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성, 재판 결과 위장탈북자라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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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12-01 17:11 조회9,13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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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성, 재판 결과 위장탈북자라 확신
위장탈북자들에 대한 문제제기
2015.10.30. 나는 ‘이제 만나러 갑시다’등 탈북자들이 판치는 TV 프로들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40여명의 탈북자들, 북한문제에 대해 방송에 단골로 나와 인기를 얻고 있는 탈북자들 중 40여명이 1980년 광주 현장에 얼굴을 들어낸 사람들로써 위장탈북일 가능성이 있으니 조사해 달라고 국정원에 직접 가서 신고했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50여명의 얼굴들을 인터넷과 화보에 공개했다. 이들 중에 장진성이 있었다. 광주 현장에서 노인, 어른 아이들이 함께 단체사진을 찍듯이 일부러 촬영한 사진 속에 많은 얼굴들이 북한에서 출세한 얼굴들로 판독됐다. 노숙자담요는 그 중 9살 난 아이의 얼굴을 장진성이라고 분석했고, 나는 이를 공개했다. 홍순경, 고영환, 김소연, 강철환, 안혁, 박상학, 정성산, 조명철, 강명도 등 굵직한 탈북자들이 여기에 포함됐지만 장진성 말고는 아무도 나를 고소하지 않았다. 장진성의 변호인이라 할 수 있는 검사가 장진성을 증인으로 불렀고, 장진성은 어제(11.30.) 서울중앙지법 525호법정에 증인으로 나왔다.
위키 백과에 기록된 장진성
장진성은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여 활동중인 북한 출신의 작가이다. 북한에서는 평양음악무용대학 졸업, 조선중앙방송위원회 TV총국 문예부 기자,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중앙당 통일전선부 101연락소 근무하다 2004년 망명하였다. 남한 입국 후 2010년까지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고, 현재는 대북전문매체 《뉴포커스》 발행자 겸 대표이다.
법정의 장진성 행동은 무례, 무도, 저속
증인석에 나오자마자 장진성은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나에게 적개심 어린 눈으로보며 실룩실룩 입 주위를 움직였다. 오후 2:40분부터 무려 2시간 반 동안 우리측 변호인이 장진성에 대해 140여개의 질문을 쏟아냈다. 그는 9살짜리 북한특수군으로 의심받은 사실에 대해 두 가지로 반박했다. 첫째, “발기도 안 되던 나이에 무슨 특수군이냐”는 표현을 했고, “그때(9살 때) 광주에 왔었다면 그때 탈출했을 것”이라 했다. 표현이 처음부터 저속했다. 시종 삐딱하게 앉아 주먹을 쥐고 그 주먹으로 뺨을 고여 입을 조금씩만 벌려 알아듣기가 곤란하게 하면서 변호사에게 눈을 부릅뜨고 “이런 질문 내가 왜 받아야 하나요?” 하고 대들었고, 역시 판사에게도 그런 말로 대들었다. 판사는 여러 차례 주의를 주고 달래가면서 대답을 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거짓의 화신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부분은 “대동강구역 문수동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갑자기 신경질을 내면서 “사적인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한다”고 비텼다. 재판장이 대답하세요 이렇게 말하자 그는 노코멘트라 말했다. 이어서“증인은 문수동에서 처와 아들 위금성이와 결혼생활을 했습니까?” 이렇게 묻자 똑같이“노코멘트 하겠습니다”이렇게 답했다. 장진성은 2011년 남한에서 또 결혼을 했고, 2012년 연말에 아빠가 된다고 했다. http://news.joins.com/article/8098466
장진성의 본명은 장철현 인 것으로 발표돼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위철현이다. 어제 이 사실 인정했다. 1971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생하여 몇 살 때 평양으로 갔느냐 물었더니 15세, 1987년이라 했다. 1987년이면 18세다. 평양음악무용대학 민족기악학과에서 무슨 악기를 전공했느냐 물었더니 퉁소과의 일종이라 했다. 조선중앙방송국 기자로 특채되어 2년 동안 일했고, 1996년부터 통전부 예하 제101연락소에서 2004년 1월까지 근무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표지 안 부분에 그의 학력을 평양음악무용대학을 기록하지 않고 오직 김일성종합대학으로 기재했다. 법정에서 물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다녔느냐?” “1997년부터 99년까지 3년간 다녔다”고 했다. “그러면 통전부에 근무하면서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녔다는 말이냐?” 이렇게 물었더니 “위탁교육”이라 실제로 나가지는 않았다고 했다. 위탁교육은 한국의 석사과정과 같이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를 믿을 사람 아마 없을 것이다.
“인터넷에 보니 증인은 2001년부터 2004년 탈북한 순간까지 인민군해군협주단“ 배우를 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 4년 동안 통전부에서도 근무하고 해군협주단에서도 근무했다는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장진성은 협주단에는 작가로만 근무했고, 1주일에 한번 정도만 근무했다고 했다. 남한의 프리랜서나 할 수 있는 “투-잡”인 것이다. 탈북 할 때 수천달러를 가지고 떠났다 하는데 얼마냐 물었더니 2-3천 달러라 했다. 인터넷 제보자의 말로는 해군협주단 공금 3천 달러를 가지고 청진을 통해 탈북했다고 한다.
장진성이 인민군 해군협주단에 근무했다는 사실, 장진성이 근무한 곳이 평양중앙방송국이 아니라 평양방송위원회 TV총국 기자였다는 사실, 장진성이 사리원에서 71년에 태어났다는 사실,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처와 아들 위금성이 있다는 사실은 제보자에 의해 안 것이지, 장진성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장진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 참으로 많다. 장진성은 판사, 검사 그리고 법정을 가득 메운 80명 정도의 방청인들 앞에서 모처럼 큰 소리로 말했다. “판사님, 저는 증인을 서려고 온 것이 아니라 저 미친 인간이 불쌍해서 치료하려고 나왔습니다. 탈북자들 모두가 저 피고인을 미친 인간이라고 합니다”
장진성은 국정원과 결탁한 전략적 탈북자
장진성은 국정원 등 합동조사를 받을 때, 황장엽 안가에서 특별히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국정원이 자기를 깨끗이 세탁해주었다고 해석되는 말도 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으면 국정원이 나를 국정원 산하 연구소에 10년 동안이나 선임연구원으로 근무를 시켰겠느냐?”나는 이 시점에서 국정원에 공식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한 개인으로서도 장진성이 위장탈북임을 의심하는 수많은 사실들을 발견해냈다. 장진성이 쓴 탈북스토리는 따로 있다는 것이 아마 아래의 신문내용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의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국정원 등은 도대체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이런 국정원이라면 차라리 해체되는 것이 백번 낫다는 생각을 한다.
장진성이 쓰고 말한 탈북스토리들
위 위키백과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왔다고 되어 있지만 그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정식으로 다니지 않은 것이 입증됐고, 통전부 산하 101연락소에 근무했다는 것도 의심이 간다. 그는 2004년 1월 25일 두만강 주변의 무산역에 내린 시점을 시작으로 탈북스토리 두 개를 썼다. 하나는 6년만인 2009년 탈북동지화 홈페이지에 6만 자에 가까운 “나의 탈북스토리”를 썼고, 그로부터 또 다른 2년 후인 2011년 말에 조갑제닷컴을 통해 완성본의 탈북스토리 “시를 품고 강을 넘다"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이를 근거로 하여 여러 매체들에 인터뷰를 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나는 결론을 내렸다. 진짜 탈북스토리는 따로 있고, 탈북 8년 만에 내놓은 탈북스토리는 소설이라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11월 30일 법정 질문(신문)을 통해 나는 이 결론이 맞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장진성이 나를 고소했기에 나는 여러 가지 공적인 자산을 얻게 됐다. 그가 거짓의 화신이라는 것, 품위가 없다는 것, 아무에게나 마구 대드는 공격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국정원과 한패로 국정원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울러 광주에서 얼굴이 찍힌 다른 탈북자들 역시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국정원과 결탁돼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매우 깊게 드는 것이다.
[중앙일보] "내 딸 100원에 팝니다" 北시장서 직접 목격후
http://news.joins.com/article/8098466
[탈북자동지회] “나의 탈북스토리”
http://nkd.or.kr/news/story/view/829
[RFA 초대석] 북한 통일전선부 출신 탈북시인 장진성
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rfa_interview/fe-si-03282011153816.html
곧 장진성에 대한 신문내용들을 정리해 게시할 것이다.
2017.12.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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