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성 광주판사에 보내는 북한군개입 추가증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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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08-08 16:59 조회5,33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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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성 광주판사에 보내는 북한군개입 추가증거2
김영택기자의 500명과 5.18기념재단 500명
1. 김영택기자의 500명
광주출신 동아일보 기자 김영택이 검찰에서 “복면한 500명”이 무기반납을 방해하고 계속해서 싸우자고 선동“한 사실을 증언하면서 그 500명의 외지인이 전두환이 광주사태를 키우기 위해 위장 침투시킨 정부군일 것이라고 믿는다는 내용을 검찰에서 진술하였습니다. 수상한 집단 500명에 대한 해석은 달랐지만 그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을 한 것입니다. 아래는 그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DKjb&fldid=eeo&datanum=50
[5월22일 광주시내]金泳澤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의 5·18
『500여 명의 시위대를 新군부 측이 의도적으로 투입시켰다』(金泳澤씨의 주장)
진술조서(제2회·1996년 2월7일·요지)
金泳澤(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문 진술인은 5·18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당청에 왜 서신을 우송했나요.
답 서신내용에 기재된 바와 같이 5·18 광주사태는, 全斗煥 보안사령관 등 新군부 측에서 12·12 사건을 통해 군권을 장악하고 다시 정권까지 갈취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광주시민들을 폭도화시킨 후 이를 진압함으로써 결국 정권장악에 이르게 된 것으로 생각되므로 그에 대한 근거자료를 제공하여 주기 위해서 제가 위와 같은 서신을 우송하여 드린 것입니다.
문 그럼 全斗煥 등 新군부 측에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광주사태를 유발하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라는 말인가요.
답 예, 제가 5·18 광주사태 당시에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로 재직하면서 느낀 바로는 분명히 5·18 광주사태는 全斗煥 등 新군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야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 진술인은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시위현장에 투입된 상황을 실제로 보았나요.
답 예, 제가 당시 취재하면서 위와 같이 항쟁본부에서 스피커를 통하여 발표하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그 당시 도청 앞 광장에 20~30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도착하자 기존의 시위대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했고, 서로 간에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습니다.
문 그전에도 연·고대생 30여 명이 광주시내에 도착했다고 했는데, 어떤가요.
답 위와 같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500여 명이 광주시내에 나타나던 날 10시45분에 저는 도청 앞에서 취재하고 있었는데, 항쟁본부에서 스피커를 통하여 연·고대생 30명이 광주에 도착했다고 하며 위와 같은 방법으로 환영행사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 위와 같이 대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을 新군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투입했다면, 왜 시위대 측인 항쟁본부에서 그들을 환영했을까요.
답 그것은 시위대들이, 그 대학생들을 新군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위장투입했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그 다음날인 5월23일 오후경 복면부대가 나타나 시위를 더욱 과격화시키고 확산시켰다고 했는데,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위하던가요.
답 저는 당시에 도청 앞 및 금남로 일대에서 복면부대들이 하는 시위광경을 지켜보았는데, 그들은 수십 대의 버스와 트럭 등 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몽둥이를 각자 하나씩 들고 차량을 치면서 『全斗煥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계엄해제하라』, 『金大中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를 통하여 주위에 있는 기존의 시위대들로 하여금 시위를 과격하게 하도록 유도했으며, 그때부터 시위는 더욱 가열되고 확산되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시위대학생 등이 총기를 반납하고 대화로써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며 총기를 반납하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우리는 끝까지 투쟁을 하여야 한다』고 외치면서 시위를 과열시켰습니다.
문 진술인의 서신내용을 보면 위 복면부대들은 정규 정보원이 아니라 무연고자인 광주 무등갱생원 원생들로서 광주사태 당시 위와 같은 의도하에 이용당한 후 전부 집단으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의 설을 접했다고 했는데, 어떠한 경위로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었나요.
답 저는 최근까지도 全斗煥 등 新군부 측에서 정권찬탈을 기도하고 시위대들을 폭도화시키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광주사태를 의도적으로 악화·확산시킬 의도로 정규정보원을 투입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5년 12월 초순경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저의 친지로부터 그 당시 투입된 복면 부대원들은 정규정보원들이 아니고 광주 무등갱생원 원생들로서 그들은 시위에 투입되어 위와 같이 이용당한 후 집단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저는 단순히 첩보제공의 차원에서 김상희 부장검사에게 사신을 보냈을 뿐입니다
2. 5.18기년재단 공식 기록에 기재된 서울서 온 대학생 500명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타임라인(상황일지)에도 ‘서울서 온 대학생 500명 환영행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현재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타임라인’에는 “1980년 5월 22일 15:08 목요일 맑음 서울서 대학생 500명 광주도착 환영식 거행”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이 이 기록은 2013.부터 2년 동안 기록에서 사라졌다가 2016.6.경 다시 원상복구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22일 15:08 목요일 맑음 서울서 대학생 500명 광주도착 환영식 거행”이라는 기록은 2013.7경, “시위도중 연행된 시민학생 등 800명 석방되어 도청도착” 이라는 내용으로 조작됐습니다.
http://www.newstow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5697
그러다 가2016.6. 한 네티즌이 “최초석방자는 33명이고, 이들은 5월 23일 19:40분에 도청광장에 도착했다고 같은 타임라임에 기록돼 있는데 5월 22일 15:08분에 석방자가 800명씩이나 도청에 왔다는 게 말이 되느냐 따지자 다시 원상복구되었습니다. 5.18단체가 불리한 기록을 자꾸만 조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결
김영택기자의 검찰조서 내용을 보나 5.18기념재단 기록을 보나 외지인 500명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분명하게 존재했던 이 500명 외지인에 대한 정체가 공식 부정되거나 해명되지 않는 한 5.18을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며, 5.18에 북한군이 절대로 오지 않았다 재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500명은 5.18의 성격규정을 하는데 반드시 풀지 않으면 안 되는 목엣가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핵심쟁점에 대해 누가 규명하였습니까. 1997대법원이 규명하였습니까. 미CIA가 규명하였습니까. 김관진과 정홍원이 규명하였습니까. 전두환이 규명하였습니까. 5.18특별법이 규명하였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5.18에 외지인 개입이 전혀 없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는 “증명이 없는 판단”의 전형이 될 것입니다.
박길성, 전남보성 고교 검정고시 건대
2017.8.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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