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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개 증거,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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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12-14 21:14 조회4,3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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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5.1810일간의 전쟁이었다는 것은 나무줄기에 불과

 

5.181980518일 오전 9, 학생으로 위장한 300명의 북한 전투부대가 전남대학에 진주한 7공수여단 병력 300여 명을 찾아가 돌멩이 공격을 가해 7명의 대원들에 부상을 입힌 순간으로부터 시작해, 1980527일 새벽 0523분 주영복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한 순간에 종결된 10일간의 전쟁인 것으로 정리돼 있다. 하지만 이는 나무줄기만 본 것일 뿐 뿌리와 가지는 생략한 관찰이다.

 

10.26 이후 실권자는 정승화

 

5.18의 발원지(Fountainhead)1979년 돌출된 10.26사건이다. 1960-70년대 김일성의 소원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로 인해 김일성이 작아지고 북조선이 위축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26은 바로 이 김일성의 소원을 김재규가 성취시켜준 사건이었다.

 

10.26, 범인 김재규는 정승화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정승화는 김재규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절차를 밟기 위해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전두환은 순발력을 발휘해 정승화의 명령을 어기고 김재규를 서빙고 조사실로 연행했다. 연행되자마자 김재규는 자기가 박정희 각하를 시해했다는 사실과 정승화가 시해 현장에 함께 있었으며, 지금은 자기 명령에 따라 군을 계엄체제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10.26 이후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는 김재규의 범행을 비호하고, 현실정치에 깊이 관여하면서 10.26에 대한 합수부(합동수사본부)의 수사를 방해했다. 당시 계엄사 합수부장인 전두환은 정승화의 이런 수상한 행위, 수사방해 행위, 현실정치 참여행위, 김재규 구명행위 등 불법행위들을 조사해야만 할 최고 직책에 있었다. 정승화에 대한 수사를 하기 위해서는 보안사 수사관들이 정승화를 합수부 조사실로 연행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정승화가 수사관들에게 무모한 저항과 난동을 벌이는 바람에 우군과 우군 사이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것이 19791212일에 발생한 이른바 12.12사건이었다. 이로써 46일 동안의 정승화 천하는 종결되었다.

 

12.12 이후 실권자는 최규하, 전두환은 시국수습 보좌관

 

군에 대해서는 계급 서열밖에 모르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2성 장군에 불과한 전두환이 감히 4성 장군인 정승화를 체포했다는 사실 하나만을 놓고 하극상이니 쿠데타니 말들을 한다. 하지만 당시 정승화 대장도 전두환 소장에게 최규하 대통령을 수사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있었다. 최규하가 시해사건의 범인이 김재규라는 사실을 1026일 오후 840분에 김계원으로부터 보고 받고도 이를 끝까지 숨긴 사실에 대해 조사하라 지시한 것이다. 이처럼 수사는 수사였고, 계급은 계급이었다. 이것이 하극상인가? 12.12가 쿠데타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쿠데타였으면 전두환은 19791212일 곧바로 대통령이 돼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전두환은 어디까지나 계엄정국 하에서 계엄사령관, 국방장관, 총리, 대통령으로 하여금 그들의 비상 임무인 시국을 수습하는 일을 돕는 보좌 임무에 충실했고, 9개월이 지난 1980827일에야 당시 인물들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12.12쿠데타라는 말인가?

 

최규하를 중심으로 하는 시국수습의 계절

 

197912.12 이후의 정국은 최규하를 중심으로 하는 시국수습기간이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자 전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폭력과 강도 등 파렴치 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부정과 부패에 대한 국민적 불만도 고조돼 있었다. 전두환은 전국에서 머리 좋은 사람들을 모집해 [국보위]를 만들어 국민들의 요구를 속도감 있게 처리해 주면서, 내무부 장관의 건의를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해 삼청교육대를 설치했다. 이는 당시의 국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다.

 

김대중의 반국가 선전포고

 

최규하는 자기의 잔여임기를 다 채우지 않더라도 헌법만 개정되면 그 순간으로부터 하야하겠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공언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개헌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 즉각 내각을 해체하고, 계엄령을 철폐하고 모든 시국사범들을 당장 석방하라며 4월초부터 장기표, 심재권 등 복학생 조직을 통해 전국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했다. 4월과 5월에는 서울 북악파크 호텔에서 그의 추종자들과 3차례 회동하여 24명으로 구성된 [김대중 혁명내각 명단]도 작성했다. 515, 서울역 10만 시위가 국가를 금방이라도 삼킬 만큼의 위력을 과시했다.

 

이로 인해 모든 국민들은 무법천지를 걱정했지만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정치 모리배들은 이를 반겼다. 서울역 집회의 위력에 고무된 김대중은 516, ‘민주화촉진선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최규하 정부에 대고 선전포고를 했다. 519일까지 김대중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지 않으면 522일 정오를 기해 전국 폭력 시위를 감행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북괴의 남침이 우려되고, 정치 모리배들과 파렴치범들은 물 만난 고기떼처럼 날뛰고, 김대중은 전국 폭력시위를 하겠다며 국가전복 작전을 노골화하고, [김대중의 혁명내각 명단]은 입수돼 있는 마당이었다. 이 마당에 김대중이 감히 국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은 믿는 구석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패였다.

 

중동에 석유를 구하러 나갔던 최규하가 긴급 귀국하여, 517일 비상내각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그날 밤 12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확대 선포했다. 10.26 밤에 선포한 비상계엄은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계엄이었지만 이날 선포한 것은 제주도까지 포함하는 전국계엄이었다. ‘지역계엄전국계엄이 다른 것은 제주도를 포함시키느냐 아니냐에 국한되는 차이가 아니다. ‘전국계엄이 선포되면 통제 항목의 범위가 확대되고, 계엄사령관이 그 누구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통령에 직접 보고하는 지휘체제로 전환된다. 5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을 점령하기 위해 25,000명의 계엄군이 배치됐다. 김대중 혁명 내각을 구성했던 김대중, 김상현 등 24명의 내란음모자들이 심야에 체포되었고, 학생시위를 주도했던 전국의 대학 학생회장들이 이대에 모였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을 쳤다. 전국단위로 젊은이들에게 지옥으로 인식돼 있는 [예비검속]이 시작됐다. 모든 젊은이들에 시베리아 쓰나미가 덮친 것이다.

 

518일 전남대에서 시작한 북한의 게릴라 작전

대부분의 공수부대들은 서울의 주요 대학들에 진주했고, 광주는 위험지역이 아닌 곳으로 분류돼 전북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 소속의 2개 대대(600)만 뽑아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각 1개 대대(300)씩 주둔시켰다. 광주는 계엄군 배치 우선순위 꼴찌였던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에게 실탄은 일체 지급되지 않았다. 전북 금마에서 생활하던 공수대원들은 소풍가는 심정으로 장기판, 바둑판, 배구공을 가지고 광주로 갔다. 전북 금마에 주둔하는 7공수의 장교와 병사의 40%는 전라도 출신이었다. 7공수대원들이 이렇게 안이하게 생각한 것은 광주가 동향인데다, 당시까지의 모든 소요사건들, 부마폭동 사건과 사북탄광 폭동 모두에서 폭도들은 공수부대가 출동하는 모습만 보고도 혼비백산 줄행랑을 쳤기 때문이었다.

 

518일 아침이면, 517일 밤중부터 시작된 예비검속으로 인해 전국은 살얼음판이었고, 젊은 사람들은 경찰과 군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집안에 꼭꼭 숨어있었다. 그런데 매우 기이하게도 광주에서만 달랐다. 518() 오전 9시경, 북한 특수부대 250-300명이 학생으로 위장해 전남대에 주둔 중인 7공수 제33대대(대대장 권승만 중령, 전라도 출신)를 찾아가 감히 돌멩이 공격을 감행했다. 7명의 공수대원들의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이들의 이 과감한 행동은 대한민국 대학생으로부터는 나올 수 없는 상상 밖의 돌연변이였다. 바로 이들이 북한에서 등교 시 학생들에게 들려주던 구슬픈 노래 [무등신의 진달래]에 등장하는 동강난 조국을 하나로 다시 잇자 억세게 싸우다 무리죽음 당한북조선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공수부대가 따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아나 금남로와 충장로의 파출소를 불태우고 차량을 태워 연기를 내서 많은 시민들을 달려오게 한 후 준비된 유언비어를 뿌렸다. “환각제를 먹은 공수부대가 무고한 광주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때린다”,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주민 70%를 죽여도 좋다는 전두환 명령을 받고 남자고 여자고 마구 살해하고 있다”, “여성을 발가벗기고 유방을 도려내고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는 등의 해괴한 유언비어들이었다. 이에 격노한 광주시민들이 광주의 번화가로 몰려들어 위장한 대학생들 즉 북한 특수군에 합세했다. 이렇게 518일의 개전 상황은 그 과감성과 정밀성으로 보아 세계에서 오로지 북과만이 기획-실행할 수 있는 게릴라전의 전형이었다.

 

첫날부터 모략전

 

광주로 파견된 공수부대는 광주지역 향토사단인 31사의 사단장 정웅의 지휘를 받도록 명령돼 있었다. 사단장 정웅은 김대중의 특별한 졸개였다. 518일 오후 3, 사단장 정웅은 지도에 36개의 점을 찍어 가지고 2명의 공수부대 대대장에게 작전명령을 내렸다. “모든 골목을 통제할 수 있는 36개 지점에 공수대원을 배치시켜 골목에 있는 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모두 체포해 31사단 헌병대로 넘겨라”. 매우 무리하고 무모한 지시를 했다. 젊은이들의 수는 많고 이들을 모두 붙잡아야 하는 계엄군 숫자는 턱 없이 적었다. 따라서 정웅의 이 명령은 계엄군 병사들에게 곤봉을 사용하라는 명령이었다.

 

오후 5, 한 골목에 4-5명씩 배치된 계엄군은 수많은 청년들의 공격을 당할 수 없어 곤봉을 사용했다. 이런 장면이 연출될 줄 알았던 북괴 촬영자들이 미리 건물 옥상에서 촬영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다. 정웅이 이끄는 작전팀과 촬영자들 사이에 교감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곤봉 사진들은 모두 옥상에서 내려다보고 찍은 사진들이다. 이 사진들이 지금까지 공수부대를 비방하는 증거로 위력을 발휘해온 것이다. 5.18이 심리전이고 모략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왜 북괴가 대한민국을 살인 국가로 모략하는 것일까? 그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의문을 가질 것이다. 당시 김일성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라진 권력 진공의 상태를, 남침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판단했다. 그렇다 해도 남침을 하려면 이른바 [3대 혁명 역량]이 구축돼 있어야 했다. 북한역량, 남한역량, 해외역량이 무르익어야 남침할 수 있다는 김일성 이론이다. 5.18당시, 3개 역량 중 북한역량, 남한역량은 튼튼하게 구축돼 있었다. 그런데 부족한 것이 미국이 주도하는 해외역량이었다. 한국은 소멸시켜도 되는 나라라는 여론을 얻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북괴는 국제사회에 남조선은 마땅히 소멸시켜야 할 악의 집단으로 매도해야만 했다. 이를 위한 북괴의 시나리오 핵심은 남한을 정권 차원에서 발포명령을 내려 무고한 양민을 체계적으로 학살한 악마의 집단으로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들에게 [집단 발포]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고, [집단 발포 명령자]가 반드시 독재자 전두환이 되어야만 그림에 부합했다. 여기에 1980523일 북괴에서 내려온 남녀노소들이 총동원되어 [시체장사]를 벌였고, 그 사진들이 대거 쏟아져 나간 것이다.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사실들을 상기하고자 한다. 광주에서 촬영된 시체장사 사진들이 매우 많다. 여기에 동원된 남녀노소들은 100% 북괴인들이다. 만일 그 군중 속에 어쩌다 한국인이 멋모르고 들어가면 그는 영락없이 잡혀가 처형된다. 그 군중 속 사람들은 북한말을 자유롭게 하고 있는데, 한국사람이 끼어 있으면, 그에 의해 군중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당시 광주시민들은 각자 대문을 잠그고 꼭꼭 숨어 있어서 남녀노소가 군중 단위로 시내의 한 복판에 형성될 수가 없었다.

 

519~21일은 공수부대가 매타작당하고 전멸될 위기에 처해

 

519-20일 양일간은 공수부대가 중과부적으로 매타작을 당하고 농락당하는 날들이었다. 4-5명 단위로 골목골목에 흩어져 있다가 매타작만 당하자 공수부대는 대대 단위로 집결해 있으면서, 그들을 공격하는 군중을 향해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발 빠른 북한군은 즉시 대형 버스와 트럭을 지그재그 궤적으로 몰아 빽빽하게 집합해 있는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케 했다. 여기에 동원된 소모품들은 모두 광주사람들이었다. 520일에는 함평경찰 4명이 돌진하는 폭도의 버스에 깔려 즉사했다. 공수부대와 경찰은 이 지그재그 돌진 차량에 노이로제가 걸려 있었다.

 

이 이틀 동안 MBC KBS 방송국이 불에 타고 세무서가 불탔다. 경상도 번호판을 단 수많은 차량이 소각되고 탑승했던 경상도 주민들이 몰매를 맞아 즉사하는 일들이 비일비재였다. 520일 밤에는 광주역 앞 넓은 공간에 집결한 제3공수여단 5개 대대 모두가 포위되어 몰살당할 뻔했다.

 

북괴군 600명이 노골적으로 펼친 521일의 특공작전

 

10개 공수대대(4,000)를 압박하던 북괴군은 521일이 되자, 세기의 걸작이라 할 만한 특공작전을 벌였다. 광주에 파견된 북괴 특수군 병력이 600명이라는 사실도 이날의 작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보다 더 정교하고 과감했다. 20사단 지휘부가 광주 톨게이트를 521일 새벽 8시에 통과한다는 정보는 간첩과 결부돼 있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극비정보다. 이런 정보를 10세 전후의 아이들, 20세 전후의 양아치들이 알 수는 없다. 이들 양아치들이 300명단위로 매복해 있다가 감히 현역사단을 습격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600명 중 300명은 극비정보 내용에 따라 광주 톨게이트 근방에 매복해 있다가 정확히 08시가 되자 이동하는 정규부대를 기습 공격하여 사단장 지프차를 위시해 14대의 지프차 및 트럭과 장비들을 탈취하여 이를 몰고 이웃에 있는 아시아 자동차공장에 진입했다. 사단장이 자기가 타는 지휘용 차량을 피탈당했다는 사실은 당시 20사단장 박준병에게는 일생일대의 수치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극비로 보안이 지켜져야 할 자기 사단의 이동계획이 간첩을 통해 북괴 침략집단에 넘어갔다는 사실도 일생일대의 불명예가 된다. 이 비밀정보는 20사단과 전교사만 공유하고 있었다. 이 두 개 부대에 간첩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김영삼은 오로지 20사단장 박준병 한 사람만 처벌하지 않았다.

 

300명 단위로 구성된 2개의 북괴군 부대

 

이 매복조 300명은 09, 차를 몰고 이웃에 있는 군납업체 아시아 자동차공장으로 행군했다. 거기에서 다른 300명과 합류하여 총 600명이 됐다. 600명은 370여 대의 군용트럭과 4대의 장갑차를 탈취해 그것들을 몰고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44개 무기고를 향해 예행연습을 한 것처럼 곧장 달렸다. 그리고 불과 4시간 만에 5,403정의 총기를 탈취하고 그것으로 무장하여 시민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그 덤터기를 공수부대에 씌우는 매우 정교한 모략작전을 수행했다.

 

521일 집단 학살은 계엄군 없는 금남로에서 북괴군에 의해 발생

 

이날 오후 1시는 유명한 시간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사실로 믿는 좌익들은 바로 이 시각에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이 애국가를 부르고 난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하여 수천 명을 살상시켜 광주시를 피의 목욕탕으로 만들었다며 공수부대와 전두환 대통령을 모략해왔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각에 광주시민은 도청 앞에서 많이 죽은 것이 아니라 계엄군이 없는 금남로 빌딩 숲에서 북괴군에 의해 가두리사격을 당했다. 40명이 거기에서 죽었고 또 다른 4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도청앞 발포는 팩트 없는 유언비어였던 것이다. 금남로의 한 옥상을 점령한 어깨들 중에는 수류탄을 총기로 발사하는 특수무기 ‘M16유탄발사기를 가볍게 들고 있었고, 가슴에는 불룩하게 튀어나올 정도의 많은 총류탄을 담은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521일 오후 1, 도청 앞 집단발포는 팩트 없는 모략

 

이 군사 프로집단은 521일 오후 1시경, 도청 정문에 도열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장갑차를 돌진시켜 계엄군으로 하여금 장갑차를 향해 총을 쏘도록 유도해놓고, 바로 그 순간 이웃 금남로 건물 숲 옥상을 사전 점령한 무장괴한들로 하여금 M16 유탄발사기 등으로 가두리장에 갇힌 광주시민을 순식간에 대량으로 사살케 했다. 그리고 이를 계엄군에게 덤터기 씌웠다. 계엄군도 시민들도 그 시각에 났던 총소리가 도청에서 났는지 이웃 금남로 옥상에서 났는지 구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섭도록 정교하게 기획된 모략전이 아닐 수 없다.

전남도청에 2,100발의 TNT 폭탄을 조립하여 광주시를 히로시마의 잿더미로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하였고, 밤에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170명의 간첩수와 2,700명의 수용자를 해방시켜 폭동의 동력으로 삼으라는 김일성 지시에 따라 광주교도소를 5회 이상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600명 중 475명의 희생자를 내 부득이 524일 정오, 북으로 도망치듯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계엄군은 곧 다시 광주로 진입할 것 같고, 주력 전투부대는 사실상 전멸된 상태에서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하루라도 빨리 줄행랑을 치는 것이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후에 상술한다.

 

결국 521일 오후 5, 공수부대 10개 대대는 전남도청과 광주시를 포기하고 시 외곽으로 도망을 쳤다. 도망하는 도중 북한군으로부터 많은 사격을 받았다. 11공수여단장 최웅 준장은 북괴군 스나이퍼로부터 조준 사격을 당했다. 그를 태운 지프차가 철로와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전복됐다. 그는 운전병과 호위병을 데리고 무등산 정상에 배치돼 있는 미 반공포 포대에 피신해 있었다. 이토록 한국 최강의 군대를 압박하고 포위하여 전멸 위기로 몰아간 전투프로들이 5.18작전의 주역들이었던 것이다.

 

계엄군이 비워준 전남도청은 북괴군의 작전사령부

 

계엄군이 퇴각한 광주시는 한국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북한의 해방구가 되었다. 북한집단은 도청 지역에 모아 놓은 시체의 관을 독점하고, 광주시민들처럼 보이도록 위장한 남녀노소 집단을 데려다 한국 정부를 모략하기 위한 사진들을 찍었다. 523일에는 갖가지 종류의 무대를 만들어 놓고 이를 촬영한 후, 독일기자 힌츠페터를 통해 세계에 방영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교도소 공격에서 전투부대의 주력을 잃은 북한 지휘부는 524일 정오경, 서둘러 도청을 버리고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 마지막 철수를 끝까지 엄호한 광수가 제1광수였다.

 

북한군이 비워준 전남도청은 양아치 집합소

 

524일 오후, 북한군이 떠난 도청은 비로소 호기심 많은 광주 청소년들의 소유가 되었다. 이때부터 전남도청에 들어온 광주시민들은 개념 없는 10대의 어린 학생들과 20대 막노동자들이었다. 이들 역시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져 이틀 동안 내내 그들의 표현 그대로 '갑론을박' 말싸움만 했다. 그리고 25일 밤중, 복학생인 김종배와 26세의 트럭 운전사 박남선, 19세의 구두공 윤석루 등이 이끄는 20대의 강경파가 온건파를 총으로 위협하여 내쫓고 계엄군을 향해 '결사항전'을 선포했다. 이들이 지금 5.18 최고의 영웅으로 행세하고 있는 이른바 피라미들이다.

 

20만을 동원한 10일 작전을 지휘한 사람 광주에 없어

 

5.18에는 운동권이 단 한 사람도 개입하지 못했다. 김대중으로부터 300만 원을 받았다는 정동년은 517일 밤중에 자택에서 체포되어 시위에 참여할 수 없었다. 김대중으로부터 200만 원을 받았다는 윤한봉은 5월 초부터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 19814월에 미국행 화물선을 타고 35일에 걸쳐 미국으로 밀항했다. 그리고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시위 기간 내내 도망가 있다가 광주인들로부터 비겁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교도소에게 단식하다 죽었다.

 

지금 현재 5.18 최고의 유공자 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들인가? 1980525일 밤에 구성한 자칭 항쟁본부를 꾸린 사람들이다. ‘항쟁본부는 수십 년이 지난 다음 근사해보이라고 붙인 호에 불과할 뿐, 공식 명칭은 시민학생수습위원회.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구술한 증언록이 200212월 전남대 출판부 명의로 발행된 [5.18항쟁 증언자료집]이다. 김종배, 정상용, 허규정, 박남선, 김상집 등 5.18 성역화로 먹고 사는 이 사람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증언한 내용들은 아래와 같다. “5.18항쟁본부에 모인 사람들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비 운동권이다. 524일에 도청에 가려다 높은 관료로 보이는 위엄 있는 사람이 돌아가라는 말을 해서 주눅 들어 포기했다가 대부분 525일부터 들어왔다.”, “항쟁본부는 525일 밤늦게 구성됐다.”, “524일까지 모두가 제각기 여기저기 숨어 있었다.”

 

518일부터 24일까지의 무시무시한 적전에 참가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도청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5.18의 전설로 신격화된 윤상원도 522일 시내에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녹두서점에서 보성기업으로 줄행랑을 쳤다가 524일 밤에야 도청에 들어왔다고 증언돼있다.

 

피라미들이 5.18영웅 행세

 

결국 계엄 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주동자들 모두는 526일 하루 도청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시건방을 떨었던 30세 전후의 콩가루들로 그 수는 10명 내외에 불과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521일의 빛나는 작전을 마치 자기들이 수행한 것이라고 국민을 속여 개국공신을 능가하는 금전 및 복지 혜택을 받고 있으며 전쟁 유공자보다 더 높은 연금을 받고 있다. 1991년 화폐로 가장 많은 일시금을 받은 사람이 31,700만이고, 연금이 월 420만 원이었다. 5.18영웅 윤기권은 19912억 원의 일시금을 받자마자 그해 34일에 월북했다(전남일보, 광주일보, 월간 말지).

 

미국이 감탄한 계엄군의 탈환작전

 

198063일자 미CIA가 작성한 문서에는 한국군을 극찬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한국군은 그들에게 주어진 자위권을 끝까지 사용하지 않고 많은 희생을 치렀다. 목숨을 걸고 도청에 잠입해 폭도들이 조립해놓은 폭탄을 해체했다. 527일 새벽, 광주시 탈환 과정에서 계엄군이 광주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 지략은 매우 출중했다.”

 

527일 새벽, 한국군의 작전 비밀은 대책 없이 새나갔다. 그래서 광주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하던 전라도 지역 계엄사령관은 작전 시간을 여러 번 변경하여 간첩들을 교란했다. 이날의 광주시 탈환적전에는 공수부대 전부(4,000)를 작전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350명 정도만 사용했다. 외과적 수술을 하듯 점 공격을 하였기에 이 작전에서 사실당한 광주시민은 불과 17명에 불과했다. 17명 중 90%가 개념 없는 10-20대였다.

 

김일성, 전라도를 북한의 해방구로 만드는데 성공

 

북한은 1980년 바로 그 해에 광주 현장을 샅샅이 촬영하여 [5.18기록영화]를 제작했다. 광주에서의 촬영 주권이 북한에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다. 북한은 이 중에서 42분 분량을 따로 편집해 [광주비디오]를 제작해 전라남북도를 위주로 하여 몰래몰래 관람시켰다. [광주비디오]가 널리 확산되고, 그로부터 파생한 유언비어들이 확산되고, 김대중이 집권하자, 전라도는 완전히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반역 지역으로 돌변해 버렸다.

 

김일성의 5.18은 성공한 작전, 미국만 아니면 오늘도 적화통일 가능

 

전라도는 공수부대를 [살인 집단]으로 매도했다. 공수부대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군] 전체를 [살인 집단], [군발이]로 매도하고 희화화했다. 전 세계를 통틀어 봐도 자기 나라와 자기 국민을 지켜주는 군대를 [살인 집단]이라 증오하고 모략하는 집단은 오로지 전라도 집단과 전라도를 성지로 여기는 김일성 종교집단밖에 없을 것이다.

 

5.18은 김일성이 남한 전체를 점령하겠다는 야심작이었다. 광주시가 수복되는 순간, 북괴의 작전은 외관상 실패한 작전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그 5.18전쟁은 그 후부터 폭동전이 아니라 소리 없는 사상전으로 그 국면이 전환됐다. 소리가 없기 때문에 정부는 물론 대부분의 국민이 지금까지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지금 대한민국이 전라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적화공작은 매일 쉼 없이 수행되고 있지만 이에 대응하는 이념 전쟁 세력이 이 땅에는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애국자들은 적화는 완성되었다는 말을 한다. 아울러 적화 상태에서 아직 통일이 안 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미국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전이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게 하는 42개 증거, 구국에 도움 됐으면

 

42개 증거는 202198, 저자가 발행한 [5.18답변서]에 다 들어 있다. 하지만 이 답변서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병합사건들과 섞여 있어서 일반 독자들이 따로 추출해내기가 번거로운 데다 지면관계로 설명이 충분치 못했다. 따라서 저자는 이 42개 증거만 따로 뽑고, 각 증거별로 스토리텔링식 해설을 달아 별도의 책을 낸다. 반면 [5.18답변서]는 책 사이즈가 A4이기 때문에 [광수]에 대한 영상분석을 자세하게 소개할 수 있었다. 영상분석에 관심을 가지신 독자들은 [5.18답변서]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5.18진실이 뭐라는 거야? 북한이 주도했다는 증거가 뭐야?

 

도대체 증거가 뭐야?” 이렇게 돌직구로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이웃이 있다면 이 책 한 권만 소개해주면 될 것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5.18'5.18작전'으로 표현하였다. '5.18민주화운동'과 대치되는 새로운 용어인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작전이었다는 뜻이다. '결정적 증거 42,' '42개의 Smoking Guns'라는 표현이 이 책의 성격을 잘 대표할 것이다. 저자는 ‘5.18작전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5.18민주화운동이 차지했던 공간을 단숨에 점령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자는 이 책이 ‘5.18은 김일성과 전라도가 공동으로 수행한 반역의 역사라는 결론에 대한 Q.E.D. 마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Q.E.D.는 수학공식이나 정리를 증명하고 나서 이로써 증명이 끝났다는 것을 선언하는 수학세계의 상징마크다. 이 책 내용인 42개 증거가 모두 논리적으로 탄핵되지 않는 한,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전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이 반국가 세력에 의해 마구 구겨진 깡통 역사를 땅에 묻고, 날로 적화돼 가는 위험한 이 나라를 구하는데 절대적인 무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C학점 받은 사람이 A학점 받은 사람보다 더 잘난 척 하는 사회

 

C학점 받은 사람이 A학점을 받는 학생을 비하하고 비난하는 모습은 한국 사회에 두드러진 현상이다. 자기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지 머리는 자기가 더 좋기 때문에 열심히만 하면 A플러스를 받을 수 있다고 희떱게 목청을 높인다. 저자는 2002년부터 5.18을 연구했고, 그로 인해 감옥에도 갔고, 수억 원의 손해배상금도 물었고, 재판이 생활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송사에 시달려왔다. 그 와중에 5.18관련 역사책을 14권 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치르지 않고, 인생 경력에서 분명 C학점만 받았던 사람들이 저자를 공격하고 저자의 연구를 쓰레기라고 선동 선전한다. 저자는 정신이 병든 또라이이고, 그래서 저자의 연구가 모두 일독-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라고 매도하고 있다. 어쩌다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직업 삼아 그 일을 해오고 있다. 저자에게는 언론 수단이 없지만 이런 사람들에는 언론 수단이 있다. 전자에는 입이 없고, 후자에는 커다란 입이 있는 것이다. 이러하기에 저자의 연구가 상대적으로 땅속에 매몰돼 온 것이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문제는 이것이 저자 개인에 국한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장래가 달린 매우 중차대한 아젠다라는 사실에 있다.

 

저자에 대한 신뢰가 저서에 대한 신뢰

 

과연 저자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 무시돼야 하고, 저자의 연구가 이런 사람들에 의해 매몰돼야 하는 것인가? 그들은 누구이고 저자는 누구인가? 우리나라에는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지천으로 많다. 그래서 그냥 박사학위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는 5.18에 대한 인식을 바꿀 만큼 충분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저자는 수리공학의 원조라 불리는 미해군대학원에서 응용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나 스탠포드의 2.5배에 해당하는 비싼 학비를 국가가 대주었다. 미국에서 가장 획득하기 어려운 박사학위가 응용수학과 물리학 박사다. 저자에 대한 학력은 응용수학 박사학위를 땄다는 것만으로는 그 설명이 부족하다. 이 세상에 없던 2개의 수학공식과 5개의 수학정리를 발명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항공모함이 출동할 때 창고에 적재해야 할 수십만 개의 수리부속 각각에 대해 몇 개씩을 적재해야 하는가를 계산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추가했다. 70여 년 전통을 이어왔던 미해군 대학원에서 저자는 전설이 되었다.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에서 온 작은 체격의 장교가 천재였다는 것이다. 이런 전설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저자가 만든 공식, 정리, 알고리즘에는 JEE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처럼 수학공식이나 수학정리를 1개라도 만들지 못한 수학박사와 그것을 단 1개라도 만들어낸 박사와는 천지 차이로 그 급이 다르다. 깊이와 스케일이 다른 것이다. 저자가 이룩한 학문적 성과를 굳이 여기에 밝히는 이유는 순전히 이 책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다. 이 책은 저자만의 업적을 위한 사치품인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죽고 사는 책이다. 그래서 함부로 내치지 말고 신중을 기해달라는 것이다.

 

저자에 대한 또 다른 신뢰항목이 있다. 저자는 1967년부터 4년 동안 소위로부터 대위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전에 전투요원으로 참전하여 게릴라를 상대로 전투를 했다. 게릴라가 무인인지 잘 알기 때문에 남북한 당국이 작성한 문헌들과 현장 사진들에서 직관적으로 5.18이 게릴라전이었다는 점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직관을 수학에서처럼 증명한 것이 저자의 연구 결과인 것이다. 수학공식과 수학정리는 수학적 직관’(Intuition)에서 출발한다. 이런 직관은 훈련된 두뇌, 몰입해 있는 두뇌에서만 떠오를 수 있다.

 

[뚝섬 무지개]가 저자에 대한 고정관념 허물어

 

너무나 많은 국민들이 저자를 기피의 인물로 알아왔다. 그래서 저자가 펴낸 5.18관련 책도 기피해왔다. 이런 국민들 중에 어쩌다 저자의 인생 표류기 [뚝섬무지개]를 읽은 독자가 있다. 저자가 야간중고를 이 학교 저 학교 전전하다가 사관학교에 합격해서부터 전방, 베트남, 미국, 다양한 군사 경력을 거쳐 오는 동안 관찰하고 체험한 내용들을 담은 책이다. 사실 그대로를 담았기에 독자들에게는 한 편의 영화로 인식돼 왔다. 1992년 수많은 기자들이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을 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시절에 읽었다면 제 인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최근 저자에게는 많지는 않지만 새로운 동조자들이 생겼다. “지만원이라는 사람이 광주에 북한군이 왔다는 넋 나간 소리를 해서 언론에서 [망언자]로 찍혀 몰매를 맞으면서도 계속 같은 소리를 내는데, 그 사람 미친 거 아냐?” 필자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그중에는 육사 출신들에도 있었고, 여성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분들 중 어쩌다 [뚝섬 무지개]를 읽은 분들이 생겼다. 그 책을 읽은 후부터 비로소 그분들과 저자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5.18관련 서적들을 찾아 읽었다. 이처럼 저자와 일반 국민 사이에는 수백 년 묵은 거북이 등처럼 딱딱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딱딱한 거북이 등을 [뚝섬 무지개]가 뚫어준 것이다. 저자에 대한 시각이 180도 바뀌었고, 5.18에 대한 시각이 변했다.

 

[결정적 증거 42]도 스토리텔링

 

독자의 흡인력은 딱딱한 사실의 나열보다 스토리텔링에 지향돼 있다. [뚝섬무지개]의 흡입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이유 중 하나는 문장들이 스토리텔링 모드로 전개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성격상 딱딱한 이미지를 풍긴다. 하지만 이 책은 많은 국민이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 내용의 문장을 스토리텔링 모드로 구성했다. 이 책은 분명 5.18을 북괴군이 저지른 게릴라 전쟁이었다는 사실 증명에 종지부를 찍는 Q.E.D.책이다. 하지만 동시에 저자가 시리즈로 저술해온 5.18관련 역사책을 제15권으로 마감하는 피날레가 될 것이다.

 

2023.1.

 

저자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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