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번 광수, 박경윤의 5.18 시체놀음(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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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토스 작성일16-04-20 10:19 조회6,64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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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번 광수 박경윤의 5.18 시체놀음
1988년 처음 북한으로 들어간 후 1992년에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로부터 공식적인 북한대외경제업무 총괄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미국-한국-북한-일본-중국을 넘나드는 어마어마한 사업가 박경윤, 그의 알려진 출생지가 1935년 충청북도 청주로 되어 있으며, 1959년에는 미국유학 길에 올라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마케팅과 회계학을 전공했다고 하고, 1975년에는 재일동포 사업가 박노정과 결혼하였으며 1986년 박노정이 사망함에 따라 막대한 유산을 물려 받았다고 전해졌는데, 이후 1988년부터 북한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엄청난 이력의 여성 사업가 박경윤은 1980년 5.18광주에서 시체놀음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시스템클럽의 과학적 사진입증으로 밝혀졌는데, 그녀는 1935년 출생임으로 1980년이면 45세의 나이가 되고 그녀가 미국유학을 마치고 일본에서 나이 40에 결혼을 한 것으로 계산이 된다. 물론 재미동포 사업가 박노정이 남편이었으니 그가 조총련과 연계되었다면, 박경윤은 자연스럽게 북한에 포섭되어 간첩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것은 전혀 무리한 추정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1980년 5.18광주 시체놀음은 충분히 가능하다.
언론에 밝혀진 박경윤의 이력을 찾는 중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가 미국유학을 마치고 일본에서 만나 결혼했던 재일동포 사업가 박노정이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박노정은 박정희 시절 60년대에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회사인 새나라자동차 회사를 설립한 사람인데, 후에 4대의혹 사건에 연루되어 박정희에게 밉보여 결국 일본으로 도피하다시피 한국을 떠났다고 한다. 그 불행한 사건은 박노정을 조총련으로 기울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와 결혼한 박경윤은 夫唱婦隨가 아닌가.
박경윤이 북한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신임과 후광으로 1989년에 정주영 회장과 김우중 회장을 김일성에게 연결 시켜 주었고, 1991년에는 통일교(세계평화연합) 문선명을 김일성에게 보내 돈 줄로 만들었다. 이후 박경윤은 자신의 재력과 능력을 기반으로 김일성으로부터 금강산국제항공, 국제관광, 국제무역개발, 고려상업은행(BDA와 거래) 모두를 맡김으로써 명실공히 북한의 대외경제업무를 총괄하는 막대한 권한을 부여 받는다. 물론 그 영향력은 1998년 이후로 김대중의 아태평화위원회로 넘어가기까지 계속된다.
박경윤이 1980년 5.18광주에서 북한특수부대로 시체놀음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이력들에 남다른 의문점을 가지게 만든다. 그 중에서 미국유학 부분이 걸린다. 2011년 6월에 신동아 송호근 기자와의 인터뷰에는 1959년 미국의 오클라호마 대학이라고 했는데, 2012년 4월에 있었던 신동아 인터뷰에서는 1958년 캔자스대학으로 유학했다고 말했다. 유학 년도가 1년 틀린 것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대학교를 다르게 말하는 것은 이상하고, 만일 둘 다 맞다고 하면 58년에 캔자스로 갔다가 59년에 오클라호마로 전학했다?
더욱 흥미를 끄는 대목이 눈에 띈다. 박경윤과 그의 남편 박노정이 모두 출생지가 충청도로 밝혀졌는데, 그렇다면 박노정이 일본에서 엄청난 재력가로 변신하여 60-70년대의 재일동포 고국 돕기 운동에 동참하여 분명히 고향 충청도 가족들에게 많은 부동산을 사주었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그 부동산 임야에 지난 청주 흥덕지구 의문의 430유골이 묻혀 있지 않았을지 추정해 본다. 박경윤의 5.18광주 시체놀음과 430구 유골이 청주에서 발견된 사건을 연계 시키는 것이 터무니 없는 상상에 지나지 않을까요?
기자: ―94년 이전까지는 북한 초청장 사업을 박회장측에서 전담해서 『북한에 가려는 사람은 박회장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까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박경윤:『여기서 그 많은 얘기를 다 하기는 참 어려운데,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북조선에선 한국과 경제협력하려고 그동안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고민발(고려민족개발위원회), 그리고 지금의 민경련(민족경제연합회)입니다. 그런데 금강산 국제그룹이나 광명성, 고민발이 다 실체는 똑같은 하나였다는 겁니다. 대만에 투자협상하러 갈 때에는 고민발 명칭을 쓰고, 북조선 안에서는 광명성, 베이징에서는 금강산 국제그룹 명칭을 쓰는 식이었지.
아무튼 94년 베이징에 참사실이 만들어지고 이게 다시 아태평화위원회가 되기 전까지는 금강산 국제그룹에서 공화국의 모든 대외경제 업무를 총괄해서 시행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태평화위원회가 생기기 전까지는 금강산 국제그룹이 단일 창구로 기능하다가, 아태평화위원회가 나오면서 영역이 세분되고 창구가 다원화됐다는 거지요』
(1998년 11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발췌)
“장군님께서 금강산을 국제관광단지로 개발하라고 하신다. 그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다.”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2월16일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발언이 ‘신동아’의 안테나에 포착된 때는 2월 하순이다. 김 통전부장은 현대그룹과 맺은 금강산 관광 관련 계약이 잘못됐다면서 국제관광단지로 금강산 지구를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김 통전부장과 박 회장이 만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잔치 때다. 북한의 대남총책이 생일잔치가 끝난 뒤 77세의 노인을 따로 불러 김 위원장의 뜻을 전한 것이다.
(2011년 6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발췌)
374번 광수 박상권, 375번 광수 박경윤 모두 전 통일전선부장 김양건과 한 식구처럼 지냈는데, 그들이 모두 1980년 5.18광주에서 특수부대로서 시체놀음에 동원된 자들이다. 둘 다 남북관계에서 광범위한 인맥을 구축하고 정관계, 재계, 군부에까지 입김이 들어가 있었으니, 누구라도 그들의 5.18광주 특수부대 역할로 시작된 북한으로부터 남파된 간첩임을 의심하게 된다. 대한민국 대통령도 국정원도 5.18세력에 무릎 꿇고 엎드린 비참한 모습에 간첩들은 기고만장으로 날뛴다. 이상.
2016. 4. 20. 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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