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탈당하는 국가혼과 역사(2) -노근리사건의 진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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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02-07 15:04 조회4,94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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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2. 2일 우리 언론은 BBC 방송을 인용하여 당시의 미군을 무자비한 살인집단으로 매도했습니다. 요사이 주한미군 철수, 반미감정, 염군사상, 병역의 양심적 기피 등 김정일 전략을 대행해주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저는 노근리 문제를 이런 차원에서 보고 있습니다.
1950년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학살당하고 짓밟힌 역사에서 벗어난 지 불과 5년이였습니다. 당하고, 죽고, 짓밟히던 민족이었습니다. 여순-순천, 4.3 사태 등을 위시하여 동족간에 집단 살인 행위들이 있었습니다. 6.25때에는 북괴군에 의해 엄청난 애국지사들이 살육당했습니다. 미국을 비난하려면 북한도 비난해야 하지 않나요? 미군이 우리를 살육하려고 왔나요, 도와주려고 왔나요?
미군은 한국전에서 56,000여명의 생명을 잃었고, 11만5천여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우리의 목숨이 중요한 만큼 미군의 목숨도 중요합니다. 양민을 죽였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양민을 가장한 게릴라, 북한에 의해 방패로 사용 당하고 있는 양민들로부터 지극히 다급했던 미군이 얼마나 당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정황도 살펴야 합니다.
저는 월남전에서 44개월간 전투를 했습니다. 내 부하가 죽으면 눈이 뒤집힙니다. 월남 도지사나 군수의 허가를 받아 마을을 통 채로 불바다로 만든 적도 있습니다. 이는 1968년의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1950년에 남의 나라에 가서 미군이 당했던 일을 당했다면 저 역시 통제 지역을 벗어난 민간인들을 적으로 간주했을 겁니다.
저는 미군을 무조건 두둔하자는 게 아닙니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입장을 바꿔 스스로에게 "나 같으면 어찌 했을까"를 먼저 물어봐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객관성과 설득력을 가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판단할 때에 조감도부터 그려야 합니다. 그래야 균형감각이 있습니다. 그다음은 우리라면 그 시대의 상황에서 어떻게 처리했을까를 상상해 봐야 합니다. 아래의 정황을 한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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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본 "한국전쟁"이 전집 10권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日本陸戰史硏究普及會" 발행입니다. 그 중의 일부를 발췌합니다.
* 1950년3월초, 1주일간 29회의 공비습격이 있었고 38선 부근에서 18회의 분쟁이 있었다(p.37)
* 3월위기설이 있었다. 북괴가 곧 남침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북괴군이 38선에 집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정보가 입수됐다(p.38).
* 5.11일, 이대통령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북괴군의 남침이 임박해 있다. 미국의 원조가 부족하다. 그래서 5.6월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p.38).
* 북괴군은 18만4천 명, 야포 609문, 전차 272대, 전투기 168대였고, 한국군은 병력 9만8천, 야포 91문, 훈련기 10대였다(p 38-39).
* 6.9일, 채병덕 참모총장은 연대장과 사단장에 대한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다. 이는 5.17일 국방차관으로 취임한 장경근의 입김이라는 설이 있다. 전방 사단장으로 임명된 장군들은 부대을 장악하고 지형을 익숙 시킬 여유 없이 전쟁을 맞았다(p.40).
* 6.24일(토요일), 육군장교 클럽(구락부) 개관 축하연회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서울번화가에서는 1사단(백선엽 대령, 개성포진) 및 7사단(유재흥 준장, 의정부 포진) 장병들과 연회에 참석했던 장병들이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각 사단에는 "내일은 좋은 날이니까 규정외의 외출 외박을 허가해도 좋다"는 전문이 있었기 때문에 춘천에 포진한 6사단(김종오 대령, 춘천 포진)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장병들을 내보냈다(p.44).
* 육본은 6.25 0시를 기해 비상경계령을 갑자기 해제하고 전 장병의 2분의1에 게 휴가를 주었다(이형근 회고록)
* 6.25 남침 사실을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채병덕에게 보고하자 전속부관은 주무시는 총장님을 깨울 수 없다며 끝내 알리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그런 부관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지 않은 채병덕 장군도 수상했다. 수많은 예비역 장군들이 채병덕 장군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참전 장군들 증언).
* 6.28일 0시 15분에 의혹의 미스터리 한강철교가 폭파됐다. 폭파경위는 다음과 같다. 한강교는 한가의 유일한 교량이었다. 미 군사고문단과 채병덕 참모총장 사이에는 "적의 전차가 한강교 근처에 접근한 것을 채병덕 장군이 확인했을 때 폭파한다"는 약속이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이 약속이 갑자기 깨졌다. 주 병력이 아직 강북에 있고, 모든 무기가 강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 고문단 부참모장인 그린윗드 중령에게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한국군이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것이다. 그린윗드 중령이 육본으로 달려갔다. 김백일 참모부장의 말이 "국방차관 장경근 장군이 01시30분에 폭파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지금 곧 폭파해야 한다. 그러는 사이에 제2사단장 이형근 장군이 와서 제2사단의 병력과 장비가 아직 시내에 있으니 폭파를 연기해달라고 건의했다. 김백일 장군이 이를 받아들여 작전국방 장창국 대령에게 폭파중지를 명했다. 장창국 대령이 짚차로 달려갔지만 도로가 피난민으로 채워져 있어 시간이 지연됐다. 28일02시15분, 드디어 한강교 위에 3열로 뻗은 인파와 차량이 2회의 섬광이 번적 하는 사이에 희생됐다. 주력부대인 2,3,5,7 및 수도 사단이 서울 외곽에 있었다(p.87-89).
* 6.28일 11시30분, 서울이 함락됐다. 한국군은 퇴로가 차단된 사실도 모르고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목숨을 건 채 사우고 있었다(p.89).
* 한강교 폭파 명령을 누가 내렸는가에 대한 군법회의가 열렸다. 채병덕 장군은 "군사지식이 있는 자가 그런 명령을 내릴 리 없다"고 증언했고, 국방차관 장경근은 "나는 명령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결국 공병감인 최창식 대령이 스위치를 누른 책임을 지게 되었다. 1950년9.21일 부산교외에서 총살 집행되었다(p.91).
* 인민군이 입성하자 서울시에는 적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인파가 의외로 많았다(p.91).
* 6.29일 0600시, 맥아더 원수가 그의 전용기 바탄호(C-54)가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정상 조직을 갖춘 한국군이 불과 2만2천명, 피난민과 섞여 뿔뿔히 철수해오는 병사들을 보고 파병을 결심했다(p.115).
* 6.30일 04:57분, 트루먼 대통령이 맥가더의 건의를 받아들여 2개사단과 1개 전투연대 파견을 전 세계에 공표했다(p.117)
* 미군 충원병의 70%는 19-20세였다(p.118)
* 6.30일, 맥아더 원수는 8군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제24, 제25시단의 출동을 전화로 명했다(p.128).
* 6.30일 밤,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24사단에게 전화로 한국 출동명령을 내렸다(p.130)
* 7.1일 03시, 비가 쏟아지는 구마모도를 출발, 08:05분에 이다쓰게에 도착했다(p.131)
* 7.1일 08:45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4대의 C-54기에 탑승하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안개가 짙어 내릴 수 없었다. 10회나 회항하다가 15:00시에 겨우 착륙했다. 이들은 열차에 탑승하여 한국 국민의 환호를 받으면서 출발, 7.2일 08:00시에 대전에 도착했다(스미스 중령 지휘)(p.132).
* 7.8-15간 제 25사단이 부산에 속속 들어왔다(p.193)
* 7.14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 지휘를 UN군 사령관에게 위임했다(p.195)
* 24 사단은 15,965명 중 1주일간의 지연작전에 4,525명을 잃었다. 이어서 오산-옥천 전투를 치르기까지 17일간의 전투에서 7,305명의 병력과 장비의 60%를 잃었다(P.237).
* 24사단장 딘 소장은 부상병이 요구하는 물을 뜨러 가다가 벼랑에 떨어져 어깨, 늑골, 머리에 부상을 입고 금산 지역을 헤매다가 자신을 도와주던 한국청년의 밀고로 36일재가 되던 8.25일 북괴에 포로가 됐다. 평소 체중은 86kg이었으나 체포됐을 대의 체중은 58 kg이었다. 그는 3년간의 포로생활을 하다가 1953년9월4일 판문점으로 돌아왔다(p.239)
* 당시 많은 피난민이 영동으로 몰려들었다가 다시 황간- 대구로 남하하고 있었는데, 북괴군과 게릴라들이 그 속에 끼어서 사단 陣內로 들어왔다. 한 임산부의 모양이 수상하여 조사해 보니, 소형 무전기를 숨기고 있었다. 그녀는 미군의 포병 위치와 북괴군의 射彈을 조종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짐 속에는 경화기가 숨겨져 있었고, 쌀을 운반하는 바구니 속에는 박격포 탄약이 들어 있었다. 또한 미군 보초가 갑자기 피난민으로부터 사격을 받기도 했고, 지뢰탐지기에 의해 총기를 발각당한 무리들로부터 습격을 받는 등 그야말로 마음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 보급차량도 종종 습격을 당했고, 도로에는 지뢰가 매설돼 있었으며, 불시에 미군 포병이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p.252).
* 영동의 7.26일 날이 밝아올 무렵, 먼저 수백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횡대로 늘어서서 전진해 왔다. 그 후방에는 전채 4대와 약간의 보병이 뒤따르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진지로 접근해 왔을 때, 지뢰가 폭발하자 주위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차와 보병이 용서없이 피난민을 사살했다.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대오를 정리하고 전진을 다시 계속했는데 지뢰는 또 다시 폭발했다. 실은 북괴군이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피난민들을 앞세워 희생시키는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여기서 기병사단은 피난민을 사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뢰지대를 통과시킬 수도 없는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이었다(p.254-255).
2017.2.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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