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사살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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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5-14 23:31 조회5,88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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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사살명령
5.18사기꾼들이 잡는 마지막 지프라기
KBS, JTBC가 앞장서 사기방송을 했다. 위컴이 본 들쥐들, 저마다 찍찍거리면서 “전두환이 사살명령 내렸다”는 인식을 갖도록 방송했다. 결론적으로 얼마나 다급했으면 광주보안대의 말단 상사 그리고 이름도 없는 미군부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거리의 낭인들을 상석에 불러놓고 민주당과 5월 단체들 간부들이 총 집결하여 마치 결정적인 증거라도 찾은 것처럼 소란을 부리겠는가?
1988년 광주청문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지난 해 2월에 종결된 국방부 특조위에 이르기까지 “발포명령”이 규명대상 제1호였다. 발포명령이 있었느냐, 그리고 있다면 명령자가 누구냐? 이 2개의 질문항목 중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야말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정보계의 하인들이 나타나 황당한 소설 한 구절씩을 낭독했다. 빨갱이 세월 참 좋다. 이 두 인간들이 내놓은 두 개의 구절을 합해보면 ‘전두환이 사살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발포명령이 있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고, 발포명령자도 밝혀지지 않은 마당에 ”사살명령이 있었다. 그 명령자는 전두환이었다“? 언론들과 민주당과 오월 것들은 이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마치 적장의 목을 베어 온 듯이 의기양양했다. 천하에 ’돌머리‘들이 천하에 못 봐줄 육갑들을 떨고 있는 것이다.
광주보안대에서 육군상사로 있었다는 허정환은 계엄군에 충성했는지 스스로 내무부장관 상을 받았다고 했다. 옥상에서 보니 계엄군이 무릎쏴 자세로 시민군을 향해 조준사격하더라는 것이다. 이는 학살이지 발포가 아니라 했다.
김용장이라는 인간이 상사출신과 세트로 나왔다. 미국시민권자가 아닌 이상 미군부대 종업원은 정보보고서를 자기 이름으로 쓸 수 없다. 패러다임으로 보면 심부름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나는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한국사람, 시민권 소지자가 아닌 한국사람들이 외부의 한국인들에 어떻게 자랑을 하는지 잘 안다.
2014. 광주 오월의 인간들, 어느 듣보잡 미국 놈, 뚱뚱하고 털 많은 미국 놈 하나를 데려다 마치 그가 모든 정보를 다 관장했던 인간인양 신주단지 모시듯 치켜 올리며 스스로는 노예노릇까지 했다.그 짓들을 하더니 이제는 육군상사를 내세우고 미군부대 고용인을 내세워 전두환이 ‘사살명령’을 내렸다고 개돼지 국민을 상대로 선동한다.
김용장이라는 인간, 5.20.에 전두환이 헬기를 타고 광주비행장에 왔다는 사실을 자기기 분명히 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의 말은 거짓이다. VIP 동정은 내가 본 수사기록에 늘 기록돼 있었다. 그것은 역사기록의 기본이다. 나는 그 VIP 일정을 모두 다 보면서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썼다. 5월 20일, 광주사태는 시민군이 공수부대를 포위하고, 공수부대는 섬멸당할 위기에 있었다. 이런날 2성장군이라는 장군계의 꼬마인 전두환이 올 이유가 없었고, 만일 내려왔다면 이는 상식 밖의 일이었다.
빨갱이들과 전라도 것들은 계엄 사령부의 정상적인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전두환이 공수부대 사령관과 여단장들을 직접 통제하는 소위 “지휘권 이원화”를 실행했다고 트집 잡았지만 1995.7.18. 검찰이 14개월 동안 조사결과로 내놓은 수사결론에는 ‘지휘권의 이원화’는 없었다'고 결론 냈다. 지금 김용장이라는 인간이 떠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문제에 또 다시 불을 지피자는 것이다.
김용장이라는 인간은 전두환이 5.20. 광주에 와서 70여명과 회의를 하면서 “사살명령”을 내렸을 것이라 했다.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대서특필한 이유는 그의 말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언론들에 물어보자. “전두환이 70여 명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면서 그 자리에서 광주시민들을 사살하라는 사살명령을 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소문이 그 이틑날이면 한국 세상에 다 퍼진다. 그러면 전두환이 살아남았을 것 같으냐? 전두환이 중세시대의 네로와 같은 존재이더냐? 이를 믿고 보도하는 언론인간들의 머리는 새머리가 아닐 수 없다. 지식인이면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남의 말을 듣고 얼마나 잘 판단하느냐가 인격의 바로메터다. 그리고 "무릎쏴"? 5월 19일부터 계엄군은 숫자에 압도돼 매타작 당하고 포위당해 섬멸될 입장에 있었고, 5월 21일 오후 4시에는 도청(7,11공수)과 전남대(3공수) 두 곳으로부터 목숨 부지하려고 줄행랑치기에도 벅찼다. 계엄군은 무릎쏴 자세를 취할만큼 여유있는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김용장: "사복 군인들 30~40명을 광주시내에 투입해 방화·유언비어 유포 등을 지시했고, 이를 빌미로 강경 진압에 나섰다. 편의대가 장갑차를 몰았고, 교도소도 공격했다" 이는 KBS, JTBS의 '메인뉴스'였다. 5.14.자 노컷뉴스는 이렇게 보도했다. “<5.18기록관>에 의하면 '계엄사' 160쪽에서 편의대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에 나는 1982년에 발행된 624쪽의 “계엄사”(계엄역사)의 160쪽을 뽑아 ‘지만원tv’ 제27화에 소개했다.
전두환은 광주의 민심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최규하에게 "광주를 한번 다녀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건의를 했고, 이에 최규하는 5월 25일 광주에 갔다. 그 결과는 역시 전두환의 예측대로 좋았다. 최규하는 그날 광주에서 결심을 했다. 광주를 수복하는 작전을 펴면 희생자가 얼마 될 것 같은가?” 이에 이재명 계엄사 작전참모 김재명이 말했다, “150명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이에 최규하는 “그러면 작전을 하라. 하지만 피해를 더 줄여 보라”
계엄사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5월 26일, 정보원들을 시내로 보냈다. 이 때는 이미 북한군이 떠나고 없었을 때였다. 작전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정보 수집을 꾀한 것이다. 적들은 정확히 어디에 분포돼 있으며, 어떤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가? 공격 전에 적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이 세상 어느 나라에서나 필수로 하는 의무사항이다.
"광주기록관"이 지적하는 계엄사 160쪽, 거기에는 이런 요지의 기록이 있다. “5월 27일 새벽을 기해 광주재진압작전이 시행됐다. 3공수는 30명 특공조를 편성헤 전남도청을 01:00부터 05:10에 점령했다. 제7공수는 262명의 특공조를 편성해 광주공원을 01:00부터 05:06에, 제11공수는 37명으로 특공조를 편성해 01:00부터 04:40에 점령했다,(주: 사망자는 150명이라는 예측치와는 달리 17명으로 종결됐다)
이러한 족집게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는 데에는 사전에 정보수집 요원들의 정확한 정보취득에 있었다. "정보수집원들은 가발을 쓰고 민간복장을 하고 침투해 어느 건물 어느 장소에서 어느 규모의 난동자들이 활동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획득하였다".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광주기록관”을 인용한 언론은 이것이 바로 전두환이 투입시킨 편의대라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런 인간들과 한 하늘을 쓰고 산다는 것이 역겹다.
1983년 미헤리티지재단 연구소가 광주에 여러 사람을 보내 조사를 했고 ,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폭도들의 난동정도에 비추어 계엄군은 참으로 인내를 많이 했다. 계엄군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상상이상의 노력을 경주했다” 광주 것들, 전라도 것들 북한 것들은 잘해주면 해줄수록 뒤통수를 치는 족속들이다.
2019.5.1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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