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고 조국통일운동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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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삼족오 작성일15-05-10 14:23 조회6,73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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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고 조국통일운동이라고 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당시 제 조카가 전남대 법대 1학년이였는데
5.18이 종료되고 방학 때 조카가 와서 상세하게 물어 보았는데
전남대 재학생들이 아닌 신분미상의 청년들이 무장시위대를 주도하였으며,
처음은 김대중 석방요구운동과 유언비어에 의해 광주시민들의 분노와 지지를 받아서 광주시를 장악하자, 그들은 차량가두방송에서 전국적으로 해방구를 확산시켜서 정권을 축출한 다음 북한과 조국통일을 하여 누구나 공평하게 사람답게 살자는 것이 목표라며 지원군이 내려올 때까지 목숨바쳐 해방구 광주시를 지키자며 방송을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지원군은 바로 북한군의 남침전쟁이 아닐까요?
당시 해방구란 용어는 남한사회에서 전혀 쓰지 않는 불순한 용어이고, 빨치산들이 쓰는 적화운동의 용어라는 점 입니다.
그래서 당시 광주시민들을 김대중의 석방이나 민주화운동이 아닌 조국통일운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몇일지나서 북한공작임을 알고 시민들이나 청년들이 대부분 빠져 나갔다고 합니다.그래서 시민대표단측에서 특전사의 광주진입요청이 있었고 최소희생으로 치안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광주시가 정상화되고 시신을 실어 나르는 군용트럭이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전투중에서 고첩들이나 남파공비들의 시신으로 파악이 되며,
당시 나오는 말은 교전중에 죽은 폭도중에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은 고첩이거나
무장공비로 분류하고 모두 제3의 장소로 살려갔다고 합니다.
당시 소문으로는 약 2,000명이 사망하였다는데 발표한 사망자 수는 200명이 안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800명 중에 490명은 사망한 남파공비이고 나머지 310명은 동원된 고정간첩의 시체라고 볼수 있습니다.
즉 광주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닌 적화통일운동이였다고 봐야 합니다.
2015. 5. 17일. 삼족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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