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와 유공자 (민족의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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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의천황 작성일17-05-26 10:39 조회5,726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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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기자는 부마사태 관련 책을 쓰던중 광주 사태가 발생하자 신문사에 휴가를 내고 광주 사태를 취재하러 갔다고 한다. 1980년 5월22일에 광주 외곽에 도착해서 23일 광주에 걸어서 들어갔다고 한다.
5월21일에는 시민군과 공수부대 간에 충격전이 발생하고 계엄군은 광주에서 모두 철수하고 계엄군에 의해 봉쇄된 상태에서 광주에서 취재했다고 한다.
5월22일 광주에 도착해서 26일 밤 까지 직접 확인한 시신이 모두 105구 인데 주로 머리 총상이 많았다고 한다.
광주사태 취재는 5월 22일 광주 외곽에 도착해서 23일 광주에 걸어 들어가서 26일 밤까지 직접 관뚜껑을 열고 확인한 시신이 105구 이고 27일 까지 취재 했다고 한다.
시신 확인은 전남도청이 시민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에서 총으로 무장한 시민군 틈에 있다가 도청 앞에 깔아놓은 사망자들의 관 뚜껑을 열어서 직접 확인 했다고 한다. 시신은 전남 도청에도 있었고 병원에도 있었는데 26일 밤까지 105구의 시신을 직접 확인 했었고 취재 당시 지역감정은 없었고 안심하고 취재 할수 있었다고 한다.
그후 27일 새벽 계엄군 몇개 중대가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시민군 17명 정도가 죽고 국군은 3명이 죽었다고 한다.
전남도청 수복작전을 펼치기 전에 전경들은 시민군이 몰려오자 사복으로 갈아입고 모두 도망 갔고 그 중 한명이 사태가 수습된후 조갑제 기자에게 찿아와서 점심식사를 대접하면서 5일동안 숨어 지냈는데 광주 아저씨가 숨겨 주었고 자신은 대구 사람이고 전남도경 소속 전경인데 이번 사태의 원인은 지역감정은 아니고 계엄군의 과잉 진압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하면서 이 사실을 보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조갑제 증언에 의하면 광주시가 21일 시민군과의 총격전이 일어난후 계엄군이 광주에서 모두 철수하고 광주시가 봉쇄된 상태에서 걸어서 23일 광주에 들어갔으며 시민군이 총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그들 틈에 있다가 전남도청 앞에 깔아놓은 관을 보고 관 두껑을 열어서 사망자의 상태를 직접 확인했으며 26일 까지 105구의 시신을 확인햇다고 한다.
- 조갑제 기자는 어떻게 광주시가 계엄군에 의해 봉쇄된 상태에서 광주시에 들어가서 총으로 무장한 시민군들 사이에서 직접 관 뚜껑을 열고 105구의 시신 확인을 할수 있었을까 ?
이게 사실 이라면 조갑제 기자는 그 당시 독일인 기자 힌터펜츠와 같은 방법으로 광주에 잠입해서 안심하고 취재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조기자와 힌터펜츠의 차이점은 힌터펜츠는 사진과 동영상을 많이 남긴 반면 조기자는 그 당시 취재한 사진이나 동영상이 전혀 없다. 취재기사는 신문사에 송출 했다가 국제신문사의 처지가 난처하게 되어 해직 됐다고 한다.
그 당시 전경과 계엄군이 시민군에 의해 모두 도망가고 의심스러운 광주 시민은 끌고가서 고문하고 살해되는 상황에서 시민군 틈에서 관뚜껑을 열어서 시신을 직접 확인하고 안심하고 취재를 했다면 독일인 기자 힌터펜츠와 마찬가지로 국내 기자로는 유일하게 시민군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지금까지 밝혀낸 광주사태 당시 시민군의 활약상과 영상 분석에 의하면 광주 시민으로 위장한 북한 특수군은 독일인 기자 힌터펜츠를 모략 선전용으로 매수해서 광주시 까지 차를 태워 호위하고 동영상과 사진촬영에 적극 협조한 것으로 분석됐다.
광주사태가 끝난후 도망갔던 대구출신 전경이 자신에게 찾아와서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시민군에 쫒겨 5일 동안 숨어지내는 동안 광주 아저씨가 잘 숨겨 주었고 이번 사태는 지역감정과는 무관하고 계엄군에 의한 과잉 진압이라는 사실을 보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는데
그 전경은 어떻게 조갑제씨가 기자인줄 알고 찾아왔으며 광주 사태가 일어난지 열흘 만에 (1980.5.18 ~5.27 새벽) 광주 사태의 원인이 계엄군의 과잉진압 이라고 단정하고 보도 해달라고 부탁했을까 ?
조갑제 기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전남도청 앞에서 한 시민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진이 있는걸로 봐서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도 가고 전남도청에도 간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조갑제 기자는 그 사진의 주인공이 자신인지 아닌지 지금까지 밝힌적도 없고 지만원 박사와의 공개토론도 거부하고 있다.
만약 조갑제 기자가 그 당시 광주사태를 취재하고 취재기사를 신문사에 송출했다가 국제 신문사의 처지가 난처하게 되어 해직됐다면 조갑제 기자도 5.18 유공자에 선정됐을 가능성이 많다.
국가보훈처와 광주시가 5.18 민주화 유공자 명단 공개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조갑제 기자가 5.18 민주화 유공자에 선정되었는지 아닌지는 본인이 직접 밝히지 않는 이상 알수 없다.
조갑제 기자가 5.18 광주사태 취재 및 그로인한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직되었다면 조갑제 역시 5.18 민주화 유공자에 선정됐을 가능성이 많다.
만약 조갑제 기자가 5.18 민주화 유공자 라면 광주사태의 북한 특수군 개입사실은 목숨걸고 인정하기 싫을 것이다.
조갑제 기자가 5.18 민주화 유공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이라도 5.18 민주화 유공자 신청하면 얼마든지 5.18 민주화 유공자에 선정될수 있을 것이다.
1980년 5월 31일 계엄사령부는 “광주 사태로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모두 170명이 사망했으며, 민간인 127명, 군인 109명, 경찰 144명 등 380명이 다쳤다”고 공식발표했다.
사망 170명,부상 380명, 합계 550명인데 2014년 7월 5.18유공자는 4643명 이고 2017년 2월에는 5769 명으로 늘어났다.
조갑제 기자는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국제신보 기자로 있을 무렵 포항 앞바다에 유전이 발견 되어서 " 한국도 곧 산유국이 될 것" 이라는 희망에 덜떠 있을때 조갑제 기자는 기사 작성을 위해 석유 시추에 대해 공부한 결과 석유 시추에 관해서 의문을 품고 광구 시추를 맡은 미국 쉘사(社)의 사무실 쓰레기통을 뒤지는 등의 열성을 보이며
정보를 모아 포항 앞바다 유전이 경제성이 없는 유전이었음을 밝혀내 이를 보도했다.
포항 석유 시추는 중앙정보부에서 관리하면서
박 대통령이 실망할까봐 보고를 하지 않았었고, 언론에 압력을 가해 석유관련 보도 금지를 해 놓았었던 상태였으나,조갑제
는 철저한 자료 분석에 근거해 포항유전의 비경제성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고, 200부를 찍어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석유관련 정부부처, 각 언론사 주한 외국 특파원 앞으로 발송 하였다.이후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기자직에서 해고를 당했다.
그후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고
중정 부장이 바뀌자, 복직을 할 수 있었고, 이후 80년에 신군부의 만행을 취재하겠다며 광주로 단독 잠입취재를 갔고,
회사에는 아프지도 않은데 병가를 제출. 이후 광주에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해 신문사에 송출 하였다. 이것 때문에 국제신문사의
처지가 난처하게 되어 또다시 해고를 당했고, 이후 같은 해 8월 신군부는 전국 언론사에 조갑제를 해임시키라는 지시를 내리며 확인사살 되었다.
댓글목록
진리true님의 댓글
진리true 작성일
조갑질은 그렇게 해서라도 밥줄을 잡고 사는 직업이나,
당시, 삼엄한 전시상황같은 곳에 동료 기자의 동행도 없이,
호랑이-굴에 들어갈 정도로 야심찬 기자였다면?
왜? 나라를 위하여, 바른 보도를 지금까지 내놓지 못했을까?
거짓-보도로 해직당한 원한을 복수하려는 마음이 졸렬한 생김새에서도
묻어나온다. (= 추한 모습으로 늙어감)
좌익세력으로부터 생계를 지원받으며 살아왔을 것이 자명하여,
이중생활(이중 숙주 -문화간첩) 이 몸에 배었을 것임.
지만원님의 댓글
지만원 작성일
위 내용들이 조갑제가 기술한 내용이라면 그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5월 21일 밤부터 도청은 북한군 사령부가 되었습니다
5월 23일에는 힌츠페터가 잠입해 북한집단이 기획한 모략장면들을 정신 없이 찍어댔을 때였고, 북괴군이 김인태, 김중식을 프락치로 의심해 도청으로 끌고 들어갈 때였습니다. 김중식을 끌고 들어갈 때 도청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조갑제와 닮았다는 의견들이 많습니다.
전경이 광주시에서 도망가 씨도 없이 사라진 날은 5월 21일 오전이었고, 그후부터 27일 수복된때까지 전경은 씨가 말라 있었습니다, 자기가 갔을 때 전경이 도망갔다는 조갑제 진술은 사실과 다릅니다.
5월 21일 저녁부터 시체는 북한군이 배타적으로 괸리했기 때문에 5월 23일 부터 조갑제가 109개의 관을
열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조갑제는 관 속에 시체들이 맨몸으로 누워 있었던 것처럼 "그가 본 대부분의 시체는 머리가 총에 맞은 시체였다" 했습니다. 하지만 관속에 있는 모든 시체들은 더운 여름이라 송장 이 부식-줄줄 흘러나오는 송장물의 악취가 진동해 비닐로 둘둘말은 후 관속에 넣었습니다.
5월 23일, 여장을 한 리을설이 하얀 찔레꽃이 얹혀진 관을 잡고 엉엉 우는 사진이 있습니다. 시체들 중 인민군이 있다는 뜻입니다. 430구의 시체는 5월 22일 새벽 이전에 청주로 옮겨졌고, 23일에 남아 있는 시체는 광주시민 시체와 일부 북한군 시체였습니다. 리을설 등 북한 사령부가 지키고 있는 관들에 조갑제가 접근한다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이고, 관뚜껑을 열 수도 없었거니와 설사 열었다 해도 시체는 이미 비닐속에 들어 있어 상태를 파악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냄새도 진동했을 것입니다. 109구의 시체 대부분이 머리에 총을 맞았다고 한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이는 통계와 전혀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