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우익으로 알려진 황호택이 이 정도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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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09-16 13:47 조회5,58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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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우익으로 알려진 황호택이 이 정도라면?
대포집에서 들은 소리 가지고 역사 평론하는 인간들
최근 들은 잡소리들을 가지고 역사가인체 하는 인간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나는 5.18과 4.3역사에 대해서는 많이 연구했고, 해방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개괄적인 프레임 정도는 잡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연구한 역사에 대해서만 아는 척을 한다. 그런데 여타의 사람들은 역사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 분야의 책도 정독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마치 자기가 역사를 혼자 다 아는 것처럼 요설들을 떤다. 동아일보 황호택은 우익사회에서 호감을 사고 있는 언론인이다. 그런 그도 12.12역사에 대해 얻어들은 내용들을 가지고 칼럼을 썼다. 2011년 5월 23일,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실장이 “5.16과 5.18‘이라는 제하의 칼럼을 쓴 것이다.
황호택의 잡소리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5·16과 전두환 보안사령관 작품인 5·18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거사 과정만을 놓고 보면 둘 다 집권에까지 성공한 군사반란(쿠데타)이다. 하지만 5·16과 5·18은 결정적 차이가 있다. 12·12와 5·18은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전두환 신군부는 1979년 12월 12일 밤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도 없이 체포하면서 총질을 했다. 5·18에 대해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현실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지만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잠들어 있는 영령들과 기록물을 보고 나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12·12와 5·18 세력의 정권이 끝난 뒤 양김 중에서 김영삼 씨가 정권을 먼저 잡은 것은 역사바로잡기를 위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처벌한 것은 김 전 대통령의 뱃심이기에 가능했다. 5·18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DJ가 단죄에 나섰더라면 정치보복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군부도 들썩거렸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과(過)는 1972년 10월 유신이 가장 크다고 본다. 유신 체제에서 국회 사법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고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폐해가 커졌다. 경제성장과 교육으로 깨어난 국민의식이 더 이상 폭압적인 통치를 원하지 않음을 박 대통령도 깨닫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마사태에 이어 궁정동의 총성과 함께 절대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민주화로 순조롭게 나아가지 못하고 신군부가 튀어나왔다. 5·18 세력은 국민의 소득과 의식수준이 높아진 시기에 대량살상과 구금, 인권유린, 해직, 공포 분위기 조성을 통해 정권을 장악해 민주화를 지연시켰다.”
전라북도 익산도 전라도인가?
이런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가,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았다. 고향은 전북 익산인데, 고등학교와 대학은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모르나 연세대에서 석사를 했고, ‘한국기자상’도 두 개나 탄 모양이다. 그는 “‘현실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지만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잠들어 있는 영령들과 기록물을 보고 나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는 말로 전두환이 대통령 재가도 없이 육군총장을 체포하면서 총질을 한 것에 대해 현실론을 펴는 것이 옳지 않은데 그 근거로 ‘기록물’들과 광주묘지를 들었다.
2005년, 대법원이 12.12-5.18 수사기록 공개하라 했으니 읽어봐라.
역사바로세우기 수사기록은 2004년 말까지 검찰청 지하 창고에 갇혀 있다가 2005년부터 대법원의 명령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필자는 검찰기록과 재판기록 모두를 다 읽었다. 이 모두의 엑기스를 500쪽 짜리 4권의 책에 담는 데만도 만 5년이 걸렸다. 정리해 보니 세상에 떠도는 말들, 좌파에 놀아난 언론들이 100% 다 근거 없는 것들이었다. 1995년 검찰은 그동안 언론들이 써댄 기사들이 다 허무맹랑한 소설이라고 못 박았다.(1995.7.18, 5.18관사건수사결과 197-216쪽)
1) 발포경위 2) 지휘체계의 2원화 3) 무기피탈 고의적 방치 4)헬기 기총소사 5)대검 및 화염방사기 사용 여부 6) 광주 외곽지역의 피해 진상 7)사망자 수 등 가장 말이 많았던 주장들에 대해 조사했지만 모두 사실무근이라고 결론지었다.
12.12 결단이 없었으면, 역사는 군벌을 장악한 김재규-정승화 쿠데타로 이어졌다
검찰의 수사기록은 1980년 것이나 1995년 것이나 조금도 변한 게 없다. 단지 기 기록을 해석하는 판사들의 판결이 세월과 권력에 따라 춤을 춘 것이다. 과거의 역적이 충신이 되고, 과거의 충신이 역적이 된 것이다. 수사 및 법정 기록에서 변론과 검찰들의 주장들을 대조해보면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정승화는 김재규와 혁명을 시도했다는 생각을 굳힐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수사권을 총 지휘했던 전두환에게는 당연히 정승화를 체포하여 수사할 명분과 임무와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대통령 직보에 대한 명분과 관례도 있었다. 그에 대한 논리는 변호인들과 감사들의 한판 싸움이 있었던 최종 변론종결일에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다.
12.12.에서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은 전두환이 아니라 역적 정승화였다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난 것은 정승화의 부관이 먼저 권총에 손을 댔기 때문이었다. 손이 권총을 향하는 순간 긴장하고 있던 수사관이 제압시킨 다음, 수사관이 부관을 향해 총을 쏘았고, 이 소리를 밖에서 들은 수사관이 전장 심리에 의해 하늘에 대고 공포를 쏘았다. 또한 공관의 2층으로 통하는 계단 위에서 정승화의 아들로 추정되는 사람이 우경윤 대령을 쏜 ‘총질’도 있다. 우경윤 대령은 그 총상으로 지금까지 하반신 마비가 되어 있다. 여기에서 ‘총질’이라는 단어를 황호택이 사용했지만 이 총질이라는 단어는 김영일 1심 재판장이 신군부를 증오하는 심정으로 법정에서 사용했던 단어다.
10.26이후 정승화의 행보, 당시 최규하가 사용하던 총리공관의 상황, 국방장관이 지휘권을 팽개치고 여의도로 미8군으로 육군본부, 심지어는 국방부 계단 밑으로 숨어 다니면서 재가를 지연시킨 사실, 육군총장 공관에서 발생했던 상황들에 대한 기록들을 황호택은 읽어보았는가? 이에 해당하는 수사기록을 읽어보았는가?
적어도 동아일보 논설실장을 하고, 연세대에서 석사를 하고, 기자상을 2회나 받았으면, 2005년부터 수사기록이 공개됐을 때, 필자보다 먼저 수사기록들을 읽고 역사를 공부한 후에 역사 평가를 했어야 했다. 도대체 황호택은 무슨 기록들을 보고 그토록 큰 소리를 치면서 주워들은 말들을 가지고 감히 역사를 함부로 평가하는가?
김영삼은 배운 게 없는 정치 건달일 뿐이었다
그가 무슨 기록들을 보고 그런 역사관을 당당하게 썼는지 신문사의 고객인 독자들은 알고 싶어 할 것이다. 기록들을 보면 김영삼은 1995년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20억을 받았다면 노태우 밥상머리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몇 천억원을 받았을 것 아니냐, 밝혀라” 이런 궁지에 몰렸다. 이런 비난들을 피하기 위해 국면전환용으로 전두환을 희생시킨 것이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었다. 황호택 류의 언론인들은 앞으로 역사평을 하려거든 최소한 필자가 쓴 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라도 한번 쯤 읽어보고 쓰기를 바란다.
검찰보고서와 북한의 대남공작 서적들을 보라, 거기에 5.18은 북한이 주도했다는 내용 있다
5.18광주사태는 지식인이라면 누가 보아도 내란 폭동이다. 2010년 진실화해위가 5.18을 반란이라 정의한 것을 황호택은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5.18 상황일지가 검찰보고서에도 정리돼 있고,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들에는 더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런 기록들을 보았다면 5.18은 누가 평가를 해도 빨갱이 역사요 북한의 역사다. 황호택은 도대체 무슨 기록들을 보았기에 이리도 용감한가?
이 잡놈들아, 유신이 있었기에 한강기적 일구어냈다
그리고 황호택은 1972년의 유신이 문제라고 하는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바로 1972년부터 급성장했다. 세계적인 오일쇼크로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불황을 겪고 있을 때 오로지 박정희가 이끄는 한국만 평균 13%의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세계인들은 그것을 ‘한강의 기적이라 불렀다. 박대통령의 발등에 새까맣게 달려들어 물어뜯는 빨갱이들, 사이비 정치건달들을 일시적으로 묶어놓지 않고서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할 수 없었다. 1972년에 황호택은 겨우 전북 어느 지역에서 고등학교 1학년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어떻게 해서 이룩한 것인지, 그 때의 정치건달들과 빨갱이들이 얼마나 박대통령을 물고 늘어졌는지 알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1972에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정권잡았다면 대한민국은 그 때 소멸됐다
만일 그 때 김대중이나 김영삼에게 정권이 넘어갔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 김씨 왕족 치하에 살고 있을 것이다. 황호택은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황호택이 17세였을 때 필자는 30세의 대위로 이미 월남전에서 44개월 간 공산주의자들과 전투를 끝내고 국방부에서 해외무관 업무를 관장하는 참모로 근무하고 있었다. 황호택은 1972년의 의미를 민주화라는 한 가지 잣대로만 판단하고 있다. 누군들 민주주의를 싫어할 사람 있었겠는가? 이 덜 떨어진 인간들아.
민주화? 1972년, 미국에서는 백인식당에 흑인 못 갔다. 뭘 알기나 하고 떠들어라
1972년을 말해보자. 당시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는 백인이 경영하는 식당에 흑인이 갈 수 없었다. 지금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1972년에 있었다면 한강의 기적도 없었다. 이 덜떨어진 인간들아. 1972년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권총 한 자루, 문드러지지 않는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정밀도나 강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가 주도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역사상 최초로 ‘자주국방’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율곡사업’을 시작했다. 그게 1972년부터였다. 이 인간들아.
박정희가 한 일, 세계의 그 어느 영웅도 지략가도 상상 못해
미국에서는 한 물 간 방위산업 제품들, 소총, 박격포, 전화기 등을 자체 모방 생산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부터 각 제품에 대한 설계도와 스펙문서들을 배로 실어 날랐다. 여기 저기 공단을 세워 이들 제품을 만들라 업체들을 지정해 주었지만 업체들이 영문으로 된 스펙서류와 설계도(Technical Data Package)를 읽을 리 없었다. 외국에 나가 있는 과학기술자들을 최고의 대우를 해주면서 초청해와 이들로 하여금 업체 인력을 양성케 하고 지도해주었다. 공업기반, 생산기반시설이 이때부터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에는 가발시대로 대표되는 가내수공업 시대였다. KIST, 과학원, 국방관리연구소가 이때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박대통령이 1972년에 유신을 하지 않았으면 단언하건데 이런 기술혁명은 없었다. 그 누구도 박대통령처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황호택은 이런 걸 제대로 알기나 하고 유신을 욕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호택은 이 나라 민주화가 386으로 대표되는 공산화인 줄 아직도 모른다는 말인가?
2017.9.1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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