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 ~5.24 북한부대 도청 배타적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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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1-28 18:18 조회4,0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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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5.24 북한부대 도청 배타적 점령
(1) 작전모드에서 시체처리 모드로 전환
(2) 청주 흥덕지구에 군대식으로 정렬된 무연고 유골 430구
*문경새재(손성모), 2014.8.17 박지원, 임동원, 김홍일 조화 수령 차 북 접촉
1980년 5월 21일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비전향장기수 문근영의 외조부 류낙진 등 사상범 180명을 포함한 2,700명의 수감자가 수용돼 있었습니다. 무기를 턴 북한군은 광주시민들에게 무기를 주면 곧바로 천투행위를 할 것으로 기대하고 시민들에 무기를 나누어주었지만 대부분의 지각 있는 시민들은 오히려 그들을 의심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북한에 보고되자 김일성은 광주교도소 수용자들을 해방시켜 그들을 폭동의 동력으로 삼으라고 지령하였습니다. 이를 감청한 계엄군은 공수 제3여단을 교도소 방어에 투입했습니다. 북한특수군은 5월 21일 밤 집중적으로 교도소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교도소를 점령하려면 교도소 뒤에 붙어 있는 설탕고지(백설탕 광고판 설치)를 점령해야 했습니다. 6.25때와 같은 고지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엄군은 미리 호를 파고 총구를 벌판을 향해 지행해 놓고 폭도의 공격을 기다렸습니다. 잠시 생각을 해 보십시오. 계엄사령부 정보참모부에는 “교도소를 해방하라”는 감청문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 감청 내용에 따라 계엄당국은 제3공수여단을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5월 21일 밤 감청한 명령 그대로 엄청난 공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공격을 감행한 존재는 북한군이겠습니까 아니면 광주시위대였겠습니까? 순수한 광주시위대가 북으로부터 지령을 받는 집단이겠습니까? ‘광주비디오’에는 도청공격을 위해 긴장한 모습으로 전광석화와 같이 출동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누구도 그 많은 시체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광주시민들은 수천 명의 시체가 집단 매장되었다며 광주의 수많은 곳들을 파헤쳤지만 단 1구의 시체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고 1개월 후인 2014년 5월 13일 오후 3시경, 광주로부터 200km 떨어진 청주 흥덕지구의 깊은 야산에 축구공원 조성을 위해 굴착기 작업을 하던 조 모씨(45) 등이 1m 깊이에 가매장된 430구의 조직화된 유골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많은 언론이 이를 보도했지만 세월호 때문에 여론화되지 못했습니다. 유골은 똑 같은 규격의 칠성판(나무판) 위에 놓여 두꺼운 흰색 비닐로 감겨 있었고, 비닐에는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었습니다. 유골에는 일체의 유품이 없어 증거가 인멸된 상태에서 포장됐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대량의 시체를 포장한 곳은 오직 1980년의 광주뿐입니다. 여름 더위에 대량으로 발생한 시체가 부식해 역한 냄새의 액체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고안된 시체포장 방법이었습니다. 보도들이 이어지자 누군가가 그 유골들을 컨테이너에 적재했고, 컨테이너 사진도 보도되었습니다. 이 많은 시체가 왜 200km나 떨어진 청주에까지 운반되었겠습니까? 이 많은 시체를 광주인근에 묻으면 금방 발각이 되기 때문에 증거가 잡힙니다. 왜 하필 흥덕지구냐? 당시 간첩의 길목이자 본거지인 문경-새재에서 감시가 가능한 지역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2015년이 돼서야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흥덕경찰서와 청주시 체육과에 전화를 했습니다. “오래 된 것이라 모른다, 화장한 것으로 안다”는 대답만 했습니다. 호주 교포이신 애국자 한분이 흥덕지구에 내려가 여러 날 수소문했습니다. 화장터에서 화장하는 시체나 유골들은 반드시 자기를 거쳐야 하는데 자기는 그런 유골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했습니다. 2015.9.9. Dailymedi 기사에 의하면 2014년 충북에서 처리한 무연고 유골 화장처리 건수는 불과 18구, 비용은 13,630,000원이었습니다. 1구당 757,000원. 조달본부 입찰공고에도 청주유골은 없었습니다.
북한은 청주유골 발견되자마자 갑자기 아시안게임 참가하기로 돌변했습니다. 2014년 9월 19일부터 10월 4일까지 아시안 게임이 열리기로 여러 해 전에 예고돼 있었습니다. 아시아게임 회원국은 모두 45개국, 다른 나라들은 모두 일찌감치 참가의사를 통보했는데 유독 북한만은 시큰둥했습니다. 청주유골이 발견되기 하루 전인 5월 12일까지도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5월 22일, 갑자기 한국 해군 함정 부근에 포를 사격하는 돌출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5월 24일, 호들갑을 떨면서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겠다고 적극적인 매너로 대시해왔습니다. 미국의 Fox스포츠는 “북한이 갑자기 참가하겠다는데 그 의도를 모르겠다”는 기사를 냈습니다. 남북한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회담을 했습니다.
7월 17일, 남북한 실무접촉이 판문점에서 이루어졌고, 남한 대표는 권경상(아시안게임 조직위 사무총장), 정기영(조직위 국제본부장), 김영일(조직위 자문위원)이고, 북측 대표는 손광호, 장수명, 고정철이었습니다. 북측관계자들은 다 광수였습니다. 2014년 8월 17일, 북한에서 전례 없이 김대중 사망 제5주년을 맞아 조화를 보낸다며 사람을 개성으로 보내라 했습니다. 박지원, 임동원, 김홍일이 조화를 가지러 개성으로 가서 북한 스파이 사령관 김양건을 만났습니다. 이들이 청주유골 처리에 대한 모의를 했을 것으로 의심됩니다. 2014년 8월 19일, 조추첨 북한대표단이 인천에 왔습니다. 8명 모두가 다 광수였습니다.
2014년 10월 4일, 북한 최상위 3인방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이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갑자기 인천에 왔습니다. 국제 스포츠 행사에 참석하는 외국 귀빈들은 개막식에 오지 폐막식에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북한정권 3인방은 폐막식에 와서 시간만 보내다 돌아갔습니다. 이 때 황병서를 밀착 수행한 남한측 공무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직책상 황병서를 수행할 군번이 아니었습니다. 김정은 전용기는 남한에서 최상의 치외법권을 누리는 공작용 무기였습니다. 430구가 적재된 컨테이너 박스는 아시안게임 조직위 ‘청산실’을 통해 북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3) 프락치 의심자 체포 살해 (김인태, 김중식)
도청을 배타적으로 점령한 북한군은 기밀이 누설되는 것을 가장 경계합니다. 자기들을 의심할 수 있는 있는 염탐꾼으로 보이면 무조건 도청으로 체포해가서 고문 후 사실했습니다. 이른바 반탐조를 운영한 것입니다. 아래 좌측 사진에 끌려가는 사람은 해남에서 올라온 50대 김인태이고, 우측에 말끔하게 신사복을 입고 끌려가는 사람은 학원 교사 김중식입니다. 사진에 포착된 것만 두 사람인데 더 많은 사람들이 정보부 첩자로 의심받아 사살됐을 것입니다. 광주 사망자 중에 나이가 30 ~50대로 기록돼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나이의 사람들은 개념이 있기 때문에 폭동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아마도 프락치로 의심받아 끌려가 사살됐을 것입니다. 잡아가는 북한군 어깨띠에 쓰인 글자를 보십시오. “수습학생위원회”입니다. 북한군이 광주학생으로 위장한 것입니다.
(4) 폭동참여 선동
5월 22일부터 도청 사무실 한 개를 허락받은 광주의 유지들은 모이자마자 무기반납이었습니다. 무기를 반납하고 그 대신 얻을 명분을 얻자고 하였습니다. 계엄군이 시외곽으로 밀려나간 광주시내는 한산했습니다. 이때 북한군은 거리를 다니면서 투쟁할 것을 선동하였습니다. 아래 도보 속도로 움직이는 트럭 옆을 따라 걷는 북한군의 도보 자세를 보십시오. 북한군식 걸음걸이입니다. 북한군식 걸음걸이를 걷는 현장사진은 여러 장 있습니다.
(5)북한부대 바람처럼 증발
아래 사진은 5월 24일 정오경에 찍힌 사진입니다. 전투 병력을 거의 다 잃은 북한집단은 24일 부지런히 대형선박으로 유유히 떠났습니다. 그리고 아래 사진은 3총사 광수의 모습입니다. 머리띠에는 하얀 찔레꽃이 꽂혀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슬픔을 의미하는 꽃입니다. 이들 3총사가 북한집단이 도청을 떠나는 마지막순간까지 기관총으로 엄호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이 아마도 광주 현장 사진들 중 마지막 사진일 것입니다. 이들이 떠난 후 개념 없는 양아치 계급들이 도청에 모였습니다. 광주인들은 훗날 그것을 ‘항쟁본부’라 부르며 자기들의 위상을 한껏 부풀렸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이 떠난 이후 광주사람들의 활동을 찍은 사진은 단 1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현장사진은 오로지 북한집단만이 찍을 수 있었습니다. 북한집단이 광주에 있을 때에는 사진들이 찍혔고, 북한집단이 떠났을 때, 광주에는 촬영이 없었던 것입니다.
2019.1.2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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