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을 김대중과 김일성의 합작품이라 생각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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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6-03-01 23:25 조회6,65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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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김대중과 김일성의 합작품이라 생각하는 이유
박정희의 로고는 한강의 기적이다. 1962년에서 1979년까지 연평균 약 9%의 고도 경제성장률을 유지했고, 1인당 GNP도 1962년 87달러에서 1979년에는 1,644달러로 18배의 상승률을 보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김일성은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1968년 1월 21일에는 31명(2014년, 33명으로 정정)으로 구성된 김신조팀을 감히 청와대에 침투시켜 살해하려는 대담한 시도를 하였고, 그해 11월 초에는 동부지역인 울진-삼척에 120명의 무장공비를 보내 무차별적인 학살을 감행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박정희를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시도했다.
1974년 8월 15일에는 일본 한민통 소속의 자객 문세광을 서울로 보내 박정희를 저격케 하였지만 총알이 빗나가는 바람에 영부인 육여사를 사망케 했다. 1979년 10월 18일부터는 부산과 마산에서 봉기를 유도하기 위해 북한 특수군 요원들을 보냈고, 이들 북한군은 1980년 광주로 이동하여 5.18폭동에 합세했다. 드디어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제거에 성공함으로써 김일성의 1차 소원은 성취됐다. 만일 누군가가 김재규를 사주했다면 그것은 김일성의 공작일 것이다. 김일성은 박정희 사후의 권력공백기를 이용하여 사회혼란을 조성하고 남침의 결정적인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남한에 파견된 간첩들에 전국적 봉기를 일으키도록 지령했고, 이와 동시에 소규모 단위로 북한특수군을 광주로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에 김대중은 전국단위로 학생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전국봉기 지령과 김대중의 활동이 일치했던 것이다.
1980년 4월 17일, 김일성은 강원도의 동원탄좌에 북한특수군을 보내 광부 3,500여 명을 폭도화 하려다 조기에 제압당하자 그 특수군을 광주사태에 투입했다. 같은 시기에 김대중은 국가를 뒤엎으려는 음모를 진행하면서 전국의 학생시위를 지휘했다. 4차례에 걸쳐 북악호텔에 비밀로 모여 혁명내각 명단을 작성한 후, 5월 16일에는 대정부 선전포고를 했다. 과도정부인 최규하 내각을 자진 해체하고, 계엄령을 철회하지 않으면 1980년 5월 22일을 기해 전국적 시위를 벌일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한 것이다. 그 결과 5월 17일 자정, 김대중 및 그와 함께 혁명하기로 모의한 24명이 전격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사려 갚은 김대중이 저지른 이 무모한 행위는 광주폭동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고, 그 결과 남한은 북한에 의해 접수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절대로 시도할 수 없는 자살행위였던 것이다. 실제로 1980년 5.18과 관련 해 군사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김대중 추종세력이었다. 김일성이 특수군 600명과 또 다른 엘리트집단 및 로열패밀리 400여명을 광주에 보낸 것도 사실이고, 남한에 전국폭동을 일으키라 지령한 것도 사실이고, 김대중이 전국폭동을 주도한 것도 사실이고, 혁명내각을 준비한 것도 사실이고, 광주폭동 관련자들이 김대중 추종자들인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 김대중은 통령이 되어 남한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북한을 위해 일했다. 이 모든 것을 중합해 볼 때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그대로 5.18은 김일성과 김대중의 합작품이라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다.
2016.3.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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