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동과 진실화해위와 윤석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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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12-15 12:58 조회4,19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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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동과 진실화해위와 윤석열(4)
김광동 위원장에 대한 빨갱이 단체와 빨갱이 언론들의 공격이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12월 14일, MBC가 또 김광동 위원장의 뒤를 캤다. 노근리 사건에 대한 김광동 위원장의 논문이 빨갱이 시각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의 언론이 뜨면 본인도 사표를 내고 대통령도 사표를 수리했을 법하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런 저항을 무시했다. 김광동 위원장이 가지고 있는 역사관련 소신에 깊이 공감하는 것 같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노근리에 대한 김광동의 시각>
"노근리 사건은 집단학살이 아님에도 반미화 때문에 사회 전체가 흥분했다“
"미국이 양민을 살해할 목적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자행한 것처럼 '집단 학살'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사회 전체가 흥분했다“
"이는 한국 사회 반미화의 진행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다. 한국의 반미운동은 다른 국가와는 차원이 다르다. 미군 관련 사건을 의도적 살인이나 학살로 몰아가는 특징이 있다“
<MBC가 주장하는 노근리 진실>
“1999년 AP통신의 보도로 알려진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미군이 기관총과 전투기 폭격을 가해 충북 노근리 일대에서만 수백 명을 죽거나 다치게 한 사건이다.”
노근리 사건은 빨갱이가 주도한 허위 모략
노근리 사건은 1999년 9월 29일 AP통신 기자 최상훈(1962), 이 일로 퓰리처상 수상을 받았다. 그의 선정적인 보도로 인해 노근리 사건은 세계적 이슈로 등장했다. 미군이 의도적으로 항공사격으로 철로에 있는 피난민을 학살하고, 지상에서는 쌍굴 다리(철로 밑에 나란히 뚫린 두 개의 굴)에 있는 피난민을 사격해서 노근리 및 인근지역 주민 수백 명을 학살했다는 것이 보도의 요지였다. 이러한 주장이 당시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은 AP통신에 이어 NBC 등 수많은 유수의 방송매체들이 ‘현장의 증인’임을 자칭한 에드워드 데일리’(Edward Daily)를 내세워 방송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노근리 보도는 반미작전의 일환
노근리 사건이 문제화되던 1999년 9월은 김대중 집권 2년 후기였다. 이 때 좌익들의 반미-반국군 운동이 동시다발로 발생했다. 난데없이 주월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양민을 의도적으로 학살했다는 엉뚱한 음해운동이 일어나 월남전에 참전했던 가장들이 가족들로부터 비하당하기 시작했다. 이 음해공작은 한겨레21의 고경태 기자-한홍구-강정구-무명의 통신원 구수정을 중심으로 국내외에 폭넓게 전개됐다.
동시에 미군부대 주변 하수구에서 독극물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국민들을 경악시켰고, 미군이 항공기 사격훈련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매향리 사격장의 피해가 부풀려졌다. 이와 동시에 주미철본, 즉 주한미군철수범국민운동본부가 주한미군 철수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모두가 조직화된 빨갱이들의 작전들이었다. 1999년은 이렇게 김대중이 반미와 반역적 모략물들을 퍼부은 해였다.
미국 매체들의 방송에 따라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한국과 합동조사를 할 것에 동의했고 합동조사는 다음 달인 10월 29일부터 양측이 다 3성장군을 단장으로 하여 50명 내외의 인력으로 수행됐다. 15개월 동안 조사를 했고, 2001년 1월 양측이 공동으로 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노근리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이 책은 저자에게 보관돼 있고, 저자는 이를 [시스템클럽]에 연재해 분석해 놓았다.
노근리 보도의 프리마돈나 에드워드 데일리는 사기꾼
노근리 보도의 꽃은 미국인 에드워드 데일리였다. 그가 없었으면 노근리 사건도 국제화 될 수 없었다. 한-미조사단은 가장 먼저 이 사건 보도를 촉발시킨 현장의 증인 에드워드 데일리가 과연 증인자격을 갖추었는지에 대해 검증했다. 노근리 지역 작전을 수행한 미군부대는 미제1기병사단 제7연대 2대대 H중대였다. 데일리는 자기가 이 H중대 기관총 사수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사결과 에드워드는 사건 당일인 1950년 7월 26일 노근리 지역에 없었고, 기관총 사수도 아니었다.
그는 1949년 3월 18이부터 1951년 3월 16일까지 제27병기중대 정비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급여명부와 출장기록 모두가 이를 증명해주었다. 그가 받았다고 증언한 훈장도 거짓이었고, 현지 임관했다는 주장도 거짓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는 사건 당시 기관총 사수도 아니었고, 현지 임관하지도 않았고, H중대 소속도 아니었으며 전쟁포로도 아니었고 전쟁상황에 노출된 바 전혀 없이 병장으로 제대한 사람이었다.
이런 거짓말쟁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혼자 노근리 사건에 뛰어들었을까 아니면 무대 뒤에서 빨갱이들에 매수당했을까.
미군은 생면부지의 나라에 와서 노근리보다 더 가혹한 피해를 입었다
한미조사단의 조사 결과 피난민들도 희생자들이었지만 미군도 희생자였다. 미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으로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노이로제가 걸려 있었던 가장 큰 주제는 북괴가 배후조종하는 피난민이었다. 민간복장 또는 미군복장 등으로 위장한 북괴 정찰대와 이들의 도우미로 역할 하는 피난민들이 공동으로 후방 게릴라작전을 폈다. 이로 인해 미군은 늘 후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대책 없이 무너지면서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미군이 무서워하는 것은 북괴 부대보다 피난민 대열이었다.
피난민 통제는 정당방위
목숨이 일각에 달린 상황 하에서 쫓기는 처지에 있던 18세 전후의 어린 미군 병사들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우리는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야 한다. 한국 사정, 북괴의 비정규전법을 알지 못하는 미군 병사들은 피난민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피난민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 방어선보다 훨씬 더 남쪽에서 집단으로 걸어가는 피난민 집단은 항공사격의 목표가 됐다. 노근리 철로를 걷는 수백 명의 피난민들 역시 항공사격의 대상으로 찍힐 수 있었다. 그들이 노근리 철로에서 공중사격을 받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당시는 미국 전투기가 미군이나 한국군을 공격해 몰살시킨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전쟁은 퍼레이드 하듯이 조직적일 수 없다. 베트남에서는 한국군 포가 한국군 보병을 유린한 적도 있다. 1980년 5.18 때에는 광주 교도대가, 철수하는 공수부대 차량을 공격하여 12명의 공수대원을 단숨에 사살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를 냈다. 공수부대 대대장은 팔이 날아간 지도 모르고 뛰고 있었다. 전쟁이 나면 억울한 피해자는 수도 없이 나게 돼 있다. 어째서 노근리 피해자들만 특수한 피해자가 돼야 하는 것인가? 어째서 제주도 주민들만 보상받는 특수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가?
밤 시간에 노근리 쌍굴에는 수십 명의 피난민이 갇혀 있었다. 밤 시간이 공포스럽고 불안한 것은 쌍굴에 갇혀 있는 피난민들만이 아니었다. 이를 감시하는 미군도 불안하고 공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쌍굴에 있는 피난민들이 밤중에 미군을 향해 살금살금 기어올지 모른다는 공포감, 저자처럼 실제 야간 전쟁터에서 전투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밤새내 쌍굴을 감사히는 미군 병사들은 쌍굴 피난민이 자기들을 향해 포복해오지 못하도록 가끔 요란 사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포 2문(2개분대)을 헬기로 공수하여 베트남 투이호아 밀림 지대의 한 고지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다. 산 정상에 있으면서 가장 으스스한 지역이 산 아래 계곡이었다. 고지의 사방으로부터 베트콩이 엎드려 살금살금 공격해 올 것만 같은 공포가 엄습해왔다. 나도 병사들도 밤의 고요와 어둠에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나는 밤새내 그들이 예측하기 어려운 시간 대에 이른바 ‘영거리 사격’을 했다. 포탄은 포구를 이탈하자 불과 200m 근방에서 공중 폭발한다. 그 폭발 소리가 크고 섬광이 강렬해 병사들은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다. 이런 공포심리가 노근리 쌍굴을 지키던 어린 미군병사들에게 엄습했을 것이다. 필자가 포를 쏘아서 베트콩의 포복 침투 가능성에 대비했듯이 노근리 쌍굴을 지키는 미군 병사들도 쌍굴 속 민간인들을 거기에 고착시키기 위해 쌍굴의 주위를 향해 가끔 요란 사격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전쟁 상황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미국이 밤새 쌍굴 주위를 향해 붉은 예광탄이 날아가는 기관총 사격을 한 사실에 대해 미군의 입장보다는 피난민의 주장에 더 공감할 것이다. 미군의 긴장감은 팽팽했을 것이다. 쌍굴 주위에서 조금만 움직이는 기색만 있어도 경고사격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날이 샜다. 미군 위생병이 쌍굴로 들어가서 부상을 입은 피난민을 치료해 주었다. 이렇게 마음 졸인 미군 병사들이 살인마인가? 그런데도 최상훈 기자는 이런 속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일반 민간인들에게 이 사실을 엉뚱하게 이해하도록 모략적인 기사를 냈다.
노근리 사건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 전쟁 상황의 일상
한미 합동 보고서가 작성되자마자 2001년 1월 12일, 클린턴은 백악관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대중에 직접 전화를 걸어 사과의 뜻을 밝히고 응분의 보상을 하겠다 약속했다. 미국은 즉시 보상의 뜻으로 175만 달러를 내놓았다. 100만 달러로 쌍굴 현장에 희생자 추모비를 세우고, 75만 달러로는 유족들 자녀 장학기금을 설립했다.
위키백과 등에는 미군의 악의적인 학살로 기재
그런데 위키백과를 포함한 인터넷 공간에는 이를 미군의 의도적인 학살행위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미보고서에는 H중대 병사가 밤에는 쌍굴을 향해 경고사격을 하고, 낮에는 의무병이 쌍굴을 방문해 다친 사람을 치료해주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한국과 미국이 다 같이 인정한 조사결과다. 이것이 의도적인 학살행위라는 것인가?
생각해 보자. 1980년 6월 당시 일본에는 제24시단, 25사단, 제1기병사단, 제7사단이 군정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중 24사단, 25사단, 제1기병사단이 1950년 6월 30일부터 7월 18일 사이에 파죽지세로 몰리고 있는 한국전투에 투입되어 연일 공포감에 휩싸여 포위와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민간복장으로 위장한 북괴 정찰대와 동네 빨갱이들로 구성된 게릴라부대가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피난민 대열에 끼어 미군 방어 진지의 후방으로 침투했다. 미군 방어 진지 위치와 포병부대 위치가 적군으로 송신됐고, 그 결과 미군은 늘 후방과 측면으로부터 공격을 당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보름 사이에 30% 이상의 피해를 입었고 중대단위로 실종되는 예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24사단장 딘 소장이 참전 20일 만에 대전전투에서 실종되었겠는가. 이렇게 후방으로부터 공격당하는 경우는 2차대전에서는 별로 경험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후방 차단이 가능한 것은 10대 소년, 여성들이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미군 방어선을 통과하여 미국 부대 위치, 특히 포병 위치를 적에게 알려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참고로 필자는 월남전에 44개월 참전했다. 베트콩들은 모두 민간인, 농민들로 위장하여 한국군 부대에 접근한다. 총을 든 베트콩은 모두 민간복장을 했다. 안심하고 마을 도로를 지나다 마을로부터 사격을 받아 피해를 보는 경우가 가장 허무하다. 그러할 경우 한국군은 베트남 성장(도지사)에게 연락하여 양민을 마을로부터 내보낸 후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월남전에서 전투를 하는 중 부하가 죽으면 눈이 뒤집힌다. 월남 도지사나 군수의 허가를 받아 마을을 통채로 불바다로 만든 적도 있다. 이는 1970년대 초의 일이다. 아마도 필자가 1950년에 남의 나라에 가서 미군이 당했던 일을 당했다면 나 역시 통제 지역을 벗어난 민간인들을 적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미군을 무조건 두둔하자는 것이 아니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입장을 바꿔 스스로에게 '나 같으면 어찌 했을까'를 먼저 물어봐야 한다.
필자가 노근리 사건을 추적한 이유
필자가 노근리 사건의 진실에 많은 시간을 투입해서 정리하는 이유는 노근리 사건을 고교 역사교과서에서는 양민에 대한 대량학살 사건으로 묘사하고, 6.25를 유태인에 대한 집단학살(제노사이드)과 유사하게 표현하는데 커다란 사례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 한미양국이 대규모 공동조사단을 투입하여 15개월 동안 연구해서 내놓은 보고서는 한글판만 해도 700여쪽이다. 여기에 진실이 담겨있는데도 교과서 주권을 독점한 빨갱이 역사가들이 이를 일방적으로 왜곡하여 의도적인 대량학살 사례로 묘사하고 있다. 필자는 이 귀중한 자료를 보관해오다가 좌익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마음대로 사실을 왜곡하기에 한미공동조사 결과에 담긴 객관적 진실을 애국진영에 알리기로 하였다. [한미합동 조사 보고서]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한미합동 조사 보고서의 결론
1. 사건발생 배경
미제1기병사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 주둔하면서 군정업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준비태세가 부실한 상태에 있다가 갑자기 한국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정신적 심리적으로 그리고 전투능력상 생소한 전투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포로 취급 요령 등 간단한 설명만 들었기 때문에 한국전에서 가장 복잡했던 피난민의 생리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는 상태에서 피난민들에 의해 수많은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피난민 중에 북한군 게릴라부대가 섞여 있을 줄은 몰랐다.
북한군은 사단정찰대나 총참모부 산하 정찰부대로 하여금 흰옷으로 위장하게 한 후 피난민 틈에 끼어 남하한 후 필요시 미군복장으로 위장하게 하여 미군 방어진지 후방으로 깊숙이 침투시켜 후방에서 미군을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미군은 늘 이런 게릴라 전법에 의해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고, 전투에서의 패배를 연속했다. 이로 인해 당시의 미군들은 흰옷을 입은 피난민들을 매우 두려워하고 공포감을 느낌과 동시에 불신감과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제1기병사단 예하부대 병사들은 나이가 어렸을 뿐만 아니라 훈련과 장비가 매우 부족한 상태에 있었다. 특히 초급 지휘관들이 매우 부족한데다 하사관들이 먼저 한국전에 투입된 24사단에 차출당해 통제와 인화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일병이나 상병이 하사관의 역할을 대행하는 과정에서 군기가 이완되고, 병사들이 명령을 불신하면서 독자적 행동을 하는 경향들이 농후했다. 이런 상태에서 늘 북한 게릴라 부대에 의해 후방공격을 당하게 되자 사기가 저하되고 공포감을 가지게 되었다.
2.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
문제의 제1기병사단 제7연대 제2대대 장병들은 7월 25일 및 26일 밤 영동 동쪽의 주곡리 전투에서 북한군의 소규모 야간침투 공격을 받아 공황상태에서 무질서하고 혼란된 모습으로 노근리로 철수하였고, 노근리에서는 자연, 진지를 향해 접근해오는 피난민에 대해 의심을 품고 강력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7월 26일, 8군사령관의 “피난민 전선 통과 절대 금지”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진지로 접근해 오는 피난민을 강력하게 통제할 필요성을 느낀 장병들은 확실한 소신을 가지고 피난민을 강력하게 통제할 생각들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진지 직전방으로부터 철도를 따라 접근해 오는 피난민들을 매우 의심하면서 공군의 근접지원 사격을 요청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피난민들이 대피하는 과정을 관찰한 미군들은 그들 중에 게릴라가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피난민들을 향해 직접 사격 또는 경고 사격을 가하게 되었다.
이후 피난민집단을 극도로 불신한 7년대 제1 및 2대대 장병들은 피난민들을 철로 밑을 지나는 쌍굴에 밀어넣고 통제하려 하였지만, 피난민 역시 낮에 겪었던 미군들의 적대행위로부터 불신감을 가지고 탈출하려 하였고, 반면 이 탈출행위를 게릴라 행위로 간주한 미군들이 시격을 가하게 되었다.
3. 주요 쟁점별 상황 해석
(1) 미군이 피난민을 주곡 임계리로 집단 인솔하였는가에 대하여
이들 피난민들을 임계리로 인솔한 부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당시 정황으로 보아 사실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인솔한 이유는 역시 피난민들 속에 게릴라 부대가 섞여 있을지 모른다는 강한 의구심이 든 나머지 이들로부터 측방 또는 후방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취한 불가피한 통제였을 것이다.
(2) 하가리에서 피난민을 억류, 사살했는가?
하가리에서 피난민을 통제한 것은 사실이고 필요한 조치였다고 판단되지만 어느 부대가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파악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7명의 피난민이 사살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만일 탈출을 시도했다면 사살될 수 있었다.
(3) 피난민이 하가리에서 노근리로 이동하는 과정에 강제성이 있었는가에 대하여
강제성이 있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발견할 수 없었다. 이동간 미군의 낙오병이 피난민 사이에 끼어 있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낙오병이기에 피난민을 통제할 입장은 못 되었을 것이다. 당시 미군은 도로를 따라 후퇴했고, 피난민들도 같은 도로를 따라 남하했다. 이런 피난민은 미군 병력 이동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피난로를 철길로 바꾸도록 미군이 통제했을 수는 있지만 어느 부대가 통제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4) 철로 위에서 피난민을 모두 검색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500명의 피난민을 모두 검색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선두집단이나 의심되는 경우에는 검색이 필요했다.
(5) 공중 공격을 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공중공격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공중공격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6) 공중공격을 계획적으로 했는지에 대하여
공중공격이 끝난 후 민간인 부상자들에 대하여 미군 의무병의 치료가 행해졌다. 이는 당시 치료장면을 보았던 장병들과 치료를 받았다는 피해자들의 일치된 진술이다. 만일 미군이 고의적으로 계획적으로 피난민 모두를 살해할 생각이었다면 치료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500명의 피난민의 대부분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7) 피난민 중 불순분자가 있었고, 그들로부터 미군이 사격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증언자들마다 증언이 상반되고 이를 입증할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다.
(8) 피난민 쌍굴 진입을 미군이 강제했는가에 대하여
피난민이 쌍굴로 진입한 것은 폭격을 피해 스스로 피난처로 선택한 것이다, 이후 수로에 몸을 피했던 피난민은 미군에 의해 강제로 쌍굴로 들어갔다.
(9) 쌍굴 피난민에 대해 사격을 가했는가에 대하여
피난민을 쌍굴에 고착시키기 위해 경고 목적으로 주변지역에 사격을 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7월 26일 밤부터 7월 29일 새벽 미군철수 시까지 피난민의 탈출 시도가 있을 때마다 사격을 가한 것도 사실로 판단된다. 특히 7월 27일 새벽부터 29일 새벽 철수 순간까지 북한군과 미군 사이에 간헐적인 포격과 전투활동이 있었다. 그 가운데 있는 피난민들이 피해를 입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10) 피난민을 살해할 고의적인 목적으로 사격을 가했는가에 대하여
미군은 주곡-임계리에서 피난민을 처음 접촉했고, 하계리 노근리에서 접촉했다. 만일 미군이 의도적으로 대량학살을 계획했다면 이들을 인솔했던 부대가 이들을 하게리에 방치하고 후퇴했을 리가 없다. 쌍굴에서의 사격도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량학살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11) 미군이 급박한 전투상황이 아니었는데도 과도한 통제를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당시 미군이 처한 상황은 다급했고, 공황상태였다.
(12) 피난민에 대한 사격명령이 있었는지, 사격명령 하달 경위가 어떠했는지에 대하여
다급한 상황에 처한 제7연대 제2대대는 피난민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해 박격포까지 사용해도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사격을 실제 한 경우는 피난민이 미군의 통제에 불응할 경우에 한했다. 그러나 누가 명령을 내렸고 누가 사격을 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 증거는 없다.
(13) 사망자 수에 대하여
주민들은 248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조사반이 여러 가지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망 170-190, 부상자 51명 정도로 잠정 산출하였다.
필자의 결론
노근리에 대한 왜곡은 제주 4.3에 대한 왜국과 5.18에 대한 왜곡을 그대로 빼닮았다.
2022.12.1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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