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68)] 지만원 족적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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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4-28 13:25 조회5,24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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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68)] 지만원 족적 10~12
⑩ 29세, 포대장 시절이 내 인생의 꽃
“여기는 더운 지역이다. 치렁거리는 바지를 잘라 입어라. 궁둥이까지 잘라도 된다.”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상 이상으로 파격적이라는 눈치였다. “야, 인솔해가면 천당도 싫다더라. 나도 육사생도 시절에 그런 생각 했었다. 아침점호, 아침집합, 모두 생략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체 집합이 없다. 그 대신 분대장은 매일 저녁 토의를 하고, 매일 일과는 분대장 인솔 하에 분대별로 수행한다. 식사도 분대별로 한다. 식당에 노트가 있으니 각 분대는 다른 분대 식사시간을 피해 식사시간을 예약하라” 병사들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천지였다.
나는 매일 분대장들을 모아놓고 토의를 했다. 내일 무슨 일을 할 것이며,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할 것이며 수행 중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가 무엇일까에 대해 토의를 시켰다. 처음엔 발표력도 없고, 관찰력이 없고, 아이디어도 없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아이디어, 창의력과 관찰력이 향상됐다. 4개월 정도 계속 했더니 내가 참석하지 않아도 시스템으로 정착됐다. 누가 포대를 방문하면 무질서한 것으로 보였다. 어느 분대는 포술훈련을 하고, 어느 분대는 소총사격을 하고, 어느 분대는 배구를 했다.
규정에는 병사와 3개월에 한 번씩 신상 상담을 하라고 되어 있었지만 나는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이 내보내는 편지 내용을 각 병사별 파일에 기록했다. 오는 편지는 보내온 사람의 주소와 이름만 적었다. 시간이 가면 각 병사들의 트렌드가 파악되고 애로사항이 파악된다. 한 수송부 병사는 경남출신인데 파월기간 중 운전면허증 갱신을 하는 날이 들어있어서 걱정을 했다. 나는 경남도지사에 애로사항을 편지로 써서 보냈다. 얼마 후 도지사로부터 답장이 왔다. 도지사 편지를 보관했다가 귀국시 운수교통과로 가서 보여주면 갱신을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중사를 시켜 그 편지를 수송과 병장에 전해주라 했다. 병사에게 생색내는 것이 싫었다.
한 병사는 말 못할 질환에 고민하는 것 같아 의무병을 불러 그 병사가 혹시 성병에 걸리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의무병은 눈이 왕방울만해지면서 포대장님이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했다. 나는 연대 의무장교에 부탁해 좋은 약을 구해 의무병에 전달했다. “야, 내가 안다는 표시 절대 하지말고, 이 약 네가 구했다고 하고 전해줘”
한 병사는 홀어머니가 많이 아프다는 것에 걱정을 했다. 나는 주월사령부에 전화로 부탁해 보잉기를 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후 대대 인사과에 서울 휴가를 부탁했다. 병사의 눈이 또 커졌다. 이렇게 하자 포대에서는 “우리 포대장님은 귀신”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안 보시는 듯 하면서 자기들 일거수 일투족을 꿰뚫고 계시다”는 이야기였다.
한번은 육사2년 후배인 부하장교와 인사계가 내 눈치를 보면서 수군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후배 중위는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치미를 떼었다. “어서 말해” 보급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연대본부에서 C-레이션을 싣고 오던 도중 연대 정문 헌병이 C-레이션 5개를 달라 했는데, 병장이 거부하니까 헌병상병이 따귀를 때렸다는 것이다. 내 표정이 달라지니까 후배장교가 나를 위로했다. “포대장님, 잊어버리십시오. 병사들은 원래 헌병들의 밥입니다. 그러려니 하십시오.” 나는 이 후배의 말에 더욱 화가 났다.
“당장 실탄잠입 시킨 10명의 병사를 차에 태워” 그리고 40분 거리를 어둠 속에서 달렸다. 베트콩으로부터 야간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연대 기지 정문에 차를 세웠다. “야, 아까 우리 병장 따귀 때린 놈 나와” 10명의 병사들이 탄창을 꽂고 총을 앞에 총 자세로 들고 있었다. “어느 놈이야” 하면서 전화기를 들고 사단 헌병대장실에 연결하라고 했다. “접니다. 제가 때렸습니다”, “오~ 너, 하극상이 뭔지 알겠지? 너 영창이야, 널 감옥에 넣으려 했는데, 안 가려면 우리 병장한테 무릎 꿇어” 그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병장님,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병장이 으쓱해했다. “너희들 트럭에 ‘2’자 번호판 보면 세우지마, 알았어? 그리고 앞으로 C-레이션 필요하면 나한테 직접 연락해, 기강 어지럽히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헌병 여러 명이 복창을 했다. 그리고 C-레이션 박스 5개를 주고 왔다. 이후 내 병사들은 연대 정문 초소를 무사통과했다.
이 하나의 조치가 포대원들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했다. 나는 ‘패기의 상징’이 돼 있었다. 내가 포대원들을 사랑하는 것 만큼 그들도 나를 아꼈다. 사고가 나면 포대장 생명은 끝이다. 그들은 안전사고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것이 포대장에 대한 사랑이었다.
나는 병사들의 소총사격 능력 향상에 각별히 신경썼다. 전쟁터에서는 그것이 자신감이었다. 대대 참모들의 입방아에 아랑곳하지 않고 불도저로 영내 끝자락에 깊은 고랑을 팠다. 25m 사격장이었다. 깊은 고랑에서 나온 돌을 맨 앞에 올려 쌓고, 거기에 표적지를 세워놓고 사격 연습을 시켰다. 모든 분대는 하루에 한 시간씩 사격 연습을 했다. 무조건 사격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세 훈련을 각자 실시한 후 준비되면 한 두 사람씩 고랑 사격장에 갔다. 각자는 사격을 한 후 표적지에 자기 이름을 써서 분대별로 내 책상 위에 놓게 했다. 사격 준비훈련은 간단했다. 눈을 가늠해 구멍에 바짝 대는 연습이었다. 구멍이 크게 보여야 조준이 명확한 것이다. 사격한 표적지를 검토해보았다. 똑똑한 병사가 쏜 총탄이 이리저리 퍼졌다. 나는 그에게 명중력이 좋은 총을 주고 다시 쏘아보라 했다. 그랬더니 9발이 거의 한 구멍에 명중됐다. 병사의 문제가 아니라 총열의 문제였다. 이렇게 해서 골라낸 하자총이 18%나 됐다. 나는 사단 병기대에 18%의 총열을 교환해 달라고 했다. 아마 베트남에서 총열을 부대단위로 교환한 사람은 주월군 전체에서 나 밖에 없을 것이다.
주월 사령부에서 사격점검팀이 대대본부에 들이닥쳤다. 대대본부 영내에 있는 제1포대가 사격검정을 받았는데 50%미만이었다. 대대장님이 곤란한 입장에 있었다. 나는 지프차를 몰고 대대본부로 40분 동안 달려갔다. 그리고 검열팀장 강복구 해병대령님께 인사를 했다. 강 대령님은 해병대에서 강직하기로 소문나 있는 분으로 주월사령부에서 나를 예뻐해주시던 분이었다. 나는 검열단을 나의 포대로 보내 내 포대의 사격능력을 체크해 달라고 졸랐다. 소령들이 40분 동안 내 포대로 오면서 투덜댔다. 100점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들이 직접 사격표적지를 설치했다. 병사들은 탄창속에 기름까지 칠하면서 용수철이 잘 작동하도록까지 준비했다. 또 100점이 나왔다. 소령이 나를 비우호적으로 바라봤다. “당신 애들을 얼마나 잡다놨소? 100점은 안돼요. 100점 보고하면 우리가 의심받아요.” 나는 협상했다. “그럼 100점하고 제1포대 점수 50점을 합쳐 평균점을 대대점수로 해주세요” 그들은 이에 동의했다. 결국 위기의 대대장님을 내가 구출해 드린 셈이 되었다. 대대장님은 부임 초부터 나를 신뢰해주셨다. 이후 한국에서도 대대장님은 나를 친동생처럼 사랑해주셨다.
1970년 11월 12일, 그날 나는 곤히 잠들어있었다. 그런데 그 날 보병 나민하 소위가 매복을 나가 베트콩과 조우해 대승을 거두었다. 그의 소대원이 13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11명은 도망가다가 포를 맞고 사살됐다. 그날 밤 내 병사들은 포탄 1,800발을 쏘았다. 나를 꺠우지도 않고.
사격을 지휘한 2년 후배는 포대장님을 깨울 필요가 없다고 했다. 자기가 포대장님 배짱을 잘 알기 때문에 왕창 쏜 것이다. 이튿날 1,800발을 보고받은 대대 작전과장(소령)은 내 부하에게 마구 욕을 했다. 포탄을 미군이 통제하고 있는데 어쩌자고 그렇게 마구 쏘았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대대장님께 보고를 했다. 대대장님이 전화를 주셨다. “어이 포대장, 사단 포 사령관님께 어떻게 보고할까?”, “그대로 숨기지 말고 보고해주십시오.” 다시 전화가 왔다. “어이 포대장, 사령관님께서 지 대위 칭찬을 많이 하시데. 포는 그런 식으로 운영하는 거라고, 그놈 배짱 한번 좋구먼, 이러시던데~” 이 사건으로 나는 화랑무공훈장을 고지에서 수여받았지만, 여러 달이 지난 후 사단 부관참모부 장교가 오더니 훈장이 잘못 수여됐다며 한 등급 낮은 인헌 무공훈장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나는 화랑훈장을 땅에 던지면서 주워가고, 다시 오지 말라고 했다. 결국 사단 부관참모부는 인헌 무공훈장을 보내주었다. 부관병과 장교들이 훈장 장사를 한 것이다.
이상이 내 포대장 근무시절의 대강이다. 나는 내 병사들만 가지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29세에 내게 부여된 포대장 직책은 내 인생 전체에 걸쳐 가장 기억하고 싶은 꽃이었다. 이 부분 역시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 범위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⑪ 유학의 전설
누구나 유학을 한다. 수 많은 사람들이 박사학위를 땄다. 그런데 대부분은 민간인 자격으로 학교라는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 하지만 나는 베트남 전쟁터에서 4년을 근무했고, 석사-박사 과정이라는 것은 상상 밖에 있었다. 영어는 해야만 되겠다는 생각에 타임지와 영문소설은 작전을 나갈 때도 철모 속 또는 전투복 큰 주머니 속에 담고 다녔다. 합참정보국에 근무할 때였다. 어느 날 유학시험이 있다기에 “한번 쳐볼까~” 하고 영어시험을 본 것이 100점 만점에 97점을 받아 생전 꿈조차 꾸지 못했던 국비 유학을 가게 되었다. MBA, 경영학 석사였지만, 응용수학 박사(시스템공학 박사) 과정으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문과 석사가 ‘미국 학계에서 가장 따기 어렵다는 응용수학’ 박사과정으로 갈아타는 것은 이변에 속했고, 이는 미 해군대학원 창설 70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박사 논문에는 이 세상에서 구경하지 못한 수학공식 2개, 수학정리 6개, 알고리즘 1개가 실려있다. 이 역시 이변중의 이변이었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대학서열이 매겨진다. 육해공군 사관학교가 늘 1,2,3등을 차지해왔다. 미 해군대학원은 학비가 하버드나 스탠포드의 2.5배였다. 그것을 국방부가 대 준 것이다.
이에 대한 스토리는 ‘지만원 메시지17, 회상(운명)’에 전개돼 있다. 수많은 수학박사들이 있지만 전투병 출신이 이병과 이변을 거듭하면서 수학정리와 공식을 8개나 창조한 수학박사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미 해군대학에서는 전설로 전해지고 있으며, 내 공식과 정리는 JEE라는 이니셜로 인용되고 있다.
⑫ 중앙정보부 1년
미국에서 귀국하던 나는 김포공항에 나온 검은 양복 신사들에 의해 곧장 이문동에 소재한 중앙정보부 해외담당 제2차장실로 안내됐다. 8개월은 특별보좌관으로 일했고, 4개월은 국정원 교육과정을 밟았다. 나는 대북 심리전에 관심을 꽤 가졌다. ‘심리전단’의 자료를 보니 심리전의 목표가 애매했다. “적보다 우세한 심리전”을 편다는 것이 목표(Goal)였다. 나는 심리전 목표가 “적의 마음을 남한을 동경하게 만드는 것”으로 수정할 것을 건의했다. 푸짐한 밥상을 사진에 담거나 해변의 여인을 사진에 담아 삐라로 보내면 선전냄새가 나기 때문에 적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대신 신문갈피에 끼워 보내는 화장품광고, 상품광고를 아파트에서 모으든지 광고사에 부탁을 해서 인쇄를 해 보내자고 건의했다. 선전냄새도 나지 않고, 남한의 인쇄술과 생활의 우수성이 잘 전달될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대북방송도 북 체제를 비난하는 등 가시 돋친 내용을 하지 말고 멜로드라마나 노래 등 적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내용으로 하자고 건의했다. 우리 국민에게는 TV를 통해 선진국의 문화와 에티켓을 소개해 매너 있는 국민이 되게 하자고 건의했다. 당시는 이 건의가 차장 선에서 수용되었다.
당시에는 전두환 정권을 공격하기 위해 북괴가 어부들을 빈번하게 납치했다가 보내주는 작전을 폈다. 어부들이 귀환 할 때마다 중정은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어부들을 훈련시켰다. 훈련된 어부들이 기자회견을 하면 국민들은 “저거 다 중정이 마사지 한거야”하면서 전두환 정권을 불신했다. 이 불신이 북괴에게는 엄청난 심리전 효과였다. 그러니 자주 납치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차장님께 건의했다. “어부가 귀국하면 귀국 순간에 곧바로 기자회견을 시키면 국민불신이 사라지고 어부납치도 줄어들 것입니다.” 이것이 채택되자 어부납치가 줄어들었다.
북괴가 아시안 게임 유치를 방해했다. 중동이 이끄는 대표단이 북한을 먼저 들린 후 중국을 거쳐 서울로 온다고 했다. 나는 북괴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북괴의 방해놀음이 중단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장님께 건의했다. “중동대표단에 전문을 보내 평양에서 곧바로 판문점을 거쳐 서울로 오라하면, 북괴는 북한 도로사정과 남한 도로사정이 곧바로 비교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대표단이 판문점을 통해 서울에 가겠다는 의사를 북에 전하자마자 북괴는 평양방문을 취소시켰다. 더 이상 아시안게임을 방해하지 못한 것이다.
4개월동안 중정교육을 받았다. 받고 나니 차장님은 내게 3가지 옵션을 제시하셨다. 교육을 받았으니 중정 과장을 할 수도 있다. 청와대 비서관을 할 수도 있다. 국방연구원에 가서 연구도 할 수 있다. 두 달의 말미를 줄 테니 3자 택1을 하라고 하셨다. 나는 자유주의자, 연구소로 가겠다고 했다.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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