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남민전 戰士 윤상원의 폭동반란 준비(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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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토스 작성일16-05-04 09:17 조회5,51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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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 戰士 윤상원과 박기순의 광천동 위장취업
1. 1980년 5월21일 아침 방위산업체 아세아자동차공장 차량탈취
“시민군이 탈취한 차량은 아세아자동차가 장갑차 포함해서 360여 대, 광주고속이 고속버스 포함해서 50여 대, 소방차 13대, 그리고 택시 시내버스 등을 모두 합해 600여 대라고 해요” (1980년 5월31일 조선일보 임시취재반)
“시위대원들은 탈취한 지프차를 앞세우고 오전 9시쯤 광주 광업단지 안에 있는 방위산업체인 아세아자동차 광주공장에 들어가 맨 먼저 군용트럭을 탈취하게 된다. 시위대는 나중에 버스, 지프차, 장갑차, 가스 차, 등 260여 대의 각종 차량을 빼앗아 몰고 다니게 되는데, 항쟁기간 동안 시위대가 이용한 장비 중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것이 가장 많고, 광주고속버스 등 108대의 버스, 그리고 개인 소유의 승용차와 용달차, 트럭 등이다. 그러니까 단일회사 소유로는 아세아자동차가 가장 많은 셈이다.”
(김영택, 1996, 07)
21일 아침 8시에 50여 명의 폭도들이 20사단 지휘부 지프차량들을 모두 탈취하여 300여 명의 또 다른 폭도들을 태우고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갔으며, 동시에 또 다른 300여 명의 폭도들이 다른 곳에서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집결한 시각이 아침 9시였는데, 이후 공장창고에 보관된 총 360여 대의 차량들을(장갑차 포함) 단 1시간 만에 모두 각각의 창고로부터 꺼내서 운전하여 일부는 전라도 각지의 무기고를 향해 일부는 광주시내 시위대를 수송하여 도청으로 집결시킨다.
그러니까 오전 10시에 공장문을 일제히 나섰다. 방위산업체에 산재한 그 많은 군용민간용 차량들을 어떻게 단 1시간 만에 빼내서 운전하여 나올 수 있었는지, 우리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군용트럭, 고속버스, 장갑차, 지프차, 소방차 등 각종 차량들이 여러 창고에 따로 보관되어 있을 것이고 각각의 창고에는 책임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차량들이 단 1시간 만에 번개 같은 속도로 공장에서 탈취당한단 말인가? 그 내막을 파헤쳐 보면 5.18폭동의 치밀한 준비과정을 짐작할 것이다.
2. 1978년 1월, 공산주의 혁명조직 남민전과 북한의 광주사태 음모 시작되다
“북한의 지령대로 1978년 1월초 서울시내 도뀨호텔 앞과 을지로 세운상가 앞 등에서 수백 장의 유인물을 살포한 남민전 전사들 대부분은 김남주 등 광주운동권이었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북한방송 청취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광주사태 때까지 계속되었다. 임헌영이 작성하고 이재문이 서명하여 김일성에게 보낸 충성맹세 편지를 북한이 방송하는 것을 주로 광주운동권으로 구성된 남민전 전사들이 1978년 1월5일부터 13일 사이에 3회에 걸쳐 청취한 때를 기점으로 내란상태를 야기하기 위한 남민전과 북한의 공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남민전이 북한의 지령대로 북한이 지정한 장소에 유인물을 살포하자 북한이 그것으로 베트남에서의 인민혁명을 위한 베트콩과 월맹의 동맹관계와 같은 남민전과 북한의 관계가 성립된 것을 인정한다고 방송한 것은 공조를 위한 남민전과 북한의 계약방식이었다. 남민전과 북한 측 사이의 이러한 밀약을 통한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은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2년 반 전이었던 1978년 1월에 시작되었다.” (김대령, 임을 위한 행진곡, “남조선 해방전사에게 바치는 행진곡 중에서, 26)
3. 군납업체 아세아자동차공장 인근에 1978년 윤상원과 박기순 위장취업 하다
윤상원은 전남대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서 은행에 취직하여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978년 직장생활 6개월 만에 은행을 그만 두고 광주로 내려가 아세아자동차공장 근처의 “한남플라스틱 공장”에 위장취업 하라는 남민전의 지령에 따라 광주로 내려왔으며, 같은 시기에 박기순은 전남대에서 민주교육지표 사건으로 1978년 강제휴학 한 상태에서 광천동 공단 부근에서 7월부터 청소년 노동자를 상대로 남민전 사상 주입을 위한 들불야학을 하고 있다가 남민전의 지령에 따라 아세아자동차공장 인근의 “동신강건사”에 여공으로 위장취업 하게 된다.
“청년학생들의 노동현장 투신도 이어진다. 1978년 6.29 전남대 민주교육지표 사건으로 강제휴학 당한 박기순이 그 해 10월 광주 광천공단 “동신강건사”에 들어 가고 비슷한 시기 윤상원도 “한남플라스틱 공장”에 일용노동자로 입사하게 된다. 이들의 현장 투신은 비록 별다른 성과 없이 한시적인 활동으로 끝나지만, 80년대 중반부터 열풍처럼 불어닥친 대학생들의 소위 ‘위장취업’의 효시가 된다.” (광주매일 ‘正史 5.18’, 1995, 61~62)
(광주매일은 윤상원과 박기순이 공산주의혁명조직 남민전 戰士였다는 사실은 쏙 빼 버리고 겨우 위장취업이라는 말만 늘어 놓는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공산주의혁명조직의 戰士 라는 사실을 역사기록에 남겼다가는 5.18은 명확한 반역 폭동반란이 되기 때문이었으니, 전라도 언론은 물론 5.18세력의 기록은 대부분 전혀 그 신뢰성이 없는 것이다.)
4. 신속 정확했던 아세아자동차공장 차량탈취의 비결
남민전 전사 윤상원과 여전사 박기순이 1978년 계획적으로 광천동 아세아자동차공장 인근에 위장취업 하면서 박기순은 들불야학으로 윤상원은 자동차공장 근로자들에 대한 포섭공작으로 남민전 투사를 엄청나게 양성한다. 그렇게 남민전 공산주의 혁명 투쟁 도구로 전락한 청소년 노동자들은 북한-남민전이 기획한 5.18광주 폭동반란의 첫 단계에서 신속하게 이용한다. 방위산업체를 습격하고도 아무 저항도 시간지체도 없이 실사천리로 수 많은 자동차를 빼 내는 일은 자동차공장 근로자들의 협조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 중 윤상원 등이 주축이 된 들불야학 출신(윤상원은 5.18이후 박기순과 가족들에 의해 영혼결혼식을 갖는다) 운동가들은 광주항쟁기간 중 ‘투사회보’ 제작, 도청 사수 등 박중한 책무를 사행하게 되며, 택시 시가들의 차량행사를 비롯하여 여성 노동자들의 항쟁참여 등은 두드러진다. 이는 전남 사회운동협의회가 집계한 항쟁 당시 구속자, 부상자, 사망자 중 직업이 확인된 801명의 52%에 이르는 420명이 저임금 노동자, 운전기사 등으로 밝혀진 점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광주매일 ‘正史 5.18’, 1995, 62)
따라서 5월21일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단 1시간 만에 360여 대의 각종 차량을 꺼내고 외부로 운전 가능하게 만든 자들은 바로 윤상원에게 이미 포섭 당하고 지령에 따라 움직였던 자동차공장 근로자들이었고, 5.18시위대 대부분이 광천동 노동자들이었음이 드러났다. 일부 공장 근로자들이 차량을 운전 할 수도 있겠지만, 거의 모든 차량들은 600명의 북한특수부대가 이미 짜 놓은 각본대로 운전했었다. 앞에서 북한과 남민전은 한통속이었음을 알았으니, 광주에서 암약했던 간첩 손성모를 통해 광주의 모든 폭도들이 사실상 북한과 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5. 광주5.18사태는 민주화도 계엄군 과잉진압도 아닌, 준비된 폭동반란
인혁당 재건위 사건, 민청학련 사건으로 반 대한민국 역적들의 대한민국 정부전복 흉계들이 폭로되고 와해된 후, 빨치산 박현채와 류낙진, 공산주의혁명조직 남민전, 광주운동권, 김대중 세력 등이 臥薪嘗膽, 切齒腐心하고 있는 동안 1978년1월부터 남민전과 북한과의 약속으로 남민전은 광주폭동반란의 흉악한 음모는 시작된다. 5.18의 임으로 불려지는 윤상원과 박기순을 이용한 폭동반란의 첫 단계 준비로서 아세아자동차공장 차량탈취 공작을 개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아세아자동차공장 차량탈취의 과정에서 총 360여 대의 각종 차량을 단 1시간 만에 창고에서 꺼내 차질 없이 운전하여 전라도 무기고 습격탈취와 시위대 수송을 감행했던 기록들에서 남민전과 북한특수부대(600명의 정체불명 폭도들이 북한 특수부대가 이라고 5.18세력이 우긴다면 그들을 유령부대라고 할 것인가?)가 혼연일체로 차량을 탈취하고, 무기고를 털었으며, 도청을 점령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5.18을 남북합작 대한민국 정부전복 폭동반란이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이상.
2016. 5. 4. 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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