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유언비어 희생양 박관현의 죽음(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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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토스 작성일16-05-16 11:32 조회5,04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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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유언비어 희생양 박관현의 죽음
1980년 5월18일 일요일 오전 10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는 운동권 지시에 따라 등교를 가장한 학생시위대 50여 명이 모였지만, 학생회장 박관현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 길로 광주역으로 이동하여 다시 30여분을 기다려도 역시 박관현은 물론 학생회 간부들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아서였는지 그들은 맥 빠졌다는 듯이 각자 흩어지려는 순간 누군가가 외친다. “박관현이 죽었다” 이 짤막한 외침은 순식간에 인근의 시위대를 불러 모았고 그들을 물불 안 가리는 폭도로 바꾸어 놓는다.
5월22일 언론사에 보내진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는 다시 가지를 치며 확산된다. 사망 유언비어에 앞서 그가 계엄군에 연행되었다는 유언비어부터 살펴 보자. 누가 한 말인지는 알 바가 아니고 목소리만이 학생들을 자극하게 되는 시기이다.
“나는 전남대 근처에 사는데, 오늘 새벽 산책을 하다가 박관현이가 현행되는 연행되는 것을 봤어요. 검은 승용차에 실려 정문을 통해 후문 쪽으로 갔는데, 광주향토사단 연병장에 감금돼 있는 모양이에요” (나의갑 기자, 1988, 105))
“첫날의 시위가 격화된 것은 전남대 학생회장을 살해하여 도청 앞 광장에 전시한 사건으로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충격 받은 전대 총장이 실신하여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자살 설이 유력합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6:154)
“계엄군이 전남대생 3명을 학살하여 도청 앞 광장에 전시한 것을 본 전남대 총장이 충격을 받아 실신, 실려 갔는데 자살 설이 유력하다.” (1980년 6월5일자, 동아일보)
그러면 박관현은 죽었는가? 살았다면 5월22일까지 어디에 있었는가? 다음으로 전남대 총장은 자살했었는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요 황당한 유언비어였음을 확인해 보자. 우선 박관현이 멀쩡하게 살아 있었던 상황부터 들어 본다.
“5월18일, 예전부터 휴교령이 내리면 전남대 정문 앞으로 모이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정문 앞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우리는 위협을 느껴 일단 피신하기로 하고 다시 시내로 나왔다. 시내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가용을 빌려 낚시꾼으로 가장하고 박관현과 김영휴를 데리고 운전수와 함께 광주를 빠져 나갔다.
양갑섭씨는 앞으로의 추이를 더 살펴 보기로 했다. 우리는 광주를 빠져 나가 전남 여천군 돌산면 방죽포 소재 전남 임해연구소 앞에 있는 김철만씨 집으로 피신했다. 이곳은 내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곳이기도 하지만 사범대 교수인 정정희씨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차명석, 1989)
이제 박관현 사망 설에 놀라 자살 했을 것이라는 전남대총장 자살 설의 유언비어의 진위를 알아 볼 차례다. 전대총장도 5월22일 멀쩡하게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잠시 후 전남대총장 비서라는 사람이 찾아와 나를 은밀히 좀 보자고 했다. ‘총장님께서 무엇이든 도와주라고 하셨네. 필요한 것이 있거든 말하게’” (1980년 5월22일)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장, 김창길, 1989)
남민전 전사 빨치산 투사 윤한봉과 민청학련 관련자 그리고 전남민청협 조직은 5.18무장폭동을 위해 벌써부터 전남대 운동권 지도부를 물색 해 놓았고 그 학생회장에 말 잘 듣고 우직한 광천동 빈민촌의 촌놈으로 알려진 박관현을 지목하여 선출토록 한다.
“당시는 밖에 있는 우리들과 전남대 학생권과의 연계가 긴밀하여 총학생회장 후보도 우리들이 물색하였는데 윤한봉 형이 법대행정학과 3학년인 박관현을 추천하였다. 이에 전남대는 박관현을 총학생회장으로 추대하기 위한 선거작업이 한 창이더니 4월2일 박관현을 중심으로 전남대 총학생회가 구성되었다.” (정용화, 1989)
이 무시무시한 유언비어는 마치 사실처럼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데, 바로 5.18사료편찬위원회 명의로 된 것이다. 대한민국을 유언비어와 거짓말 천국으로 온 세계에 선전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고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가?
“가슴 아픈 사실은 전남대 학생회장이 너무나 참혹하게 계엄군에 의해 살해되는 모습을 보고 전남대총장이 할복자결을 한 것은, 미친개처럼 날뛰는 계엄군들이 시민.학생들을 살해하는 장면이 얼마나 참혹했으면 자결을 하였겠는가?
(5.18사료편찬위원회, 2009, 2;104)
5월18일에 향토사단에 연행되어 감금되었다가, 금새 죽었다고 광주 시내에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간 유언비어로 인해 박관현은 이후로 세상 사람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의 사망 유언비어는 사실 김대중 내란의 주모자 정동년의 증언에서 이미 예견된 공작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동년:학생시위를 과격화시켜 시민과 고교생을 가담케 하면서 시위도중 학생이 죽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야 하고, 도청을 점거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면 현정부는 전복되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수립될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이제부터 5월18일 죽은 걸로 되어 있었던 박관현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사망하게 되었는지 그 비참했던 과정을 추적해 본다. 그는 실로 윤한봉, 윤상원, 정동년 등의 원했던 대로 5.18폭동반란의 확산을 위해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 수도 없었으며, 그가 사라진 광주에서는 명실공히 남민전 전사였던 윤상원이 무장투쟁의 선봉에서 진두지휘하게 된다.
박관현이 광천동 공단 출신이라는 점은 아세아자동차공장 차량 탈취 극은 물론 그의 사망 유언비어에 이성을 잃고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노동자들의 폭력적 시위를 유발하게 되었으니, 정동년의 학생 사망 유언비어 확산 계획에서 시작된 박관현의 죽음에 따른 노동자들의 과격폭력화는 폭동반란 주도 자들의 놀라운 예지력을 알 수 있다.
박관현은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처럼 유언비어가 확산되어 있었고 그것은 시위의 과격화에 불을 지른 엄청난 효과를 얻었기 때문에 5.18폭동이 막을 내리기 전에는 얼굴을 내밀지 못하게 되었으며, 폭동 종료 후에도 그는 공식적으로는 행방불명 처리되었고 수사당국의 수색 대상이었기 때문에도 숨어 살아야만 했던 신세가 되었다.
가난한 학생 박관현은 신분을 숨기면서 노동생활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했고, 전두환의 집권이 있는 후에 5.18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처리가 마무리 된 후에 1982년 3월18일에 김현장 등에 의해 부산미문화원방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일로 또 다시 시국사범에 대한 대대적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명으로 박건욱을 쓰면서 요꼬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박관현은 1982년 4월5일에 당국에 체포되었고, 1982년 10월12일 그는 전남의대 부속병원에서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사망하게 된다.
유언비어에 의해 5월18일 죽은 자로 변한 박관현이 객지를 떠돌면서 신분을 숨기고 이름까지 바꾸고 험난한 생활을 하면서 육신이 피폐했을 것이며, 그가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 단식투쟁을 함으로써 부실한 건강을 악화시켜 그의 죽음을 앞 당겼을 것이다. 5.18세력이 아무리 그를 열사라는 이름으로 칭송한다고 해도, 젊은 나이에 쓸쓸하게 병사한 박관현의 죽음은 결과적으로는 5.18폭동 주모자들의 시체놀음 희생자가 된 셈이다. 이상.
2016. 5. 16. 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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