 것이 고백돼 있다. "광주 인민봉기가 남조선 파쑈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것이다.
교훈1: 남조선 인민이 남조선 파쑈 정부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벌이는 투쟁 은 반드시 반미투쟁과 결합될 때에만 확고해진다.
교훈2 : 남조선 인민의 해방투쟁(내란투쟁)은 청년학생 운동과 노동운동이 한 차원 높게 결합돼야 한다.
교훈3: 남조선 인민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국가전복) 민주화 대중조직을 광 범위하게 확장되어야 한다.
이 세 개의 교훈에는 5.18의 목적이 남한 정권 전복이라는 것이 생생하게 드러나있다. 그리고 그 교훈 그대로 지금 남한에는 주사파 세력이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북의 전략, 전술 그리고 교훈이 남한 책에 기록돼있는가?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전략, 전술, 교훈 속에 드러나 있는 국가전복 의도를 충분히 인식하고 소름이 돋아야 할 것이다. 조사위 사람들에는 이것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인가?
6. 결론
1. 대한민국의 정치 역사는 끝없는 대남공작의 역사다. 이 표현은 북한의 박설영을 위시한 북조선 역사가들의 상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북한에는 대남사업부가 가장 큰 부서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수많은 간첩사업소에서 노골적으로 간첩을 양성하고 있다. 5.18만은 여기에서 예외라 할 대공 전문가는 없을 것이다. 북한의 특성은 증오심과 적개심을 가지고 주민을 끝없이 학습 세뇌시켜 증오심을 콘크리트로 삼아 주민을 단결시키고, 시선을 안으로 돌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증오심과 적개심이 단결을 위한 콘크리트인 것이다. 황석영 이름으로 발간된 [넘어넘어]의 머리글에는 최초 5.18 유족회장 전계량의 글이 있다. "증오하라, 증오하라. 끝까지 증오하라" 그리고 그 [넘어넘어] 책에는 북한이 발행한 두 권의 광주 관찰기가 그대로 전재돼 있다. 여기에서부터 5.18과 북한은 탯줄처럼 연계돼 있는 것이다.
2. 북한 문헌들에는 광주 반파쑈 투쟁이 어떤 전략과 어떤 전술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고, 앞으로 남조선을 전복시키고 북한 체제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교훈을 실천해야 한다는 교시가 기록돼있다. 남한 내에 반체제 조직을 대폭 확산시키고, 학생과 노동투쟁과 반미투쟁을 끝없이 전개하여 혁명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포위를 당했을 때 광주투쟁 전사들은 한 부분을 과감히 돌파하여 돌파당한 괴뢰군(계엄군)을 역포위해서 언제나 기선을 제압하였다는 전술이 명시돼 있다. 지금 남한에는 위 교훈들대로 반국가 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하고 있다. 이 기록들을 보고, 5.18과 북한이 무관하다고 주장할 사람도 드물 것이다.
3. 5.18이 북한이 주도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2020.5.11.에 미국이 한국 외교부에 이관했다는 비밀 해제된 자료 122건 522쪽 분량에 9개 문서 중 확연히 드러나있다. 그런데 당시 문재인 외교부는 미국의 122건이 아니라 43건, 522쪽이 아니라 140쪽만 이관했다고 국민을 속였다. 그래서 이 100쪽 가운데는 결정적 문서 9건이 들어있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대국민 사기를 친 것이다. 이 122건 522쪽은 주한 미 대사관 홈페이지에 있다. 그런데 이 9개의 결정적 증거 문제를 두 번째로 사기를 친 주체가 조사위다. 조사위가 조사 대상으로 삼은 책은 2021.9.8. 출간한 [5.18 답변서] 책이다. 그 책의 95~100쪽에는 문서 내용을 캡처한 원본이 제시돼 있다. 그런데 조사위는 이 부분은 회피하고 엉뚱한 문서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너스레를 떨었다. 참으로 간교한 수법이다. 미국 헤리티지 재단이 연구관들을 광주에 보내 심층 연구를 시켰다. 그 내용은 교도소에서 가장 치열할 교전이 있었고, 계엄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광주시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헌신하였고, 광주의 피해는 폭도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강조했다. 그런데도 조사위는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삼삼오오 대열을 이탈해 다니면서 강간을 했고, 집단으로 암매장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집단 암매장이 바로 청주유골일 것이다.
4. 스카이데일리의 추가 증거 30개가 더 있다. 필자가 연구서를 내놓은 다음, 5.18을 북한이 주도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증언하고 나선 사람들이 탈북자들이다. 탈북자들의 95% 정도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그들은 증언한다. 산간벽지의 주민들만 모를 것이라 했다. [무등산의 진달래]를 통해, 통일을 이루기 위해 북한의 자식들이 광주에 가서 억세게 싸우다가 무리죽음을 당했다고 슬퍼한다. 일간지 스카이데일리가 사운을 걸고 2023년 한 해 동안 5.18 진실찾기 취재를 하여 필자가 제시한 42개 증거 이외에 또 다른 30개의 증거를 발굴했다. 신문사는 이 모두를 엮어 2024년 1월 2일, 40쪽 분량의 [5.18 특별판]을 발행해 수많은 국민에 배포했다. 그 제목이 [5.18은 DJ 세력과 북이 주도한 내란]이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제외하더라도 필자의 증거가 42개, 스카이데일리가 취재한 증거가 30개, 계 72개인 것이다. 그런데 조사위는 스카이데일리가 새로 발굴해낸 30개의 증거가 42개 증거 속에 다 포함된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스카이데일리 증거 중에는 전남해안에 북한 침투조가 상륙했다는 첩보에 따라 20사단 수색중대(130명)가 접근하던 도중 5월 17일 송정리 부근에서 괴한 수백 명에 의해 외딴곳으로 130명이 납치돼가서 죽지만 않을 만큼 매를 맞고 집단으로 3주 동안 입원한 사실이 적시돼 있다. 수색중대는 체력과 기능이 우수한 병사들만 뽑은 부대다. 130명의 총기 소지자가 군용트럭을 타고 가는 것을 차단하고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죽지 않을 만큼 구타한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는 군분교 사건 못지않은 북한군 개입의 충격적인 증거일 것이다. 그들은 왜 죽이지 않고 죽도록 패기만 한 것일까? 모두를 죽이면 비밀이 탄로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괴한들은 해안에 접근하는 침투조를 보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5. 필자의 5.18 연구 내용의 백미 중 하나는 청주유골이다. 그 단서를 북한 아리랑 '무등산의 진달래'에서 잡았다. 노래에서 얻은 단서는 ① 5.18이 김일성의 통일전략의 일환이었다는 점 ② 북한의 병정들이 광주에 와서 엄청 (무리죽음) 죽었다는 점이었다. 무리죽음이라면 몇 명일까? 북한자료 4곳에 475명이 반복, 거론되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475명이 어디로 갔을까? 청주유골 430구가 발견된 것이다. 430구가 광주에서 왔을까? 광주 시립공동묘지 작업자의 증언이 있었다. 공식통계 사망자 164명 이외에 430구를 처리했다는 증인이다. 시체가 광주에서 언제 청주로 갔는가? 안병복씨의 증언이 있었다. "5월 27일 새벽 시체를 가득 실은 대형트럭 여러 대가 시외로 달리고 있었다". 그 다음 청주유골의 처리와 행방을 추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를 추적 연구의 백미라고 자평한다.
475명 중 430명을 제외한 45명 중에 신원 미상의 12인이 있을 것이고 부산 국제신문 이양우 취재팀이 5월 22일 교도소 근방인 창평에서 괴한들이 2개의 관에 찔레꽃을 매달고 리어카에 싣고 야산으로 야반도주하듯이 올라갔다는 그런 시체도 있을 것이고 광주를 떠나 북한에 가서 죽은 이도 있었을 것이다. 광주 폭동 상황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은 오로지 교도소 교전뿐이다. 그날 공수부대가 사용한 실탄이 48만을 넘었다 하고, 미 헤리티지 재단 보고서 역시 교도소 근방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교도소 공격은 민주화 운동의 범위를 넘는다. 대법원 판결도 이를 인정했다.
6. 조사관들의 자질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 통계학 개념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일부러 이러는 것인 줄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베트남전에서 상황장교 1년을 했다. 위에서 매일같이 수많은 첩보가 하달된다. 필자는 상황 발생지역을 지도 위에 표정하라고 지시했다. 병사들은 상황을 받아적을 때마다 지도에 상황 발생지역을 표정했다. 점들이 몇 개만 찍혀 있을 때는 정보가 보이지 않았다. 수백 개의 점이 찍히니까 경향(Trend)이 나타났다. 그 지역 그 시간에 포를 날렸다. 베트콩에서 노획한 문서에는 한국군 포에는 눈이 달렸다는 기재가 있었다. 이는 자랑 목적으로 쓰는 글이 아니다. 이 사례가 5.18 연구에 대한 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조사위는 42개 증거 하나하나씩만 독립적으로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른 사건 다른 증거와는 아무런 결합도 없이 "이거 하나 가지고 북한군이 왔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42개 모두에 냈다. 이는 사고력이 없는 아메바 두뇌들이나 할 수 있는 코미디 행위다. 430구의 청주유골에 대해서는 거짓말도 했다. 430구에 대한 화장 증명서가 있다고는 해놓고 그 사진을 제시하지 않았다. 2014년 충청북도에 소재한 4개의 화장터가 화장한 무연고 유골 수는 겨우 18구, 7개월에 걸쳐 109개 공동묘지에게 나온 유골들을 똑같은 크기의 칠성판에 올려놓고 하얀 비닐도 포함해 1개 길이의 땅에 대오를 갖춰 109번씩이나 파고 묻었다는 변명은 이솝우화보다 더 배꼽 잡을 우화다. 이걸 믿으라고 보고서에 쓰는 조사위 사람들의 지능이 매우 의심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5.18을 북이 주도했다는 증거는 모두 72개다. 필자는 이 모두를 엮어서 트렌드를 분석했고, 조사위는 트렌드 개념 자체를 무시했다. 이는 조사가 아니다.
7. 비상근 위원에게는 조사 권한이 없다. 그런데 비상근 위원인 이동욱이 총대를 메고 조사관도 할 수 없는 일과 외 근무를 했다. [보랏빛 호수]의 주인공과 저자를 각각 밤중에 성남에 있는 모텔로 불러내 주인공 정명운에 대해서는 4시간, 저자 이주성에 대해서는 1시간씩 협박하고 회유해 조사위가 원하는 바의 진술서를 쓰게 했다. 논리적으로나 사실 측면에서나 있을 수 없는 협잡행위를 한 사실이 있다. 바로 제1호 광수로 내세운 차복환 케이스다. 이는 참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협잡행위다. 1호 광수는 영화감독 강상우 팀이 이미 4년 동안의 추적을 통해 밝혔다. 영화 [김군], 김군이라는 영화 제목은, 영화의 주인공 주옥(당시 21세)의 진술에 따라 정해졌다. 막걸리집을 경영하는 주옥의 부친이, 막걸리집에 자주 오는 1호 광수에게 이름을 물으니 그냥 ”김군이라고 불러주세요“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김군]이 되었다. '주옥'은 김군을 자주 보았다고 했다. 이웃 광주천 다리 밑에서 7~8명 단위로 천막을 치고 양아치 생활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가 차를 타고 다니며 대장 노릇을 하고 있을 때 눈이 마주쳤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시위가 끝나자 모두 종적을 감췄다고 했다. 이 정도이면 [김군]은 북한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송선태가 내세운 차복환은 본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가짜다. 모텔 공작을 자랑할 만큼 부도덕한 조사위에 어울리는 협잡행위일 것이다.
8. 조사위 위원장은 제척 사유를 위반한 전형적인 5.18 유공자이고, 5.18을 내란으로 기획한 기획 문서를 사태 1주일 전인 1980.511.에 기록한 [자유노트]의 주인공이다. 이런 사람 말고는 대한민국 땅에 5.18을 조사할 능력 있는 사람이 없는가? 필자는 이 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국힘당에 의해 추천되었지만 뭇사람들의 방해로 제외된 사실이 있다. 이렇게 구성된 조사위는 그 자체로 객관성을 상실했고, 승복력을 상실한 것이다. 5.18은 광주의 로고다. 5.18로 인해 광주와 전라도 사람들이 사회적 신분과 정치적 신분을 상승시켰고, 5.18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있는 핵심 이권 사업이다. 5.18의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에서 광주와 전라도는 이해당사자다. 5.18 진실규명을 왜 꼭 이런 이해 당사자가 그리고 5.18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나서서 해야 하는가? 국제적으로 조소를 당할 코미디 현상이다. 치사하고 유치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국민을 미물로 보는 행위다.
9. 조사위는 광주의 뭇 단체들로부터 "왜 광주가 바라는 결과를 내놓지 못하느냐?"고 닦달을 당하고 있다. 2024.4.25.자 MBC 보도를 보면 조사천이 맞은 총탄이 꼭 M16총탄이어야 하고, 암매장 사실이 꼭 있어야 하고, 전두환의 집단 발포 명령이 있어야 하고, ‘무기고 습격’, ‘경찰서 습격’이라는 표현은 절대로 보고서에 넣어서는 안 되는 불경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최초 사망자가 권 일병이었다는 결과도 보고서에 넣으면 안 된다고 압박했다. 한마디로 광주의 여러 단체는 갖지 않은 아이를 낳으라고 조사위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하나의 현상을 바라보면서 일반 국민은 무슨 생각을 할까? 첫째, 5.18 조사위가 광주국이 파견한 광주 총독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고 둘째, 광주국은 서울에 파견된 광주 총독이 거짓말로라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보고서에 담으라고 압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할 것이다. 광주는 보고서 내용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발간정지' 가처분 소송을 하겠다고 한다. 이 무슨 깽판이란 말인가? 대한민국이 광주를 위해 있다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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