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최근 역사 다시 음미해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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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4-26 15:20 조회5,76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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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최근 역사 다시 음미해 보니!
1987년 2월 28일, 나는 22년 동안의 장교생활을 대령으로 마침과 동시에 국방연구원(KIDA)을 떠났다. 그리고 3년 동안 미 해군대학원에서 교수를 하면서 국방성 연구과제를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펜타곤 근무도 했다. 그리고 1989년 말 귀국해 세계일보 제11쪽 전면에 ‘율곡역사’(전투력증강사업 역사)를 연재했다.
1991년 김영사를 통해 내 처녀작 “70만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를 냈다. 당시 한국경제신문은 매주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보도했다. 내 책이 소설을 제치고 베스트셀러 1위를 연속 7주간 했다. 이 책에서 나는 그동안 장막에 가려졌던 군의 비능률성을 사례를 들어가며 지적했고 개선방향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책을 가장 반긴 사람들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빨갱이들과 북한이었다. 우익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매우 좋은 통계와 팩트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군의 장군 세계는 반반으로 갈렸다. 나를 역적으로 취급하는 장군들과 ‘군이 이 책을 열심히 읽어 진화하해야 한다'는 장군들로 갈라진 것이다. 수적으로 보면 전자가 훨씬 더 많았다. 80:20? 모든 언론들이 나를 신성시했다. 당시 나는 이 사회 최고의 인기인이 되어 있었다.
나에게 몰려든 국내 빨갱이들
어느 날 김근태가 접근하여 나를 자주 만나자며 가까이 했다. 젊은 사람들도 만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빨갱이들이었다. 1998년 김대중과 임동원이 햇볕정책을 과감히 추진할 때까지 나는 빨갱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개념이 없었다. 이어서 리영희, 강만길, 한완상, 권노갑, 한화갑, 김남식, 김락중, 송영길을 위시해 빨갱이교수들이 나를 무척 따랐다. 김남식과 김락중은 세미나가 있을 때 자주 만났고, 걸을 때 그들은 내 손을 잡고 걸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두 사람은 무서운 간첩이었다. 민중당을 차린 김락중은 1993년 간첩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95년은 김대중이 나를 무척 좋아했을 때였다. 그해 5월,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김대중이 주최하는 한-중 국제세미나에 나는 기조연설을 맡아 기립박수를 받았다. 아태재단에도 3개월에 1회씩 나가 강의를 했다. 10월 25일부터 31일까지 나는 북경 영빈관(조어대)에 머물면서 발표도 하고 김대중과 한 식탁에서 말동무를 해주었다. 김대중이 나를 최고의 교수라 말하고 다녔다. 이에 많은 빨갱이들이 나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이것이 김대중의 힘이었다. 김대중이 최고라고 평가하면 빨갱이들은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김대중이 미워하니 모든 빨갱이들이 다 나를 향해 총 공격했다.
1997년, 북한 간부 8명, 지만원을 리영희 대타로 생각해
1997년 한국일보가 북경에서 3박 4일간의 남북 세미나를 주최했다. 북한에서 8명, 남한에서 12명이 갔다. 남한에서는 기자들과 학자들이 갔지만, 북한에서는 다 간부들이 왔다. '대우'가 북경에 지었다는 켐핀스키호텔 2층, 첫 상견례가 열리고 세미나가 열릴 참이었다. 내가 서울 식구들에 끼어 2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맞은편 소파를 점령하고 앉아있던 북한팀 중에서 누군가가 “아, 저기 지만원 선생 아닙니까” 하고 톤을 높였다. 알고 보니 그가 원동연이었다. 그는 2박 3일 머물면서 나와 늘 대화상대가 되었다. 최근 그는 조평통위원장을 거쳐 통전부 부부장에까지 올랐다가 사라졌다.
북한측 팀장은 장재언, 당시에는 종교협회 위원장이었지만 김대중 시대에는 북한적십자 총재였다. 그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내게 매우 사랑스런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남북대화 전문요원 등 모두가 유독 나에게 애정을 표했다. 그러던 마지막 날, 원동연이 나에게 말했다. “리영희 교수는 민족주의자이긴 한데 이제 나이가 들었습니다. 우리는 지만원 선생님이 훌륭한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선생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왜 그 12명 중에 끼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한 아파트에서 살던 간첩
중국에서 돌아온 후 유난히 귀찮을 정도로 나에게 접근한 주간지 기자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내 주변을 늘 빙빙 돌았다. 하지만 건네는 말들이 늘 애매해서 나는 그를 가급적 멀리하려 했다. 어느 날 그가 한 젊은이와 함께 동네 고기집에서 식사를 하자고 했다. 예약을 했다는 것이다. 가보니 퉁퉁하게 생긴 젊은이가 ‘삼성’이라고만 쓴 명함을 건넸다. 삼성 어디냐고 물었더니 “그거까지는 자세히 알 필요 없다”고 말을 끊었다. 그는 의협심을 과시하면서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은 지선생님께 빚을 많이 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사무실 하나를 차려 드리려구요”
이때에야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는 사무실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집이 일하기엔 가장 좋은 곳입니다. 내가 쓴 책과 기고문들은 대한민국이 잘 되라고 교훈적 목적으로 쓴 것이지 한국군을 비난하려고 쓴 것들이 아닙니다” 이 말에 그 젊은이는 주춤해 하는 눈치였다. 주간지 기자는 소주에 많이 취해 있었다. 나는 술에 취한 그를 바로 앞 건물 그의 대문 앞까지 부축해 주었다. 며칠이 지난 후 이상해서 그 집을 다시 찾아가니 그는 이사하고 없었다. 매우 섬뜩한 순간이었다.
북한 간부들과 남한 빨갱이들이 형성한 연동시스템
나는 이 모든 과정에서 남한의 골수 빨갱이들은 서로 밀착돼 있고, 질서가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남한 빨갱이 사회의 신은 김대중이었다. 빨갱이들이 추천하는 사람은 김대중이 포섭했고, 김대중이 포섭한 사람은 빨갱이 전체가 따랐다. 나는 김대중의 호의를 거절했지만, 김대중의 호의를 받아드린 사람은 간첩질을 했을 것이다.
당연히 조갑제를 연상한다. 언론계에서 조갑제 이상으로 김대중으로부터 크나큰 호의를 입은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없다. 조-중-동에 망치질을 했던 김대중, 유독 월간조선을 조선일보로부터 떼어내 독립시킨 후 조갑제에 경영권과 편집권 모두를 넘겨준 것이다. 박권상이 1998년 김대중으로부터 KBS 사장 자리를 선물 받았다면 조갑제는 2001.1.3.에 김대중이 특별히 따로 마련한 월간조선 사장 및 편집장 자리를 선물 받은 것이다. 언론계의 황제 자리가 박권상으로부터 조갑제에 넘어 간 것이다. 오늘날 조갑제가 언론계에 형성한 무서울 정도의 영향력은 바로 이 지워지지 않는 김대중의 거대한 증표 때문일 것이다.
2019.4.2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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