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에 토론결투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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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6-09 15:53 조회5,5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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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에 토론결투 신청
정규재가 조갑제를 노골적으로 편들고 나섰다. 그 옆에 있는 김진도 마찬가지다. 김진은 한 때 조갑제 편을 들더니 요사이는 5.18에 대해 좀 잠잠해진 모양이다. 조갑제와 정규재는 며칠 전 뉴스타운tv에서 펼쳐진 조원룡 변호사와 박명규 박사와의 90분간 대담에서 상식과 지식의 기반이 일천한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Gl6QGIbBq3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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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가 말한 것을 직접 간접으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북한군 600명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갔는지 상상이 안 가기 때문에 600명을 믿을 수 없다.
2. 12.12는 분명한 쿠데타다. 따라서 5.18은 민주화운동이고, 북한군은 개입하지 않았다.
3. ‘까까’ 해서 가기만 하면 끝날 일을 가지고 왜 시끄럽게 구느냐.
반 론
1. 제1항에 대한 반론
1) ‘600명’이라는 숫자는 내가 지어낸 숫자가 아니라 검찰기록, 안기부기록, 상황일지에 있는 기록이다. 이들 문헌들에는 이들 600명이 수행한 활동내용들이 기록돼 있다. 나는 단지 이들 활동 내용들을 눈에 보이도록 잘 정리했고, 정리해놓고 보니 이들 활동들은 절대로 광주의 부나비들이 벌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는 해석을 했다. 판사가 살인현장에 없었으면서도 사형선고를 내리듯이 나도 판사처럼 판단한 것이다. 광주현장에서 쏟아져 나온 현장사진들에는 활동성격이 담겨있고, 주역을 담당한 어깨들의 모양과 자세가 담겨있다. 나는 이들이 절대로 광주 7~22세에 이르는 아이들과 양아치, 구두닦이, 껌팔이, 공돌이, 식당보이 등 천대받던 계급이 취할 수 있는 자세, 취할 수 있는 적전내용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2) 광주폭동은 광주의 희생자들과 처벌받는 사람들이 일으킬 수 있는 성격이 것이 아니었다. 사망자와 산 유공자의 정체를 분석해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사망한 154명의 연령 분포>
5.18기념재단에는 “사망자현황”이 있다. 총 166명이 기록돼 있고, 그 중 8명은 신원 불상으로 처리돼 있다. 그리고 이 5.18유공자 중에는 5월 20일, 버스에 깔려 사망한 함평경찰서 직원 4명(1942~43년)이 있다. 따라서 순수한 광주시민 사망자는 154명이다. 1960년생 이하는 60명, 1959년생 이상은 94명이다. 20세 이하가 40%, 21세 이상이 60%인 것이다. 여기에서 59년생은 9명, 58년생이 3명이다. 22세 이하의 젊은 사람들이 72명, 그 이상이 92명인 것이다. 비율로 보면 47% 대 53%다. 대략 주먹구구로 보아 절반은 22세 이하이고, 또 다른 절반은 그 이상의 연령대라는 것이다.
<154명의 직업 분포>
직업을 보면 어린이, 학생, 공원, 페인트공, 프레스공, 오토바이정비공, 가사 돕는 여성, 목공, 운전, 주점, 재수생, 방직공원, 가정주부, 농업, 판금공, 주방장, 미장공, 상업, 다방주방장, 주점, 식당보이, 이용사, 연탄배달원, 농아, 목공, 타일공, 행상, 공원, 구멍가게, 야채상, 노동, 보일러공, 기공사공원, 한약방점원, 표구점점원,당구장 점원, 방위병, 문방구점원, 사원, 선반공, 판화기능공, 샷슈공, 여관종업원, 재개공, 페인트공, 양계장종업원 등등이다. 여기에서 생략된 직업은 없다. 이들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산화한 특급 유공자라는 것이다.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이자 노동자교육센터 부대표인 박준성은 2005년 9월 5일 인터넷(http://blog.naver.com/logosist/17006521)에 “광주항쟁의 주역은 바로 노동자였다”는 제하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 . . 1980년 ‘민주화의 봄’을 이끌던 지도부가 광주를 빠져나간 뒤 광주를 지키며 끝까지 싸웠던 이들은 노동자, 농민, 기층 민중이었다. 사망자 162명의 직업분포를 보면 노동자가 가장 많은 35명, 학생이 31명, 무직이 23명, 불명 17명, 사무직 13명, 자영업 12명, 운수업 및 운전기사가 12명, 서비스직 11명, 농업 4명, 공무원과 방위병 각 2명이다. 학생사망자에는 대학생보다 초중고생과 재수생이 더 많다.”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17권 65쪽에는 5.18 주역이자 평민당 국회의원이었던 정상용의 회고가 들어 있다. 근 계엄 군법회의 제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자다.
“5.18의 기동타격대 구성원은 그 80%가 17살에서 22살 사이의 청년이었고, 대부분이 학생이 아닌 도시근로자, 노동자, 점원, 실직자, 구두닦이, 품팔이, 식당 종업원 등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기층민중이며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다. 지금까지는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말을 썼지만 나는 5월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위 정상용의 회고는 1982년 3월 15일 육군본부가 발행한 ‘계엄사‘(戒嚴史)의 분석과 일치한다. 계엄사 134쪽에는 극렬시위의 전위대들이 불량배, 구두닦이, 넝마주이, 공장근로자, 전과자, 무직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군법회의 피고인들의 정체>
계엄사 354쪽-367쪽에는 광주사건 수사기록 통계자료가 나와 있다. 광주사태 관련자 2,518명을 조사한 결과 1,957명은 훈방조치하고 561명이 검찰로 송치되었다. 1980.9.5-10.24간 제1심이 열렸고, 80.12.8-12.24에 제2심이 열렸다. 제1심 피고인 수는 모두 357명, 이들은 사형에서부터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까지의 형을 받았다.
위 1심 피고인 357명을 연령별로 뜯어보면 10대가 71명으로 20%를 차지했고, 20대가 216명으로 61%를 차지했다. 10-20대가 81%를 차지한 것이다. 나머지는 30대 36명, 40대 23명, 50대 6명, 60대 5명으로 집계된다. 이들 357명중 학생은 80명으로 23%에 해당했다. 학생 80명을 뜯어보면 10대 고교생이 16명, 20대 대학생이 60명, 30대 복학생이 4명이었다. 학생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의 직업을 보면 참으로 다양하다. 이들의 직업은 주로 하층 계의 직업들로 무려 59종에 이르며 직업별 구체적인 숫자는 아래와 같다,
학생80 농업30 무직27 운전수24 종업원21 노동13 방위병13 교수11 목공11 상업9 공업7 회사원6 양화공5 용접공5 행상4 미장공4 광부4 목수4 선원4 교사3 변호사3 재수생3 보일러공3 교직원3 인쇄업3 조수3 운수업2 샤시공2 제과공2 석공2 신부2 자개공2 가구공2 회사이사2 재봉사2 정비공2 실내장식1 약사1 개찰원1 다방1 전기공1 변호사사무장1 서적판매원1 세공1 도자기공1 의사1 이발사1 양복점1 엿장수1 건재상1 신문보급소1 당원1 청과물상1 불럭공1 매점1 대학이사1 회장1 화가1 가톨릭회장1(서경원)
학생80. 교수11, 교사3, 변호사3, 교직원3, 신부2, 이사3, 의사1.회장2. 화가1 약사1 등 110명을 제외한 나머지 247명(70%)이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소요를 주도했거나 적극 가담한 광주인들 중, 사망한 사람들과 중상을 입은 사람들은 재판을 받지 못했다. 성한 몸으로 재판을 받은 사람들이 357명이며, 이들 중 90% 정도가 10대와 20대 그리고 하층계급(민주화 측 용어로는 기층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광주소요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상용 전의원(30. 사원, 무기형)이 기술한 바와 같이 5.18광주폭동은 소외받고 천대받던 젊은이들의 한풀이의 장이었다. 5.18의 영웅은 30명에 불과한 7개조의 기동타격대이고, 그 영웅들의 80%가 17살에서 22살 사이의 노동자, 점원, 실직자, 구두닦이, 품팔이, 전과자, 넝마주이, 식당 종업원 등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기층민중이기 때문에 소위 진보계 사람들은 광주사태를 민중항쟁이라고 부른다. 이들 10-20대와 기층세력이 바로 대한민국을 민주화시킨 열사요 영웅이라는 것이다. 기동타격대장은 19세의 구두공 윤석루이고 그는 1심에서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윤석루(20)-자개공, 이재호(33)-회사원, 이재춘(20)-방위병, 양기남(19)-샤시공, 임성택(17)-양복공, 구성회(16)-양화공, 오정호(33)-식당종업원, 박승렬(20)-레코드사, 박명국(18)-양화공, 김상규(19)-전파사, 박영수(18)-도자기공, 안성옥(19)-목공, 김두전(19)-재수생, 정광호(20)-타일공, 염동유(23)-다방, 이성주(18)-차량조수, 김공휴(19)-나전칠기공, 남승우(19)-삿슈공, 도준식(23)-식당종업원, 남영관(18)-농업, 박홍식(21)-목공, 김기광(18)-고3, 박인수(21)-노동, 김여수(20)-용접공, 나일성(18)-가구공, 김태찬(19)-석공, 김행남(16)-노동, 김재귀(16)-고2, 영용섭(19)-나전칠기공, 장승희(19)-양화공.
<2일천하 갑론을박하다 진압당한 1급 유공자들 정체>
이들 357명의 제1심 피고인들 중 사형과 무기를 받았던 사람들이 유공자 등급(1급~14급)중 가장 높은 등급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김창길(온건파 초기 학생수습위원장, 김종배(사형, 항쟁사령관), 정상용(무기, 외무위원장), 허규정(무기, 내무위원장) 박남선(사형 상황실장)이 5.18항쟁증언자료집-시민군들의 구술-(전남대학교 출판부2003)에 증언한 내용의 전체집합은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한마디로 이들은 5.24. 도청을 점령했던 북한군이 사라지자 24일부터 도청으로 한 사람씩 들어가 25~26일 동안 갑론을박하며 다투고 싸우더 진압당한 존재들일 뿐, 계엄군과 싸운 실적도 없고, 민주화에 기여한 실적도 없는 개넘없는 존재들이었다.
“수습위원회는 학생들이 다 도망갔고 일반인들로 채워졌다. 시민군조직들은 모두 자생적인 조직이었고, 도청에서 통제할 수 있는 조직은 없었다. 23일부터 무기를 회수하러 다녔다, 윤상원 정상용 등은 5월 24일 오후에 도청에 들어왔다. 예비군을 모아가지고 본격적으로 투쟁해보자 작정한 날이 5월 25일이었다. 이날 기동타격대를 조직한 사람은 자개공 이재호였고, 기동타격대장을 한 사람은 윤석루(19, 구두공, 무기징역)였는데 그는 어리고 뭐 잘 모르는 아이였다. 도청발포 이후 21일 오후에 총이 나왔다. ‘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곧 항쟁지도부였다. 이는 5월 25일 오후에 급조된 조직이었다. 5월 19일부터 윤상원 등과 녹두서점에서 대책을 상의하다가 21일 총소리가 나자 각자 도생하자며 보성기업으로 도망쳤다가 22일 YWCA에서 다시 만났다. 운동권들은 5월 18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다 잡혀갔기 때문에 운동에 대해 전혀 개념이 없는 사람들만 모였다. 국장급처럼 보이던 사람들(북한군) 은 24일 도청을 빠져나갔다. 주도자도 리더도 없었다. 도청을 군인들로부터 빼앗은 사람들은 우리더러 도청에 들어오지 말고 나가라 했다. 높은 관료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맨날 회의를 했지만 방법은 안 나왔다. 어른모임 따로, 학생모임 따로 일반모임 따로 제각각이었다. 통제도 안 되었고, 콩가루 식이었다. 나는 밖에 가서 소주를 마시고 다시 왔다. 운동권들은 다 도망갔다가 5월 23~25에 돌아왔고, 지식인들은 수습대책이나 만들어 가지고 얼굴 세우는 일만 했다. 앞장 선 사람들은 식당종업원 구두닦이 들 뿐이었다.”
3) 광주시위를 조직한 사람, 지휘한 사람 광주에 없다.
4) 북한의 5.18(영화, 기념행사, 5.18로 시상, 대남공작사 기록)
제1항의 결론
국가 문헌에는 세계 최정상급 용병이나 주도할 수 있는 작전내용들이 기록돼 있고, 그 작전내용을 600명의 학생집단이 주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정보관들은 이 600명이 주도한 작전내용에 대해 북한의 게릴라 전쟁이라는 해석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의 정보관들은 광주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성분, 1심에서 피고인 신분이었던 357명의 성분, 5월 25~26일 도청에 콩가루처럼 각자 들어왔던 부나비들의 성분을 분석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분석요소는 시위대를 조직한 사람, 지휘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5.18은 광주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분석은 그야말로 처삼촌 벌초하기였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국가기록만으로도 북한군 600명이 게릴라전을 했다는 판단이 나온다. 나는 연구를 해서 북한군 600명 개입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냈지만 정규재는 “600명이 어떻게 왔다 어떻게 사라질 수 있느냐, 600명은 허구다” 이런 말을 한다.
나는 현장에 있었던 600명을 문헌으로 확인했다. 그런데 국가기록에는 정규재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갔는지? 이에 대해 나는 군사전문가이기 때문에 추측을 할 수 있다. 600명이 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고, 사라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정규재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나는 군사전문가이지만 정규재는 군사전문가가 아니다. 나는 어떻게 침투했고,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철수했는지에 대해 그 시나리오까지 썼다. 하지만 정규재는 이 모두를 부인한다.
정규재가 가장 웃기는 것은 “강도를 당한 것이 사실인데, 그 강도가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 나갔는지 밝히지 못하면 강도당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규재는 여기에 대해 나와 토론해야 한다. 뒤에서만 이상야릇하고 비겁하고 음흉하기까지 한 웃음을 지으면서 횡설수설하는 것은 그가 남 앞에 설만큼의 신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2. 제2항에 대한 반론
정규재는 말했다. “12.12는 분명한 쿠데타다. 따라서 5.18은 민주화운동이고, 북한군은 개입하지 않았다.” 12.12는 분명히 구데타다? 연구를 안 해 본 사람은 보도내용들과 그 보도내용을 상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통설을 믿는다. 정규재는 늘 현 언론들을 향해 가짜뉴스 공장이라 통렬히 비난해왔다. 그런 그가 언론을 믿는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정규재는 또 판사들, 검사들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12.12에 대해서만은 검사도 믿고 판사도 믿겠다 한다. 어느 것을 믿느냐는 자유이지만 적어도 방송매체의 운영자라면 일관성은 유지해야 한다. 나는 12.12 당시 중령이었다. 나는 전두환이 12.12를 주도한 것을 높이 평가해왔다. 12.12가 없었다면 아마도 김재규-정승화의 쿠데타가 진행됐을 것이다.
설사 12.12가 전두환의 쿠데타라 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광주에 북한군이 침투하지 말라는 법은 어디 있는 것인가? 전두환이 1979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1980년 5.18 때에는 대통령이 돼 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전두환은 5월 당시 2성장군이었다. 전에 한번 정규재는 1980년 5월에 전두환이 이미 대통령에 앉아있었다고 강의를 했다. 전두환이 대통령에 오른 날짜는 1980년 9월 1일이다. 역사에 대해 일말의 공부도 없는 인간이 세상을 혼자서 다 아는 체 하는 꼴 차마 불쌍해서 못 봐줄 정도다. 결론적으로 전두환이 쿠데타를 했다고 해서 광주에 북한군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서로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정규재의 무식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3. 제3항에 대한 반론
정규재는 “‘까까’ 해서 까기만 하면 끝날 일을 가지고 왜 시끄럽게 구느냐”는 말을 했다. 정규재에 물어보자, 1) 만일 까라고 줄기차게 시위하면 저들이 까겠는가? 2) 까면 무엇이 나오는 것인가? 3) 무엇이 나오면 무엇이 끝난다는 것인가? 저들이 까든 안 까든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모두가 사기라는 것을. 까면 가짜 유공자 진짜 유공자가 가려진다는 것인가? 정규재에 물어보자. 북한군 개입이 증명된다 해도 광주폭동만큼은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묻자. 연구결과에 대해서는 연구서를 읽고 난 다음에 의문이나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그런데 정규재는 연구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연구 분야 밖에서 연구내용을 부정한다. 더구나 연구내용은 북괴의 소리 없는 남침에 관한 것이다. 연구를 했다면 연구내용에 대해 학자적 자세로 토론을 해야 신사다. 그런데 정규재는 무슨 이유로 매우 옳지 못하게도 마타도어 방식으로 북한군 개입을 숨겨주려 하는 것인가? 논리 없이 하는 짓이라면 간첩질이 아닐 수 없다.
결 론
1. 정규재는 이유 없이 나와 토론을 해야 한다. 많은 애국국민들은 이 토론을 반드시 성사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2. ‘까’ 집회에 대하여 나는 최근 위험한 냄새를 맡고 있다. 단지 광주지역, 전라도 지역이라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는 전라도 사람들을 선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타 지역에까지 확산하는 것은 5.18의 진실을 덮을 수 있다. 이 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은 안정권과 김상진 등이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영혼을 믿고 양심을 믿는다. 그러나 객관적 평가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안정권 그 사람 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좋은 사람이고 좋은 일 한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떤 시스템 속에 속해 있느냐를 따지고 있다. 첫째 그는 5.18을 거룩한 민주화운동이라고 천명한 이희범과 팀워크가 돼 있다. 안정권이 이희범에게 지만원의 우려를 전했다 한다. 이에 이희범은 “까 집회는 지만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 했다고 한다. 둘째 안정권이 정규재와 라인이 형성돼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까” 집회는 1) 정규재-조갑제 집단이 추구하는 북한군 배제운동에 지대한 도움을 주고 있다. 2) 5.18진실을 전국민에 알리는 방법은 오로지 학습이다. 이것은 기나 긴 여정이다. 학습만이 대안인 이 진실알리기 운동에 “까”운동은 방해가 된다. 헛꿈, 불로소득-일확천금의 꿈을 선동한다는 것이다. 당장 정규재가 “까”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며, 전국적인 학습운동에 재를 뿌리고 있지 아니한가? 안정권은 이희범과 정규재의 도구가 돼 있다는 것이 내 관점이다. 깟다고 하자, 드러나는 현상이 무엇일까? 다 사기꾼들이고, 도둑놈들이 아니겠는가? 저놈들은 5.18을 성역화하기 위해 호위무사 병력을 100만으로 양성해야 한다. 그래서 유공자를 많이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 막아야 한다. 국민에게 이걸 알려야 한다. 5.18을 성역화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공산공화국을 만들기 위해 유공자를 마구 늘리고 있다는 점을 국민에 알려야 하는 것이다. 이는 ’까‘를 소리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2019.6.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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