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선의 사기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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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9-27 17:02 조회4,59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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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선의 사기 소송
이번 5.18관련 소송에서 언론과 광주판사들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박남선이다. 박남선은 자기가 5.18총사령관이었다고 진술했고, 광주 부장판사 6명은 박남선의 주장이 상당히 구체적이라서 박남선이 제71광수(황장엽)가 맞다며 1억원에 가까운 손해배상을 선고했다. 그러나 박남선은 이 소송을 사기로 한 것이고, 사기로 했다는 근거를 모두 제출했는데도 광주판사 6명은 오로지 박남선 편만 들었다. 얼굴도 박남선의 주장 그대로 지만원이 변조했다고 판결했다. 광주 6명의 부장판사: 이창한, 김동규, 최인규, 김상연, 박길성, 노경필,
박남선의 허풍과 거짓
증거자료: 증141. 박남선에 대한 전교사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 피의자신문조서(1,2회)
박남선은 1954. 생으로 중학교 2년 중퇴(증141, 13쪽)하였고, 1973.에는 절도죄, 1979.에는 협박죄로 각 징역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증141의 1쪽 하단). 2017.7.7.에는 광주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헸고, 2018.6.21.에는 이 사건 법정에 출석하여 박남선 자신이 시위대 총사령관이었고, 1980.5.21. 상황 모두를 자기가 지휘했고, 그날로부터 전남도청에 상황실을 차리고 자기가 시위상황을 총 지휘했고, 광주 현장 사진들에 등장한 주역들을 모두 자기가 지휘했다고 자랑을 했지만 증141. “전교사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 피의자신문조서(1,2회)”를 보면 이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없다. 또한 위 71광수에 대한 현장사진과 어울릴 수 있는 기록이 전혀 없다.
증141의 기록을 보면 박남선은 1) 1980.5.20. 계림동 산수동 풍향동 등 소요의 핵심지역이 아닌 변방들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가두시위”를 했고(2쪽), 2) 5.23.1400.경부터 적십자병원에 있는 19구의 시체를 도청으로 운반하는 일에 동원되면서부터 시체를 도청으로부터 상무관으로 옮기는 일에 노력동원을 당한 피동체에 불과했고(3쪽), 3)5.25. 김창길이 위원장을 하는 시민학생수습위원회의 부위원장인 김종배의 제의로 상황실장을 맡기 시작했고(4쪽), 4)별 로 하는 일 없이 45구경 권총을 어깨에 차고 돌아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어린 학생 등을 상대로 산발적인 지시를 하였으며(4쪽), 5)5.26.1800 경, 김창길 등이 자기들을 계엄군에 넘겨주려 한다는 이야기를 김종배로부터 듣고, 회의를 하는 부지사실로 들어가 김창길을 권총으로 협박해 내 보냈고(5-6쪽), 6) 5.27. 새벽 도청 2층 회의실에 있다가 “투항”하여 체포(7쪽)된 행적 밖에 남기지 못했다. 7)그가 지휘했다는 상황실은 “직원이 6명”(8쪽)이라 진술하였다. 한마디로 개념 없는 피라미였다는 뜻이다. 그가 광주법원과 서울 법정에서 진술한 허풍의 내용들은 모두 그 혼자만의 주장인 것으로 그의 허풍을 뒷받침할 아무런 자료가 없다.
박남선은 위 71광수의 현장사진이 자기 사진인데 피고인측이 턱 부분을 황장엽 비슷하게 깎아 합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 사진이 왜 자기 사진이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인 원본사진을 내놓지 못했다. 무조건 위 사진의 71광수는 자기인데 턱 부분을 황장엽 얼굴과 비슷하게 변조시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위 사진은 XX일보 사진DB에 지금도 그대로 있다. 박남선의 위계 주장은 이 하나만을 가지고도 증명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잠을 잘 때에도 워커를 벗어 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제71광수가 신은 신발은 감정 색 사제 단화다. 제71광수가 소지한 총은 무거운 M16유탄발사기, 이는 M16소총에 M203 유탄발사기를 결합하여 수류탄 정도의 폭발력을 가진 유탄을 최대 400m까지 발사할 수 있는 특수화기이며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다. 하지만 박남선은 2017.7.7. 광주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이 총기의 방아쇠와 조준용 부위들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못했다. 무거운 무기를 그냥 가지고만 다녔다고 답했다.
서울법정에 나와서는 자가가 무장 시민군 600명을 총 지휘했다고 허풍을 떨었지만 유공자 등급은 최고 1급에서 최저 14급이 있는데 자기는 겨우 10급밖에 받지 못했다고 불평했다. 모든 공식기록에는 골재채취운전자로 기록돼 있고, 그가 도청에 들어온 날이 5.25. 오후였다고 기록돼 있는데 그는 5.21. 상황을 자기가 지휘했고, 자기가 계엄군을 전남도청에서 추방시켰다고 허풍을 떨었다. 위 사진은 1980.5.24.에 XX일보에 등재됐다. 그들이 말하는 항쟁본부는 5.25. 밤중에 형성됐고, 상황실이라는 존재는 이 때 처음으로 항쟁본부 예하조직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박남선은 공식 수사기록과 5.18유공자 증언록(증59)에 반하는 허위주장들을 마구 쏟아냈다.
5.25.밤중에 탄생한 항쟁본부의 총사령관은 전남대 3년생 김종배였고, 박남선은 상황실장이었다. 위 사진의 등록일은 5.24.다. 박남선은 제71광수가 가진 무전기로 전남도청 상황실과 통신하였다고 주장하지만 5.24.에 전남도청에는 시민군 상황실이 없었다. 북한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항간에는 ‘시민군’이라는 단어가 많이 떠돌아다닌다. 피고인이 추적해 본 결과 광주사람들은 시민군을 형성한 적이 없다. 시민군이라는 어감에는 ‘펄펄 날아다니는 용병 급 시민부대’라는 의미기 들어 있다. 이 500-600명의 시민군을 놓고 광주사람들은 홍길동 같이 나는 ‘연고대생’이라 불렀다. ‘시민군’은 이제까지 광주사람들 사이에는 연고대생이라는 전설로 통한다. 분명히 있었는데 안개처럼 한순간에 사라진 존재였던 것이다. 그 전설의 연고대생 시민군은 곧 북한특수군이었다.
2018.9.2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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