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메시지(30)]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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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3-07 22:23 조회3,8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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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메시지(30)]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의 의미
주사파와 일본과의 관계
시대는 변한다. 일본도 변했고 한국도 변했다. 변화하는 것을 싫어하는 종족은 오로지 공산주의자들이다. 우리가 일본과 사이좋게 지내면 김일성 신화가 무너진다. 오늘날까지 이 땅에 반일 감정을 부채질한 세력은 문화 권력과 언론 권력이다. 오늘의 반일의식, 반일 정서는 이 두개의 권력의 공작 결과이다.
윤 대통령의 3.1절 연설
“우리는 국가가 어려울 때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려 한 애국자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영령들이 지금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은 한-미-일의 굳건한 동맹이다.” 이 말이 오늘 기념사의 전부였다. 연설이 간단해서 메시지는 매우 강력했다. 한마디로 국민 정서에 역행해서라도 일본과 잘 지내겠다는 것이다. 선이 굵은 이 말은 주사파들과 전쟁을 하겠다는 선전포고로 들렸다.
주사파들이 확산시킨 반일감정, 그 도구는 위안부, 강제징용, 수탈이었다. 먼저 수탈에 대해 약술하면, 수탈은 왕과 양반과 탐관오리들이었지 일본이 아니었다. 일본은 노예로 살아가는 조선 백성을 불쌍하게 여겼고, 불쌍한 감정이 생기는 것 만큼 조선 왕조를 미워했다.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킨 첫 작업이 호적을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조선어를 말살시킨 사람은 연산군이었고, 조선어를 장려하여 조선어 시험 합격자에게 조선어 수당까지 지급한 사람은 일본 총독이었다. 1923년, 한글날을 제정해준 사람도 일본 총독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우리가 얼마나 진실을 거꾸로 알면서 우리에게 너무나 유익한 일본을 증오하면서 살아왔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내용은 내가 저술한 [조선과 일본]에 자세히 연구되어 있다.
위안부가 종교인 나라 만들기
주사파들은 위안부를 지고지순한 나이팅게일로 숭상한다. 위안부를 칭송하고 아부하고 눈물을 흘리는 족속들이 매우 많다. 위안부라는 말에 눈물부터 흘려야 양심가이고 애국자로 인식되는 세월이 이어져 왔다. 나는 이 현상을 지적했다가 윤미향(심재환 변호사)으로부터 민형사상 소송을 당했다. 검사가 불기소한 것을, 김용빈 당시 서울 고법 판사가 검사에게 기소할 것을 강제했다. 1, 2심에서 검사는 구형을 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런데 1, 2심 주사파 판사들이 각 징역 8월과 6월,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민사 재판에서는 여성 판사들이 3천만 원을 선고했다. 논리가 필요 없다. 성역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위안부 역시 5.18과 같은 심리전을 폈다. 결국 위안부는 김일성 신화를 성역화 하는 선전물이 되어온 것이다. 일본을 증오하게 만들어야 김일성의 항일 신화가 보존되는 것이다.
문옥주는 위안부로 신분상승
주사파는 일본 헌병에 끌려간 위안부 숫자가 20만명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연구들에 의하면 위안부는 1937년 청일 전쟁에서 시작되어 8년 동안만 존재 했으며, 1945년 8월 15일까지 누적 연인원은 겨우 3,600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군 위안부 중 숫자가 가장 많은 나라는 일본, 40%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 다음이 중국 여성, 그 다음이 한국 등 10개의 기타 국가였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 알려진 위안부에 대한 키워드는 강제 연행, 무리한 성폭행, 학대, 대가 없는 착취다. 이 역시 새빨간 거짓말이다.
위안부의 대표성을 갖는 여성 중에 문옥주가 있다. 그는 2005년 일본판 자서전을 냈다. 2005년에는 한국판 자서전 [버마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를 냈다. 그녀는 1924년생, 대구 대명동에서 출생하여 12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17세가 될 때까지 요정 등에서 심부름을 했다. 일본은 당시 기율이 엄해 17세 미만의 여아들을 성접대 현장에 갈 수 없도록 했다. 17세가 되어 ‘권번’에서 기생 수업을 받고 1942년 7월 대구 여성 20명 그룹에 끼어 부산-사이공-싱가포르-버마 랑군에 가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20~22세 사이에 공식 화대 31,000엔 이상을 벌어 대구에 와서 돈 많은 화류계의 대스타가 되었다. 그녀는 다이아 반지를 끼고 악어백을 들고, 하이힐을 신고 초록색 우의를 입고 사이공 거리를 걸을 때는 마치 여왕이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팁은 80,000여 엔, 우체국 저금도 50,108엔이었다. 위안소에는 준수사항 6개가 엄격하게 이행되었고, 이용시간이 규정되어 있었고, 화대가 공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생리일에는 영업을 금지시켰다.
강제징용은 거꾸로 꾸민 이야기
2024년부터 일본 돈 10,000엔 권의 초상이 ‘후쿠자와 유키치’에서 ‘시부사와 에이치’로 바뀐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옥스포드 영영사전을 영-한문사전으로 바꾼 불가사의적 전설이다. 조선의 개화파 청년들의 스승이기도 하다. ‘시부사와 에이치’는 1840년대 인물로, 일본 기업에 일본식 자본주의 정신을 심어준 위인이다. “한손에는 주판을, 한손에는 공자의 도덕율을 들어라, 주판은 도덕율 범위내에서 두어라.” 이후 일본 기업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덕 경영을 정착시켜 왔다. 1924년대의 송하전기(파나소닉)을 이룩한 마츠시타 고노스케는 송하전기를 “인간을 만드는 기업”으로 정의했다. 일본은 세계의 품질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는 품질 일등국이다. 근로자를 학대하면서 1등 품질을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강제징용은 내가 아는 한 없다.
1939년 9월 조선 청년에게는 로망의 길이 열렸다. 일본이 1941년 12월 하와이를 공격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1939년 청년을 대거 징집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일본 청년들이 전쟁 훈련에 동원되자 공장 근로자들을 대거 조선에서 채용했다. 조선 청년 73만 명이 싱글벙글 하면서 꿈에 그리던 로망, 일본 땅으로 건너갔다. 당시 봉급표를 보면 조선 청년들은 일본 청년들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지 않았다. 조선의 양반과 탐관오리들로부터는 노예 취급을 받았으니 급료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이런 거짓말을 지어내는 공산주의자들이야 말로 참으로 이 땅에 같이 살 수 없는 인간성 상실자들인 것이다.
일본이 없었으면 경제 10대국도 없었다.
한국 국민들은 포항제철을 자랑한다. 박정희-박태준이 세웠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박정희는 물꼬를 텄고, 공사 현장 감독을 박태준이 했고 모든 소재, 부품, 기술, 자본은 일본이 다 제공했다. 10%는 박정희-박태준의 기여이고, 90%가 일본의 기여라는 것이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일본이 아니었다면 포항제철도 없었고, 중화학 공업도 없었고, 오늘날의 창원, 대구, 울산, 인천 등 대규모 공단도 없었다.
1945년 일본은 23억 달러 어치의 사회 간접자본과 기업들을 이승만 정부에 남겼다. 당시 한국 총 경제 규모의 80%가 일본 자산이었다. 1965년 일본은 한국에 8억 달러를 주었다. 그것으로 경제 성장의 종자돈을 마련했다. 소양댐, 경부도로, 포항제철, 충주비료, 호남정유 등이 일본 자본과 일본 기술로 건설됐다.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이 40억 달러를 가져왔다. 그것으로 제2의 IMF 위기를 넘기고 한강을 건설하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제 올림픽을 치러 국가 브랜드를 천문학적으로 높였다. 포항제철을 자랑스러워 하려면 일본에 감사해야 하고, 한강을 아름답다 자랑스러워 하려면 전두환과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
2023.3.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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