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府는 '5.18 事件'을 特檢을 통해 원점에서 재조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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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스터korea 작성일16-06-16 03:25 조회6,542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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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府는 '5.18 事件'을 特檢을 통해 원점에서 재조사하라!
[1]'5.18의 진실'을 밝혀 줄 역사적 증언들 1. 36년 전 한국의 육상과 해상은 북한의 안방처럼 뚫려 있었다. 그 증거는 북한의 남한접수원정대 1200여 명이 그곳으로 침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과연, 안전할까? 그 당시 북한은 땅굴을 강원도 철원에서부터 충청도(?)까지 확보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정부와 국방부가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15명의 증언 중 대표적인 사례 4건을 뽑아 봤다. 증언 1) 안창식 일행 11명은 1980년 11월 잠수함으로 목포로 가서 부마사태 때 선발대로 침투한 7명과 합류하여 무려8개월 동안이나 그들의 아지트에 은거하면서 작전을 수행하고, 7월 중순 께 동해안으로 가서 잠수함으로 복귀했다. 그들은 한 명이 사망하고, 네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세 명이 행방불명이 돼서 모두 14명이 살아서 돌아갔다. 증언 9) 여기에는 두 가지 사례가 소개됐는데 하나는 친구의 사촌형이 전사했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팔목에 <문신비표>를 한 당위원회 지도위원의 얘기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일행 12명중 두 명이 죽고, 세 명이 행방불명이 돼서 7명 만이 살아서 돌아갔다 한다. 증언 10) 당원사단 출신 창고장 일행12명은 잠수함으로 서해안까지 와서 서울시내로 침투했다고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퇴로에 한 명이 총상을 입어 그의 목에다 동료들의 수류탄을 걸어 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폭시켰다는 것이다. 나머지 11명은 생환했다 한다. 증언 11) 이 사례는 좀 특이한 사례이다. 5.18광주작전에 투입될 소요인원은 사전에 이미 다 들어가 있었고, 김형철 일행 23명은 5.18발생 초에 강원도 철원에서 땅굴로 충북/충남(?) 어딘가 한적한 곳으로 나왔는데, 노부부가 그들을 맞아주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여러 조로 나누어 밤새 산을 타고 전라북도 접경을 넘었는데, 광주상황이 여의치 않아 갑자기 복귀명령이 내려와 돌아갔다고 한다. 이상 네 가지 사례에서 살펴 보앗듯이 저들은 해상,육상, 땅굴 등 다양한 루트로 북한특수군 600명과 각종 엘리트 그룹, 예술가 그룹, 어린 미래 그룹, 로열 패밀리 등 공작조 600여 명을 분산 침투시켰다.
2. 또한 그 당시 광주는 평양과 같을 정도로 의식이 좌경화 돼 있었다. 그 증거는 1200여 명의 북한원정대들과 그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고, 각종 정보와 통신 및 운반 수단들을 제공해 줄 수천 명의 고정간첩들을 광주가 맞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당시에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비밀을 끝까지 함구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을 태운 잠수함은 바다 밑으로 깊숙이 잠수하여 마양도 해군기지를 출발하였다. 3일째 되던 날 안내요원이 나타나서 지금 잠수함의 위치가 남조선 전라도 쪽의 해상이라고 전달해 주었다. 안내요원이 들고 온 지휘부의 명령서에는 소부대 인원들을 지휘하여 남조선의 후방에 침투해서 현지에서 차후명령을 전달받고 수행하라는 임무였다. 지역은 전라남도 일대이고 육지에 상륙하여 도착장소까지의 안내과정은 별도의 인원들이 맡아서 수행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게 안방이었다. 침투인원들은 그곳에서 7명의 현지 북한요원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앞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전내용과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무사항을 전달받았다. 먼저 내러 온 7명의 북한요원들은 부마항쟁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무장폭동을 준비하는데 관건인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북한의 원래 계획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 안창식을 비롯한 18명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 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2월말을 넘기면서 전라도 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상황판단)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질적으로 짜여있는 북한의 당 조직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조직구성과 집단화된 규율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인 무장상태나 각오 정도에서도 북한의 조선노동당원들의 수준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지휘부 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도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 수립이었다" -증언1)-
3. 한국의 막강한 공수부대가 600명의 학생, 시위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1) 오전 9시경, 7공수 제33대대가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 정문으로 학생 250여 명이 몰려와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각진 돌을 던져 부동자세로 서 있는 7명의 공수대원들에게 피를 흘리는 부상을 입혔다. 곧 뒤를 쫒으니 저들은 광주의 중심가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도주하여 파출소를 파괴하고 불태우며 경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경찰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12.12와 5.18 상"/도서출판 시스템/지만원/P296 中)
2) 08:00시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시위대는 광주 톨게이트에 대거 운집해 있다가 육로로 광주에 출동 중이던 20사단 지휘부를 막대기와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지휘용 지프차 14대와 4정의 M-16 및 탑재된 무기를 탈취했다. 사병 1명이 실종됐다가 나중에 복귀했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P384~385)
3) 09:00시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 300여 명이 아시아자동차를 점거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를 탈취했다.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산재한 44개 무기고를 12시부터 16시까지 불과 4시간만에 털었다. 2개 연대 분의 무기였다.(P386)
[2]'5.18'이 북한이 <기획-수행-기록>한 역사라는 증거들
우선 5.18과 관련하여 북한이 발행한 두 개의 책들을 살펴보면 현장에 있지 않고선 도저히 쓸 수 없는 자세한 내용들이 수록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엔 "5.18이 대남공작 역사상 최고봉"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1. 5.18관련 북한책
1)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1982, 조국통일사, 595쪽-)
"5월 26일 600여 명의 광주 학생, 시민들은 도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쟁을 선언했다."
2) <광주의 분노>(1985, 조선노동당출판사, 35~36쪽-)
"폭동군중은 괴뢰들의 군용차량공장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군중들은 로획한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들을 로획하였다. --- 600여 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내였다."
"이리하여 무기탈취 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빈총 2,240정, <M-1>보총 1,235정, 권총 28정, 실탄 46,400여 발이였고 장갑차가 4대, 군용차량이 400여 대에 달하였으며 수백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개의 뢰관들도 획득하였다. 무기획득을 위한 봉기군중들의 투쟁은 이날 오후부터 광주의 주변지역으로 확대되었다."
3)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은 넘어>(1985, 황석영 명의로 발간/1999, 이재의 명의의 영문판)
이 책은 자기가 저자라는 사람이 황석영을 포함해 4명이나 된다. 책의 내용이 위에 열거한 두 권의 북한책을 그대로 복사한 것에 불과하며, 황석영 자신이 자기는 발행하는데 명의만 빌려주었다고 실토했기 때문에 여기에 올렸다.
2.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1989년 김일성은 황석영과 윤이상을 직접 불러들여 북한의 5.18영화인 <님은 위한 교향시>를 만들었다. 그 시나리오는 황석영이 쓰고, 배경음악은 윤이상이 작곡했다. 그들은 그 공로로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 황석영에게는 상금으로 25만 달러를 주었으며, 윤이상에겐 저택과 15층짜리 윤이상 음악당을 하사하였다.
1) 북한이 5.18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제목이 “님을 위한 교향시”였다 한다. 남한에는 빨갱이들이 국민의례 대신 민중의례를 치르는데 애국가를 부르는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5.18을 소재로...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blog.naver.com/jmw8282/140094637743 블로그 내 검색
2) 영화 「님을 위한교향시」 황석영이 시나리오를 , 윤이상이 음악을 맡아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로 엄청난 날조와 과장으로 반미 , 반대한민국을 선동한 영화였다 . 왜곡 , 날조 장면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그게 사실은... blog.daum.net/cthwn/15720234 블로그 내 검색
3. 5.18 시체사진 사진첩
1) <아! 광주여!>(1990, 5.18, 북한 '한민전 평양대표부')
2)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천주교광주대교구정의평화위원회편/1987년 9월)
3) <찢어진 깃폭>(일본편)
4. 북한 최고의 것에 붙여진 5.18 명칭들
1) 5.18청년호(1만 톤짜리 프레스)
2) 5.18무사고 정시견인초과운동(기차역)
3) 5.18영화연구소
4) 5.18 누에고치반
5) 5.18전진호
6) 영예의 5.18청년직장
7) 5.18땅크호
8) 5.18청년제철소 등등
5. 북한이 해마다 5.18을 기념하는 사진
6. 601번 외국인 광수 힌츠 페터
힌츠페터,북한정권의 5.18국제선전전 요원(제601광수)증거
7. 자유북한군인연합회장 임천용씨 기자회견 " 5.18민주항쟁과... /보내기
2006년 12월 20일 서울 세실레스토랑에서 ‘자유북한군인연합회’가 주최하고 ‘대한민국애국청년단’이 협찬하는 <5.18광주사태에 개입했던 북한군의 실체에 대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8. 시스템공학박사 지만원의 책
1)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2008. 10, 도서출판 시스템)
2) 수사기록으로 본 다큐멘터리 역사책 압축본 <12.12와 5.18 상/하> (2009. 10, 도서출판 시스템)
3) <솔로몬 앞에 선 5.18> (2010. 8. 도서출판 시스템)
4) 12년 연구의 결과물 <5.18분석 최종보고서> (20014. 10, 도서출판 시스템)
9. 재미교포 김대령 박사의 책
1) <역사로서의 5.18/4권> (2013. 5.12)
2) <임을 위한 교향시>
10. 광주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의 검찰 증언
"5월 22일 15시 08분경 저는 도청 앞 광장에서 취재 중에 있었는데, 항쟁본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방송이 있었습니다. 즉, 광주도청 앞을 비롯하여 금남로 등 주요 시위지역 곳곳에 500여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광주항쟁 지원차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의 방송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은 이미 20사단 병력까지 동원하여 광주가 철옹성처럼 봉쇄되어 외부 사람들은 한 사람도 드나들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다수의 대학생들이 광주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11. 신천박물관의 가묘와 추모비
1) 신천박물관 개관일: 1960년 6월 25일.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신천박물관 (信川博物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황해남도 신천군에 1960년 6월 25일 건립된 역사 박물관이다. 본래...
https://ko.wikipedia.org/wiki/신천박물관 사이트 내 검색 웹문서 더보기
2) http://blog.daum.net/02mrkorea/595
12. 김명국의 증언/채널A의 '김광현의 탙탙평평'(2013.3. 15)
13.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삼씨의 증언/황장엽, 김덕홍씨의 발언
채널A 뉴스 와이드 , TV조선 뉴스쇼 판 (2013.1.11)
14.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2009. 9, 자유북한군인연합/임천용 회장 외 15명의 증언집)
15. 2014년 5월 13일, 청주 흥덕지구에서 발견된 '무연고 유골 430구'의 정체를 밝혀라!
1) 5.18광주의 시신처리 방법
일체의 유품 없이 칠성판 위에다 두꺼운 비닐로 둘둘말아서 일련번호를 적었다.
1980년 광주의 시신 포장
2) 청주의 무연고 시신 430구의 향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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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3일 청주 현장에서 발견된 유골
16. 작년 5월 5일부터 지금까지 만 13개월에 걸쳐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에서 발굴해 낸 광수의 수가 무려 477명이다.
<광수 통합분석>
1. A그룹: 북한특수군 600명
2. B그룹: 民-官 엘리트 및 로열패밀리 600명 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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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총 : 1,200여 명[남한접수원정대]
4. 사망자: 490여명(신천박물관에 가묘와 추모비 있음/ 時在, 이 나라가 대한민국 정부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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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생환자: 710여 명/여자 66명
1) 군인 광수: 199명/여 3
2) 민간 광수: 197명/여 46
3) 예술 광수: 30명/여 7
4) 서울광수: 51명/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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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총 : 477명/여 66명
6) 미확인 광수: 233명/여기엔 아직 발표되지 않은 서울광수 10여명이 포함돼 있다.
이들 중에는 김일성家의 로열패밀리가 8명, 여자 광수가 66명이나 된다.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한가?
<<결 론>>
5.18은 큰 틀에서 보면 다음의 3단계로 구성 돼 있다.
제1단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
제2단계: 김일성 부자와 김대중이 야합하여 일으킨 '5.18폭동',
제3단계: 아직도 진행중인 서울 광수(약 50여명)들의 활약이다.
따라서 가장 확실한 증거는 477명의 광수다. 지금까지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이 발굴한 광수의 수가 477명이다. 그 중에는 군인광수가 199명이고, 民-官 엘리트 및 김일성가의 로열패밀리, 미술가 그룹이 227명에 이른다. 또한 이들과는 별도로 미래 그룹으로 형성된 10~20대 젊은 광수들 50여명이 현재 탈북하여 서울에서 다방면으로 진출해 활동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정치가도 있고, 교수도 있고, 방송 및 연예인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많다.
작금에 이와 같은 수많은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수장들과 국무위원, 국회의원, 안보관련수장들이 오로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의 '직무유기'에 대하여 이 자리를 빌어 공개 고발한다.
재작년에 학생들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가 참변을 당했다. 이른 바 <세월호 사고>다. 현행법에 따라 처리하면 될 것을 정치권이 개입하여 특별법을 만들어 개국공신 이상의 특혜를 주는 나뿐 선례를 만들어 놓았다. 2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 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 후, 얼마 지나 중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고가 발생했었다. 우리의 정치권은 그들이 그 문제를 얼마나 신속히, 조용히 처리했는지를 배워야 한다.
앞서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5.18 사건'은 북한이 남한을 접수하기 위해서 600명의 전투조와 600여 명의 공작조가 불법으로 침투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 특수게릴라전이었다. 갖은 유언비어를 만들어 살포하고, 관공서들을 불태워 사람들을 모으고,경찰서를 파괴하고, 광주 톨게이트를 지나는 20사단을 공격하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380여 대의 차를 빼았고, 전남지역에 산재한 44개 무기고를 습격하여 2개 연대분의 무기를 탈취하고, 이어서 2700여 명의 재소자가 있는 교도소를 여섯 차례나 공격하였다.
이와 같은 못된 짓을 한 전범들을 우리의 사법부에서는 '준헌법기관'이라 하였고, 행정부와 입법부는 특별법을 만들어 이들을 '민주화유공자'로 만들어 엄청난 보상금과 연금을 수여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그들은 우리의 공수부대원 23명과 경찰관 4명을 희생시켰으며, 민간인도 166명이나 죽여놓고 그것을 계엄군에 뒤집어 씌운 특수 전범들인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특검을 통해 '5.18'을 원점에서 다시 조사를 하여 북한군은 UN의 사법재판소에 제소를 하고, 북한군을 도왔던 광주시민들은 현행법에 따라서 '여적죄'로 처벌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5,18특별법'은 즉시 폐기처분해야 한다.
2016.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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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frhd님의 댓글
aufrhd 작성일국회의원 중에서 5.18에 관한 재조사 특검을 주장하는 자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