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에 대한 기본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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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4-11 19:01 조회6,1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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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에 대한 기본 지식
5·18은 겉으로 보기에는 광주시민들과 국가 사이에 발생했던 10일간의 무력충돌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16일, 김대중이 혁명내각을 구성한 후 감히 국가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고, 이에 최규하 정부는 5.17 자정, 김대중 내란음모 일당 26명을 전격 체포함과 동시에 전국계엄을 선포했다. 전국에 예비검속 경찰들이 쫙 깔리면서 젊은 사람들은 모두 다 종적을 감췄다. 그런데 매우 기이하게도 광주에서만은 홍길동처럼 나르는 청년 군병 600명이 동해 번쩍 서해 번쩍 광주의 부나비들을 몰고 다녔다. 1980년 5월 18일 09:30분경, 학생들로 위장한 250여 날랜 청년들이 전남대학에 숙영하고 있던 공수부대를 감히 찾아가 가방에 숨겨온 돌멩이를 던져 7명의 공수대원에게 유혈공격을 가한 후 금남로와 충장로로 도망을 해서 차량과 파출소를 태워 연기를 내 시민들을 모이게 했다. 그리고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환각제를 마시게 한 후 여성들의 가슴을 도려내 나무에 걸었다는 등 전라도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악성 유언비어들을 살포했다. 처음부터의 작전이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5.18폭동은 바로 이 순간으로부터 시작됐고, 5월 27일 새벽 05시 23분 주영복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한 순간에 종결됐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5·18광주시위는 국가를 상대로 한 ‘반국가폭동’으로 인식됐고, 당시의 법관들도 그렇게 판결했다.
하지만 이 사회는 때 아닌 민주화라는 광란의 쓰나미를 맞는 불운을 당하게 됐다. 광란이 휩쓸고 간 사회는 전과는 단절된 딴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 사회인식도 대법원 판결도 모두 거꾸로 뒤집혔다. 문명이 사라진 원시림 사회에 정권의 사생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라는 흉측한 괴물이 탄생했다. 헌법에서 규정한 일사부재리 원칙과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능멸했다. 헌법이 불법으로 규정한 관심법까지 동원하여 5·18에 대한 정통역사관을 뒤엎고 좌익세력과 ‘양아치로 대표되는 무산계급’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극시켰다. 반역의 5·18이 대한민국 역사에 화려한 획을 그은 민주화운동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이로써 예전의 ‘내란세력’이 ‘헌법수호세력’이 됐고, ‘내란’을 진압한 국가는 ‘헌법파괴세력’이 됐다. 이후 5.18은 국가의 이름으로 아래처럼 정의돼 있다.
“전두환은 5.17 비상계엄령 발동을 통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했다. 이에 광주시민들이 헌법수호를 위해 분기했고, 전두환 일당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 후 5.18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졌고, 5.18민주화에 대한 3개 법률이 제정됐다. 아울러 대법원은 1997. 전두환 등의 탄압행위를 헌정질서파괴행위, 내란행위로 보아 관련자들을 처벌했다. 위 각 법률 및 판결 취지에 의하면 5.18은 애국 애족의 귀감으로 항구적으로 존중돼야 할 대상이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이를 기리고 발전시켜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국가는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을 할 의무를 진다. 이에 5,700여 명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고, 국가는 매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이 운동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되었고, 그 기록물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라도 사람들이 지금도 외치고 있는 진실은 북한의 선동내용 그대로 굳어져 있다. 지금도 전라도 사람들은 광주 사망자가 2,000명이 넘고, 광주시가 피의 목욕탕이 되었고, 무차별 헬기사격에 의해 학살된 수천구의 시체가 집단으로 암매장 되었다며 2018년 2월말까지도 국가예산으로 광주의 땅들을 파헤쳤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와 표현은 1982년 북한이 뿌린 삐라내용과 일치하고, 전라도 사람 전체가 몰래 숨어서 보았다는 '광주비디오' 의 선동 내용 그대로인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공식자료와 북한의 선전내용은 많이 달랐다. 1995년 7월 18일 인쇄된 검찰보사결과에 의하면 광주시민 사망자 154명, 그 80% 이상이 계엄군이 없는 곳들에서 사살됐다. 계엄군이 소지하지 않은 카빙소총 등 무기고 총에 의해 사살됐고, 맞아죽고, 찔려죽고, 자동차에 깔려 죽었다. 대부분을 북한특수군이 죽여놓고 계엄군에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23명이 전사했고, 함평경찰관 4명이 지그재그로 돌진해오는 시위차량에 깔려 죽었다. 이에 추가해 한국사람 아닌 시체가 12구 있다. 북한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5.18민주화로 신분이 상승된 전라도 사람들은 이 사망자 수 154명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이를 거대한 태산으로 포장하기 위해 전두환과 공수부대를 살인마로 규정했다. 전두환의 발포명령에 의해 헬기까지 동원된 대규모 살육전이 전개되었고, 2,000명 이상의 시체가 집단 암매장되었다는 북한의 주장을 전 국민에 인식시키는데 천문학적인 돈을 써왔다. 10여 개의 영화를 만들고, 5.18체험학교를 만들고, 각종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학교에 교육재료를 책으로 만들어 뿌리고, 전국의 문고들을 허위사실들로 채웠다. 그 결과 대부분의 국민들은 5.18에 대한 위험한 허상들을 머리에 심었다.
이 책자의 저자 지만원은 이 모든 것이 허위이고 사기라는 것을 연구 17년 만에 9권의 책을 통해 밝혀냈다. 2014년까지의 연구결과는 5.18이 ‘다재다능한 살인기계로 훈련된 북한특수군’ 600명이 주도한 게릴라전이었고, 이에 개념 없는 양아치 급 10-20대 부나비들이 부화뇌동한 광란극이었다는 결론을 냈다. 여기까지 밝혀내는 데에는 검찰자료, 안기부자료, 5.18유공자들이 써낸 ‘항쟁자료집’ 북한의 대남공작역사책 등 문헌적 자료들을 사용했다. 정부가 보유한 문헌자료들에는 600명이라는 숫자가 들어있었고, 광주시민들로서는 도저히 꿈조차 꿀 수 없는 초특급 군사적전 내용들이 기록돼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안기부와 보안사 분석관들은 그 많은 인력규모를 가지고도 눈 뜬 장님이었다. 이러한 발견은 수천 명의 재래식 분석관들이 달려든다 해서 해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600명이라는 결론을 내자, 사람들은 전 국토가 철통같이 밀봉돼 있었는데 어떻게 600명씩이나 올 수 있느냐며, 내 연구결과를 백안시 했다. 나는 육사를 나왔고, 베트남전쟁에 4년 동안 참전하여 게릴라전의 생리를 터득했고, 군과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면서 북한정보를 공부했고, 군연구소에서는 한국의 해안방어와 대공방어에 대한 보고서를 쓰기 위해 전국의 해안과 고지들에 배치된 모든 레이더 및 방공포 기지를 다 점검했다. 이런 경험으로 판단하건데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전 국토는 밀봉돼 본 적이 없고, 당시 광주시도 계엄군에 의해 밀봉돼 있지 않았다. 틈은 지금도 얼마든지 있다. 최근까지 휴전선 곳곳에 노크 귀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틈이 많기 때문이다. “삼엄하게” “철통같이” 이런 말은 그냥 구호일 뿐, 현실은 그 반대다. 이런 말을 믿는 사람들은 현장 작전을 안 해 본 사람들이다.
600명의 북특수군이 광주에 왔다는 사실도 믿으려 하지 않는 척박한 황무지에서 나는 또 다른 600명 이상의 북한 민간집단이 정치공작 목적으로 광주에 왔다는 또 다른 사실을 보탰다. 2015년 5월 5일부터였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동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매우 귀한 과학적 탐구결과이기에 발표한 것이다. 이 공작집단에는 남녀 노인들, 10세 전후의 아이들, 예술가들, 인민배우들, 행정엘리트들, 체육인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 있었다.
북한집단은 증거를 남기지 않고 5월 24일 낮에 사라졌지만 수많은 현장 사진들을 남겼다. 수류탄과 TNT 더미 속에서 폭탄을 조립하고 있는 모습 등 수 백장 사진들에 등장한 모습들은 절대로 광주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들인 데다 그 중 561명의 얼굴이 북한 핵심 권력층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굴해 냈다. 광주 현장의 얼굴 하나를 컴퓨터에 걸어놓고, 이름 있는 수만 명의 북한 얼굴들을 일일이 대조하는 고가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없다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얼굴인식을 위한 과학적 업무를 일상화 하지 않았던 일반사람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꿈같은 특수영역이요 시력 상실이라는 엄청난 위험성을 전제로 하는 강도 높은 몰두의 작업이었다. 이런 작업을 2015년 5월 5일부터 지금까지 만 3년 넘게 수행한 것이다. 나라의 안녕을 생각하는 애국심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국 정보기관에서 영상분석 과업을 수행했던 사람들로 이루어진 팀이 3년 동안 작업을 해준 것은 신의 영역일 것이다. 한 장의 광주현장 사진 속에는 28명의 얼굴들이 찍혔는데, 그 28명이 최근 김정은과 함께 찍은 장군집단 속에 다 들어 있다. 2017년 3월 홍콩 주재 북한총영사 장성철이 홍콩 봉황-TV와 28분 동안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32회에 걸쳐 혀를 입술 밖으로 냈고, 우리 영상분석가는 그 32회의 순간을 다 정지영상으로 포착했다. 그런데 그 자는 5.18때 전남도청 정문 앞에서 교련복을 입고 있었다. 이 포착된 32개의 얼굴과 광주 현장 얼굴을 비교하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광주에 북한사람들이 오지 않았다는 주장은 이 하나의 사실만 가지고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이들 1,200명 이상이 어떻게 광주에 올 수 있었으며, 어떻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는가? 1979년 10.26사건 이후 김일성은 잠수함과 태백산맥 통로를 이용하여 10명, 20명, 30명 단위로 특수군을 침투시켰다. 일단 교두보를 형성한 다음 그들은 목포지역에 안전한 상륙지점을 확보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형 선박들을 이용해 마음대로 편하게 오갈 수 있었을 것이다. 중앙정보부 시절 간첩을 많이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모두 역공작에 의해 상륙지점을 미리 알고 그 지점에서 매복하고 있다 잡은 것이었지, 해안경비 시스템이 포착된 것이 아니었다.
5.18에 북한특수군이 개입했다는 단 한 개의 표현으로 인해 나는 2002년 안양에서 수갑을 뒤로 채인 채 6시간 동안 광주로 끌려가면서 자식 벌되는 광주검찰-경찰들에 쉴 새 없이 언어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당했다. 그건 생지옥이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었다. 인생의 추락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유명한 군사평론가에서 또라이로 매도된 것이다.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미친 사람이구먼” 그러나 지금은 정신적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영혼이 깨어 있고, 사고력이 살아 있는 많은 국민들이 나서서 5.18이 전라도 사람들의 사기극이었다는 사실을 널리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국회가 2018년 2월 28일 통과시킨 “5.18진상규명특별법” 제3조 6항에 “북한군 개입 여부를 규명하라”는 명령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곧 진상규명 작업이 시동될 것이며 늦어도 2021년 중순경에는 5.18이 민주화운동인지 아니면 북한군이 개입한 게릴라전이었는지 밝혀질 것이다. 따라서 그때까지는 법률적으로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닌 것이다. 100% 장담하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5.18의 진실은 연구결과 그대로 판정받을 것이다. 물론 열심히 싸워야 하겠지만, 싸우면 이길 수 있는 희망이 열려 있는 것이 그 얼마나 귀중한 하늘의 선물이던가.
2018.4.11.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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