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열린 박정희 탄생 100돌 학술대회(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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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7-05-17 01:28 조회5,179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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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16혁명 발발 57돌이 되는 날이다. 민족의 운명을 통 채로 바꾸었던 거대한 혁명이 있었던 날이었지만 5.16혁명을 기념하는 행사는 보이지 않는다. 5.18행사는 해마다 시끌벅적하건만, 박근혜는 대체 무얼 했더란 말인가. 박근혜는 자신이 침몰하면서 박정희까지 침몰시켜 버린 모양이다.
올해는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박정희 탄생 100돌을 맞아 조촐한 행사가 열렸다. 오늘 제주대학 아라컨벤션홀에서는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주관으로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 제주학술대회'가 열렸다. 박정희 학술대회가 제주에서 열린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학술대회가 제주에서 열린 것은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좌승희 이사장이 제주 출신이어서가 아니다. 제주도는 박정희와 특별한 인연을 가진 곳에서도 가장 인연인 깊은 곳이다. 제주도 곳곳마다에는 박정희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고, 제주도 처처마다에는 박정희의 숨결이 스며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제주도는 박정희의 꿈의 실현장이었다.
박정희가 제주도를 처음 방문한 것은 1961년 9월 8일이었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초도 순시 차 제주를 방문했다. 박정희는 "제주도는 꼭 한번 오고 싶었던 곳인데 난생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어 감회가 깊다"고 밝힌 뒤 "공중에서 내려다 본 제주도는 산업발전 소재가 잘 구비된 살기 좋은 곳으로, 각별한 관심을 가져서 발전케 할 것이다"라고 언명하였다.
2박3일 예정으로 제주도를 순시하던 박정희는 체류를 하루 더 연장하여 제주도 관광에 나섰다. 서귀포 해안을 구경하던 박정희는 쌀쌀한 날씨였지만 중문 앞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즐기기도 했다. 배 위에 올라온 박정희는 빌려 입었던 수영 팬티를 직접 빨아 건네주는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는 재임 기간 중 제주도를 총 25회 방문했다고 한다. 당시 제주도에는 물이 없었고, 길이 없었고, 먹을 것이 없는데다가, 4.3으로 민심마저 피폐해 있었다. 박정희는 제주에 내려올 때 마다 관료들을 다그치고 격려하면서 제주도 혁명에 시동을 걸었다. 길과 물의 혁명은 제주도 혁명의 시발점이었다.
박정희 강력한 후원으로 제주에서 최초인 포장도로인 5.16도로가 개설되었다. 제주에서 서귀포시로 가려면 빙 둘러서 가야했지만 5.16도로 개설로 제주도가 1시간 생활권으로 좁혀졌다. 어승생 계곡에 댐을 만들어 수도 개설도 추진되었다. 이때 박정희는 도지사에게 수도 개설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묵고 있던 호텔 메모지에 대략 설계도를 그려주기도 했다. 이 설계도는 지금도 남아있다.
박정희는 제주 순시 중에도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차에서 내려 일일이 악수를 청하고 '잘 살 수 있다'고 격려했다. 어느 도지사의 회고에 따르면 "대통령이 제주도를 보는 모습은 자기 집 정원을 보는 것 같았고, 제주도민을 대하는 대통령의 소박한 마음은 마치 떨어져 있던 가족이 상봉하는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
제주 경제를 지탱하는 삼두마차인 관광, 감귤, 축산은 모두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밥그릇이었다. 제주도는 지금도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밥그릇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의 신제주도 박정희가 구상하여 도지사들을 닦달하며 추진했던 신도시였고, 신제주 중심에 있는 삼무공원에는 기차 한 량이 전시되어 있다. 기차를 구경하지 못하는 제주 어린이들을 위한 박정희의 배려였다.
탐라시대나 조선시대나 일제 시대나 제주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은 비슷했다. 기울어진 조그마한 자갈밭에 보리를 심고, 나지막한 초가집에 바닷가에 솟는 용천수를 마시며, 돼지를 키우는 변소에 볼 일을 보며 살았다. 오천 년 동안 변화가 없던 삶의 방식은 박정희가 나타나면서 제주사람들은 비로소 살아가는 방식을 바꿀 수 있었다.
제주도의 5.16도로는 이름을 바꾸자는 반대론자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이름을 지켜내고 있다. 박정희가 제주에 뿌려놓은 씨앗이 깊게 뿌리가 박혀있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탄핵 당하자 개그맨 김제동이 다시 5.16도로의 이름을 바꾸자고 들고 나섰다. 문재인은 박정희 잔재를 척결하는 것이 적폐청산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너희가 무슨 수로 박정희를 청산할 것인가. 너희가 무슨 수로 5.16도로를 걷어내고, 제주도 감귤을 걷어내고, 경부고속도로를 걷어낼 수 있단 말인가. 김정은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핵폭탄이라도 떨어뜨리겠다는 것인가. 한민족이 멸망하지 않는 한 박정희를 지울 수는 없다. 그럴수록 국민들의 가슴에서 박정희는 계속 커갈 뿐이다.
문재인은 박근혜보다 더 좋은 정책을 제시하여 대통령에 오른 것이 아니라, 박근혜를 짓밟고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를 짓밟는다고 해서 박정희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 박정희를 능멸하고 싶다면 박정희보다 더 좋은 혁명으로, 박정희보다 더 아픈 노력으로 박정희를 능가하여, 국민들의 뇌리에 위대한 영도자였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비바람
박정희와 비바람의 추억
유엔총회에서 필리핀 수석대표가 태풍 하이옌의 피해를 입은 필리핀에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하면서 눈물의 연설을 했다고 한다. 필리핀의 피해는 2004년 발생했던 인도양 지진해일 피해규모를 능가한다고 한다. 눈물의 호소 덕분인지 필리핀에 국제사회의 손길이 이어진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인 느낌이다.
내가 사는 제주도는 태풍이 많은 지역이다. 내 필명이 비바람인 것도 태풍과 관계가 있는 이름이다. 몇 년 전 나리 태풍이 제주를 방문했을 때는 태풍의 위력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급류로 변한 복개도로에는 차량들이 떠내려가고, 아래쪽에서는 떠내려가던 차량들이 담장을 부수고 집안 거실로 들어가기도 하고, 떠내려온 차량들이 흡사 폐차장처럼 산더미를 이루기도 했었다.
아마도 필리핀이 하이옌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처럼, 제주도에도 잊지 못하는 태풍이 있는데 바로 사라호 태풍이다. 내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 사라호는 제주를 방문했다. 그래서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소싯적에비바람이 거세어지는 날이면 부모님은 예외 없이 그때 그 사라호를 언급하곤 하시면서 몸서리를 쳤다.
사라호는 1959년 9월 16일 제주를 덮쳤다. 9월 16일은 추석 전날로 '명절 떡 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불어대던 비바람은 저녁때부터 악마로 변했다. 사라호는 악귀처럼 날뛰면서 진흙집에 짚으로 지붕을 덮고 사는 초가집 마을들을 유린했다. 창호지 문은 쓸모가 없어져 방안으로 굵은 빗방울과 거센 바람이 날아들고, 초가지붕은 힘없이 벗겨지고, 지붕 위로는 부서진 문짝들이 날아다녔다.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태풍에 특화된 마을이었다. 담장은 무거운 돌담으로 만들고, 지붕은 새끼줄을 단단히 꼬아 가로 세로로 촘촘히 덮어, 그야말로 비바람이 상습적으로 치는 섬에서, 비바람과의 전쟁을 위해 완전 무장을 하고 사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사라호는 이런 원시적인 방패들을 비웃으며 제주도를 초토화시켰다.
해마다 두서너 개까지 태풍은 제주를 방문했다. 고요한 마을에 비바람이 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전깃줄은 귀신처럼 울부짖고, 나무들은 머리를 풀어헤쳐 몸부림치고, 몇 집 건너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는 진군하는 군마들의 말발굽 소리로 들렸다. 태풍은 전쟁이었다. 비바람은 내 유년의 아이콘이었고, 제주도의 모습이었고,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그 섬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사라호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사망자 849명, 부상자 2,500여 명, 이재민 37만 3,459명을 남겼다. 사라호는 우리나라에 비바람을 몰고 온 손님 중 가장 규모가 큰 태풍이었고, 역대 가장 많은 피해를 남긴 태풍이기도 하다. 1959년은 초가집과 판잣집의 시대였다. 이런 것들은 태풍과 겨루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것들이었고, 태풍의 먹잇감으로 딱 좋았다.
필리핀의 태풍 피해가 막심했던 이유 중의 하나에는 필리핀의 후진성도 일조를 했다는 생각이다. 대리석 건물보다는 판잣집이 태풍에 취약한 것은 불문가지, 필리핀에 목제건물이 많았던 것은 태풍 피해를 키운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이옌이 덮친 지역에 전부 석조건물이나 빌딩들이 들어서 있었다면 당연히 피해는 지금보다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라호가 찾아왔을 때 우리는 세계의 최빈국에 속했다. 그때 필리핀은 아시아의 선진국이었고 6·25 참전국이기도 했다. 필리핀의 기술자들이 장충체육관을 지었고, 1966년에는 박정희가 돈을 빌리러 필리핀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때 박정희는 '우리 대한민국도 필리핀처럼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게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라호가 우리를 찾아오고, 하이옌이 필리핀을 방문하기까지 약 두 세대가 흘렀다. 하이옌의 필리핀의 모습은 사라호의 우리의 모습을 닮았다. 두 세대 만에 두 나라의 모습은 정 반대쪽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초가집의 나라에서 대리석의 나라로 탈바꿈을 했고, 필리핀은 판잣집의 나라로 국내총생산 세계 165위로 후퇴를 했다. 결정적으로 우리에게는 박정희가 있었고 필리핀에는 박정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디오가 생기고부터 부모님은 태풍예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불시에 기습을 받는 것보다 태풍과의 전투에서 유리했다. 태풍예보가 내려지면 부모님은 초가지붕 위에 무거운 것들을 올려놓거나 끈으로 더 동여매기도 하셨다. 바람에 날아갈 만한 것들은 안으로 옮겨놓고, 창호지를 바른 문에는 비닐을 씌우거나 멍석을 대기도 하셨다.
이런 원시적인 무기를 들고 비바람과 싸우는 민초들 앞에 지도자가 나타났다. 박정희는 그런 방법을 쓰지 말고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석조건물을 짓는 방법을 알려줬다. 석조건물을 짓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 그것은 열심히 땀을 흘리는 '근면'이었다. 박정희는 근면이라는 하나의 무기로서 굶주림을 물리치고 인간을 괴롭히는 자연재해를 물리쳤다.
필리핀에 목제건물 대신에 대리석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면 피해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필리핀에도 박정희가 있었다면 1만여 명 이상이 사망하는 저런 대참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가 사리사욕을 탐했다면 우리도 필리핀을 닮았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 이익이나 명예보다 언제나 국가와 민족이라는 대의를 선택했던 박정희가 있었기에 우리는 어지간한 태풍에 코웃음을 치게 되었다. 박정희가 있었기에 대리석 건물에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3. 11. 13.
비바람
- 拙著 '대한민국의 far and away'에서 발췌
5·16道路
제주도에는 5·16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로가 있다. 5·16도로는 제주시와 서귀포를 연결하는 가장 빠른 도로로서, 제주시에서 출발하여 한라산 동쪽 허리 800여 고지를 넘어서 서귀포로 이어지는 약 45km의 도로이다. 5·16도로는 현재까지도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가장 빠른 도로의 지위를 지키고 있고, 5·16도로를 주행해본 사람들은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서 5·16도로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5·16도로는 그 명칭으로 인해 좌파정권하에서는 정치적 공격을 받기도 했고 도로 명칭을 바꾸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 도로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주장이다. 일부에서는 5·16도로가 ‘5·16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거나 ‘국토재건단’을 동원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데, 5·16도로의 탄생이나 명칭에 '5·16 기념'이나 국토재건단은 관련이 없다.
5·16도로의 명칭은 공모를 통해 뽑힌 명칭으로서 제주도민들이 붙인 이름이다. 애초의 명칭은 ‘제주시 서귀포 횡단도로’로 불렸고 나중에 만들어진 ‘제2 횡단도로’와 구별하기 위해서 ‘제1 횡단도로’로 불리기도 했다.참고로 국토재건단이 투입되었던 도로는 ‘제2횡단도로’였다.
5·16혁명이 일어나면서 제주도에는 김영관 해군 준장이 12대 지사로 임명되었다. 김 지사가 제주에 왔을 때 제주는 돌, 바람, 여자의 삼다의 섬이 아니라 바람, 홍수, 가뭄의 삼다의 섬이었고, 거지, 도둑, 대문이 없는 삼무의 섬이 아니라 길과 물과 먹을 것이 없는 삼무의 섬이었다. 무인(武人) 도지사는 4·3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제주의 ‘재건’을 슬로건으로 내세웠고, 5·16은 제주에서도 길의 혁명, 물의 혁명으로 이어지는 제주도 혁명의 시발점이 된다.
김 지사는 박정희 의장이 초도순시했을 때 의도적으로 박정희 의장을 며칠 동안 제주에 머물게 하는 ‘작전’을 실행하여 박정희 의장을 제주도의 든든한 후원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무인 지도자와 무인 도지사가 이처럼 제주도에 애정을 가졌던 이유는 4·3의 위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제주도의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두 사람이 제주에 반해 제주의 미래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된 사실은 제주도로서는 축복이었다.
두 명의 무인 지도자가 공통으로 제주에서 우선적으로 인식했던 것은 ‘길’의 필요성이었다. 당시 제주에는 포장도로가 전무한 상태였고, 도로라고 할 만한 것은 타원형의 제주도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 일주도로가 전부였다. 제주에서 서귀포로 가는 길은 타원형의 외곽도로를 따라 빙 둘러서 가야 하는 형편이었다. 제주와 서귀포 사이에는 한라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주시에서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로 가는 중턱에는 1930년대에 만들었던 길이 있었는데 5·16도로는 이 길을 기초로 계획되었다. 계획 당시 조사에 의하면 견월악까지는 겨우 차량이 진입할 수 있었고, 성판악까지는 소로길의 형태만 남아있었다. 성판악부터 서귀포 방면으로는 수풀이 우거져 도로의 형태도 남아있지 않은 형편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5·16도로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로는 재정이나 장비가 열악한 시대였고 한라산은 거대한 절벽이었다. 그리고 제주도 내에 포장도로는 전무한 상태였기에 횡단도로보다는 일주도로 포장이 급선무라는 주장도 있었다. 더욱이 당시에 국도의 포장 지원에는 1일 통행 차량 대수가 800여 대가 넘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는데 당시 제주의 사정은 차량 보유 대수를 전부 합쳐도 300대가 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5·16도로가 먼저 건설되었던 이유는 일주도로 포장은 가난한 시대의 재정 탓으로 완전 포장까지에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다는 이유도 있었고, 당시 제주시와 서귀포의 왕래에는 제주도의 일주도로를 따라 둘러가야 했기에 차량으로도 5~6시간이 걸려야 했지만, 횡단도로의 건설로 1시간 전후로 단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횡단도로 건설은 투자 대비 효용이 컸고, 제주도의 지리적 여건상 제주시와 서귀포 간의 직통도로가 여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5·16도로가 제주도의 막힌 숨통을 틔워주고 대동맥 역할을 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고, 극심한 반대 속에서도 김영관 지사의 추진력과 박정희 의장의 후원은 5·16도로의 산파역을 했다.
5·16도로는 탄생 배경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닮았다. 반대 속에서 탄생되었지만 그 열매의 진가는 오랜 세월 자손 대대로 누리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중앙정부의 압도적 지원 때문에 다른 지방의 질투와 견제 속에서 지금의 제주시청 앞에서 ‘제주 서귀포 횡단도로’의 기공식이 열렸다. 그때가 1962년 3월 24일이었다.
5·16도로는 기공된 지 1년 7개월여 만인 1963년 10월 11일 개통식을 가졌다. 도로 포장은 채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문제는 역시 재정이었다. 중간에 계획이 바뀌어 도로 포장 폭이 넓어지면서 도로가 완전 포장되기까지에는 1966년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개통식은 역사적인 인파가 모인 가운데 흥분 속에서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개통식은 제주시와 서귀포 두 군데에서 개최됐다. 김영관 도지사는 제주시 행사 중간에 서귀포로 달려가 행사를 치렀으며, 행사가 끝난 다음에는 5·16도로의 중간에서 제주시와 서귀포 양쪽 주민들이 만나 얼싸안고 노래를 부르며 막걸리 잔치판이 벌어졌다. 서귀포에서는 5·16도로 개통을 기념하여 극장에서는 무료입장을 시켰고 술집에서는 가격 할인이 벌어지는 등 이날 하루 제주도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5·16도로를 따라서 제주시청, 세무서, 법원이 세워졌었고, 제주대학, 산업정보대학, 제주여중·고, 중앙여고, 서귀포산업고, 그리고 여러 초등학교가 5·16도로의 젖줄을 물고 도열해 있고, 제주의료원, 산천단, 성판악 휴게소, 숲터널길, 왕벚나무 자생지, 한란 자생지, 돈내코,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제주의 문화와 역사가 숨어있는 곳이 5·16도로이다.
5·16도로는 성판악을 기점으로 제주시 방면으로는 중앙로로 이어져 탑동 해안가까지 달려 나가며 제주시를 이등분하고, 서귀포 방면으로는 급한 경사로 이뤄져 구불구불거리며 서귀포 시내로 뛰어든다. 5·16도로는 제주도를 좌우로 이등분하는 선이며, 산북과 산남을 이어주는 대동맥이 되었다. 막혔던 핏줄이 5·16도로로 혈액이 순환되면서 제주에는 수천 년 묵은 제주의 낡은 껍질을 벗겨내려는 혁명의 기운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지도자들의 순간의 판단이 국민의 평생을 좌우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였다. 만약 그때에 5·16도로 건설이라는 결단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그 후의 환경단체들의 발호를 보아 하건대 우리는 지금 5·16도로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한라산의 밀림을 뚫고 길을 내는 것, 그만큼 5·16도로는 그 당시로써는 혁명적 발상이었고 과업이었다.
그 과감한 발상에 걸맞게 5·16도로는 지금 오가는 차량과 관광객들의 차량으로 붐빈다. 그리고 5·16도로는 한라산의 허리를 지나가는 만큼 경사와 굴곡이 심하고 안개가 심하거나 눈이 많이 내리면 도로는 차단되기도 한다. 그만큼 5·16도로는 천의 얼굴을 가졌고 관광객들은 계절에 따라 변하는 한라산의 사시사철을 구경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고, 5·16도로의 숨은 비경을 제대로 본 사람들은 5·16도로의 포로가 되고 만다.
5·16도로는 제주도 혁명의 출발점이었고, 그 혁명적인 발상에 걸맞게 5·16도로는 지금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5·16도로라는 이름만큼 이 도로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5·16도로에는 그 구불구불한 길바닥에, 그 길가의 풀 한 포기에조차 선대들이 흘렸던 땀과 눈물이 배어있다. 5·16도로는 불가능에 도전하던 우리의 긍지이고 그 명칭조차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이다.
2008. 05. 15.
비바람
- 拙著 '대한민국의 far and away'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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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true님의 댓글
진리true 작성일
박정희란 선각자는 한국민의 운명을 이끌고 간 사람이다.
지금의 6학년 이상(당시 초등학생)은 운명적으로 그분의 품 안으로 이끌렸다.
모든 고난에 그분과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가 자식을 위한 행복의 열매를 따먹는 그 때에,
그분은 이 좋은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는 철모르던 시절이라, 너무나 갈등하고 괴로워 했다.
그러나, 그분과 우리의 인내가 한국의 기적을 일으켰다.
이제, 그분이 떠난 한국은 탐욕과 교만의 바벨탑에 올라서, 신의 심판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시가 사라지자, 양심과 이성도 사라졌다.
배부른 돼지가 되어버린 한국민은 굶주리는 북한보다 실제로는 더 타락한 것인지,
우리 국민들은 각자 되돌아서야 할 시점이다.
그분이 다시 올 수만 있다면?
맨발로라도 달려가, 마중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