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5.18의 거짓말 시리즈(4)-차량 돌진(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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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6-07-11 00:20 조회5,3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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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의 금남로에는 최루탄 가스와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다. 20일부터 유언비어에 선동당한 시위대는 폭도화하기 시작했고, 계엄군은 쇠파이프와 식칼, 각목 등을 소지한 폭도들에게 쫓겨 다니며 매타작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에는 계엄군이 아무 죄도 없는 택시기사들을 때려죽였다는 유언비어가 돌아다녔고, 이에 선동당한 택시기사들과 버스와 트럭들이 대열을 유지한 채 금남로로 몰려들었다.
광주 시가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폭도들의 난동에는 살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광장에는 경남 번호판을 단 트럭이 불에 타고 있었고 운전사와 조수는 폭도들에게 구타당해 중상이었다. 계엄군의 머리 위로 투석전을 벌이던 폭도들은 휘발유가 든 드럼통에 불을 붙여 계엄군 쪽으로 굴려 보냈다. 도청 앞, 광주역 광장, 전남대 정문 등에서 계엄군은 수만의 시위대에 포위되어 있었다.
밤 8시 경 광주역 도로에서 버스 한 대가 계엄군을 향해 달려오다가 분수대를 들이 박고 넘어졌다. 운전사는 없었고 차량 엑셀레이터는 기어 1단에 놓은 채 묶여 있었다. 차량을 계엄군 쪽으로 돌진시켜 놓고 운전사는 뛰어내리는 차량 공격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이른 바 '차량 돌진 공격'의 서막이었다.
5.18세력은 5.18폭도들의 차량 돌진 공격에 대해 이렇게 변명했다. '차량 전진을 저지하기 위해 군경이 던진 최루탄이 버스 앞 유리창을 깨고 버스 안으로 투입되면서 최루탄이 버스 안에서 터지자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시위대들이 최루가스를 못 배겨내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바람에 버스는 전진을 계속하다가 앉아있던 군경을 덮치게 된 것이다.'
차량 돌진에 경찰이 사망한 것에 대해 '518광주민중항쟁' 저서에서 김영택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고는 시위대원의 잘못도 아니고 경찰의 잘못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시위대원 쪽이 아니라 경찰 저지방법의 잘못이었다." 이 발언은 섬마을 여교사가 윤간을 당한 것은 처신을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발언과 쌍둥이 발언이었다. 김영택 기자는 전라도 출신이었다.
5.18세력이 주장하는 차량 돌진의 장면은 이것을 가리키는 모양이다. 20일 저녁 도청 앞 도로에서 차량 시위대의 선두차량 10여 대가 전진을 계속하자 계엄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았다. 차량이 전진을 멈추지 않자 결국 특공조가 편성되었고 특공조는 진압봉 하나만을 들고 선두 차량으로 돌격을 감행하여 진압봉으로 유리창을 파괴했다. 시위대 차량이 바리케이트를 박고 멈추자 계엄군은 차 안으로 최루탄을 집어넣고 운전자와 시위대를 끌어내었다.
그러나 폭도들의 차량 돌진 공격은 단순한 1회성 공격이 아니었다. 도청 앞에서만 발생한 것도 아니었다. 차량 돌진 공격은 도청 앞과 광주역, 전남대, 조선대 등을 지키는 계엄군을 향해 20여 차례 이상 이어졌다. 돌진 방법도 밤이 깊어가면서 잔인한 방법으로 변해갔다. 폭도들의 차량 공격은 계획적이며 집요했고, 계엄군에 상당한 인적 피해를 입혔다.
처음에 무인(無人) 차량 공격으로 시작된 '차량 돌진'은 점차 유인(有人) 차량 공격으로 바뀌었다. 유인 차량 공격은 운전사가 직접 운전하는 방식이었기에 차량 속도가 빨랐고, 계엄군이 도망가는 방향을 쫓아가며 지그재그로 운전했기에 더욱 위협적이었다. 일본군의 가미가제 공격에 공포에 떨었던 미군처럼 폭도들의 차량 공격에 계엄군은 쉴 수도 없었고, 계엄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차량공격이 처음 출현한 것은 19일 오후였다.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공방을 벌이는 가운데 가톨릭센터 앞에 모인 폭도들이 가톨릭센터 차고에서 승용차 4대를 끌어내어 의자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시동을 건 채 계엄군 쪽으로 밀어 붙였다. 불붙은 차량이 바리케이트에 부딪혀 폭발할 때마다 폭도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20일 오후, 노동청 쪽에서는 3천여 명의 시위대가 계엄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폭도들은 주유소를 점거하여 기름을 탈취했고, 차량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다음 계엄군을 향해 굴리던 중에 유인 버스 1대가 경찰 쪽으로 돌진했다. 미처 버스를 피하지 못한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관 4명이 버스에 깔려 사망했고, 경찰관 5명이 부상을 당했다.
20일 저녁 8시 경 광주역 광장에서는 쉬지 않고 이어지는 폭도들의 무인 차량 돌격을 피하느라 계엄군이 쩔쩔매고 있었다. 밤 10시쯤 유인 돌진 차량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빠른 속도로 계엄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인 차량 돌격은 최루탄이나 진압봉이 쓸모가 없었다. 피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목표물을 쫓아 지그재그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박종규 대대장이 45구경 권총으로 달려드는 트럭의 바퀴를 겨냥해 발포했다. 5.18폭동의 2번째 발포였다.
수차례의 폭도 공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폭도 진영에서는 2톤 트럭이 엔진음을 올리며 다시 한 번 돌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엄군 사이에서 "차 온다!"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고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께 트럭은 계엄군을 향해 지그재그로 달려들었다. 어느 쪽으로 피할 것인가 망설이는 순간에 트럭은 계엄군 3m 앞까지 달려왔고 계엄군 몇 명이 트럭의 뒷바퀴에 끌려갔다. 하사관 3명(하사 2명 중사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날 저녁 전남대 정문에서도 수천 명의 시위대와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었고, 폭도들의 차량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밤 10시 경,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던 11톤 트럭이 급 방향을 틀다가 쓰러지면서 계엄군을 덮쳤다. 공수부대 병사 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날 폭도들의 돌진차량 공격에 사망한 군경은 공수부대원 2명에 경찰관 4명이었다.
이날 오후에는 3공수 부식운반 차량 2대가 2천여 명의 시위대에 피습 당했다. 무기가 없던 병사들은 도망가고 차량은 전복되었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3공수 16대대가 출동했다가 차량 돌진 공격을 받았다. 정광철 중사가 온몸이 찢기고 두개골 골절상으로 현장에서 즉사했다. 정광철 중사는 전역을 한 달 남기고 있었고,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있었다.
21일 정오, 도청 앞에서도 차량 돌진 공격은 이어지고 있었다. 이날 돌진 공격에는 장갑차도 가세했다. 폭도의 장갑차 돌진 공격에 병사 1명이 사망했고,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유인 차량 공격이 병사들을 쫓아 지그재그로 달려드는 다급한 상황에서 장교들이 바퀴를 향해 집중 사격했다. 계엄군의 기관총 오발도 이때 발생했다. 5.18세력이 시민을 정조준 사격했다고 문제 삼는 도청 앞 발포사건의 진상은 돌진 차량에 대한 방어사격이었다.
당시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 대대장은 돌진 차량의 공격 유형에서 ‘5만 원짜리’와 ‘8만 원짜리‘가 있다는 애기를 들었다고 한다. 5만 원짜리는 무인 돌격 차량 조작이고, 8만 원짜리는 유인 돌격으로 공수단 대형을 한 바퀴 공격하고 오는 사람에 대한 보상이었다고 한다. 차량 돌격조의 출발지를 공격해서 수색했더니 진짜 조종자는 구멍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며 지휘하고 있더란 증언을 남겼다.
계엄군을 사상케 한 돌진차량의 운전사들은 분명 광주시민은 아니었다. 광주 시민이었다면 계엄군에 대해 무참하고 잔혹한 공격을 퍼붓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기 탈취, 장갑차 운전에 이어 돌진 차량의 존재는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주장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광주시민에 의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한군에 의한 계엄군 살상이라는 표현에 더욱 신빙성을 가게 한다.
5.18폭동 진압에 참가했던 3공수 15대대장 박종규는 돌진 차량의 공격을 받기도 했고 저격 공격을 받기도 했다. 박종규 대대장은 5.18체험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박종규 대대장의 주장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5.18에서 유효한 것이다.
"억울한 희생자가 보상을 요구하며 팔을 걷어붙일 때, 총기를 잘못 다루다가 사람을 죽인 폭도는 떳떳이 나의 잘못도 있다고 침묵을 깨야 한다. 군인을 매도하는 광주시민의 함성이 있을 때, 나를 치어죽게 하려다 달아난 지금 30이 되었을 청년은 나같은 합리적이고 선량한 국민의 군인도 있었다고 설득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민간인을 총으로 쏠 수 있느냐고 울부짖는 사람 앞에 광주교도소에서 나를 저격한 대학생은 자신이 총을 쏘았다고 자백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광주사태의 규명이다."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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