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이 대일외교 영웅이라는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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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7-11 14:27 조회4,7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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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대일외교 영웅이라는 조선일보
2019.7.10. 조선닷컴에는 논설위원 “[김광일의 입] ‘문재인’은 ‘김대중’을 모르는가”라는 제목의 글과 동영상이 올라있다. 조선일보의 대문 글이고, 대문 영상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10/2019071002493.html
김광일 기사의 요지
그 요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오는 8월 18일이 김대중이 죽은지 10년인 날이다. 여당족들이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을 초청하려고 몸이 달아 있는 것 같다. 초청장을 들고 평양으로 그녀를 ‘모시러’ 갈 움직임이 있다.
2. 그 여당족들은 김대중의 훌륭한 대일 외교에 대해 알기나 하고 무역전쟁을 일으키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3. 21년 전 김대중이 취임했던 해인 1998년은 한일 관계가 몹시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일본 정가에서는 심심치 않게 망언들이 나왔고, 김영삼은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 했다. 김대중은 이러한 적대적 한일관계를 화해의 관계로 전환했다. 김대중은 1998년 10월 7일부터 10일까지 일본을 국빈 방문했다. 그때 김대중은 목포상고 시절 은사인 무쿠모토 이사보로 선생을 영빈관으로 모셔서 반가운 해후를 한다. 김대중은 일본인 선생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한국말이 아니라 일본어로 인사를 한다. "센세이 와타시데쓰. 아노 다이주데쓰요." 옮기자면 ‘선생님 접니다. 대중입니다.’ 이런 뜻이다.
4. 다른 대통령이라면 한사코 감추고 싶어 했을 일제시대의 개인사를 김대중은 과감하게 드러냈다. ‘도요타 다이주(豊田大中)’로 창씨개명한 자신의 일본식 이름까지 그대로 공개했다. 이로써 김대중은 80객 은사에게 일본어로 인사하는 속 깊은 인간적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한국인은 고마운 일을 고맙게 여길 줄 아는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일본인에게 전달했다.’ ‘아니 일본 사람들이 지닌 뿌리 깊은 혐한의 감정과 불신의 마음을 조금씩 누그러뜨리고 우리 편으로 돌려세우는 작업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작했던 것이다.’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한국의 대통령인 그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우리 한국인의 다양한 감정을 잘 알고 있는 그가, 자신의 사소한 행동 하나가 정치적 반대파들에 의해 엄청난 친일적 행태로 비난받고 증폭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는 그가 참으로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우리 한국에 대한 신뢰의 감정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5. 바로 이런 김대중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우리는 아키히토 일본 천황이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고통’과 ‘사과’라는 표현을 해가며 사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바로 그런 김대중이 있었기에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공동선언문에 ‘통절한 반성’, ‘마음으로부터 사죄’라는 표현을 명기하며 읽어 내려갔던 것이다. . 그때 김대중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오부치 총리와 약속을 했다. 앞으로 두 나라는 정치인들의 망언에 대해 국가적 쟁점으로 비화시키지 말고, 두 지도자는 오로지 양국의 미래만 보고 나아가자고 했다."
6. 지금 문재인 정부는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해 보복 철회를 요구하고, 국제무역기구(WTO)에 제소하고, 국제여론전을 펼치려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모든 책임은 일본에 있고, 이제 대책은 기업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기조다. 한마디로 ‘초강경 모드’로 나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21일 일본 참의원 선거가 끝나면 풀릴 것이란 생각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신각수 전 일본대사는 그건 ‘오산’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미국의 중재를 바라고 있는 것 같은데 미국은 전략적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여권에서는 "의병을 일으키자" 같은 강경 목소리만 터져 나오고 있다. 답답하다. 문 대통령은 21년 전 김대중이 일본에서 했던 생각과 언행에서 배우는 바가 전혀 없는지, 이제는 완전히 잊었는지 묻고 싶다.
조선일보와 김광일은 김대중을 거꾸로 해석
1971년 49세가 된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유세도중 자기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당했던 교통사고를 박대통령 측이 저지른 암살음모라고 뒤집어 씌웠다. 김대중의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해 폭발시켜놓고 공화당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패하자 그는 신병 치료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1년,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김병식 부주석으로부터 20만 달러를 받았다. 1972년 10월 유신 계엄령이 선포됐고, 선포됐고 국회가 해산됐다. 이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 운동, 망명정부수립 운동,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시도 등 반국가적 행위를 감행했다.
1973년 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도록 미의회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자민당 출신이면서도 좌파의원인 우스노미야 의원 등 일본 국회의원들의 지원을 받는 한편 이른바 베트콩파로 알려진 곽동의 등 반국가인물들을 규합하여 1973년 8월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을 조직하여 자신이 의장으로 앉아 일본을 무대로 반정부 운동을 벌였다.
1973년 8월 8일, 그는 도쿄 팔레스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됐다.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 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했지만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 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을 해임하고,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고, 김종필 총리의 방일 사과 등으로 마무리됐다. 이로써 이 사건은 86일 만에 정치적으로 매듭 됐다. 하지만 1981.1. 대법원은 김대중은 한민통이라는 반국가던체 구성죄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1971~73, 3년 동안 일본에서 반국가활동을 해온 김대중은 자연 일본 언론과 기관에 많은 약점이 잡혀 있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난 일본의 언론인들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서도 일본의 언론인들에게 많은 공을 들였다고 전한다. 바로 이 점이다. 김대중이 일본에 가장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쓴 것은 그가 훌륭헌 외교가라서가 아니라 약점이 많이 잡혀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일본이 그의 목숨과 정치생명을 구해준 은인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전혀 무리한 생각이 아니라는 점은 아래 사례들에 잘 나타나 있다.
1989년 1월 9일, 일본에 충성 표시
1989년 1월 일본 왕 히로히트가 사망했고, 서울 일본대사관에는 히로히토 분향소가 설치돼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가지않는 일왕의 분향소를 김대중이 은밀히 찾아가 90도 허리를 숙여 조문을 표했다. 이 사실이 일본의 조야에 전달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이 공교롭게도 경영신문 카메라에 잡혔다.
독도 상납
이승만:1952.1.18.에 ‘리승만 라인’을 선포했고, 그 선 안에 독도가 있었습니다. 일본을 통치한 연합군최고사령부(SCAP)는 1946.1.29. 일본정부에 하달한 지시령(SCAPIN) 677호 3항에서 “일본 영토는 홋카이도, 혼슈, 큐슈, 시코구 등 4개 주 섬들과 약 1,000개의 주변 작은 섬들로 제한 한다”며 “‘웃즈로(울릉도)’, ‘리앙쿠트 락스(독도)’, ‘쿠엘파트(제주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시킨다”고 명시했습니다.
박정희:1965.6.22. 소위 구-한일어업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여기에서도 독도는 우리 땅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돈을 주는 대가로 일본이 또 독도를 거론했습니다. 1965. 5.17, 존슨 대통령은 방미중인 박정희를 만나 한일협정 진척을 축하하면서 독도를 일본과 공유하라, 공동등대를 설치하라 종용했습니다. 박정희는 이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미국이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지만(1965.6.15, 국무부문건 364호) 박정희는 장관급 회담을 거절하겠다며 맞섰습니다. 미국대사는 ”박정희는 그 무엇으로도 독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며 밀어붙이기의 불가능성을 본국에 보고했습니다.
김대중:1998.11.28. 독도를 포기하는 신-한일협정에 서명했습니다. 1999.1.6. 국회에서 토의도 하지 않고 여당의 날치기로 단숨에 통과시켰습니다. 1999.1.22.부터 발효됐습니다. 이 때 새로 그은 ‘배타적경제수역’(EEZ)에는 독도가 우리 땅이 아닌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로 인해 3,000여척의 쌍끌이 어선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선박 및 어구 제조업체들이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어민들은 통곡을 했지만 당시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그 어선들을 북한에 주자했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가 사라졌습니다. 국민이 독도를 방문하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도대체 김대중은 일본과 무슨 뒷일을 벌였을까요?
노무현: 그는 여당 부총재를 거쳐 2000.8.7.해양수산부 장관이 됐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냉엄한 국제 현실 속에서는 우리 주장만 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이에 당시 야당 의원들은 “장관은 한국 장관인가. 일본 장관인가” 이렇게 화를 낸 바 있었습니다. 반기문, 한덕수. 이정빈도 이들 편에 서서 일했습니다.
노무현은 또 2004.7.21. 제주도에서 고이즈미 일본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말했습니다. "다케시마 문제에 관해서는 좀 적당하게 얘기하고 넘어가겠다. 이런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재론하지 않겠다 이런 정도로 말씀을 드리겠다" 일본 시사통신은 7.22일 "일본과 한국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토문제에서 한국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일본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어수룩한 데가 있다, 잘하면 되겠다!” 이런 생각 안했을까요?
정동영: 1999년 당시 국민회의 대변인이었습니다. 그는 협정의 국회비준을 촉구하면서 이를 적극 찬성하는 논평을 연일 냈습니다. “한일어업협정은 독도 영유권 문제와 무관한 것인데 한나라당이 독도 수호를 끼워 넣어 장외투쟁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1997년 12월 5일, 북한 부주석 김병식이 보낸 편지
김대중 선생 귀하.
이번 대선의 큰 사업을 앞두고 분망하실 선생에게 따뜻한 인사를 보냅니다. 그 동안 어려운 길을 걸어온 선생의 오랜 소망과 뜻이 성공의 빛을 보게 된다고 생각 하니 선생과 협력해오던 지난날이 회억 되면서 감개무량 함을 금할수 없습니다. 선생과 처음으로 상면 하던 때가 엊 그제 같은데 벌써 26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요즘 텔레비죤 화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1971년 가을 일본 도꾜 플라쟈 호텔에서 서로 뜨겁게 포옹 하던 때가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물론 약소 하였습니다. 선생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20만 딸라 밖에 보탬 해 드리지 못한 것 지금도 괴롭게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을 오늘의 성공에로 이르도록 돕는데 밑 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보람을 찾습니다. 선생이 어느 회합에서 말씀 하셨지만 조국 통일의 앞길에는 의연히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지금에야 말로 이남에서 자주적인 민주 정권이 서야 북과 남이 민족 주체적 힘으로 통일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때이라고 간주 합니다. 나는 선생이 대선에서 꼭 승리 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선생과의 상봉을 확약 하면서 옥체 만강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주체 86 (1997년)12월 5일 평양에서
조선 사회 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병식
결 론
조선일보는 김대중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김대중을 띄우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래와 같은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전혀 무시한 채 김대중을 위대한 대일외교의 영웅인 것으로 띄웠다.
1) 김대중이 1971~73까지 일본을 무대로 하여 북한과 결탁한 대규모의 반국가단체를 만들고 반국가활동을 벌이는 동안 일본에 많은 약점을 잡혔을 것이라는 의혹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2) 김대중은 일본에 잘 보이기 위해 1989년 1월 9일, 아무도 찾지 않는 일왕 분향소를 몰래 찾아가 90도 절을 했다는 사실도 빼놓았다.
3) 대한민국만의 배타적 수역인 독도를,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아무런 명분 없이, 국내어업을 희생시키면서 일본과의 공동수역으로 내주었다. 개인이 진 빚을 국토로 갚은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조선일보는 이것도 빼놓았다.
4) 1973년 8월 8일, 바다의 고기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김대중, 영원히 매장될 수밖에 없었던 김대중을 구해준 은인이 일본이다. 조선일보는 이것도 뺐다.
5) 이런 엄청난 약점과 빚 때문에 일본에 아부한 것을 놓고 조선일보는 김대중을 위대한 대일 외교의 영웅이었다고 추켜올렸다.
2019.7.1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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