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세력에 양심을 팔았던 김영택과 윤재걸 기자(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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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토스 작성일16-04-24 09:23 조회5,39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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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세력에 양심을 팔았던 김영택과 윤재걸 기자
1. 김영택 동아일보 기자, 5.18세력에 양심을 팔고 거짓 증언하다
김영택 기자는 1988년 5월22일 시민군 600명 지휘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도청에 들어간 시민군은 처음에 김원갑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계엄군이 철수하자 광주공원의 시민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시위대를 차량에 태워 도청에 들어왔었다. 밤을 도청에서 세운 김원갑은 아침7시쯤 시민군 500여 명을 지휘하면서 시내 요소요소에 바리케이드를 치는 한편 돌고개 쪽, 교도소 쪽, 백운동 쪽, 운남동 쪽, 지원동 쪽, 광천동 쪽 그리고 고속도로 진입로 등 7개소에 임시 초소를 세우고 600여 명을 배치하여 계엄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한편 시내 주요건물에도 시민군을 배치했다. (김영택, 1988, 124)
그런 김영택 기자는 1996년 5.18특별법에 의한 인민재판 상황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가 막히는 소설 같은 엉뚱한 증언을 하게 된다.
검찰 질문: 진술인은 5·18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당 청에 왜 서신을 우송했나요?
김영택 답: 서신내용에 기재된 바와 같이 5·18 광주사태는, 全斗煥 보안사령관 등 新군부 측에서 12·12 사건을 통해 군권을 장악하고 다시 정권까지 탈취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광주시민들을 폭도화시킨 후 이를 진압함으로써 결국 정권장악에 이르게 된 것으로 생각되므로 그에 대한 근거자료를 제공하여 주기 위해서 제가 위와 같은 서신을 우송하여 드린 것입니다.
검찰 질문: 그럼 全斗煥 등 新군부 측에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광주사태를 유발하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라는 말인가요?
김영택 답: 답 예, 제가 5·18 광주사태 당시에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로 재직하면서 느낀 바로는 분명히 5·18 광주사태는 全斗煥 등 新군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야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검찰 질문: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김영택 답: 5월22일 15시08분경 저는 도청 앞 광장에서 취재 중에 있었는데, 항쟁본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방송이 있었습니다. 즉, 광주도청 앞을 비롯하여 금남로 등 주요 시위지역 곳곳에 500여 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광주항쟁 지원차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의 방송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은 이미 20사단 병력까지 동원하여 광주가 철옹성처럼 봉쇄되어 외부 사람들은 한 사람도 드나들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다수의 대학생들이 광주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全斗煥 등 新군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투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다음날인 5월23일 13시경 광주도청 앞을 비롯하여 금남로 등 주요 시위지역에 복면을 한 시위대가 나타나 시위를 더욱 과격하게 확산시키며 주도했는데, 그것 또한 全斗煥 등 新군부 측에서 처음부터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광주시민 등 시위대들을 자극하여 시위를 확산시킴으로써 정권장악을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이루어진 일련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김영택, 1996. 2. 7. 제2회 검찰 진술조서)
김영택 기자는 1988년 5월22일 새벽에 이미 600여 명의 시민군이 김원갑의 지휘하에 광주 시내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고 증언하고서는, 1996년 김영삼과 민주화 광신도들이 날뛰어 5.18특별법을 급조하여 인민재판을 감행하려는 낌새를 감지하고는, 재빠르게 자신의 과거 증언을 뒤집고 5.18세력에게 아부하여 유언비어를 뼈대로 코미디 같은 소설을 썼던 것이다. 21일 저녁 늦게 계엄군이 광주를 빠져 나갔는데, 다음 날 새벽7시도 되기 전에 시민군 600여 명을 김원갑이 지휘하였고, 그 시민군이 모두 전두환이 폭동을 확산하기 위해 투입시킨 폭도들이었다니, 차라리 중국 무협지를 읽는 듯한 느낌이다.
2. 윤재걸 동아일보 기자, “화려한 휴가” 수기 써서 5.18역사 왜곡날조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책 48쪽에 나오는 구절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을 따서 그 책의 온갖 유언비어를 짜 깁기 한 책을 펴낸 사람이 바로 5.18당시 광주에서 동아일보 기자로 취재를 했었다는 윤재걸 기자이다. 노무현이 임기 말 종북좌파 정권을 연장하려고 악질적으로 5.18역사를 유언비어 판으로 제작하여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렸던 범죄자들의 불순영화가 바로 “화려한 휴가” 였는데, 그 책을 바로 윤재걸이 썼었고, 윤재걸은 이것 말고도 5.18주동세력의 한 축인 간첩 사경원과 김대중의 김일성 공작금 수수 사건으로 얽힌 전력을 가진 사람이다.
즉 김대중이 간첩 사경원의 김일성 면접 및 공작금 전달 사실을 김대중이 알고 있었는데도, 검찰에서 김대중이 몰랐다고 위증했던 일로 곤욕을 치르고 동아일보에서 신동아로 최종적으로는 한겨레 신문 창간에 참여하게 되었던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1985년에 5.18사태에 대해 그나마 사실대로 증언을 했었다.
“이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앞에서 함성이 터지면서 200여 명의 청년들이 가톨릭센터 안쪽으로 밀고 들어 갔다. 9층 옥상에서 6명의 무장공수대원이 시민들의 시위상황을 무전시로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이 목격된 직후였다. 수 많은 청년들이 집중적으로 돌세례를 퍼붓자 공수대원들도 비틀거리며 손을 들고 말았다. 공수대원들이 비틀거리자 청년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때려 눕혔다. 그리고 한 청년이 그들로부터 빼앗은 M16 소총 한 자루를 번쩍 치켜 올리자 도로의 시위대들은 함성을 질렀다.”(윤재걸, 1985, 239)
“시위대는 문화방송을 표적으로 삼았다. 일부 시위군중은 방송국 내부로 들어가 공격하는 한편, 또 한 시위대는 차고로 들어가 취재차량 2대와 승용차 3대 등 5대를 끌애 불을 질렀다. MBC방송국 사장이 직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바로 옆의 전자제품 상인 문화상사에도 불을 지러 버렸다. “ (윤재걸, 1985, 240)
그렇게 사실대로 기사를 썼던 윤재걸 기자가 1989년에는 간첩 사경원과 김대중의 김일성 공작금 수수 내막을 알고서도 김대중을 덮어 줌으로써 스스로 양심을 팔아버린 믿을 수 없는 기자로 변신하게 된다. 이에 앞서 윤재걸은 앞서 지적한 황석영의 유언비어 책 속에서 이름을 딴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를 제목으로 악질적인 유언비어와 왜곡날조 투성이 기록을 남겼으며, 그 모든 것이 인위적 조작이었다는 월간조선 기사가 있다.
「광주사태 지하 베스트셀러의 비밀」 - 나의갑,『월간조선』, 1992년 5월호, 403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되는 기사가 있다.
5.18 광주의 진상규명을 위해 국방부를 조사한 과거사위원회는 이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가 실재했는지 샅샅히 뒤졌지만, 해당 명령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광주시민을 살륙하라는 그런 명령따위가 애시당초에 있을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령을 최초로 언급한 이재의에게 그 실체를 확인했으나, 2006년 11. 30. 면담조사에서 그는 군 공식문서가 아닌 누군가가 기록해 놓은 자료를 보고 썼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이재의는 80년 5.18 광주 당시 온갖 유언비어를 만들어내던 투사회보 제작팀원이다. 이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령은 1988년 윤재걸이 한 공수부대원의 수기를 소개하면서 "작전명령-화려한 휴가"로 정식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공수부대원의 수기에는 화려한 휴가라는 말은 없었으며 원 제목은「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였던 것을 윤재걸이「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로 바꾼 것이다.
『작전명령-화려한 휴가』, 윤재걸, 실천문학사, 1988년, 21페이지 머리말은 다음과 같은 기술을 해 놓았다.
이때만해도 "화려한 휴가"라는 말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2007년 7월 노무현 정부에서 밀어 준『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부터 이 명칭은 공식화되다시피 하였다.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령이 유독 주목을 받는 이유는 광주의 학살이 우발적이라거나 자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발포가 아니라 처음부터 광주시민을 살륙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된 군사작전이라는데 촛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광주살륙작전=화려한 휴가"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화려한 휴가, 머리말)
그러면 익명의 공수부대원으로 제보된 그 문제의 수기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는 11여단 공수부대 출신의 작품이 확실한가? 그동안 이 익명의 수기는 학계의 논문과 역사책, 각종 저널과 발표에서 무수히 인용된 자료이다. 나는 우연히 이 자료의 오류를 발견한 뒤, 신빙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당시 특전사, 계엄사 작전일지를 통해 전반적인 사실관계를 교차검토 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공수부대원의 수기는 조작이다. 이상.
2016. 4. 24. 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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