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 228] 이걸 보고 , 누가 아니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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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5-22 10:09 조회10,58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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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 228.
이걸 보고 누가 아니라 할까요?
북한 전역에서 슬피 불리는 북조선 아리랑 '무등산의 진달래'가 인터넷에 떠 있다. 탈북 여성이 부르는 모습도 있고 가사도 2절 다 떠 있다. 북에서는 등굣길에 확성기로 매일 들려주고, 최근에는 광주 일각에서도 암암리에 불리고 있다는 말도 있다. 2015년 7월 초, 북한 전문 뉴스매체 프리엔케이(FreeNK)는 이 노래를 1980년대 중반에 김정일 지시로 제작했고, 이 제작과정에는 2015.7.3~4에 동아일보와 채널A가 대서특필했던 박승원 상장(3성 장군)이 참여했다는 뉴스를 전했다. 프리엔케이는 박승원이 1980년 광주에 참전했고, 평양의 '대남영웅대회'에서 광주 참전 위훈담을 소개했다는 기사를 전했다.
<무등산의 진달래>
제1절
광주라 무등산에 겨울을 이겨내고 연분홍 진달래가 곱게 피어나네
동강난 조국 땅을 하나로 다시 잇자 억세게 싸우다가 무리죽음 당한 그들
사랑하는 부모형제 죽어서도 못 잊어 죽은 넋이 꽃이 되어 무등산에 피어나네
제2절
광주나 무등산에 봄철을 부르면서 새빨간 진달래가 붉게 피어나네
찢어진 민족혈맥 하나로 다시 잇자 억세게 싸우다가 무리죽음 당한 그들
사랑하는 부모형제 죽어서도 못 잊어 젊은 넋이 꽃이 되어 무등산에 피어나네
북한에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두고 광주에 와서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억세게 싸우다가 떼죽음을 당해 무등산의 꽃으로 피어난다는 뜻이다. 이 노래를 듣고 북한 전사들이 광주에 와서 5.18 전쟁을 하다가 떼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 과연 있겠는가? 이처럼 명확한 증거가 또 어디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북한은 노래를 통해 5.18주역이 북한이었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단서를 잡으면 추적하는 것이 국가정보 요원들의 임무이고, 학자의 생리이다.
영국에 있는 세계 최고의 정보간행물 발행기관 IISS는 이 세상 최고 수준의 1급 비밀은 99%가 적장의 서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공개된 정보를 분석 평가하고 이를 퍼즐 맞추기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생산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바 있다. 이후에 나타난 뉴스와 첩보들 하나하나는 일반 국민들이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조각들이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사람들은 이들 작은 조각들을 놓치지 않고 수집한다.
혹시 1980년 5월경 광주에서 수상한 사람들 본 사람 있을까요?
스카이데일리가 편집한 [5.18 특별판] 제18쪽에는 1980.5.14. 광주 군수부대 장교단 70여 명이 간첩 손성모가 광주의 비전향 장기수 류낙진의 딸 류소영 등과 함께 5.18작전을 폈다는 무등산 입구 증심사(절) 옆길에서 눈에 살기가 돋는 이방인 100여 명과 마주쳤다는 증언들을 게재했다. 긴 장발에 남루한 복장, 검게 그을리고, 눈에서는 살기가 솟아나고, 전라도 말을 쓰지 않고 몸매들이 '늘씬늘씬'하게 다듬어진 적대감 풍기는 이방인 그룹이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러면 증심사에는 정말 간첩 손성모와 류소영이 있었을까? 많은 자료에는 류소영이 증심사에서 5.18 관련 활동을 했다고 기재돼 있다. 간첩 손성모는 5.18 작전에 가담했을까? 광주 현장 사진 5매에는 손성모 사진이 지휘부 간부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다. 손성모는 확실히 광주 현장 주역 중 한 사람으로 보인다. 사진을 뒷받침할 다른 자료는 더 없을까?
김대중이 감옥에서 꺼내 북으로 보낸 간첩 손성모가 광주시위 주도
탈북 1호 박사 안찬일, 그는 2021. 4. 30. <안찬일 TV>에서 손성모에 대해 한동안 특별방송을 했다.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손성모에 대해서입니다....이 사람은 1929년생으로 1967년도에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북한의 엘리트였습니다. 그 사람을 통일전선부가 스카우트해서 공작원으로 키워오다가 1980년 4월경 그를 광주로 직파했습니다. 광주 사건이 진정된 이후에 북한의 당간부들 비교적 권력기관 사람들한테는 특별강연이 있었습니다. 손성모 동지 유훈을 따라 배우자. 마치 손성모라는 대남공작원이 광주 시민군 총사령관으로 북한에서 내려간 특수부대, 공작원 또 광주의 학생들 시민들을 묶어서 지휘한 총사령관이었다는 인상을 갖도록 강연을 했다 합니다.“
”김일성이 60년대 초반에 남파간첩들에게.... 교시를 준 게 있는데 ‘공작원들은 십자가와 스님 뒤에 숨어라’ 그래서 종교계에 침투하는 걸 그 사람들은 가장 안전하게 생각을 해왔고 이 손성모라는 공작원도 바로 80년 4월에 대한민국에 침투하면서 광주 근교에 있는 증심사라는 절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으로 위장한 거죠. 머리를 이렇게 깎고 복장도 스님 복장을 하고, 그 주변에 흑룡사니 뭐니 이렇게 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거사를 꾸몄고, 또 류낙진의 딸 류소영과 공모를 했다는 내용들이 손성모의 강연에서 밝혀졌습니다.
광주사태가 종결된 후도 손성모는 월북하지 않고 암약하다가 1981년에 체포가 된 겁니다. 우리 군 정부 당국에 체포가 돼서 감옥으로 갔고, 거기에서 아주 오랫동안 거의 뭐 19년 동안 복역을 하다가 2000년 6.15공동 선언 이후에 김대중이 비전향 장기수들을 대거 북한으로 송환할 때 이 공작원도 북으로 송환을 시켜버렸습니다. 당시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들은 대체로 30년이상 복역했지만, 손성모는 19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만 감옥에 있었습니다. ....북으로 간 이 사람은 북한 최고 명예라 하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접견하고 국기훈장 1급을 비롯한 많은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탈북자들과 그들의 수장인 황장엽-김덕흥은 어떻게 진술했을까요?
2009년 10월, 탈북군인연합회가 탈북자 수기 16개를 모아 450여 쪽의 수기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을 제작 판매했다. 16명은 5.18을 북한이 주도했다는 생생한 수기들을 썼고, 아울러 탈북자의 99% 이상이 5.18을 북이 주도한 것으로 믿고 있다 증언하였다. 2013.4.22. TV조선 '신율의 시사열차'에는 국정원보다 먼저 황장엽을 중국에서 접촉했던 전 월간조선 기자 김용삼이 황장엽과 김덕홍의 증언을 발표했다.
황장엽: 광주 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 전가한 일이다.
김덕홍: 조선노동당 대남 부서에 소속된 사람들 상당수가 광주민주화 운동 끝난 후에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
무리 죽임을 당한 그들의 숫자는 도대체 얼마라는 것일까요?
북한 자료 4개에 "하룻밤 사이에 475명이나 죽였다"는 표현이 분노의 감정에 실려 있다. ① 1982년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591쪽 ② 1985년 노동당 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 86쪽 ③ [찢어진 깃폭, 어느 한 목격자의 진술] (천주교 정의평화 협의회) ④ 조선기록영화촬영소가 제작한 [군사파쑈 도당을 반대하는 광주 인민항쟁] 끝부분에 전두환과 공수부대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하면서 내레이트돼 있다. 북한은 왜 이렇게 475명을 계엄군이 단 하루에 다 무리 단위로 죽였다고 분노할까? 실성해서 그랬을까? 왜 하필 그 많은 숫자 중에 475명일까. 광주시민 사망자는 겨우 모두 154명뿐인데 그 3배가 넘는 475명을 왜 이렇게 반복하는 걸까?
청주유골 430구에 대한 추적은 하나의 예술품이라 생각합니다.
2014.5.13. 나라가 세월호에 파묻혀 있을 때 청주시 흥덕지구 축구공원은 조성하던 도중 인부들이 밀림의 야산 지대에서 무연고 유골 430구를 발견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런데 뉴스를 보니 이 430구는 광주에서만 올 수 있는 시체의 유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30구의 유골은 모두 규격이 일정한 나무판(칠성판)에 얹힌 채 하얀 비닐로 감겨있고, 유품은 일체 없고, 비닐 위에는 군번처럼 숫자들이 기재돼 있었다. 지하 1m 아래 대신 군대식 대오를 맞춰 가매장돼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시체가 금방 부패해서 역한 액체가 악취를 풍기고 있어서 빨리 비닐로 감아야만 했고, 실제로 도청 안에는 비닐 작업장이 사진에 촬영돼 있었다. 430구는 475구의 큰 부분이고 45구는 이리저리 흩어진 이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430구에 대해 의심을 갖은 사람은 아마 저 한 사람뿐이었을 것 같다. 증거는 가설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눈에 띄게 돼 있다. 이어서 430구가 광주에서 나온 숫자라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전남대 5.18 연구소는 1989.2. 당시 43세의 여교사 최봉희의 증언을 보관하고 있다. 광주에서 시체를 총괄했던 시립 공동묘지 관계자가 자기 손을 거친 시체의 총수가 594구였다는 증언이다. 당시 광주시면 사망자 수는 모두 164명인 것으로 발표돼 있었다. 그러면 594-164=430구가 되는 것이다. 이는 우연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같은 5.18 연구소에는 1988.7. 60대 여성 안병복의 증언의 보존돼 있다. 5월 27일 새벽, 시체를 가득 실은 화물차 여러 대가 시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이 있다. 이날 광주시 외곽도로는 모두 뚫려있었다. 여기까지를 합치면 점점 430구가 광주에서 나온 유골이라는 가설이 사실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나머지 430구의 행방만 찾으면 가설이 사실로 전환될 수 있었다.
청주시는 430구를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2020년, 저는 2심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에 사실확인 신청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430구에 대한 처리 과정을 밝혀달라는 것이었다. 청주시가 많은 자료를 보내왔지만 중요한 것은 아래와 같다.
① 유골 수는 정확히 430구다.
② 이 유골은 1994.10.19부터 95.5까지 7개월 동안 위치가 다른 109개의 공동묘지에서 작업 중 발굴된 것들을 집단으로 이장한 것이다.
③ 5월 14일에 보도가 집중되자 청주시는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5.16부터 보도를 하지 못하게 보도통제를 가했다.
④ 5월17~18 사이에 현장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로 안장 완료했다.
⑤ 화장 및 안장 작업은 현대장묘개발과 수의 계약하여 10,501,280원을 지급했다.
청주시 해명에 대한 해석
① 109개의 위치가 다른 공동묘지에서 7개월 동안 430구가 모였다면, 한 번에 평균 4주씩 나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 발굴될 때마다 업체를 109차례 선정해 화장해서 봉안하고, 화장증명서와 봉안증명서를 보관해야 한다.
② 그런데 청주시는 109번이나 흥덕지구 가매장 장소에 1회에 4구씩을 위해 똑같은 규격의 나무판을 제작해 하얀 비닐로 감고, 그 위에 군번과 같은 숫자를 기입해 1미터 깊이에 묻어놓고, 매장하기를 109차례 해서 430구를 모아놓았다고 한다. 이는 이솝우화보다 더 황당한 우화일 것이다.
③ 무연고 유골을 처리하려면 지방자치 단체는 조달청 홈페이지 나라장터에 입찰공고를 내서 장묘업체와 계약해야 한다. 당시 구당 화장 시가는 구당 백만 원이었다.. 그런데 청주시는 무명의 장묘업체인 '현대종묘개발'에 수의 계약하여 구당 2만 원을 지급했다. 시가의 2%이다.
④ 그 2%의 돈으로 업체는 컨테이너 박스에 철 진열대를 설치하고, 유골 1구당 불투명 비닐봉지에 하나씩에 털어넣고 숫자 번호를 기재하여 정리 정돈해 놓았다.(사진 제출)
⑤ 화장 증명서와 봉안증명서는 제출하지 않았다.
⑥ 메디칼뉴스들에 의하면 2014년 충청북도 4개 화장터에서 화장한 총 무연고 유골 수는 겨우 18구이다. 430구는 화장하지 않은 것이다.
430구 무연고 유골 어디로 갔을까요?
2014년 9월 19일부터 10월 4일까지 인천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북한은 전혀 게임에 관심이 없었고, 그대로 모든 참가국들이 신청을 마감했을 때였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이 호들갑을 떨며 5월 24일 북한도 참가하겠다며 실무자 회의를 열자 하였다. 당시 미국의 Fox 뉴스는 북한의 의도가 수상하다는 기사까지 냈다. 2014.7.17. 판문점에서 남측 대표 3명 (권경상, 정기영, 김영일)과 북한 대표 3명(손광호, 장수병, 고정철)이 만났다. 너무나 기이한 이벤트가 있었다. 2014.8.17. 북한의 스파이 사령관(통전부장) 김양건이 북한의 절대 협력자로 이름나 있는 임동원; 박지원, 김홍일을 개성으로 부른 사건이다. 김대중 사망 5주기를 기념하는 화환을 김정은이 만들었으니 이를 가져가라는 것이 호출의 이유였다. 바로 여기에서 컨테이너 박스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해 의논을 했을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8월19일 조 추첨 명목으로 8명씩이나 북한 요원이 인천공항에 왔다. 8명씩이나! 이는 컨테이너를 가져갈 절차에 대해 최종적으로 기술적인 점검을 위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변 중의 이변, 적장의 전용기 한국 땅 날아와
그리고 10월 4일! 이변 중의 대이변이 발생했다. 김정은 전용기가 날아온 것 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적장의 전용기가 적진인 한국에 날아온 역사는 없었다. 적장의 전용기가 날아왔다는 이 사실은 지축을 흔들 만한 이변인데 이를 수상히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이 김정은 전용기는 북 권력 3인방,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이 몰고 왔다. 북에서 가장 바쁜 권력 3인방, 하루종일 인천공항 VIP실에서 하품만 했다. 청와대 안보실장 김관진 역시 그들을 대접한다며 그들과 함께 하품만 했다. 그리고 폐막식에는 얼굴만 보이고 사라졌다. 이를 수상히 여기지 않은 대통령 안보실이 미덥지 못해 보였다.
475명은 도대체 어디서 다 죽었을까요?
5.18기간 중 5월18일부터 21일 오후 5시 광주시를 탈출할 때까지, 계엄군은 한결같이 수세에 몰려 공격만 당했다. 이 기간에는 북한군이 떼죽음을 당하지 않았다. 475명이 하루 사이에 떼죽음을 당했다면 그 개연성은 오로지 쌍방이 치열한 교전을 벌여야만 한다. 치열한 교전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2021년 밤사이에 있었던 교도소 공격이다. 비공식 자리에서는 여러 명의 공수부대 출신들이 "교도소에서 수많은 살상이 이루어졌을 텐데 이상하게 시체가 없더라"는 말을 한다. 공공연하게는 광주가 수백 명 단위의 암매장이 이루어졌다며 굴착기 등 중장비들을 동원해 국가 세금을 사용하면서 암매장 장소를 찾는 작업을 수십 차례나 했다. 1985년 미국 헤리티지 재단 연구팀이 내놓은 광주사태 보고서(South Korea's Kwangju Revisited)에는 광주교도소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50명이 살해됐다는 내용이 있다. 2017.8.29. 경향신문은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조사위원회가 밝혔다는 보고서 내용을 보도했다. 5월 21일 공수부대가 사용한 실탄의 수가 무려 484,484발이나 되었다고 했다. 이 엄청난 실탄이 5월 21일 하루에 사용됐다면 그것은 오로지 광주교도소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개연성 밖에는 달리 생각되는 것이 없다.
결 론
5.18은 북한이 주도했는가? 정보기관의 가설이어야 하고 학자들의 가설이어야 한다. 많은 식자들이 무책임한 말을 한다. “북한 주도 여부는 통일이 돼서 북한 통전부의 비밀창고를 열어봐야 한다”고. 이 말대로라면 정보기관들도, 과학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 정보원들은 대상자의 서랍만 훔치러 다녀야 할 것이다. 최고의 1급 정보는 적장의 서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수많은 첩보 조각을 논리적으로 추적하여 퍼즐 맞추기해서 생산한 결론이다. 군사 전략정보 과정에서 첫 시간에 들을 수 있는 중요한 교리다. 모든 과학은 예측을 위해 존재한다.
예측은 사실을 논리적으로 전재한 결론이다. 물체를 관찰하는 데에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Top View가 있고 사방 옆에서 보는 Side View가 있듯이 ‘5.18북한 개입’에 대한 가설 역시 Top View가 있고 여러 측면에서 접근하는 Side View가 있다. 이번 회처럼 ‘북조선의 슬픈 아리랑 [무등산의 진달래]를 중심으로 해서 접근한 것도 있고, 북한이 5.18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의 측면에서 접근한 것도 있고, 광주에서 진행했던 작전들의 내용이 과연 광주의 구두닦이들이 수행한 것인가의 측면에서 추적하기도 했고, 미국이 어떻게 평가했는가에 대한 측면, 그 엄청난 작전을 했는데 지휘자나 주도자가 광주 사람이 아니라는 측면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접근한 것들도 있다. 이 모든 측면에서 접근해 보아도 '북한 개입'에 대한 가설은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추리다운 냄새가 나는 추리는 [무등산의 진달래]에서 출발한 가설을 증명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화자찬이겠지만 이는 추리 과정의 한 모범 모델이라고 자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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