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5.18 ‘주남마을 사건’의 북한특수군(2~3)(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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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9-05-06 20:27 조회4,3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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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5.18 ‘주남마을 사건’의 북한특수군
1.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의 왜곡
2. 11공수 62대대 통신부사관 문병소 중사
3. 공수부대를 추적하는 무장폭도들
4. 주남마을 폭도들의 강간
5. 주남마을의 기나긴 전투
6. 쇠사슬에 묶인 주남마을 버스 운전사
7. 주남마을 미니버스의 사망자들
8. 등에 카빈총을 맞은 주남마을 버스의 사망자들
9. 9공수부대 학살 증언자 최영신의 거짓말
10. 가짜 목격자들의 거짓 증언들
11. 제2의 주남마을 사건들
12. 주남마을의 미스테리
2. 11공수 62대대 통신부사관 문병소 중사
5.18 당시 11공수여단이 7공수여단이 방어하고 있던 지서, 파출소 등 주요 목진지를 인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광주역에 도착한 것은 5월 19일 비 내리는 새벽이었다. 11공수가 주요 목진지와 전남도청, 금남로, 충장로 등에 병력 배치를 마친 5월 19일은 광주시위가 격렬하게 변하면서, 방어하는 공수부대와 공격하는 폭력 시위자들 간에 일진일퇴의 공방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불길이 치솟고 부상당한 부대원들이 속출하고 최초의 발포가 발생한 날이 19일이었다. 이날 광주에서는 폭도화한 시위대에 쫓겨 이리저리 몰리며 매타작을 당하는 불운한 일진이 11공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5월 20일 3공수 5개 대대가 추가로 광주에 투입되었고 이로서 광주에 배치된 공수부대는 총 10개 대대였다. 주요 거점마다 공수부대가 배치되었고 11공수는 도청 앞에서 수만 명의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오후 4시부터 택시와 차량들이 몰려와 도청을 향해 무력시위를 시작했고, 저녁부터는 파출소와 방송국이 불에 타고, 공수부대를 향한 폭도들의 차량돌진 공격이 이어졌다. 돌진 차량에 깔려 경찰 사망 4명, 부상 5명과 군인 2명이 사망했다.
각 거점 방어에 나섰던 공수부대원들은 시위군중에 포위되었다. 3공수는 광주역 앞에서 수만의 시위대에 포위되어 공격을 받고 있었다. 3공수는 지휘관에게만 지급된 방어용 실탄으로 공포를 쏘고 최루탄을 터뜨리면서 포위망 탈출에 나섰다. 3공수 4개 대대는 전남대로 탈출했지만, 11공수 3개 대대와 7공수 1개 대대는 전남도청 앞에서 고립된 채였다.
5월 21일에도 11공수는 여전히 도청 앞에서 차량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옥상에서는 폭도들이 LMG 기관총 사격을 가해왔다. 폭도가 운전하는 장갑차 돌진 공격에 11공수 부대원 1명이 사망했다. 차량 돌진 공격은 세 차례나 이어졌고 이때 돌진 차량 바퀴에 대한 경고 사격이 가해졌다. 이 발포가 5.18세력이 주장하는 도청 앞 ‘집단발포’였다. 그리고 이 발포는 5.18에서 발생한 8번째의 발포였다. 시위대에 몰리던 공수부대는 21일 오후 외곽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공수 62대대는 천신만고 끝에 광주시 동남부 지역으로 철수하여 주남마을이 있던 지원2동 근처에 주둔했다. 이 부대에는 통신부사관으로 근무하는 문병소 중사가 있었다. 문병소 중사는 전남도청 앞에서 부하가 폭도들의 장갑차에 깔려 무참히 숨지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고, 주남마을 사건에서 버스에 탄 정체불명의 세력과 직접 총격전을 벌인 공수부대원의 한 사람이었다. 즉 주남마을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문병소 중사는 현재 모 단체의 회장 직을 맡고 있다.
문병소 회장은 2015년부터 유튜브 참깨방송에 출연하여 당시 5.18을 직접 겪었던 사람으로서 5.18의 정체에 대해 진술을 시작했다. 그는 주남마을 사건에 대해서도 여러 편의 방송에 출연해 그의 체험담을 방송 했다. 주남마을 사건을 직접 겪었던 문병소 회장의 증언은 5.18세력이 어떻게 거짓말을 했으며 어떻게 선동을 했는지 그 진실을 말해 주고 있다.
3. 공수부대를 추적하는 무장폭도들
도청 앞에서 폭력 시위대에게 매타작을 당하던 공수부대는 21일 저녁 탈출을 감행했다. 11공수는 조선대로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도 시위대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평소 같으면 20분이면 도달한 거리였지만 2시간이 걸려 조선대에 도착했다. 정문에 들어서자 조선대에서도 총알이 날아왔다. 조선대 건물 옥상에는 기관단총이 거치되어 있었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공수부대가 움직이는 곳마다 총알이 날아왔다. 11공수는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 방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화순 지역에서도 11공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총알세례였다. 화순은 21일 아침부터 폭약을 노리는 폭도들에게 침입을 받았다. 그리고 5.18참가자 조인호의 증언에 의하면, 21일 점심에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총을 쏘며 차를 타고 들어와 지역민들에게 무기를 나눠줬다고 한다. 폭동이 절정으로 치달을 당시 무장을 했던 곳은 광주만이 아니라 광주 외곽까지 이미 무장이 완료되어 있었다. 그만큼 5.18폭동은 배후세력의 치밀한 계획을 바탕에 두고 있었다.
11공수가 야밤을 이용하여 산을 넘던 중 11공수는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사격을 받았다. 산중턱에서 집중사격을 받는 바람에 11공수는 사분오열되면서 여러 팀으로 쪼개져 각자도생해야 했다. 총알세례를 받고 흩어진 11공수 한 팀에는 7~ 8명으로 구성된 최웅 여단장 팀이 있었다. 여단장 팀은 산자락의 불빛을 기준 삼아 무등산 미군 기지를 향하고 있었다.
여단장 팀이 산자락 7부 능선에 이르렀을 때 정체불명의 청년으로 구성된 무장 폭도들과 맞닥뜨렸다. 여단장 팀은 폭도들에게 무기와 장비를 비롯하여 군복까지 뺏기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말 그대로 폭도들은 여단장 팀을 홀라당 벗겨갔다. 이로서 폭도들은 완벽하게 공수부대로 변신하여 공수부대를 음해하는 역공작 작전에 활약했음을 추정하게 한다.
주남마을 사건이 벌어졌던 22번 국도에서 약간 북쪽으로 검문소가 있었다. 문병소 중사 일행이 이 검문소에 도착한 것은 도청에서 퇴각한지 20여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검문소에 돌진해 들어가자 폭도들은 이미 퇴각한 뒤였고 검문소에는 폭도들이 남긴 무전기 한 대가 있었다. 폭도들은 공수부대가 쓰던 무전기를 탈취하여 공수부대 통신을 감청하면서 자기들 통신용으로 쓰고 있었다. 주인 없는 무전기에서 폭도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야 공수부대 개놈의 새끼들을 다 산으로 몰아넣어서 한꺼번에 다 죽여 버려!”
광주시내를 벗어나면 안전할 것이라는 공수부대의 상상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광주시내에서도 공수부대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지경이었지만, 광주를 벗어난 야산에서도 공수부대가 끊임없이 총알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광주5.18은 단순한 폭동이 아니었음을 반증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광주5.18은 다시 원점에서 폭동의 성격과 실체를 분석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2일에야 문병소 중사는 흩어졌던 여단장과 통신에 성공할 수 있었다. 11공수는 조직을 재정비하고 광주와 화순을 연결하는 22번국도 변에 거점을 마련하고 진지를 구축했다. 근처에는 넓은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고 5월의 보리가 고개를 숙이고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여기에서도 11공수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는 저격에 시달렸다. 폭도들이 쏘는 총탄은 서너 발씩 어떨 때는 빗발처럼 쏟아지며 11공수를 괴롭혔다.
22일 오후 3시 경, 여단장이 근처 미군기지에서 헬기 3대에 전투식량과 실탄을 공수하여 왔다. 이로서 11공수 병사들은 비로소 무장할 수 있었다. 20일 차량돌진 공격이 이어질 때 부대원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11공수의 중대장들에게는 위급 시에만 사용하는 조건으로 이미 20일 오후에 15발이 든 탄창 1개씩이 지급되어 있었다. 21일에 전남대로 피신했던 3공수는 22일 새벽에 폭도들이 이미 무장한 것을 보고 병사 1인당 10발씩의 실탄을 지급 받았다.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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