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탈당하는 국가혼과 역사(1)-좌익이 쓴 노근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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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02-07 14:32 조회5,25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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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탈당하는 국가혼과 역사(1)-좌익이 쓴 노근리 역사
우익이 태극기만 들고 있는 동안 좌익은 역사승리를 굳히기 하고 있다
역사를 지배하는 자가 국가를 요리한다. 좌익이 역사를 점령하고 있는 과거 수십 년, 우익은 잠만 잤다. 잠자는 우익이 일부 깨어나 좌익과의 전쟁을 하겠다 나섰다. 뒤늦게나마 다행이다. 지금의 좌우 대결은 광화문이 상징한다. 좌익은 촛불, 우익은 태극기,
하지만, 광화문 촛불은 좌익이 벌이는 총력전의 극히 일부인 반면 광화문 태극기는 우익이 벌이는 전선의 전부다. 좌익이 벌이는 수많은 전선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좌익세력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곳은 대한민국 역사의 침탈전쟁이다. 좌익은 차분하게 집요하게 역사전쟁을 한다, 역사전쟁에서 이미 승리했다. 지금은 그 승리한 역사를 국민에 널리 전파하고 있다. 국가혼은 역사에 담겨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가혼이 거의 다 실종돼 있는 껍데기 나라다. 미국이 아니었으면 벌써 적화된 나라다.
지금 역사전쟁은 제주도에서 광주에서 그리고 인터넷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지만 태극기 물결은 오직 태극기의 수적 우세에만 만족하고 있다. 통일뉴스가 또 대한민국과 미국을 증오하게 만들기 위해 “노근리 학살”을 날조 왜곡하고 있다. 먼저 통일뉴스가 날조한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이후 필자가 연구했던 반론 역사를 제시한다.
태극기만 들지 말고 역사전쟁에 임하라
만일 빨갱이들이 벌이는 이 날조-왜곡된 역사가 우익진영으로부터 아무런 반론 없이 확산된다면 우리는 매우 중요한 아킬레스건을 점령당하는 것이다. 지금 우익진영 사람들은 역사에 관심 없고 좌익의 실체를 연구한 글들조차 읽지 않는다. 좌익과 대결을 한다면서 좌익들이 벌이는 역사왜곡 현장에서 눈을 돌리고 좌익의 실체가 무엇이고 누구들인지에 대해 공부가 없다.
이제부터 나는 빨갱이들이 다시 벌이고 있는 역사전쟁에 임하고자 한다. 연구해놓은 역사를 읽지도 않는 우익진영 사람들이 야속한 건 어제 오늘의 감정이 아니다.
<제주도의 역사전쟁>
민주 “원희룡 도정의 몰역사 인식이 빚은 참극”
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187163
신구범 前제주지사 “5.16은 혁명…전두환 존경” 막말 퍼레이드
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187149
<광주의 역사전쟁>
광주광역시의회, "국정교과서 즉각 폐기하라"
http://www.nocutnews.co.kr/news/4729478
광주시, 5.18 진실규명 지원단 업무 돌입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404498
5.18 발포명령자 "역사의 법정에 세운다'
http://www.kjmbc.co.kr/board/index.cfm?bbs_name=todaynews&w=view&wr_id=214262
전일빌딩 10층 내부 탄환 국과수에 추가조사 의뢰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404500
<인터넷 역사전쟁>
통일뉴스가 역사를 날조- 왜곡하여 주한미군에 대한 적개심을 물러 일으키고 있다. 아래는 노근리사건을 날조-왜곡한 통일뉴스의 기나 긴 글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이 글에는 대한민국과 미국을 증오하고 모략하는 왜곡된 내용들이 아주 많다. 만일 통일뉴스가 시도하는 이 노근리 사건에 대한 왜곡기사에 대하 아무도 반론하지 않는다면 우익은 역사전쟁의 매우 중요한 전쟁터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고, 국가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국가는 무력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혼으로 유지되는 것이고, 그 국가혼은 곧 역사의식이 좌우하는 것이다.이 나라 우익진영에서 노근리 역사를 공개적으로 다룬 사람은 아마 필자가 유일할 것이다
먼저 통일뉴스 기사를 전하고 이후 필자가 연구했던 반론의 역사를 소개한다.
미군에 의한 학살사건(1)-노근리 사건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682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동맹관계라 하지만 갑과 을의 관계다, 갑을관계가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군사분야다. 작전권도 없는 이 나라는 창피한 수준을 넘어 주권이 피탈된 나라다. 미국은 미군정을 통해 남한지역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평정하였고, 남한 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고, 6.25전쟁으로 남한 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직접 군대를 보내 구해주었다.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이 제공한 원조물자로 전시의 어려운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 미국은 한국인의 ‘구세주’가 되었다. 그와 같은 미국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가끔씩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성조기를 휘날리며 미국의 은덕을 찬양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곤 한다.
그러나 앞으로 대한민국을 짊어지고 나갈 세대에게는 미국에 대한 부채가 없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미국에 빚진 게 없으니 비굴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조부모들 세대가 신세를 좀 졌다고 그들까지 채무자가 돼야 할 이유는 없다. 미국이 한국을 지원해준 것은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지 한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미국은 그동안 한국에 준 것 이상으로 가져갔다. 한국은 60년 이상 미국에 헐값으로 군사기지를 제공해왔다. 지금은 한국이 주한미군의 주둔비용을 50%나 분담하고 있다. 미국의 새 대통령 트럼프는 한국에 주둔비용을 더 내놓으라고 요구할 태세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냉전시대에는 그런 주장이 먹혀들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주한미군의 주된 역할은 사실상 미국의 세계패권을 위협할 잠재적 적국인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지위 변화’다. 그런데도 남한의 친미주의자들은 주한미군의 주둔에 거저 감읍할 따름이다.
반미의 무풍지대에서 대중적 반미로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은 미국의 요구를 거의 맹목적으로 추종해왔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의도와 배치되는 행위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국은 어떤 동맹국도 거부한 베트남 전쟁 파견을 수용하여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견하며 ‘자유의 십자군’노릇을 하였다. 이라크에도 미국·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병했다.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남한 사회는 누구 말처럼 ‘멸균실’수준의 반공(反共)국가였고, 그에 버금갈 정도로 ‘반미의 무풍지대’였다. 1980년대가 되어서야 이른바 ‘반미운동권’이 겨우 선도적인 미국비판을 내놓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래봐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대학생들의 서울 문화원 점거사건, 농민들의 미국산 농산물 수입 반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21세기 한국민의 의식이 많이 달라졌다. 미국이 불합리한 태도를 보이면 거침없이 반미의식을 표현한다.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한 여중생 효순과 미순을 위한 촛불시위도 그랬다. 2016년부터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성역이 아니다. 반미투쟁이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1960년 4.19, 1980년 5.18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 그리고 2016년 11월 촛불혁명과 같은 혁명적 사건들을 통해서다. 하지만 작은 일들이 역사의 변화에, 사람들의 의식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노근리 사건도 그런 경우다. 노근리 사건은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하순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이 한국 민간인을 집단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랫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채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44년 동안 역사의 이면에 은폐되어 있던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한국전쟁 시기 미군에 의한 한국 민간인 학살의 단초가 드러났고, 이를 통해 그동안 ‘인권과 정의의 보루’로 포장되었던 미군의 실체가 폭로되었다. 이 사건에서 드러난 미군의 모습은 자유․인권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무고한 민간인을 향해 기총소사와 총질을 해댄 학살자였다. 노근리에서 보인 미군의 모습은 세계 최강의 군대와는 거리가 먼, 나약하고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 그것이었다.
노근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이 부분은 전문 그대로 계재)
1950년 7월 25일 전후한 시점에서 영동 일대는 대전을 점령하고 남하를 시도하는 인민군과 패주하는 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은 7월 19일 대전공략에 들어가 7월 24일 대전을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대전이 함락 후 인민군 주력부대의 다음 공격 목표로 영동 지역이 들어왔다. 전선이 가까워지자 대전에서 김천 방면으로 통하는 도로변에 위치한 영동읍 임계리와 주곡리 주민들은 근처 산속으로 피란을 갔다.
그런데 그때 미군이 들어왔다. 미군은 피란을 시켜준다면서 모두들 산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미군은 일본인 통역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주민들을 모았다. 당시 임계리는 60호 정도의 마을로, 평균 4인 가족으로 계산을 해도 2백여 명이 넘었다. 임계리보다 큰, 바로 옆 동네 주곡리 주민 3백여 명도 미군의 권유로 피란길에 올랐다. 거기에 대전 등지에서 피란을 오다가 합세한 2백여 명의 타지 사람들까지 합류해 대략 7백여 명의 피란민 대열이 형성됐다. 이들은 미군의 재촉을 받으며 남쪽으로 향했다.(2)
그러나 해거름 무렵에 출발한 7백여 명의 피란민 행렬은 미군의 재촉에도 속도를 내지 못했다. 보리쌀 자루와 솥, 이불보따리를 짊어진 대다가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함께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가지 못해 밤이 되었다. 미군들은 피란을 중지시켰다. 모두 도로 밑의 강변으로 내몬 뒤 모두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고개를 들면 총을 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날 밤 가까운 곳에서 인민군과 교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알이 날아가고 포격소리도 요란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악몽처럼 밤을 지샜다.
다음날 아침 미군의 명령에 따라 피란민들이 다시 출발했다. 강변에서 도로로 올라온 피란민 행렬이 4킬로미터 가량 나아가 노근리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미군들은 탱크로 도로를 차단하고 정지 명령을 내린 다음, 도로와 인접한 철로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피란민들은 미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7, 8명의 미군들이 철길 위로 올라온 7백여 명의 피란 짐들을 앞쪽에서부터 검사하기 시작했다. 검사를 기다리는 행렬이 2백미터는 되었다. 전날 저녁부터 밥을 못 먹은 피란민들은 차례를 기다리면서 가족끼리 둘러앉아 미숫가루 등으로 허기를 달랬다. 일부는 앞가슴을 풀어헤친 채 소 그늘에 앉아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3)
피란민들의 짐보따리에는 이불이나 보리쌀 따위밖에 없었다. 피란민들의 짐 검사를 끝낸 미군들은 어딘가에 무전기로 연락을 하더니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곧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 피란민을 향해 폭탄을 떨어뜨렸다. 미군 폭격기는 20여 분간 폭격과 함께 기총소사를 했다. 현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 상태가 되었다.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었고 여기저기서 사람과 소가 쓰러졌다. 이때 철로 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최소한 1백여 명은 죽었을 것이라고들 증언하였다.(4)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격을 피해 철로 밑에 있는 수로용 굴로 모여들었다. 굴의 폭은 2미터가 될까 했다. 폭격이 멈추자 폭격 직전 어디론가 달아났던 미군 3~4명이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이제 진짜 안전한 곳으로 피란시켜 주겠으니 모두 나오라”고 말했다. 미군들 가운데 위생병 한 명은 부상자들에게 약도 발라주고 붕대도 감아주었다. 사람들은 치료까지 해주는 것을 보고는 아까는 뭔가 잘못돼 폭격을 했지만, 이제 정말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미군은 피란민들을 바로 1백여 미터 떨어진 쌍굴다리로 몰아넣었다. 철로 밑에 나란히 뚫린 쌍굴다리 밑에 약 4백여 명의 피란민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그런 상태에서 미군은 굴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양쪽 야산에 기관총을 설치하고는 굴다리에서 한 발자국만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을 쏘아 죽였다. 한 여름철인데다가 폭격에 놀라 허둥대느라 목이 말랐다. 사람들은 굴다리 바로 아래쪽 물이 좀 고여 있는 웅덩이로 슬금슬금 내려가 물을 마시려 했지만 나가는 족족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미군은 밖으로 나간 사람뿐만 아니라 굴다리 안까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총에 맞지 않으려고 더 안쪽으로 밀착했다.
하루 종일 총질을 해댄 다음날 아침, 위생병을 앞세우고 미군 2~3명이 굴다리로 와서는 전날처럼 부상자를 치료해주었다. 미군 두세 명이 굴다리 안으로 들어와 상황을 살펴보기도 했다. 국민학교 처녀교사 정구임(당시 20세)이 일본어로 “제발 우리를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 남쪽으로 피란시켜 달라”고 했더니 미군은 “여기가 안전하다”고 말했다. 정구임은 그날 저녁 미군이 쏜 총에 사망했다.(5)
굴다리에는 미군과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연희전문 사학과에 다니던 정구일이었다. 그는 마을에서 피란 오기 직전 약 일주일간 마을 근처에 진지를 구축한 미군들의 통역관 노릇을 하기도 했다. 정구일이 굴다리 근처에 온 미군에게 “왜 아무 죄 없는 우리를 아무 이유 없이 죽이는지 그 이유나 알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그 미군은 “피란민이라 할지라도 의심나는 사람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고 답했다. 그래서 정구일이 “우리는 총은커녕 칼 한 자루도 가진 것 없는 양민들인데 무엇이 의심스럽기에 죽이려는가”라고 했더니 미군은 그냥 냉랭한 표정만 짓고 가버렸다.(6)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그때서야 사람들은 ‘미군들이 우리를 상부의 명령에 따라 작전상 죽이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날 밤부터 남자들을 중심으로 필사의 탈출이 시작됐다. 하지만 탈출을 시도한 사람 가운데 절반가량은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이틀이 지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 속에 떨어야 했고, 허기와 목마름으로 극한상황을 맞았다. 사람들은 예의나 격식을 잊어버렸다. 전쟁이 어떻게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를 그 굴다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실감했다. 전쟁은 이웃이나 친척뿐만 아니라 가족간의 본능적 사랑마저도 파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노근리 사건은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햇빛 아래 역사 속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정은용이었다. 당시 경찰관으로 가족들을 두고 피난을 떠났던 정은용은 나중에야 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됐다. 그는 이 사건으로 다섯 살 난 아들과 두 살배기 딸을 잃었다. 그는 집에 돌아와 이 소식을 들은 후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시들 써 아픔을 토로했다.(8)
정은용은 1960년 10월 27일 노근리 사건을 상세히 기록해 미합중국 정부 앞으로 손해배상청구서를 보냈지만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 후 1994년 봄 다시 사건의 진상을 정리한 실록소설 그대, 우리 아픔을 아는가(도서출판 다리)를 펴냈다. 그런데 이 책자는 노근리 사건을 햇볕 아래로 나오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국내의 각 언론사들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으로 여론화 작업을 시도했다. <한겨레> 신문의 황순구 기자가 유족들의 증언을 취재해 1994년 5월 4일 처음으로 기사를 썼지만 전국판이 아니라 충청판에만 실렸다.(9)
이 사건을 보다 전국적으로 확대시킨 것은 월간 <말>이었다. <말>지 기자였던 오연호는 우연히 서점에서 정은용이 쓴 책을 접하게 된다. 그는 책을 읽는 순간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사실이다’라고 직감했다. 그는 즉각 취재에 들어갔고, 1994년 7월호에 「최초 증언-6.25 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백여명 학살사건」이란 기사를 실었다. 노근리 사건에 대한 최초의 심층취재였다. <말>은 1998년 9월호, 1999년 6월호에서 미군 작전일지 등을 통해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다루었다. 1999년 6월호에서는 “피란민을 포위하라”는 내용이 담긴 작전일지까지 공개했다.(10)
<말>이 사건을 계속 보도하고 있던 1999년 봄부터 AP통신도 가해자들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AP가 <한겨레>와 <말>의 기존보도를 보고 본격취재에 들어간 것이다. 그 후 9월 29일 드디어 AP통신이 보도하면서 이 사건의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AP는 사건 당시 노근리에 배치됐던 미군 병사 10여 명의 인터뷰 기사와 제1기갑사단 명령서, 미8군본부 통신문, 미군 25사단 명령서 2종 등 4가지의 문서를 입수 보도함으로써 그동안 국내 언론이 보도한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11)
노근리 사건의 원인은?
그렇다면 미군의 노근리 학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왜 미군은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던 것일까? 50년 동안 이런 의문을 품고 살아온 정은용은 그 해답을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로 인민군에 패퇴를 계속한 미군이 겁에 질려 이성을 잃었을 경우, 또는 질이 나쁜 ‘예외적인’한 부대였을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피란시켜 주겠다고 동네사람들을 목적의식적으로 모은 점, 폭격기와 공동작전을 펼친 점, 굴다리에서 사흘간 계속 총질을 해댄 점 등을 볼 때 그와 같은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나는 ‘작전’과 ‘복수’가 함께 이뤄진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미군이 대전에서 피란민으로 가장한 인민군 유격대에 크게 당한 직후였거든요. 그래서 현장의 미군이 말했다는 것처럼 미군은 실제로 ‘의심나면 피란민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을 겁니다. 피란민 조사를 통해 그들이 비무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살인을 계속한 것은 대전에서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과 피란민을 살려 둘 경우 언제 인민군들과 합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일단 학살을 시작했으니 ‘전멸’시켜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13)
‘의심나면 피란민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라는 판단은 평생을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의 주장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 같은 생각을 뒷받침해줄 중요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 무초가 미 국무부 딘 러스크 차관보에게 보낸 비밀서한이다. 2006년 5월 30일 미 AP통신은 1950년 7월 26일 존 무초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미 국무부 딘 러스크 차관보에게 보낸 비밀 서한 전문을 공개했는데 여기에 미군 방위선을 향해 접근하는 한국인 난민들에 대한 발포정책이 채택됐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무초는 “미군 방위선을 향해 접근하는 한국인 난민들에 대한 발포정책이 채택됐다”고 보고했던 것이다.(14)
은폐된 진실이 드러나다
2001년 1월 12일 한국과 미국 두 나라는 노근리 사건에 대한 공동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때 양국은 ‘노근리 사건은 철수 중이던 미군에 의해 피란민 다수가 사살되거나 부상을 입은 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조사결과 발표 직후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미국을 대표해 1950년 7월 하순 노근리에서 한국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은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그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거듭 유감을 표명했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민을 향해 공식사과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99년 용산 미군부대에 의한 한강 독극물 사건이 폭로되자 주한미군사령관이 공식사과를 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때도 사과 대상은 한국 국민이 아니라 서울 시민이었으니 국민을 향한 공식사과는 아닌 셈이다. 그렇게 보면 클린턴 대통령의 유감 표명은 한미관계에서 상당히 새로운 변화를 알리는 신호라고 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냥 두었다가는 한국민의 반미감정이 격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사태를 마무리 짓기 위한 선제적 행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이 공식적인 유감 표명에도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은 만천하에 명백히 드러나 아무리 해도 감출 수 없는 사실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단편적인 일부 사실만을 인정하겠다는 태도였던 것이다. 이런 태도는 그동안의 미군범죄사건에 대한 미국의 행동양식 그대로였다.
진실의 단면만 드러낸 두 나라 정부
국방부는 ‘민간인에 총격을 가한 것은 고의성이 없었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전투경험이 없고 훈련이 덜 된 나이어린 병사들이 전장에 급히 투입되는 바람에 두려움에 떨다가 실수로 총격을 가한 것’이라고 변명했다.(26) 언제는 세계 최강이라고 자랑하던 미군이 한 순간 오합지졸로 바뀌었다.
더욱이 미 국방부는 사건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감추려 했다. 미 공군 전투·폭격기 등이 명백히 민간인을 공격목표를 삼았음을 보여주는 ‘임무보고서’라든지 ‘조종사의 증언’같은 것들을 은폐하려 했다. 이 같은 주장에 사건 피해자들은 진실을 은폐하는 행위라며 분개했다. 한미조사단의 공동 발표 뒤 정은용 노근리미군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장은 “산간 외딴 마을의 주민들을 미군이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주겠다며 끌어내 폭격과 기총소사, 소총으로 400여명을 마구 학살한 사건, 이게 노근리의 진실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의 발표는 이런 진실을 허구로 가리면서 생색만 내려는 짓입니다”라고 비판했다.(27)
노근리 피해자들과 대책위원회는 미국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표문은 ‘일어난 사실’만은 인정하고 있을 뿐 ‘학살’이란 점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노근리 사건은 절박한 한국전쟁 초기의 수세적인 전투상황 하에서 강요에 의해 철수 중이던 미군이 노근리 주변에서 수 미상의 피란민을 살상하거나 부상을 입힌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미군에 의해 사람이 죽은 사실은 인정하겠는데 고의는 아니라는 주장인 것이다.(28)
발표문에서는 “사건의 가장 핵심 사안 가운데 하나인 사격명령 하달 여부에 대해서는 ‘증언자들의 증언이 엇갈려’결론에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이 문제는 한국과 미국 사이에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부분이었다. 한국과 미국은 각기 조사를 따로 진행했고, 조사결과보고서도 각기 따로 내놓았다.(29) 미국이 강력하게 주장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미국 측 보고서는 참전군인 175명에 대한 증언 청취 결과 일관되게 “사격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면서 사격명령이 하달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미국은 명확한 물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상부의 명령에 따라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것이 아니라 경황없이 후퇴하는 와중에 일선 사병들이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주장했던 것이다. 도의적인 책임은 인정하더라도 군과 정부의 직접적인 책임만은 어떻게든 피해가려 했다.(30)
미국 보고서는 발포 명령 책임 등의 주요쟁점에 대해 죄다 물음표를 달고 있다. 곳곳에서 ‘결정적 증거(hard evidence)’가 없다는 점을 이유로 사격명령은 없었다는 ‘단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고의적인 학살이 아니라는 증언들만을 골라서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 조사단 자문위원인 버나드 트레이너 예비역 해병중장은 “사격명령이 없었더라도 미군 지휘부가 최소한 부대와 사병을 제지하거나 통솔하지 못한 책임이 있으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발포 명령이 내려졌을 것”이라고 비판하였다.(31)
결국 1999년 10월부터 시작된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15개월간에 걸친 노근리 진상조사 결과 발표는 “분명히 드러난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핵심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양쪽 주장을 병렬적으로 기술하는 선에서”끝났다.(38)
노근리 사건 공동 발표 이후
노근리 사건에 대한 미국측 보고서와 한국측 보고서 모두 공통적으로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밝히기보다 미군의 책임을 가급적 최소화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미국측 보고서는 무수히 많은 사실 가운데 미군의 책임을 피할 수 있는 증언과 자료만을 주로 취급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어서 보고서로서의 객관성과 신뢰성이 부족하다.
2001년 한미 양국의 진상조사 결과 발표 후에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유족회는 사건의 재조사를 촉구하며 다각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한 활동과 함께 시민사회의 노력도 있고 해서 2004년 2월 9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노근리 사건 희생자 및 유족 심사와 명예회복을 위한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만장일치로 통과될 수 있었다. 노근리 특별법에 따라 노근리 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심사를 진행하였고, 218명을 희생자로 2,170명을 유족으로 최종 결정하였다.(39)
이와 함께 2005년에는 노근리 역사공원 조성 기본계획이 수립되어 노근리 사건을 역사 현장으로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2008년 6월 11일 오후 2시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에서 노근리 역사공원 기공식이 열렸다. 그리고 2009년 9월과 10월에는 청주 MBC는 <노근리는 살아 있다>는 3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영하였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노근리 사건의 진실, 진실규명을 위한 주민들의 노력, 반전에서 평화로 나가야 하는 당위성 등이 자세히 그려졌다.
2009년 노근리 역사공원이 평화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와 함께 노근리 사건 또한 반전과 인권에서 평화로 어젠다(Agenda)가 넘어가게 되었다. 2011년 10월 27일 노근리 쌍굴다리 건너편 4만평의 부지 위에 평화공원이 조성됨으로써, 노근리 학살 현장은 평화를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평화공원에는 평화기념관, 위령탑, 조각공원, 평화기원 마당, 야외전시장, 교육관 등이 만들어졌다. 노근리 평화공원은 노근리에서 희생된 영혼을 추모하는 공간이자 살아남은 사람들의 아픔을 보여주는 역사관, 평화의 전당이 되고 있다.(40)
2017.2.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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