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특수군 증거, 600명 증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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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5-30 22:38 조회5,75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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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특수군 증거, 600명 증거 (1)
I. 기초개념
위법성에 대해
1. 연구목적: 저 지만원은 19년 동안 5.18을 집중 연구해왔으며, 연구목적은 현대사 중 가장 중요한 역사를 학자적 양심에서 규명하자는 것이었고, 광주사람들 개개인의 명예를 훼손하고자 19년의 인생을 가시밭길에 던지지는 않았습니다.
2. 연구결과: 5.18은 북한특수군 600명과 그들의 작전을 돕고 별도의 정치심리전을 수행하기 위해 약 1,000명 내외로 추산되는 별도의 남녀노소 게릴라 부대가 동원되어 일으킨 게릴라전이었습니다. 전남 일대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게릴라 작전에 동원된 사람들은 약 20만 명으로 추산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위를 조직한 사람이 한국에는 없습니다. 시위를 지휘한 사람도 한국에 없습니다. 북한에서 5.18영화(‘님을 위한 교향시’)가 제작됐고, 남한에서도 10여개의 영화가 제작되었지만 남북한 영화를 통 털어 지휘자는 없었습니다. 오로지 공수부대를 모략하는 내용들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지휘자 없는 20만 시위가 이 세상 어디에 존재할 수 있습니까? 북한은 왜 5.18을 무기삼아 남한을 이토록 모략하는 것입니까?
3. 법적 처벌성: 한 학자가 오로지 공익을 위해 학술연구를 한 것은 법적인 제재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는 5.18을 성역화하려는 이념집단이 언론을 장악해 가지고, 5.18을 성역화하기 위해 “5.18은 오로지 민주화운동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7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요지의 법률까지 제정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독재입니다. 이 지구상의 수억만의 역사들이 존재하겠지만 그 어느 나라도 특정 역사사건 하나를 지정하여 “이 역사사건은 해석이 종결되었으니 다른 해석을 하면 처벌한다”며 국민을 윽박지르는 나라는 없습니다. 민주주의 국가, 문명권의 국가에서 학술연구를 처벌하는 나라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아무런 근거 없이 “광주에 북한군이 왔다”라고 단순히 주장 차원의 말을 하려면, 무엇 때문에 18만 쪽의 수사기록 속에 파묻혀 살았겠습니까? 저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상식 차원의 ‘의견’을 표명한 것이 아니라 22개 이상의 증거들을 찾아내서 역사의 진실을 밝힌 것입니다. 이를 놓고 법이 처벌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북한군개입여부’에 대해 조사하고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국방부에만 있습니다. 그런데 국방부는 2019.2.12. 정식으로 입장을 밝혔습니다. “국방부는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해 이제까지 아무것도 확인한 바 없으며 그것은 앞으로 규명위원회가 밝혀야 할 사안이다.” 또한 1988년의 ‘광주특위’, 2005년의 ‘국방부과거사위’, 2017년의 ‘국방부특조위’가 형성되어 규명작업을 벌였지만, 그 어느 규명과정에서도 ‘북한군’을 [규명범위]에 포함시켜 본 적이 없습니다. [규명범위]에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규명하지 않습니다. ‘북한군개입여부’를 규명하라는 항목이 [규명범위]에 들어간 것은 오로지 2018.3.13. 제정된 ‘5.18진상규명특별법’ 하나뿐입니다. 팩트가 이와 같음에도 이 나라 언론들은 5.18성역을 지키는 호위무사 역할을 자임하면서 “북한군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 이미 규명됐다”며 지만원을 처벌하라 마녀사냥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는 지금 문명사회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사회가 심각한 수준의 정신병에 걸려 있습니다.
왜 혼자 짐을 지고 있는가?
5.18의 진실을 밝히려면 1995~97의 수사 및 재판 기록 18만 쪽부터 분석해야 합니다. 물어보십시오. 트럭 두 대 분의 서류에 묻혀 그 내용들을 분석하겠다 나선 사람 있었습니까? 5.18호위무사 세력으로부터의 공격을 감당하려 나선 사람 있었습니까? 언론들로부터 집중 몰매를 맞을 각오를 한 사람 있었습니까? 그 다음은 북한이 쓴 대남공작 역사책들을 분석해야 합니다. 통일부가 발간하는 북한자료도 연구해야 합니다. 이런 일 하고 싶다 나선 사람 없었습니다. 광주의 5.18유공자들이 내놓은 증언집들도 살펴야 합니다. 이런 연구를 감히 시도한 사람 있었습니까? 남이 못한 일, 남들이 엄두조차 내지 못한 대업을 이룩해냈다면, 박수를 쳐주고 격려의 함성을 보내 주어야 제대로 된 국가사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 사람들은 남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업을 이룩한 사람을 가운데 놓고, 집단으로 돌을 던집니다. 이런 사회가 건전한 사회인지,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싶어하는 그런 이상의 사회인 것인지 국민모두에 묻고자 합니다.
5.18역사는 이해당사자들이 살아있는 ‘당대사’(Contemporary History)입니다. 당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이해당사자들로부터 목숨까지 빼앗길 수 있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일대 모험입니다. 이런 연구를 하겠다고 달려들 배포 있는 학자는 없었습니다. 수십 년이 필요한 이 방대한 연구를 하겠다고 감히 달려든 학자도 없었습니다. 이 나라 역사학자들은 제가 고혈을 짜내 쓴 역사책마저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읽어서 목소리를 내 봐야 이념세력으로부터 마녀사냥을 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 되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그 누가 돈 생기지 않는 일, 집단 이지매 당할 수 있는 일에 나서려 하겠습니까?
그러면 저는 누구이기에 이런 돈키호테가 되었겠습니까? 첫째, 진정한 의미의 과학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번 물면 풀릴 때까지 탐구하는 DNA, 그것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없는 수학공식과 수학정리 다수를 발명한 사람이면 전 세계적으로 “지독한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둘째, 저는 2008년 문근영을 이용해 빨치산을 선전하고, 그것을 이용해 큰돈을 모으려는 불순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몰매 맞는 줄 뻔히 알면서 의표를 찔렀고, 그 후폭풍을 다 감수했습니다. 세월호를 이용한 시체장사를 할 것이라는 의표를 찔러 또 공격을 당했습니다. 저는 왜 손해 보는 ‘바보 짓’을 했을까요?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저는 왜 1998년 김대중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내 저를 장관시키려는 것을 거부했겠습니까? 2000년 새한국당 부총재 홍사덕이 제게 3차례나 찾아와 전국구의원이 돼 달라 하는 것을 뿌리쳤겠습니까?
저는 돈이나 사회적 지위보다는 창작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지위나 돈에 가치를 두었다면 절대로 20년 가까이 매력 없고 고통만 많은 이런 연구,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합하겠습니다. 저는 현대판 갈릴레오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5.18연구에 쌓아올린 상아탑은 절대로 무너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돈보다 그리고 일시적으로만 반짝하다 마는 사회적 명예보다 덜 한 것입니까? 미녀 배우 ‘오드리 헵번’의 아프리카 봉사를 무엇으로 생각하십니까? 자기 목숨 버리면서 타인들의 목숨을 지켜준 이 나라의 유수한 국민들의 선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국당 이종명 의원도 그런 의인입니다. 육사16기 강재구 소령도 그런 의인입니다. 의인들은 세월호에서도 나오지 않았던가요? 오드리 헵번은 되고, 강재구도 되고, 이종명도 되는 데, 어째서 지만원은 안 된다는 것입니까? 서기 1,600년대에 이태리에서 태어난 천체과학자 갈릴레오는 되고, 2000년을 걸쳐 있는 이 지만원은 왜 새로은 발견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북한군 개입’에 대해 의인 이종명 의원과 함께 제가 같은 이유로 탄압받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 나라 세도 실세들은 도대체 무슨 영혼의 소유자이기에 이리도 짐승들 같이 행동하는 것입니까?
이 파일은 북한군이 5.18광주에 왔고, 그것도 특수군 600명이 왔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22개의 핵심 문헌 및 사진증거들을 요약한 것입니다. 저는 육사를 22기로 졸업하고 베트남에 파병되어 소위에서 대위에 이르는 44개월 동안의 대게릴라전을 수행한 후, 학비가 스탠포드의 2.5배였던 미국의 귀족학교 미-해군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와 응용수학박사를 획득하고 이 세상에 없는 수학공식 2개, 수학정리 6개, 미해군함정이 출항할 때 싣고 가야 할 부품별 수리부속 적정량을 계산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발명한 전설의 인물로 회자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방대한 5.18 연구를 신뢰성 있게 연구할 충분한 자력을 갖춘 사람인 것입니다.
전두환내란사건 수사 및 재판자료 18만쪽, 누가 읽고 정리하나
저는 남들이 구할 수 없고, 구할 엄두조차 내지 않았던 ‘전두환 내란사건’에 대한 수사 및 재판기록 18만 쪽을 전두환 측 변호인으로부터 빌렸습니다. 그 방대한 기록들을 사무실에 진열해 놓고 18년 동안 연구했습니다. 이 내용을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라는 1,720쪽 4권에 정리하는 데에도 꼬박 6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두 9권의 5.18역사책을 썼습니다.
북한의 대남공작역사 문헌, 접근하기도 해석하기도 쉽지 않은 존재
이 4권짜리 역사책이 발간되자마자 5.18단체 사람들이 2009년에 저를 또 고소했습니다. 안양법원에서 1심 재판을 3년 동안 받았습니다. 재판장에게 대외비로 분류된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을 복사할 수 있도록 통일부에 협조공문을 보내달리 요청했고, 매우 고맙게도 재판장이 이를 들어주었습니다. 북한이 남한의 모든 시위를 주관했다는 것을 사실로 믿게 하는 10여권의 대외비 북한자료들을 복사했지만, 이 들 중 특히 5.18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책은 1982년에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문들의 투쟁’과 1985에 조선노동당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입니다. 이 책들에는 북한의 전문 심리전 기록요원들이 광주 및 전남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발행한 모든 상황들이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광주시위의 시위전략과 시위전술 그리고 차기의 성공을 위한 3대 교훈까지 기록돼 있습니다.
이 내용들은 광주시위대도 몰랐고, 계엄군도 몰랐습니다. 게릴라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읽으면서도 무슨 뜻인 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전문내용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크고 작은 각 시위대를 어떻게 연결하였는지, 시위대 상호간의 연결과 배합을 어떻게 했는지, 각 시위대에 전투서열을 어떻게 지정하고 공격서열을 어떻게 지정하였으며, 시위대를 포위한 경찰을 ‘역포위’ 방법으로 혼비백산시키는 방법으로 시위의 주도권을 틀어쥐었다는 등에 대한 소상한 게릴라 전략-전술이 기록돼 있습니다. 심지어는 가로수를 들이받고 정지한 버스차량 번호가 ‘광전교통 전남 5에이3706’호라는 정도로 기록돼 있습니다. 공수부대가 소단위로 행동할 때의 공격전술과 대부대로 활동할 때의 공격전술을 달리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북한이 5.18을 매년 북한전역 시-군-도시 단위로 성대하게 거행한다는 통일부 주간 북한정세보고서
통일부의 ‘주간 북한정세보고서’에는 “해마다 5월이 되면 북한이 평양을 선두로 하여 전 지역의 시-군-도시 단위에서 5.18기념행사를 성대히 거행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습디다. 북한에서 최고인 것들에는 5.18을 영예의 상징으로 하사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1989~91 김일성은 친히 황석영과 윤이상을 불러 북한판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하여 해마다 방영해 주고 있습니다. 황석영은 시나리오를 썼고 윤이상은 배경음악을 깔았습니다. 이 모든 자료와 영상들이 통일부 자료센터에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5.18을 광주에서만 간단하게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해마다 북한 땅 전역에서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북한의 5.18행사와 남한의 5.18행사 사이에는 규모의 격차가 존재하고 그 격차는 가히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북한에서 이렇게 전역에서 행사를 하는 것은 5.18이 거의 유일하다고 합니다. 남한에서는 2007년 처음으로 5.18영화 ‘화려한 휴가’를 개봉했지만 북한은 그보다 17년 전인 1991년에 개봉하였습니다. 북한의 영화에서나 남한의 영화에서나 공통으로 두드러진 현상은 영화의 주인공들이 지휘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북한의 영화도 남한의 영화들도 다 같이 웅변합니다. 5.18의 지휘자가 남한에는 없다는 선언문인 것입니다. 북한이 정신 나간 집단이 아닌 이상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이토록 대남공작 역사서에 소상히 기록하고, 황석영과 윤이상까지 불러다 5.18영화를 만들어 온 주민에게 강제로 보게 하며, 노동생산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모든 지역의 주민들을 5.18행사에 동원하는 행사를 끈질기게 매년 하고 있겠습니까?
5.18은 게릴라전
저는 북한군이 5.18을 주도했다는 학문적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600명이라는 숫자를 노출시켰습니다. 이 600이라는 숫자는 제가 광수를 세어서 판단해낸 숫자가 아니라 남한 및 북한 당국들의 문헌에 똑 같이 “600”으로 기록돼 있는 숫자입니다. 문헌연구가 끝난 시점은 2014.10.25.입니다. 그날 저는 “5.18분석 최종보고서‘를 발행함으로써 5.18연구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8개월이 지난 2015.5.5.부터 네티즌들의 착안으로 광수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장사진들을 보면 눈이 예리하고 동작이 민첩하고 자세가 단련된 특수군 600명을 위장시키고, 국가를 살인집단으로 모략하기 위한 ’시체팔이‘의 심리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수많은 남녀노소 게릴라 요원들이 그 2배 정도의 숫자로 동원됐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광주에 오려면 대형 선박이 전남지역을 자유롭게 왕래하였다는 판단이 추가되었습니다. 당시 합참의장 유병헌 대장의 회고록을 보면 5.18 직전 영광~목포 해안을 방어하던 해군 및 육군 경비부대를 전라북도 변산반도 이북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군번 1번 이형근 대장이 ’10대불가의‘를 후대에 남겼습니다. 6.25 전쟁직전의 군을 간첩이 지휘했다는 데 대한 10가지 미스터리인 것입니다. 5.18직전에도 유사한 이적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합니다.
본론 이전에 국민 모두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
1. 일명 ‘조갑제 이론’에 대하여: “600명이 왔다면 어느 통로로 왔는지 밝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수사관이 이렇게 묻습니다. 조갑제 이론이 널리 확산돼 있는 것입니다. 주지하시다시피 조갑제는 “당시 대한민국은 완전 밀봉돼 있었다. 북한군이 단 1명이라도 왔다면 내가 목숨 내놓겠다, 600명이 어떻게 들키지 않고 왔으며, 왔다면 계엄군과 전투를 했어야 했는데 왜 계엄군 중 사망한 사람이 겨우 23명뿐이냐? 그 23명 중에는 국군끼리의 오인 사격에 의한 사망자가 11명 있지 않느냐?” TV에 수도 없이 나와 강조했습니다. 5.18측 사람들은 “그것 봐라, 우익의 최고봉인 조갑제 선생도 이렇게 말하지 않느냐?”
600명의 통로를 밝히라 닦달하는 수사관에게 저는 말합니다. “선생님, 제가 집에서 자다가 강도를 당했습니다. 이는 팩트입니다. 그런데 수사관 선생은 '강도가 어느 통로로 들어왔느냐, 그걸 대지 못하면 당신은 강도를 맞은 것이 아니다' 이렇게 다그칩니다. 강도를 당한 것은 팩트인데 강도가 침입한 통로를 대지 못한다고 팩트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생사람 잡을 수사관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군사전문가입니다. 1990년 10년 동안에는 이 나라에서 오로지 저 한사람만 군사전문가로 통했습니다. 제 판단으로는 600명이 들어온 방법과 통로는 여러 가지로 혼합돼 있습니다. 10.26 하루 후인 10.27. 북한은 ‘폭풍명령’을 내려 남침 준비명령을 내렸습니다. 13명씩 타는 잠수정들을 여러 달 동안 이용했을 것이고, 태백산으로는 20-30명 단위의 소부대로 침투해 주로 양아치 신분으로 위장해 광주시내 곳곳을 정찰하였을 것입니다. 해안교두보가 확보된 다음에는 대형선박들로 자유롭게 왕복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 판단입니다. 지역주민들과 탈북자들 가운데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간첩 손성모는 문경에서 체포되었고, 5.18때 간첩들에 길을 안내했다는 이유로 종신형을 받았습니다. 법관이 이런 제 해석을 틀렸다고 죄를 부과할 수 있겠습니까?
2. 지만원을 처벌할 수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만일 제가 아무런 근거 없이 “북한군이 왔다, 600명이 왔다” 이렇게 주장했다면 저는 근거 없는 소리를 한 사람이 됩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북한을 경계하자”는 이 경고성 발언을 놓고 감옥에 보낸다는 것도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북한군이 왔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22개나 발굴해 냈습니다. 이 증거들은 모두 증거자격이 있는 남북한의 ‘당국기록’들입니다. 제 연구결론을 부정하려면 이 22개 '사실'(팩트)들을 부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기록들을 증거로 사용하여 역사책을 쓴 학술행위에 대해 국가가 벌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일 것입니다.
3. 국가기록에 쓰인 광주의 불명예: 국가기록에는 광주시위대가 교도소를 5회씩이나 집요하게 공격하고, 극비중의 극비인 현역사단 이동계획을 미리 획득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행군중인 20사단 지휘부를 공격하여 사단장용 지프차 등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하고, 지휘체계를 갖춘 600명이 군납업체를 점령하여, 장갑차와 군용트럭 수백 대를 탈취하고, 그것을 타고 전남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44개 무기고를 털어 5,403정의 무기를 탈취하고 무기고에서 꺼낸 총으로 광주시민 85명을 사살하고, 광주시를 히로시마로 날릴 수 있는 TNT 폭탄 2,100발을 조립한 사실들이 명확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광주의 불명예이고, 민주화운동과는 정면 배치되는 행위들입니다.
1982.3.에 육군본부가 발행한 “계엄사 제354쪽에는 1심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판결을 받은 사람이 고작 283명인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들의 대부분이 10대와 20대 초의 하층계급들입니다. 이 283명의 숫자와 이들의 직업 그리고 연령구성을 가지고는 신출귀몰한 이 600명이라는 숫자와 행위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오월단체 사람들은 이 모든 국가기록들을 아무런 이유도 대지 않으면서 무조건 부인합니다. 누구의 눈에나 이런 반국가 행위들은 광주의 불명예로 비쳐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 모든 기록된 행위들을 북한군이 와서 저질렀다는 연구결과를 냈습니다. 그렇다면 광주는 저에게 참 고마워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북한군은 광주의 부하도 아니고 광주의 상전도 아닙니다. 광주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광주사람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북한군이 선전포고 없이 불법침략 행위를 저질렀다 하면, 첫째로 광주의 이런 불명예가 벗겨집니다. 둘째로는 북한의 속임수에 대해 경계하자는 정서가 확산되면서 국민정체의 안보의식이 강화됩니다. 그런데 어째서 광주가 이토록 나서서 북한의 남침행위를 가로막아주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북한군이 저지른 행위라 하면 광주의 불명예와 공수부대의 불명예가 동시에 말끔히 벗어지는 윈-윈 프레임인데 어째서 광주사람들은 반드시 광주희생자는 천사들의 자식이어야 하고 공수부대는 악마의 자식이어야만 한다고 떼를 쓰는 것인지, 왜 오월 사람들은 국가를 국민에 총질이나 하는 악의 존재요 ‘태어나서는 안 될 더러운 국가’인 것으로 몰고 가야 하는지, 그들 주장의 순수성이 심히 의심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학술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그 결론이 자기들 생각과 다르다고, 자기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고, 폭행하고 법으로 탄압하는 것은 야만: 제가 공부한 응용수학은 응용력의 최고봉을 양성하는 학문입니다. 그런 수학자가 18만 쪽의 정부기록물, 북한당국의 기록물 등을 가지고 19년 동안이나 국가역사를 연구했다면 그건 박수를 받고 훈장을 받을 일입니다. 그런데 연구를 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제가 쓴 9권의 책들 중 단 1권도 읽어보지 않은 채, 그 책들의 결론이 자기들이 가져온 오랜 고정관념과 틀리다하여 집단 이지매를 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국가가 나서서 이러는 것은 국격과 국체를 파괴하는 점령군 행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대한민국 말고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 이런 야만이 횡행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2019.5.30.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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