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시신 부검이 빨갱이 시체놀음의 끝(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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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토스 작성일16-10-08 09:42 조회4,96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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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시신 부검이 빨갱이 시체놀음의 끝
1. 대구 10월폭동반란 시체놀음
1946년 10월2일 대구의전에서는 시험이 치러지고 있었다. 그 때 4명의 복면을 한 학생들이 시체 한 구를 시험이 진행되고 있는 강당으로 매고 들어간다. 복면의 학생들은 그 시신을 연단 위에 올려 놓고 학생들에게 경찰의 발포에 의해 죽은 시신이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치며 학생들이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선동한다. 그 시체는 도립병원에서 해부용으로 포르말린 탱크에 들어 있는 것을 훔쳐서 가져왔다고 한다. 이후 폭도들은 그 시신을 매고 대구 시내를 돌아 다님으로써 공산주의 혁명분자들의 “대구 10월폭동”에 휘발유를 부었던 악랄한 시체장사다. 시체를 이용하여 시민들을 선동하고 폭동의 확산에 불을 질렀다.
2. 제주 4.3폭동반란 시체놀음
1947년 3월1일 남로당이 주최하는 3.1절 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기념식을 끝낸 남로당원들은 가두로 뒤쳐나가 불법시위를 감행한다. 이를 통제하려는 기마경찰의 말굽에 구경 나온 어린이 한 명이 치게 됐는데, 이 모습을 본 폭도들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죽은 어린이를 들쳐 매고 “경찰이 말 발굽으로 어린이를 치어 죽였다”고 외치면서 읍내를 순회하며 선동하자, 군중들은 경찰을 향해 항의하고 공격하기 시작했고, 경찰은 시체장사의 연극에 속아 넘어가 휩쓸리고 발포함으로써 또 다른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공산주의 형명분자들의 시체장사는 성공한 셈이다. 시체를 제주도민들에게 끌고 다니면서 경찰의 살인행위라고 선동하고 폭동을 부추겼다.
3. 광주 5.18폭동반란 시체놀음
박관현의 경우:
1980년 5월18일 일요일 오전 10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는 운동권 지시에 따라 등교를 가장한 학생시위대 50여 명이 모였지만, 학생회장 박관현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 길로 광주역으로 이동하여 다시 30여분을 기다려도 역시 박관현은 물론 학생회 간부들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아서였는지 그들은 맥 빠졌다는 듯이 각자 흩어지려는 순간 누군가가 외친다. “박관현이 죽었다” 이 짤막한 외침은 순식간에 인근의 시위대를 불러 모았고 그들을 물불 안 가리는 폭도로 바꾸어 놓는다.
가난한 학생 박관현은 신분을 숨기면서 노동생활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했고, 전두환의 집권 후에 5.18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처리가 마무리 되고 1982년 3월18일에 김현장 등에 의해 부산미문화원방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일로 또 다시 시국사범에 대한 대대적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명으로 박건욱을 쓰면서 요꼬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박관현은 1982년 4월5일에 당국에 체포되었고, 1982년 10월12일 그는 전남의대 부속병원에서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사망하게 된다. 5.18폭동반란에서 드러난 박관현 사망사건은 전형적인 시체놀음이었다.
폭도들에게 사망한 경찰과 시민들의 경우:
1980년 5월21일 아침 도청분수대 앞에는 전날(20일) 저녁 시위대의 트럭에 치어 숨진 4구의 경찰관 시신이 가마니에 덮여 있었다. 그 시신들은 시위대가 병원으로 이송하지 못하도록 막고 거적으로 덮어 놓았던 것이다. 같은 날 아침 8시경에는 또 다른 시신 2구가 시민 군 점령지역에서 발견된다. 아무도 그들의 사망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시신들이지만, 새벽에 광주톨게이트에서 20사단 지휘부를 혼비백산토록 한 정체불명의 괴한 50 여명의 짓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시신들이 낫으로 살해된 모습이 20사단 습격 시에 사용한 무기에 의한 것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이 2구의 시신들은 그날 온 종일 광주시내, 나주, 영광, 해남 등지를 돌면서 무기고를 털고 사람들을 선동하는데 이용되었다. 5.18에서의 시체장사는 광주시민들을 흥분시키고 폭동에 쉽게 가담시키는데 큰 힘을 발휘한다. 폭도들에 의해 죽은 시체를 광주시민들에게 계엄군의 살인이라고 선전 선동하였고, 이에 분노한 수 많은 광주 시민들이 폭동에 가담하도록 했다.
4. 용산 방화폭동 시체놀음
2009년 1월20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의 용산재개발 제4구에서 재개발을 위한 건물 철거에 항의하는 철거민들이 남일당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한다. 사태를 진압하려는 경찰에 맞서 폭도로 변한 시위자들은 방화를 저질러 시위자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의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철거민들은 시신의 장례를 못하게 하는 한편,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희생자 장례를 못하게 시간을 끌다가 사건발생 345일 후에 결국 서울시장이 도의적 책임을 진다는 사과와 함께 보상을 받음으로써 일단락된 사건이다. 후에 법원은 방화 폭동 관련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방화폭동관련자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진행 중인데도 진상규명이라는 해괴한 요구를 하면서 결국 서울시장의 억지사과를 받아 내고 아울러 범죄자들에게 보상을 해 주는 야만적 시체장사의 기록이다.
5. 세월호 사태에서 좌파세력의 대정부 투쟁 시체놀음
2014년 4월16일 인천-제주간의 화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바다에서 침몰함으로써 제주에 수학여행 차 탑승했던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을 포함 총 304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참변이었다. 범죄의 화신 유병언이 수 많은 정관계 사기꾼들과의 유착으로 안전이 전혀 보장 되지 못한 여객선 회사에서 운항시켰던 세월호에 탑승한 것이 희생자들에게는 자신들이 원치 않았던 죽음을 초래한 원통한 대참사였다. 크기만 달랐을 뿐 그것은 엄연한 해상교통 사고였다.
그런데 그 비극을 빨갱이들은 놓치지 않고 곧장 박근혜 정부에 공격의 칼날을 들이대며 1년을 넘게 김대중 노무현 추종자들이 판치는 야당과 함께 국정을 마비시켰고, 과거의 수 많은 교통사고 희생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국가보상을 안김으로써, 국가유공자와 다른 교통사고 희생자들과는 상대적으로 너무도 차별화된 죽음의 대가를 보상 받음으로써, 세월호 해상 교통사고 희생자들에 대한 대정부 투쟁은 대한민국 국가관을 희석시켰고, 반 대한민국 세력의 시체놀음이라는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6. 백남기 사망 사건 시체놀음
작년 11월에 있었던 종북 역적들의 반정부 집회 이른바 민중총궐기대회 때,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함부로 접근하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고 이후 병원에 입원생활을 했다가 지난 9월25일 사망하게 된 농민출신 시위자 백남기에 대한 사망원인을 밝히기 위해 경찰 측에서는 백남기의 시신을 부검해야 한다고 법원에 요구했었고, 마침내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재판부가 백남기에 대한 부검을 명하게 된다.
백남기 측 유족과 이름도 거창한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 진상규명 책임자 및 살인정권규탄 투쟁분본부(백남기투쟁본부)”라는 단체가 빨갱이들에 의해 구성되고 공동대표에 한국진보연대 대표 박석운과 전국농민총연맹 대표 김영호가 앞장 서서 진두지휘하게 된다. 한국진보연대와 전국농민총연맹은 세월호, 사드배치반대, 국정원댓글사건 등의 반정부 집회의 단골골수 조직들이며, 사라진 통진당의 잔류세력과 연계되어 있고, 이들이 지금 백남기의 부검을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백남기에게 물 대포 직격탄이라는 공권력의 과잉 시위집안으로 사망했다고 억지를 쓰는 자들이 백남기의 시신 부검에는 반대하고 있고, 2015년 시위에서 백남기가 물 대포에 맞고 쓰러질 당시의 정체불명의 이른바 “빨간 우의의 사나이”에게 치명적 타격으로 사망했다는 수 많은 국민들의 부검 요구는 정부와 사법부의 명령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정부가 빨갱이들에게 항복할 것인지, 아니면 빨갱이들의 시체놀음이라는 악마적 흉계가 탄로날지 두고 볼이다.
2016년 대한민국, 빨갱이들의 시체놀음이 종착역에 도착했다
백남기 사망 사고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지독하게 대한민국을 괴롭혀 왔던 빨갱이들의 시체놀음이 그 막을 내릴 것인가, 아직도 그 악마적 범죄행각이 계속될 것인가 판가름을 낼 사건이 되어 있다. 백남기의 시신을 부검하자는 정부와 사법부 그리고 여당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빨갱이 단체와 그에 물든 유가족 측 그리고 그들의 숙주 정당 더민주, 국민의당 그리고 정의당이 한 편이 되어 일대 격전을 치를 태세에 직면했다. 입으로만 대한민국과 국가안보를 외치는 박근혜 정부가 빨갱이들의 시체놀음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상.
2016.10.8. 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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