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Hong Kong) <신보(信報)> 기고문(이용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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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11-23 00:22 조회4,51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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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Hong Kong) <신보(信報)> 기고문
南韓「5/18光州事件」最新研究成果及其政治含義
한국 ‘5.18 광주사건’ 최신 연구성과 및 그 정치 함의
이용빈(홍콩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
前 인도 국방연구원(IDSA, India) 객원연구원
[시스템클럽/대한민국대청소 500만야전군 회원, 필명 “기재”]
一。序言:沒有民主化就沒有新南韓?
1. 서언: 민주화가 없으면 곧 신한국(新韓國)도 없는가?
綜觀20世紀南韓現代史,一般認為1910年到了1945年是日本帝國主義殖民地時期,1945年8月15日被美國和前蘇聯光復之後,以冷戰起步為轉捩點韓半島漸漸分為南韓(韓國,即大韓民國)和北韓(朝鮮,即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經過1950年韓國戰爭到現在韓國在停戰體系之下努力奮鬥同時爭取政治穩定和經濟發展。南韓的現代政治史大體上可分為三個時期:(1)民主國家建國時期(1947—1961:第一及第二共和國),(2)現代國家建國時期(1961—1987:第三到第五共和國),(3)民主國家再建時期(1987至今:第六共和國)。從南韓與北韓政治對決歷史的角度,研究1980年「518事件」(即光州事件)為期長達12年的南韓系統俱樂部(System Club)議長池萬元博士主張,南韓的現代史大體上也可分為三個時期:(1)李承晚總統的建國歷史,(2)朴正熙總統的富國歷史,(3)南北韓共產主義者所推行的「(人民)民主化歷史」。
20세기 한국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1910년에서 1945년까지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시기였고, 1945년 8월 15일에 미국과 구소련에 의해 광복이 된 이후 냉전의 시작을 전환점으로 해서 한반도는 점차 남한(한국, 즉 대한민국)과 북한(북조선,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된다. 1950년의 한국전쟁을 거쳐 한국은 정전 체제하에서 동시에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과 분투를 해왔다.
한국의 현대 정치사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즉 (1)민주국가 건국시기(1947~1961, 제1공화국 및 제2공화국), (2)현대국가 건국시기(1961~1987, 제3공화국에서 제5공화국까지), (3)민주국가 재건시기(1987~현재, 제6공화국). 또한 한국의 남북한 정치대결 역사의 각도에서 1980년 발생한 5.18사건(즉 광주사건)에 대해서 12년에 걸쳐 장기간 연구해온 한국 시스텝클럽(System Club) 지만원 박사는 한국의 현대사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1)이승만 대통령의 건국(建國) 역사, (2)박정희 대통령의 부국(富國) 역사 (3)남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인민]민주화[人民](民主化)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從政治民主化過程的角度來說,文人國父李承晚「建國總統」在形式上已經實現了所謂「(國民)民主化」,但是經濟產業化方面力不從心。通過1961年5月16日的軍事政變,文武雙全的朴正熙總統開始了國家現代化和經濟產業化進程,以軍人集團的犧牲精神為基礎實現了高度發展的根基。朴正熙總統不僅維護國家安全,也繼續維持民主制度。所以有人把他當做「獨裁者」難免失之偏頗,倒不如認為是「獨走者」。南韓現在是第六共和國,此乃基於1987年最後改正的「憲法」為基準,從前任廬泰愚總統到現任朴槿惠總統,都是按照1987年憲法領導國家的,所以南韓政治體制被稱為民主化的「87年體制」。這個「87年體制」與1980年5月18日在南韓全羅南道光州爆發的所謂「光州事變」密不可分。南韓前任總統金泳三在開始其「文民政府」的時候公開揚言,「我們文民政府基於1980年5月18日光州民主化運動」,以此作為領導國家的法寶,因為沒有光州5/18民主化運動就沒有民主文人總統。按照這個邏輯,沒有所謂「三金時代」(即金大中、金鐘泌、金泳三)所領導的民主化就沒有87年體制的新南韓。那麼,真的只有文人民主化才能領導國家嗎?創造新南韓的5/18光州民主化運動究竟是怎麼回事?
정치 민주화 과정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문인(文人) 국부(國父)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형식상에 있어서 이미 소위 ‘민주화’를 실현했지만, 경제 산업화의 방면에서는 그 역량이 마음먹은 것에 미치지 못했다. 1961년 5월 16일의 군사정변을 거쳐 문무(文武)를 겸비한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현대화와 경제 산업화를 군인 집단의 희생정신을 기초로 하여 시작하여 고도 발전의 굳건한 토대를 실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의 안보를 수호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제도를 계속적으로 유지했다. 따라서 혹자가 그를 독재자라고 보는 것은 균형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독주자(獨走者)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한국은 현재 제6공화국이며, 이는 곧 1987년에 최후로 개정된 헌법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으며, 따라서 한국 정치체제는 민주화의 ‘87년 체제’라고 불린다.
이 ‘87년 체제’는 1980년 5월 18일 한국 전라남도에서 폭발한 광주사건과 나뉠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한국 전임 대통령 김영삼은 그의 문민 정부를 시작할 때에 공개적으로 천명하기를 “우리 문민 정부는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했으며, 이를 국가를 지도하는 비책(秘策)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이 없다면 곧 민주적인 문인 대통령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소위 ’3김 시대(즉 김대중, 김종필, 김영삼)가 영도한 민주화가 없었다면 곧 87년 체제의 신한국(新韓國)도 없었다는 것이 된다. 그럼 정말로 문인(文人)에 의한 민주화여야만 국가를 이끌 수 있는 것인가?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낸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二。你所完全不知道的所謂南韓光州5/18民主化運動的真實情況
2. 당신이 전혀 몰랐던 이른바 한국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
在介紹和分析有關1980年5月18日在南韓全羅南道爆發的所謂「光州5/18民主化運動(民運)」的學術研究取得新突破之前,我們應當注意對該事件的稱呼不相一致的顯著事實。在南韓第五共和國時期,這個所謂民主化運動被稱為「光州搔搖」、「光州暴動」、「光州事態」等,因為1980年南韓最高法院宣佈「5/18光州事件是反政府暴動以及內亂陰謀事件」。1981年到1997年為止,這是當時在南韓被公認的,特別要注意的是1987年憲法制定之後相當長的時間這個看法一般被認為是合法判斷。但是1997年南韓文民總統金泳三提出「清算第五共和國」和「正確地樹立歷史」,基於南韓檢察院和國家安全計劃部(現在南韓國家情報院的前身)的搜查記錄和資料,把以前5/18「光州暴動」稱為「5/18民主化運動」。這樣一來,南韓在法理上就存在兩個完全不同的「5/18事件」。一個是的1980至1995年的5/18「光州暴動」,另外一個是1995年以後到現在的「5/18民主化運動」。除了還生存的第六共和國首任前任總統廬泰愚以外,第五共和國主張5/18事件就是「光州暴動」,反而第六共和國強調5/18事件不是「光州暴動」而是「民主化運動」,光州是「民主化聖地」。
1980년 5월 18일 한국 전라남도에서 폭발한 소위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의 새로운 학술적인 돌파를 소개하고 분석하기 전에, 우리는 응당 이 사건의 명칭조차도 서로 다르다는 엄중한 현실을 주의해야 한다. 한국 제5공화국 시기에 이 소위 민주화운동은 ‘광주 소요’, ‘광주 폭동’, ‘광주 사태’ 등으로 불렸는데, 왜냐하면 1980년 한국 대법원에서 “5.18 광주 사건은 반정부 폭동 및 내란 음모 사건이다”라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1981년부터 1997년까지 이는 한국 역사의 정사(正史)였는데,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1987년 헌법이 제정된 이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러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합법적인 판단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1997년에 당시 한국의 문민 대통령 김영삼이 ‘오공(五共)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를 제기하며 마찬가지의 한국 검찰과 국가안전기획부(현재의 한국 국가정보원의 전신)의 수사 기록과 자료를 토대로 해서 이전의 5.18 ‘광주 폭동’을 ’5.18 민주화 운동‘이라고 목소리 높여 말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따라서 법리(法理)상에 있어서 한국에는 두 가지의 완전히 서로 다른 ‘5.18 사건’이 있는 셈이다. 하나는 1980~1997년의 5.18 광주폭동이고, 또 다른 하나는 1997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5.18 민주화 운동이다. 아직 생존해 있는 제6공화국 첫 번째 전임 대통령 노태우을 제외하면, 제5공화국은 5.18 사건은 곧 광주폭동이라고 주장하고, 반면 제6공화국은 곧 5.18 사건은 광주폭동이 아니고 민주화운동이며, 광주는 민주화 성지라고 강조하고 있다.
那麼5/18光州事件是到底什麼?一個事件,兩種觀點,孰是孰非?
그렇다면 5.18 광주 사건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누가 맞고 누가 틀린가?
5/18光州事件是1979年10月26日朴正熙總統逝世及同年12月12日所謂「雙十二日事變」發生後,在南韓宣佈戒嚴令之下於光州發生的一次出人意料的武裝衝突。5/18事件發生的時間是1980年5月18日早上9點30分至27日淩晨5點23分。具體而言,按照池萬元博士的看法,該事件可分為如下三個階段:(1)5月18至21日(所謂「鬼子部隊」出現),(2)5月22至25日(光州收拾對策委員會運作期間),(3)5月26至27日(非理性的光州年輕人的決死抗戰蠻行)。(1)為4天,(2)和(3)一共為6天,總共10天。(1)這段時期是關鍵,來自首爾的600個所謂的「大學生」攻擊了行動中的政府戒嚴軍現役部隊,從軍用車輛專門製造廠「亞細亞汽車」搶奪裝甲車4輛和軍用卡車374輛,同時迅速席捲全羅南道的44個武器庫,4個小時內就搶了5200枝槍,開槍打死光州市民85人,然後將罪名轉嫁給南韓政府戒嚴軍。之後,戒嚴軍被「大學生」驅逐到光州市郊,在光州市內便沒有政府戒嚴軍了,所謂「大學生」則隱身地下。隨後,一些光州市民聚集在戒嚴軍所放棄的光州全羅南道道廳裏,圍繞收拾方案進行(2)和(3)階段為期6天的空虛論爭。所謂的光州事件告終了之後,南韓軍處罰了232個人,但是在(1)的階段發起武裝行動的600個所謂「大學生」卻連1個也沒有被抓住了。
5.18 광주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및 1979년 12월 12일 이른바 ‘12.12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 한국에서 계엄령이 선포된 아래에서 한국 광주에서 발생한 일종의 발상하기도 어려운 무장 충돌이었다. 5.18 사건의 발생 시간은 1980년 5월 18일 오전 9시 30부터 5월 27일 새벽 5시 23분까지였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5.18 사건을 12년 동안이나 연구해온 한국 시스템클럽 의장 지만원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5.18 사건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즉 (1)5월 18~21일(소위 도깨비부대의 출현), (2)5월 22일~25일(광주 수습대책위원회의 가동 기간), (3)5월 26~27일(비이성적인 광주 젊은이들의 결사항전 만행) (1)은 4일이고, (2)와 (3)은 6일이며, 모두 10일이다.
(1)이 관건 시기인데, 서울에서 도착한 이른바 600명의 “대학생”이 이동 중인 현역 계엄군을 공격하고 군용차량 제조공장인 아시아자동차에서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를 강탈하여 동시에 전남지역에 숨어 있는 44개 무기고를 향해 질주하여 불과 4시간 만에 5,200여 정의 총기를 탈취하고, 그 총으로 광주시민 85명을 쏘아 죽여 이를 한국군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는 최고 수준의 특수작전을 수행했지만, 한국군이 그들에 의해 광주시 외곽으로 쫓겨나가고, 광주에서 싸울 상대가 없자 그 600명도 지하로 숨었다. 이후 한국군이 포기한 전남도청에는 광주시민들로 가득차 6일 내내 수습방안을 놓고 논쟁만했다. 한국군은 232명을 처벌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처음 4일 동안 행동한 600명의 ‘도깨비들’은 단 1명도 잡지 못했다.
此外,按照南韓國家安全計劃部在1985年5月提出的報告,5/18事件的民間死亡者總數為164人;而按照1995年南韓檢查院提出的報告,民間死亡者總數為166人。其中69%的民間死亡者不是死於戒嚴軍的槍下,而是在死於從44個武器庫非法搶奪槍支的所謂光州市民軍之手。那麼問題就來了,既然不是戒嚴軍向市民射擊,那麼用武器庫搶來的槍支射擊光州市民的又是什麼人呢?
또한 한국 국가안전기획부가 1985년 5월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5.18 사건에서의 민간 사망자 총수는 164명이고, 1995년 한국 검찰이 제시한 보고서에 따르면 5.18 사건의 민간 사망자 총수는 166명이었다. 그 중에서 69%의 민간 사망자가 계엄군의 총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소위 광주 시민군이 한국 전라남도에 산재해 있는 44개의 무기고를 단지 4시간 내에 불법적으로 강탈한 총에 의해서 비명횡사한 것이었다. 그럼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계엄군이 무기고의 무기를 이용하여 일반 시민에게 총을 발사했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신속하게 무기고의 총을 이용하여 광주 시민을 향하여 발사했던 것은 누구란 말인가?
兵書常言:「兵不厭詐」。南韓5/18事件研究專家、歷史學家、系統工學博士、南韓系統俱樂部(System Club)池萬元議長在他的最近專著裏,科學地主張5/18光州事件的第一個階段,即從5月18到5月21日是關鍵時刻,大約600個北韓特攻隊軍人,作為一種鬼子部隊,得力於金大中為首的反國家政治勢力而展開具有離間性質的武裝衝突,先要以解放「光州」為突破口而實現其「人民民主化」的政治意圖(池萬元,《5/18分析最終報告書:12年研究的結果物》(首爾:圖書出版系統,2014年10月),第22至45頁)。
병서(兵書)에서 항상 말하기를 병불염사(兵不厭詐: 군사작전은 전략적 기만을 도외시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한국의 5.18 사건 전문가이며, 역사학자이고, 시스템공학 박사인 한국 시스템클럽(System Club) 지만원 의장은 그의 최근 전문서적에서 과학적으로 5.18 광주 사건의 제1단계, 즉 5월 18일부터 21일까지가 핵심 시각이었으며, 대략 600명의 북한 특수부대 군인이 일종의 도깨비 부대와 같이 김대중을 우두머리로 하는 반(反)국가 정치세력의 도움을 얻어 이간(離間)을 위한 무장 충돌을 전개하여, 광주를 해방구로 먼저 삼고 그 ‘인민민주화(人民民主化, 즉 적화)’의 정치의도를 실현하고자 했다고 주장했다(지만원, 『5․18분석 최종보고서: 12년 연구의 결과물』(서울: 도서출판 시스템, 2014년 10월), pp.22~45).
其核心根據是600個來自首爾的所謂「大學生」(此乃光州對北韓特工部隊的暗號名稱)確實存在,但是到目前為止,連一個人也沒有亮過相。1995年南韓國會通過了「5/18特別法」,國家對所謂光州民主化運動有功者應該提供金錢報償和各種特別待遇,因而這600個來自首爾的莫名其妙的「大學生」,非北韓特攻隊軍人不可。這不是推測,而是有從北韓逃走進入南韓的所謂「脫北者」提供的不少證言:「當我知道了5/18光州暴動的殺人蠻行屬北韓特工部隊故意所為,禁不住目瞪口呆。」(池萬元《在所羅門面前的5/18》(首爾:圖書出版系統,2010年8月),第114頁)。更為重要的發現是,所謂5/18光州民主化運動在第一個階段連一個以光州市民為核心的民主運動指揮人員都沒有,只有從首爾到光州來的600個所謂「大學生」本著離間政府戒嚴軍和光州市民的策略而發動的武裝衝突,他們功成身退,以退保身!(池萬元《12/12與5/18:通過搜查記錄看的歷史壓縮本》上卷(首爾:圖書出版系統,2009年10月),第469至473頁)。
그 핵심 근거는 이른바 600명의 서울에서 도착한 ‘대학생’(북한특수군에 대한 광주의 암호명)이 확실히 존재했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중의 한 사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에 있다. 1995년 한국 국회는 <5.18 특별법>을 통과시켜서, 국가가 이른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공자에게 응당 금전적인 보상과 각종 특별 우대를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600명의 서울에서 온 ‘대학생’은 북한 특수부대 군인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추측이 아니라, 북한에서 탈주하여 한국으로 들어온 이른바 ‘탈북자’의 무수한 증언도 있다. 즉 “5.18광주폭동에서 저질러진 살인 만행들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들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만들어진 내용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놀라움과 함께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지만원,『솔로몬 앞에 선 5.18』(서울: 도서출판 시스템, 2010년 8월), p.114].
중요한 발견은 이른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위에서 언급한 제1단계에서 근본적으로 한 명의 광주 시민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운동 지휘자가 없었으며, 단지 서울에서 광주로 도착한 이른바 600명의 대학생이 정부 계엄군과 광주 시민 사이를 이간질하는 책략을 이용하며 무장 충돌을 진행했을 뿐이고, 공(功)을 이루고 몸을 피하여, 자신들의 안위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것이다![지만원, 『12.12와 5.18: 수사 기록으로 다큐멘터리 역사 압축본』상권(서울: 도서출판 시스템, 2009년 10월), pp.469~473].
通過池萬元博士的研究,1980年以後又過了35年才證明了所謂「光州民主化運動」其實是「北韓特工部隊對南韓開展的特務工作」這一駭人的事實。以上述分析與內容為基礎,在某種意義上,5/18事件既不是什麼「光州暴動」,也不是什麼「光州民運」,而是以北韓特工部隊周密策劃的政治離間計為主的「光州軍亂」。如果不是,怎能有任何光州市民在其全羅南道道廳裏設置大規模TNT炸藥,以策劃殺傷全體光州市民?反正,光州人是愛光州人的。5/18光州事件的政治目的何在,實為不言而喻!
이상의 분석과 내용을 기초로 해서 어떤 의미에서 5.18 사건은 ‘광주 폭동’도 아니고 ‘광주 민주화운동’도 아니라 북한 특수부대가 면밀하게 획책한 정치적 이간계(離間計)를 위주로 한 ‘광주 군란(軍亂)’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광주 시민이 그 전라남도 도청에 대규모의 TNT 폭약을 설치해서 전체 광주시민을 살상하려고 획책했겠는가? 어쨌든 광주 사람은 광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그 정치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실로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아는 것이다!
三。結論:問天,愛國有罪還是愛國無罪?
3. 결론: 하늘에 묻건대, 애국유죄(愛國有罪)인가 애국무죄(愛國無罪)인가?
1987年南韓第六共和國首位新任總統盧泰愚向5/18事件全體受害者家屬致公開信,認同「光州事件應被視為民主化過程的一部份」。此話有道理,因為「光州事件」不是「民主化運動」而是北韓(即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特工部隊精心策劃開展的「人民民主主義化運動」,所以可以說是「(失敗的)民主化過程的一部分」,但不能說是「民主化過程的一切」。南韓第五共和國的核心人物之一,許和平前任總統府秘書官也對5/18翻案能耐地指出,(這是)政治性審判,孰是孰非,未有定論(池萬元《12/12與5/18:通過搜查記錄看的歷史》第4卷(首爾:圖書出版系統,2008年),第295至296頁)。
1987년 한국 제6공화국의 첫 번째 신임 대통령 노태우는 공개서한을 통해서 5.18 희생자 전체 가족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광주 사건은 응당 민주화 과정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한다”고 인정했다. 이 말은 이치가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광주 사건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북한(즉 북조선인민민주의공화국) 특수부대가 세심하게 획책하여 전개한 ‘인민민주주의화(人民民主主義化) 운동’이었기 때문에 따라서 ‘(실패한) 민주화 과정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과정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 제5공화국의 핵심 인물 중의 한 사람인 허화평 전임 대통령실 비서관도 5.18 ‘역사 뒤집기’에 대해서 커다란 인내심을 발휘하면서도 “(이것은) 정치적 재판이고, 시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지만원,『12.12와 5.18: 수사 기록으로 다큐멘터리 역사 』제4권(서울: 도서출판 시스템, 2008년), pp.295~296].
就第三者的立場而言,5/18光州事件只不過是一個「歷史事件」。但是從南韓這樣一個分化嚴重的國家的角度來說,這不僅是「歷史事件」,而且是現在還進行著的「政治事件」,更是決定國家命運的一種「歷史戰爭」。如序言所論及的那樣,南韓的當代政治歷史階段為(3)南北韓共產主義者推行「民主化」的歷史時期,因而在南韓現在,作為正當的歷史,只有推崇南韓共產主義者的「民主化」歷史,規定1980年以前的歷史(即建國之後長達32年的歷史)為獨裁歷史而對此進行降格運動。在1945年8月15日解放之後,南北韓的共產主義者主導了歷史學界,推行如上所述的洗腦工作。被洗腦的人們否定李承晚總統和朴正熙總統的歷史功績,卻信俸南韓共產主義者所注入的北韓史觀。也就是說,人們的靈魂被北韓控制了。所以池萬元博士展開「歷史戰爭」,其開頭是2015年3月19日揭開1980年5/18暴動真相的《5/18的歷史真相:對國民報告會》。
제3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5.18 광주 사건은 단지 일종의 역사 사건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이라는 이러한 분단 국가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이는 역사 사건일 뿐만 아니라 또한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정치 사건이고, 더욱이 국가 운명을 결정할 일종의 역사 전쟁이기도 하다. 이 글의 서언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의 현재 정치역사 단계는 (3)남북한 공산주의에 의한 ‘민주화’ 역사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현재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의 민주화 역사만 정당한 역사이고 1980년 이전의 역사(건국 이후 1980년 이전의 32년간이나 달하는 역사)는 독재의 역사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격하운동을 벌여왔다.
남북한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부터 역사 학계를 점령하여 이 같은 세뇌 공작을 해왔다. 이렇게 세뇌된 사람들은 이승만과 박정희 역사를 부정하고 이들이 주입시킨 북한 역사를 신봉하고 있다. 영혼을 북한에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며, 그 시발이 바로 광주 폭동의 진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2015. 3. 19일 <5.18역사의 진실 대국민보고회>였다.
南韓5/18光州事件研究專家池萬元博士在2015年3月19日宣佈有關5/18事件的「歷史戰爭」開始之時,特別強調:「在大韓民國的歷史中,只有民主化的歷史,沒有建國的歷史,沒有產業(化)的歷史。……如果不改正這種狀況,大韓民國就永遠淪為沒有生日的生而被拋棄的國家了」(池萬元,《就開始歷史戰爭》(首爾:2015年3月17日),第2頁)。
한국의 5.18 광주 사건 연구 전문가 지만원 박사는 2015년 3월 19일 5.18 사건과 관련된 역사 전쟁을 선포하면서 특별히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대한민국에는 민주화 역사만 있고, 건국의 역사, 산업(화)의 역사가 없습니다. ……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생일 없는 사생국가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지만원, 『역사전쟁을 시작합니다』(서울, 2015년3월17일), p.2].
本著這樣的歷史邏輯,為了恢復(1)李承晚總統的建國歷史貢獻和(2)朴正熙富國歷史功勞的正面歷史觀,理應展開「歷史戰爭」,只有這樣才能防止愛國心的消滅,恢復國家的正當性。這是與南韓國家命運息息相關的事情。每個國家的歷史都有正面和負面,兩者是共存而混合的,所以對過去歷史的全面否定就是「歷史獨裁」,也可能抹煞愛國心和忠誠心,歷史不是打倒的物件,理應肯定歷史的延續性,只有這樣才能恢復愛國心,達到國泰民安,有利於擴大包容性,實現和平發展。很遺憾的是,今年3月19日在南韓開始「歷史戰爭」之際,收到公開信被邀請參加討論「5/18光州事件真相」的所謂有關「民主化」人士連一個也沒有來參加,就證明他們是在搞「歷史獨裁」。
이러한 역사 논리에 입각하여 (1)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역사의 공헌과 (2)박정희 대통령의 부국 역사의 공로에 대한 긍정적인 역사관을 회복하기 위해서 마땅히 ‘역사전쟁’은 진행되어야 하며, 오직 이렇게 할 때에만 애국심의 소멸을 방지하고, 국가 정당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는 한국의 국가운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모든 국가의 역사에는 좋은 역사도 있고 나쁜 역사도 있으며 이 두 가지가 공존하여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 역사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곧 “역사 독재”이며, 또한 이는 애국심과 충성심을 말살할 수 있다. 역사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며, 응당 역사의 연속성을 긍정해야 한다. 오직 이러할 때에만 비로소 애국심을 회복하고, 국가와 국민이 안정되고 포용 속의 증대를 실현할 수 있으며, 평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2015년 3월 19일 역사전쟁이 한국에서 시작되었을 때 공개적으로 참가해서 5.18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 토론할 것을 요청받은 이른바 관련된 “민주화 인사”들은 단 1명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이는 곧 그들이 “역사 독재”를 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有關5/18光州事件,21世紀初以池萬元博士和金大領(音譯:Dainiel Kim)教授(其專著為《作為歷史的5/18》全4卷(首兒:飛風出版社,2013年5月))為首的「修正主義史觀」出現之前,一般認為5/18光州事件是國家暴力所導致的惡劣行為,因此軍人(武人)有罪,文人(文民)無罪;軍人獨裁,文人民主。但是最近的研究成果指出,一直被認為是反映5/18民主化運動的經典力作的《超越死亡超越黑暗》一書,竟然主張自己是其作者的人一共有4個人,而且有不少內容與北韓出版的關於光州事件的書籍相同之處頗多。(池萬元,《5/18分析最終報告書:12年研究的結果》(首爾:圖書出版系統,2014年10月),第156至第163頁)。特別重要的是,《5/18分析最終報告書:12年研究的結果》一書是在美國海軍大學獲得應用數學博士學位的南韓池萬元博士12年來通過研究18萬頁的搜查記錄、北韓資料、統一部資料等百分之百的政府文獻而得出的科學證明(Q.E.D.),其中不依賴於黃張葉、金德洪等身為前任北韓高官的脫北者的相關資料。
5.18 광주 사건과 관련해서 21세기 초에 지만원 박사와 김대령 교수[그의 전문 서적은 『역사로서의 5.18』전4권(서울: 비봉출판사, 2013년5월)이 있다]를 주축으로 하는 ‘수정주의 역사관’이 출현하기 전에 일반적으로 5.18 광주 사건은 국가에 의한 폭력이 강행한 악렬한 행위라고 여겨졌고, 이로 인해 군인[무인(武人)]은 유죄(有罪)이고 문인[문민(文民)]은 무죄이며, 군인은 독재이고 문민은 민주라고 보았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성과는 줄곧 이른바 5.18 민주화 운동의 성전(聖典)으로 간주되어왔던 『사망을 넘어 어둠을 넘어』라는 책이 놀랍게도 모두 4명의 서로 다른 저자가 있다는 점, 그리고 북한의 5.18 광주 사건과 관련된 서적을 혼합해서 베껴쓴 것이기에 매우 많은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지만원, 『5․18분석 최종보고서: 12년 연구의 결과물』(서울: 도서출판 시스템, 2014년 10월), pp.156~163]. 특히 중요한 것은 『5․18분석 최종보고서: 12년 연구의 결과물』(서울: 도서출판 시스템, 2014년 10월)이 미국 해군대학에서 응용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한국의 지만원 박사가 12년에 걸쳐 18만여 쪽의 수사 기록, 북한 자료, 통일부 자료 등 100% 정부의 문헌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도출한 과학적 증명(Q.E.D)이라는 것이며, 그 가운데에는 황장엽, 김덕홍 등 과거 북한 고위관료 출신의 탈북자의 유관(有關)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問天,愛國有罪還是愛國無罪?在南韓圍繞著5/18光州事件現在進行著刻不容緩的歷史戰爭,最後勝利者為是,最後敗北者為非。雙方一比一,基於最近研究成果和科學性發現,我堅信歸根結底還是「愛國無罪」!
하늘에 묻건대, 애국유죄(愛國有罪)인가 애국무죄(愛國無罪)인가? 한국에서 5.18 광주 사건을 둘러싸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각도 늦출 수 없는 역사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시(是: 옳은 자, 의인)가 될 것이며, 최후 패배자가 비(非: 옳지 못한 자, 죄인)가 될 것이다. 쌍방의 승부는 현재 1:1이며, 최근 연구 성과와 과학적 발견에 기초하여 필자는 너무도 합리적으로 당연하게도 애국무죄(愛國無罪)가 입증될 것으로 굳게 믿는다!
출처: [홍콩(香港) <신보(信報)>, 2015.6.5] / 한국어 번역문(2018.11.22)
참고사항: 해당 기고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홍콩 <신보(信報)> 특파원이 한국을 방문하여 5.18 관련 사실(事實) 조사를 한 이후, 해당 기고문이 최종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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