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메시지(13)] 광주에 북 민간인 1,000명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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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2-13 22:27 조회5,12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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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메시지(13)] 광주에 북 민간인 1,000명이 왔다?
나를 신뢰한다는 분들도 “그런데 정말 북한군이 600명씩이나 왔나요? 믿어지지가 않아서요.” 이렇게 말한다. 600명의 특수군은 믿기 어려워하는 이런 분들에게 600명 이외에 북에서 출세한 각계의 엘리트, 3살 난 아이, 로얄 패밀리까지 광주에 1,000여명이 몰려왔다고 하면 믿으려 할까? [결정적 증거 42개]를 읽기 전에는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선 개념부터 설명하면 어느정도 윤곽은 잡힐 것 같다.
특수군 600명이 어떻게 왔는데?
조갑제, 정규재 같은 훼방꾼들은 600명을 부정한다. 조갑제는 “단 1명이라도 왔으면 내가 목숨을 버리겠다.”고 방송을 해댔다. 또 “어느 경로로 넘어와서 어느 경로로 갔는지 설명하지 못하면 북한군은 오지 않은 것이다.” 이런 태클도 걸었다. 특수군이 600명이고 이들이 광주에서 팀으로 활동한 사실은 남한 당국의 문헌 2개, 북괴 당국 문헌 2개에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어느 경로로 오갔는지에 대한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반면 2015년부터 갑자기 쏟아져 나온 현장사진들에는 북괴군은 물론 남녀노소, 어린이까지의 모습들이 담겨있다. 이들 중에는 북괴 내각총리를 한 사람이 5명이나 끼어 있고, 이후 대부분 고위직들을 거친 사람들이다.
조갑제는 말한다. “강도를 당했는데 집주인이 강도의 출입경로를 대지 못하면 강도를 맞은 것이 아니다.”라고. 이 말이 과연 맞는 말인가? 집주인은 말한다. “강도를 당한 안방을 촬영한 CCTV는 있다. 이 CCTV만 있으면 강도당한 것이 사실 아닌가?”
조갑제의 이 말을 2심 재판장이 판결 내용에 인용하는 것을 보고 조갑제의 능력이 주사파 판사들의 입까지 움직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 시내에는 CCTV가 있었다. 남북 당국 문헌이 600명을 기재했고, 그 600명이 수행한 군사작전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2015년부터 쏟아져 나온 수백장의 현장 사진들과 북이 1980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5.18 기록영화에 담겨 있다. 광주라는 안방은 분명하게 강도를 맞은 것이다.
남녀노소 민간 1,000여명은 또 무엇인가?
광주 현장에 멸치 떼처럼 집단으로 몰려다닌 남녀노소 집단은 철저한 통제 하에 움직인 것으로 판독됐다. 이때 광주시민들은 무서워서 대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기 때문에 1,000여 명 단위의 집단행동을 보일 수 없었다. 통제 하에 몰려다닌 집단의 크기가 1,000여 명으로 추산된 것이다.
만 3년 동안 발굴한 광수는 616명, 이 중 571명이 민간인
노숙자담요가 발굴한 661명의 광수 중 군인광수는 90명이었다. 나머지 571명은 모두 민간인들이었다. 그런데 그 민간인 집단의 크기로 보아 571명은 약 절반 정도로 추산됐다. 그래서 1,000여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1980년 5월 23일에 촬영된 현장사진 속에 군인 광수가 90명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특수군 600명 중 100명 정도가 교도소 공격에 참여하지 않고, 지휘부와 8명의 로얄 패밀리를 보호하기 위해 근위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리를 가능케 한다.
결국 500명의 특수군이 광주교도소를 야간 공격하다가 475명을 잃었고(떼죽음, 무리 죽음), 그 중 430명을 청주에 1m 깊이로 가매장해 두었다는 결론이 수많은 증거에 의해 도출되어 있다. 졸지에 “무리 죽음”을 당한 북괴는 5월 23일, 모략사진, 시체 팔이 사진들을 수도 없이 촬영한 후 5월 24일 서둘러 안개처럼 사라졌다.
600명의 경로와 1,000명의 경로
김일성은 그의 소원인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 김재규를 통해 성공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10~30명 단위의 특수군을 잠수함으로, 산맥으로 남파했다. 잠수함에는 겨우 10명 내외만 승선할 수 있다. 5.18직전 까지는 6개월의 시간이 있었다. 이들이 처음에는 광주 주변 비트에 대기하다가 전남 해안을 통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고 광주 시가의 골목들과 주요 건물들에 대한 정찰을 했다. 이는 군의 상식이고 게릴라전의 상식이다.
그러면 민간인 1,000여명은 어떻게 왔고 어떻게 북으로 사라졌을까? 대형 여객선을 타고 공해를 통해 직접 목포 등 전남 항구로 왔다. 이 방법 말고는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대량으로 올 수가 없다.
합참의장 유병현이 전남 해안 활짝 열어줘
북이 전쟁 등 사건을 벌일 때에는 늘 고위 핵심요원을 포섭한다. 당시 합참의장 유병현이 5.18 직전에 반역행위를 단행했다. 5.18 직전 그는 전남 해안 경비 부대 모두를 전북 변산반도 이북으로 배치한 것이다. 이렇게 하기 전에는 대형 여객선이 8명의 로얄 패밀리까지 태우고 소풍 오듯이 올 수는 없었다. 그리고 600명중 475명을 졸지에 잃자, 계엄군이 재진입하기 전에 서둘러 5월 24일 정오경에 군인과 민간 모두가 거선을 타고 공해상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6.25의 10대 불가사의 이해가 필수
더러의 사람들은 또 “설마! 합참의장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이러한 분들은 중앙일보에 연재됐던 “군번 1번 이형근 대장 회고록”을 상기하시기 바란다. 6.25 발발 1주 전, 누군가가 전방부대와 후방부대를 뒤바꾸는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대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을 모두 교체했다. 하루 전에는 장병의 50%를 갑자기 휴가 보냈다. 6월 24일 밤에는 육군 회관에 전후방 중령급 이상을 불러 밤새내 술파티, 댄스파티를 열었다. 서울 시민은 물론 국군의 주 병력과 장비가 강북에 있었는데도 서둘러 한강교를 폭파했다. 한강교를 가득 메웠던 시민들이 강풍 맞은 꽃잎처럼 낙하했다. 그리고 1950년 9월 21일, 비밀리에 명령에 따라 한강교를 폭파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서둘러 처형해 증거를 인멸했다.
이형근 대장이 기록한 이 10대 불가사의와 유병현의 조치를 놓고 비교해보자. 유병현의 조치는 그 무게 면에서 매우 가볍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유병현의 이 조치를 문제 삼은 사람은 없다. 유병현은 이 반역행위를 [유병현 회고록]에 버젓이 기록해 놓았다. 뜻도 모르고 조종당했다는 냄새가 난다.
10대 불가사의 누가 저질렀나?
군 원로들은 10대 불가사의의 주범이 당시 국방차관 장경근인 것으로 지목했고, 일본 역시 장경근을 지목했다. 당시 국방장관은 신성모, 군 경력이 전무한 뱃사람, 이른바 허풍이 센 “뱃놈”이었다. 영국과 인도의 상선을 탔기 때문에 좀 깨었다 해서 장관이 되었다. 채병덕 육군총장은 당시 35세 일본군 병참분야 초급 장교였고 몸무게가 136kg이나 되는 ‘뚱보’였다. 이런 조직적이고 과감한 일을 벌일 인물이 아니었다. 그럼 누구일까, 장경근 국방차관이라는 것이다. 그는 1911년생, 동경제대를 나와 일본국과 미군정에서 판사를 했던 수재였다. 10대 불가사의를 실행할 수 있는 두뇌인 것이다. 장경근의 이 반역행위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유병현의 행위는 쉽게 이해하리라 믿는다.
2023.2.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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