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은 북 게릴라전, 입증증거 42개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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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10-31 22:41 조회2,90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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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북괴가 주도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42개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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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답변서] 책에는 5.18을 북괴가 주도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42개 증거를 50-224쪽에 걸쳐 사진들과 함께 정리했다. 그런데도 많은 독자가 42개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하신다. 그래서 그 42개 증거를 따로 뽑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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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5.18을 지휘한 지도자가 없다. 지축을 흔드는 폭동에 지휘자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장에는 분명 지휘체계가 확립돼 있었고, 지휘자도 보였다. 이 세상에 지휘자 없이 어떻게 20만 규모의 폭동이 10일 동안이나 일사분란하게 지속됐고, 600명의 국제용병 급 어깨들을 조직하여 정규사단 지휘부를 공격하고, 군납업체에서 장갑차와 군용트럭을 빼앗아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무기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어 2개 연대에 해당하는 총기를 탈취하고, 군 생활을 수십 년 해도 특수 전문가가 아니면 다룰 수 없는 중화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영화 007에서나 불 수 있는 TNT 폭탄을 조립할 수 있겠는가?
금남로 빌딩들의 옥상을 모두 점령하여 광주시민 80여 명을 살상할 수 있는 것이며, 한국군에서 가장 막강한 최정예 공수부대 10개 대대를 광주시로부터 몰아내고, 감히 야음에 교도소를 5회씩이나 파상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인가? 지휘자 없이!
광주 최고의 운동권 정동년은 5월 17일 밤중에 구속되었다. 전남운동권의 화신이라는 윤한봉은 5.18 훨씬 전에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화물선을 타고 미국으로 도주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시위기간 내내 도망가고 광주에 없었다. 유공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5.18 시위에서 활동한 운동권 출신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5월 21일 오후 5시, 도청과 전남대로부터 계엄군 10개 대대 모두를 시 외곡으로 몰아낸 600명 특수군 집단은 곧바로 도청을 점령하여 작전사령부로 이용했다. 이들이 5월 24일 오후 도청을 비워주자 이름도 운동경력도 없는 콩가루들이 하나씩 둘씩 도청으로 들어왔다. 도청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모르는 낯선 이들이었다. 이때까지 광주에는 조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5월 24일 밤, 도청에 모인 사람들은 불과 몇 십 명, 개념 없이 호기심에 이끌려 들어온 어린 아이들이 많았다.
5월 25일 밤, 낯모르는 사람들끼리 도청에 모여 꾸린 것이 ‘시민학생수습위원회’(자칭 항쟁본부)다. 이 위원회를 꾸린 김종배, 정상용, 허규정, 윤상원, 박남선 등은 예외 없이 5월 24일까지 총소리에 숨어서 도망 다니다가 5월 24일 밤 북괴가 비워준 도청에 들어갔다. 개념 없던 존재들이었다. 누구의 공작을 받았는지 서점 점원 윤상원이 5월 25일 밤 외신들에게 ‘결사항전’을 발표했다. 이 강경대응의 선포가 5월 27일 새벽의 공수부대의 수복작전을 불러왔다. 공수부대가 점 조직으로 들이닥치자 이들은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목숨만 살려달라는 식으로 잽싸게 양손을 높이 치켜 들었다.
바로 이런 존재들이 현재 5.18 최고의 영웅들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전두환에 대한 노태우의 배신행위로 인해 이들에게는 1991년부터 천문학적인 보상이 이뤄졌다. 제1급에서 14등급까지 유공 등급이 설정돼 있는데, 제1급에게는 1991년 화폐로 일시금으로 3억 1,700만원이 지급되었고 이에 더해 매월 420만원의 연금이 지급돼 왔다. 아마도 물가상승률에 따라 지금은 그 두 배는 더 받을 수 있다. 국가가 밝히지 않고 있으니 이런 추측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참고로 스스로 5.18총사령관으로 600명을 지휘했다고 뻥을 치는 박남선은 10급 판정을 받았다.
2022.10.3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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